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기억, 뫼비우스의 띠 같은.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문학동네, 2013

 

 

 

 

나는 나를 어디에서부터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에 관한 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없다. 며칠 전 알지 못하는 고등학교 동창이 갑작스레 지하철 안에서 아는 체를 했을 때에도 나는 우리가 어쩌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력은 스스로조차도 미덥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다. 다행히 동창은 우리가 인연이 없는 그저 학교만 같이 다닌 사이임을 빨리 말해주어 안심했지만 ‘그런데 왜 넌 나를 기억하는 거니?’라는 생각이 들어 또다시 나를 의심해야했다. 집에 와 꾸준히 연락을 하는 친구들과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가 왜 친해졌는가’에 대해 서로 확인해봤다. 답을 얻진 못했다. 셋 다 몰랐다. 그저 우리는 현재의 우리로서 만날 뿐이었다. 최근의 기억들만 그나마 명료하다. 최근의 에피소드들은 매번 다르게 재생되는데, 과거의 에피소드들은 매번 같다. 이게 보편적인 기억의 양상이다. 오래된 것부터 점점 희미해지는 것.

 

그런데 최근의 기억부터 잃어가는 병이 있다. 알츠하이머. 더 이상 낯선 이름의 질병은 아니다. 나의 할머니도 우리 옆집의 할머니도 이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작가는 어느 매체에서 이 병을 시적이라고 말했지만 난 전혀 이 병을 시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시라고 보기엔 매번 같은 기억에만 머물러 있다. 어제 내가 반복한 것을 오늘은 잊었다는 듯. 특정 트랙만 반복 재생하는 CD플레이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가장 나쁜 기억만 재생하는 고장난 CD플레이어.

 

한 은퇴한 살인자가 이 병을 앓고 있다. 그 역시 고장난 CD플레이어처럼 한 가지 트랙만 반복 재생한다. 하지만 특별하게도 그는 기억을 잃어가면서 동시에 기억을 재구성한다. 원래 이 병이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면에서 그의 알츠하이머는 시도 CD플레이어도 아닌 소설 같다. ‘박주태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 확신을 가진 채로 점점 끊임없이 퇴고해가며 이야기를 탄탄하게 맞춰가는 김병수의 능력은 독자로 하여금 판단력을 끊임없이 유보시키게 만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기억에 어느 순간 전적으로 의지해버렸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한 은퇴한 살인자의 불확실한 기억에 멀쩡한 한 독자가 그대로 의지해버렸다는 것은 이야기 막바지에 이를 즈음 허탈한 탄식과 작가에 대한 탄성을 내뱉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소설은 빠르게 나를 흡수했고, 또 그만큼 빠르게 나를 배반했다. 김영하가 돌아온 것인가.

 

사실 <호출>이라는 단편을 통해 김영하 작가를 알게 되었고, 이후 많은 작품들을 읽으며 작가의 작품에 공감을 했다. <검은 꽃>에 이르러 김영하 작가는 이전과는 다른 좀 더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고 느꼈으며 <빛의 제국>에서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곧, 김영하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지만 쉽게 오지 않았는데 이 작품의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왠지 그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작가는 여러 매체에서 이 작품의 두 가지 주제인 ‘살인’과 ‘기억’에 대해 꾸준히 관심이 있어왔다고 말했다. 그것은 귀납적인 결론이었다.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살인’과 ‘기억’이었다는 말인데,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을 꾸준히 읽은 독자로서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제목만 들었을 때에도 이 작품이 그의 모든 것을 압축한 작품일 것이라고 직감했고, 읽어보니 그 직감은 통쾌하게도 들어맞았다. 김영하가 돌아온 것이다. 가장 김영하 다운 작품으로.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사실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병수의 기억이 모조리 틀렸다는 거야?’라는 허탈감과 동시에 ‘그럼 은희의 통화를 엿들은 것도, 박주태와의 결혼도 모두 환상이었다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었다. 인정하기 어려웠고 그것은 책을 다시 펼쳐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환상과 현실이 하나로 연결된 듯 했다. 그에게 살인은 무엇이었기에 이런 증상을 남기는 것일까? 자신에게 던진 물음처럼 그는 악마 아니면 초인 혹은 그 둘 다인 것인가? 아버지를 죽인 것과 은희 엄마를 죽인 것의 이유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동족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로서 인간은 살인의 원인을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할 테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혹은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물음을 남기는 것,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물음의 범위는 매우 명확하다. 살인 그리고 기억 혹은 그 둘 다. 그 범위 안에서 나는 이런 저런 물음들을 만들고 아무런 답을 내지 못한다. 다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그리하여 ‘다만 추측컨대’ 김병수는 은희 모녀로 인해 ‘살인’이라는 행위를 자신의 삶 속에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김병수에게 ‘기억’이라는 도구는 최적의 도구가 아니었겠는가. 현재의 기억을 잊어가며 과거의 기억도 잊고, 현재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과거의 기억도 재구성한다. 그것만이 그의 삶에서 ‘살인’의 ‘기억’을 지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신이 내린 것이지만 알츠하이머라는 도구는 김병수가 만들어낸 것이다.

 

김병수가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에 왜 살인을 하지 않게 된 것일까? 인간이 살인을 할 때에는 어떤 이유가 필요하다. 그것이 자신으로서는 정당하다는. 물론 요즘의 무지막지한 범죄에도 그것이 적용되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아버지를 죽였을 때 김병수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냈다는 스스로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 살인이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기에 이후 마지막 살인까지는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 저질렀다. 처음 살인을 했을 때 제정신이었다면 거짓말이었을 테고 당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살인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버렸다. 그러다 마지막 살인에서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김병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복원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이상 살인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은희에 대한 사랑이 박주태의 살인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다시 살인을 재개하는 것으로 정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저질렀던 최초의 살인처럼 그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다시 살인을 계획한다. 다만 기억 속에 남겨진 살인의 후유증들이 그를 괴롭힌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그것들을 정당화한다.

 

멀쩡한 기억은 그에게 최악의 고문 도구가 되지만 알츠하이머 환자로서의 기억은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최적의 도구가 된다. 자신이 가장이 된 단란한 가족의 모습과 죽은 아버지를 만나는 꿈을 꾸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금강경, 반야심경, 수상록, 니체, 젊은 시인의 시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자신의 살인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살인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김병수이지만 일흔이 넘은 나이의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으로 맡게 된 은희 뿐이다. 살인의 전리품으로서 은희에게 가지는 김병수의 애정은 어쩌면 모순되는 듯 보인다. 자신은 그 애정이 살인의 무결성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죄책감의 표현 혹은 면죄의 도구로 보인다. 그런 은희를 난데없이 박주태라는 놈이 접근해 죽이려고 한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안형사의 등장으로 불안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20년 만에 살인을 해야 한다. 자신의 무결성을 지키기 위해, 혹은 면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박주태를 죽여야 한다. 이제 그에게 살인은 아쉬움의 문제가 아닌 정당화의 문제이다. 현재 그가 저지를 살인은 금강경과 수상록만큼 정당하고 박주태의 살인은 흉악하기 짝이 없다. 김병수는 환상으로나마 그런 대립 구조를 만들어놓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야한다. 박주태가 그에게 알츠하이머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환상은 논리적이고 구체적이다. 결국 그의 기억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혼돈을 만들지만 왜인지 그의 결말은 평온해보인다. 환상과 현실 중 한 가지를 택해야했던 긴장을 벗어나 환상과 현실을 하나의 띠로 인정해버린 득도자 같달까?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듯, 현실이 환상인지 환상이 현실인지 현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과거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고 현재 한 요양보호사를 살해한 일흔 살의 알츠하이머 김병수만 있을 뿐이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짧기에 흡입력이 강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번도 읽을 수 있을만큼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읽고 나서도 많은 물음들이 생겨난다. 앞서 말했듯 그런 수많은 물음들이 발생하는 것, 그것이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라고 할 때 단언컨대 이 소설은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다. 여름이면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드라마, 영화, 뉴스로 쏟아지곤 한다. 때로는 가십거리로 때로는 심각한 사회 현상으로. 하지만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이라는 정신 기능과 맞물려 빚어내는 이 소설만큼 긴 여파를 남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김충규 시인의 ‘기억의 퇴적층’이라의 마지막 두 연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떠올렸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무엇엔가 홀린 듯 맴돌았던 그 장소마저

기억의 퇴적층에 묻힐지도 모를 터,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겠지만

정말 그러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동일인일까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 그대로일까

 

그런데 이렇게 중얼거리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김병수가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처벌받을 것이라는 사실 보다는 현실과 환상 속에서 헤매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디 그대, 기억의 퇴적층에서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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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엔 벼르던 책들을 샀다. 충동 구매는 딱 한 권 있었다.

 

1.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 벼른 기간-5개월, 벼른 정도 - 강

 

우선, 몇 주 전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도저히 이 책은 사야겠다 싶어 과감히 덮은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를 샀다. 이 책은 문학적 소양+철학적 소양이 없는 자국의 수상에게 책을 권하는 맹랑하다고 하기에는 영향력이 있는 작가 얀마텔이 용기있게 꾸준히 수상에게 책을 권하는 편지글을 묶은 책이다. 몇 편 읽어봤는데 일반 독자가 책에 대한 글을 읽는 재미로도 유익할 뿐 아니라 자국의 수상을 엿먹이는 그 세련된 방식이 너무 맘에 든다. 얀마텔의 충고를 듣지 않은 대가로 스티븐하퍼 수상은 전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다. 이 책의 시작이 '박근혜 대통령님께'로 시작하는 만큼 박근혜 대통령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듯 싶다. 누군가가 한국판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용맹함 어쩌면 보고도 싶다.

 

 

2. 에스타 베를링 이야기 : 벼른 기간 -4개월, 벼른 정도 - 중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셀마 라겔뢰프의 대표작이라는 <에스타 베를링 이야기>가 국내 최초 완역으로 올해 출간되었다. <닐스의 모험>은 알아도 셀마 라겔뢰프는 알지 못했던 나이지만 이 책이 관심 갔었던 것은 표지 때문이었다. 굉장히 고전적이면서도 궁금증이 이는 표지이다. 좋은 평가와 책의 두께를 보건대 만만찮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저 두 사람, 궁금하다.

 

 

 

 3.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 벼른 기간- 2주, 벼른 정도 -강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이렇게 떠들썩하게 추천을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김영하, 살만 루슈디, 얀 마텔, 조나단 샤프런 포어 등이 강력 추천한 이스라엘 작가 에트가르 케레트의 소설집이다. 보그 지에서는 단편의 귀재라고 호평하던데, 사실 외국 작가의 단편은 많이 읽어보질 않아 궁금함 반 걱정 반이라만 많은 이들의 추천을 일단 믿고 기대해 본다. 어제까지 예약판매이길래 어제 구입했다. 예판의 매력은 마지막날 구입하는 것이다.  아직 읽을 책이 많으니 추석 때 강화도 여행길에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 계획 중이다.

 

 

 

4. 정거장에서의 충고 : 벼른 기간 - 1개월, 벼른 정도- 강

 

 

 제일 처음 사랑한 시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기형도라 답할 수 있다. 처음 그의 시를 읽었을 때 울었던 순간의 촉각이 지금도 얼핏 생각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은 몰랐다. 참, 내 사랑은 게으르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을 통해서였는데 그 책에서 강신주는 이 책이 기형도에 대한 가장 좋은 책이라고 추천하였다.(정확한가? 묻는다면 그건 확실하지 않다. 내 형편없는 기억에 아마....) 참여한 시인들도 빵빵하고 정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강신주 씨에게 인사라도 해야겠다^^

 

 

5.  엄마가 읽는 동의보감 : 벼른 기간 -10일, 벼른 정도 - 중

 

 얼마 전 관심 신간 페이퍼에 올렸던 책인데 구입했다. 지금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을 읽고 있는데, 읽을수록 우리 나라 철학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동의 보감>이 철학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면 육아책으로서의 <동의 보감>은 어떨지 궁금하다. 아주 유용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6. 눈물이라는 뼈 : 벼른 기간 -5일, 벼른 정도 - 중

 

 

며칠 전 다녀온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시:리즈>에서 김소연 시인을 가까이에서 뵈었다. 책갈피를 탐내던 우리들을 위해 책갈피를 건네주던 그 분의 세심함에 집에서 그분의 시집을 찾아봤지만 없어서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다. 마침 다음 달 호스트고 하니 시집 정성껏 읽고 낭독회에 찾아가야겠다. <눈물이라는 뼈>라는 시집은 시인을 닮았을까? 궁금하다. 조만간 한 편 옮겨 적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 외에 아이의 책 3권을 샀다. 이보나흐미엘레프스카의 <생각>, 아마 이 책은 나를 위해 산 것 같고!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는 아이가 세 살 때부터 벼르던 책이니 참 오래 버텼다 싶다. 영어 그림책 <We all go traveling by>는 중고로 샀더니 엉뚱한 CD가 들어있어 내가 몹쓸 발음으로 읽어줘야 한다는 것만 빼면 요즘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들과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반복되는 문장이 많고 문장의 구조가 같아 CD없이 엄마랑 읽어가다보면 어느새 엄마를 따라하게 된다. CD보다는 엄마와 함께!가 더 좋은 듯 하다. 그리고 글 처음에 밝힌 충동구매 한 권은 바로 <상체부터 빼셔야겠습니다>^^; <뱃살부터 빼셔야겠습니다>는 몸을 크게 움직여야해서 귀찮아서 상체 버전으로 바꾸려고 샀다 ㅋㅋ 할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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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서예를 배운지 6개월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갈 때 반, 못갈 때 반이었다. 현재 '타, 터, 토, 투, 튜'를 배웠는데 꾸준히 수강했다면 지금쯤 어떤 문장을 익히고 있을 터였다. 우리 모임에서 평생학습축제에 작품 한 개씩을 내게되어 있었다. 아직 내 수준이라면 단어나 써서 내야겠다 싶었는데 선생님께서 서른 자 가량 되시는 구절을 주셨다.길이도 길이었지만 문장이 낯간지러웠다. 기왕 붓글씨 작품을 쓸 거라면 시를 쓰고 싶었다.

 

 

 

 

 

지금 내게 선택하라면 황진이의 시를 한 수 옮겨적는다 했을 텐데 당시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읽던 시가 김성대의 <사막 식당>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우울한 내용은 지양하라셨고, 시인의 시중 가장 서정적이라고 여긴 '월롱역'을 옮겨적기로 했다.

 

이번 주도 결석했다. 이러다 선생님 얼굴에 그야말로 먹칠하겠다 싶어 집에서 간간히 연습 중인데 거짓말 아니고 참 재밌다. 다만, 허리가 아플 뿐이다. 첫 날엔 글씨를 너무 크게 삐뚤빼뚤 써서 내 이름 석자 넣을 자리도 모자랐는데 둘째 날인 오늘은 이름을 넣는데 성공했다. 오늘 두번째 장을 쓰는데 왠걸 자리가 많이 남는다. 뚫어지게 쳐다보니 한 글자를 빼먹고 썼다. 아, 김샌다. 허리도 아프고 김도 새서 좀 긴 휴식을 갖는다. 바람이 불고 좋다. 다음엔 어떤 시를 써보면 좋을까, 이런 바람을 닮은 바람도 가져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시집을 뒤적거려 쓰고 싶은 구절을 찾아볼까 싶어 책장에 갔는데 막막하다. 그러다 며칠 전 다녀온 낭독회가 생각났다.

 

 

그분들의 시집 중 집에 있는 것은 총 4명의 시인의 시집 6권이었는데, <사막 식당>에서 '월롱역' 찾아내기 어려웠던 만큼 붓글씨 쓰기에 괜찮은 시구 찾기가 쉽진 않다. 좋아하는 시라고 해도 붓글씨는 걸어두고 보는 작품이라 너무 우울하거나 어두운 구절은 피하게 된다. 더욱이 현대시의 경우 언어 유희가 많고 난해하기도 하여 더욱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낼 때의 희열, 그게 재미다, 고 말하기엔 너무 찾기가 어려웠다. 다들 왜 이리 우울한 시들만 쓰셨는지,,,나는 왜 이리 그들의 우울한 시들을 사랑하는지 처음으로 의문을 가져봤다.

 

 

 

 

 

 

 

 

 

1. 오은 '아이디어' 중

한 줄기 빛은

한 줄기 빛

발아가 이루어지면

한 포기 난초와

한 떨기 장미로 피어난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2. 심보선 '휴일의 평화'

아름다운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사랑하는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문득 창밖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3. 허연 '나비의 항로'

사막,

쓰고 말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곳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 기적이

하루 종일 일어난다는

 

앞으로는 시를 읽으면서 한 가지를 더 고려하게 될 것 같다. 시를 즐기는 나만의 방법이 또 하나 늘어난 것이 좋다 나쁘다는 잘 모르겠다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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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에 숨어사는 사람의 이야기. 김기덕 감독의 <빈집>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는 김기덕 감독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영화이다. 김기덕 감독의 <빈집>은 여백과 낭만이 좀 있었다면, 이번에 손현주 첫 단독 주연 영화작으로 더 알려진 <숨바꼭질>은 추리와 스릴러의 장르이다. 긴박하여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보려고 하는 자 검색하지 말지어다! 스포일러가 말도 못하게 심한 모양이다. 난 다행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봐서 심하게 몰입하며 봤더니 지금도 밤이 서늘하다...

 

       

               

영화의 리뷰를 책리뷰보다 더 빠져서 썼던 때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건대 내용, 의미, 음악, 편집 등등 다방면으로 신경을 썼어야 했던 것 같다. 책리뷰를 더 많이 쓰기 시작하던 어느 순간부터 영화 리뷰를 전혀 쓰지 않다가 요즘에 와서 간혹 쓴다. 그런데 예전만큼 다방면으로 신경을 쓰지 못한다. 더 게을러지고 덜 여유있어진 탓일 것이다. 더불어 영화 리뷰를 쓸 때에는 적극적으로 타인을 권유하는 입장으로 썼던 것 같다. 꼭 보던지 아니면 절대 보지 말라는 뜻으로. 하지만 책리뷰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지금은 너무 고쳐지지 않아 고민이지만 어쨌거나 나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하는 목적으로 시작해서 그 목적이 주를 이루어 좀더 개인적인 작업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자연 책리뷰를 많이 쓰면서부터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무엇을 권하고 말리고 하지 못하게 된 듯 하다. 결국은 더 게을러지고 덜 여유있어진 탓이 맞다.

 

어쨌거나 오늘 <숨바꼭질>을 봤고, 배우들의 연기가 거슬리는 것 없이 좋았고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 여운이 남는다. 그사람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누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아무런 책임은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다만, 왜 경찰을 재깍재깍 안부르고 도망은 안가고 할 일 다 하고 당하는지, 영화 일반에 대한 회의가 좀 들었지만 그건 내 담이 작기 때문인 탓도 있으므로 지나치기로 한다. 남의 집에 숨어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식상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신선한 소재는 아닌데 연출을 잘 했다.

 

남의 집에 숨는 이야기를 영화가 아닌 책으로 읽은 적이 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아마 가능하더라도 실화를 토대로 하는 방식이 가장 쉽지 않을까 싶어 찾아봤는데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있었다.

 

자기 집에 숨어 사는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집주인이라는데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고 상도 받은 소설이라고 한다.  이 소설을 살펴보다 보니 아주 유명한 책이 한 권 생각났다.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다. 숨어 산 사람 중 팬텀은 말 그대로 갑!이다. 숨어사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 두려운 존재들이지만 일말의 연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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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과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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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사과, 너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황금 사과, 김경욱, 문학동네, 2002

 

 

 

 

사과의 계절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인류 최초의 음식이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고귀한 물질이었다. 가을빛을 가득 담고서야 열매를 획득할 수 있었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사시사철 돈만 있다면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되었다. 탐할 수 없었던 것조차도 모두 득할 수 있는 시대에 이제 와서 ‘황금 사과’를 들먹인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를 파리스 삼아 베르송은 속권인가, 교권인가, 이단인가를 심판해 보라는 에리스의 주문 같은 것일까? 1998년 7월 12일 파리의 소르본 대학 도서관 고문헌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더 멀고 낯선 1298년 프랑스 베르송의 주교 피에르의 죽음으로 나를 데려가 ‘황금 사과’를 손에 쥐어 준다. ‘나’의 손을 따라 ‘-말하자면, 이것은 내 젊은 날 우연히 만났던 어느 요리사에 대한 이야기이다.(22쪽)’라는 문장을 읽으면서부터 오로지 심판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이 책을 텍스트라고 규정함으로서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겹쳐 읽으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건 하나 질문 하나는 <황금 사과>이기 이전에 <장미의 이름>에도 해당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로지 <황금 사과>만 읽었기에 내가 가진 이 의문들은 <장미의 이름>이 아닌 <황금 사과> 그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러하므로 내게 이 책은 당연히, 텍스트가 아니라 작품이다. 지금 내 손엔 작가가 쥐어준 ‘황금 사과’가 쥐어 있다. 이 사과를 누구에게 건넬 것인가? 나는 파리스처럼 감언이설에 넘어가 사과를 특정한 누군가에게 건넬 생각이 없다. 다만 이것을 텍스트가 끝날 때까지 꼭 쥐고 있음으로써 그들을 압박할 생각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을 심판하고 ‘재앙’을 선물하여 조롱할 생각이다.

 

 

 

프랑스 베르송은 교황청과 프랑스 국왕 모두가 자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특수한 지역이다. 주교가 죽었으니 다음 주교를 뽑아야할 터, 교황청은 교황청의 사람으로 국왕은 국왕의 사람으로 거기에 레이몽 부주교는 자신을 차기 주교로 삼고 싶다. 꼴사나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각 지역의 수장이라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잇속에 열을 올리는 모습은 윌리엄이나 제롬, 토마스 못지않게 내가 봐도 참 꼴사납다. 윌리엄의 말처럼 ‘모두들 의로움보다는 이로움을 좇는’ 모습이었다. 이 꼴사나움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 페스트를 선물하기로 했다. 윌리엄이 글로 쓰기도 민망할 정도의 막말이 오가는 참사회의 소란을 막은 것은 토마스 사제의 등장이었다.

“그러니까, 사인이 바로……페스트가 틀림없다고……판정을 내렸습니다.”

이 말에 이어 교권과 속권은 마치 육탄전을 벌이며 국회 의사당을 폭언과 폭력으로 물들였다가도 금세 허허실실 웃으며 국회를 나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만큼이나 익숙하게 서로 사죄하며 악수를 나눈다.

 

질베르 영주의 돈 자랑 만찬 역시 참사회 못지않게 비웃음 거리었다. 자신의 권력을 교황청에게 과시하며 차기 주교를 자신들의 측근으로 선출하려는 그 속셈을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눈앞의 음식에 넋을 잃은 교회 사람들의 모습은 보는 내가 비참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그들에게 인육 파이를 선물하기로 했다. 자신의 만찬에 오른 음식이 인육 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질베르 영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이 주억주억 먹은 그 파이가 인육 파이임을 알고 난 교회 사람들의 속은 어떠했을까? 고소하다. 그러나 재앙을 해결하는 그들의 모습은 놀라웠다. 장과 로제 그리고 마리를 살인자가 아닌 이단으로 몰고 가는 데에 힘을 합쳤던 교권과 속권의 모습은 서로 으르렁 거리다가 막강한 적수가 나타났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연합하여 흠집 내기를 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닮았다. 황금 사과는 여전히 내 손에 있다, 그들에겐 결코 쥐어줄 수 없다.

 

교권과 속권 외에 이단이라 불리는 한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황금 사과를 이 무리에게 줄 것인가? 피에르 주교와 제롬 사제, 윌리엄의 아버지는 이단이라 불리는 무리였던 것인가? 윌리엄이 혼란을 느꼈던 것만큼 나 역시도 혼란을 느꼈다. 그러다 결국 ‘황금 사과’는 처음에 마음먹었던 것처럼 아무에게도 주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단으로 처형된 푸줏간 사람들과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을 조롱하지는 않기로 했다. 피에르와 로제, 제롬의 마지막 모습은 비열하지 않았으므로. 조롱은 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탐한 자들을 위한 것이므로.

 

 

 

파리스는 황금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바치고 헬레네를 얻었다. 이로 인해 트로이는 짓밟히고 말았다. 탐할 수 없었던 것을 탐했던 탓에 일어난 일이다. 탐할 수 없었던 것을 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에게 무시로 주어지는 황금 사과들이 맛을 보아도 되는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사과의 계절이다. 계절이 사라지는 지금, 이 계절을 사과의 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에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아직은, 이 계절을 사과의 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어 다행이다. 아직은, 우리의 삶을 삶이라 부를 수 있어 다행이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황금 사과’를 마지막 장을 읽으며 다시 1998년 7월 12일 파리의 소르본 대학 도서관 고문헌실로 돌려놓았고 그 뒤는 ‘나’에게 맡겼다. ‘나’가 읽었다던 프란체스코 회의 어느 수도사가 지었다는 시편을 따라 나도 한 번 물어본다.

 

 

 

황금 사과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서 누구의 마음을 욕망으로 물들이고 있는 걸까?

어떤 이의 용맹함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고귀함과 빼어남과 지성을 앗아가고 있는가?

 

 

 

*모두들 아시겠지만 제목은 김경주 시인의 시집을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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