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삶과 죽음, 존재와 인식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메우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나이브하다. 그것은 필시 어떤 믿음에 기댄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포장될 수 있으나 모든 위장은 언젠가는 어설프다. 순진한 믿음과 가치체계 위에선 어떤 세련된 발화들도 결국은 유약한 대상들이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나는 그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유약함에 괴로워 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작업은 헛짓이다. 유약함을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것, 그 겸손으로부터 확장은 가능하다. 진리는 단순하며, 단순해야 한다. 보편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보편적인 유약함에 가닿는 진리 작업을 꿈꾸겠다. 내 유약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겠다. 그것을 더 들여다보겠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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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조용하던 독도가 다시 떠들썩하다. 얼마 전 자민당 의원 셋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며 정치쇼를 한바탕 벌이면서 한일간의 불안한 정적은 다시 산산조각 났다. 그 이후 일본 정부 차원에서 방위백서에 다시 한번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면서 한일 관계는 급랭하고 반일 감정은 끓어 넘치고 있다. 심지어 이번 방위백서에는 한반도 유사시 독도에 자위대를 파견하겠다는 강한 도발까지 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 도발은 단순히 한 섬에 대한 영토분쟁을 걸어오는 것이 아니다. 독도 강제 편입은  폭력적 제국주의/군국주의의 상징이며 독도에 대한 권리를 지금와서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정당화 혹은 부활을 상징한다. 일본은 2차대전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공을 위한 미국의 전략과 한국전쟁의 전쟁 특수를 거치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의 지위까지 얻었다. 패전은 잠시의 충격이었을뿐, 그들의 자존심은 경제성장을 통해 어느정도 치유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거품경제 이후 일본의 자존심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경기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깔보던 중국에 추월당하더니, 지진과 쓰나미가 몰아닥쳐 원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타개할 정치적 리더십은 보이지 않으며, 정권교체로 집권한 민주당은 희망마저 잃게 했다. 경제적으로도 첨단사업은 한국 등에 밀리고 제조업 기반은 신흥국에 잠식 당하는 상황에서 고령화라는 악재까지 겹쳐있다. 심지어 절대 우위에 있던 문화산업도 세월이 변해 한류라는 역풍을 맞고 있다.

 이런 지점에서 정권교체 때 한일 우호적 관계 회복을 말했던 민주당 정권까지 독도 도발에 합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며 군국주의를 본격화했던 1930년대와 매우 닮아있다. 서구 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해 제국주의 국가 반열에 오른 일본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구강하고 한반도와 대만 등을 강제적으로 병합하는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성공신화를 구가했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이 밀어닥치면서 일본의 성공신화는 추풍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실업이 폭증하고 경제가 마비됐다. 영국과 미국에서 케인즈와 뉴딜이 등장하는 동안 일본은 독일처럼 군국주의적 확장을 통한 경제회복을 선택했다. 그들은 만주를 침략했고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한 때 동아시아, 동남아, 태평양을 아우르는 드넓은 영토를 가진 대 제국을 건설했다. 한반도 남쪽 좁은 땅에 갇힌 우리가 장수왕 시절 고구려의 영토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처럼, 일본의 우익과 그들을 지지하는 많은 국민들은 그 영광의 시절을 기억하며 그로부터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평화헌법 9조를 바꿔 자위대를 군대로 바꾸고, 다시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 식민지 시절 강제로 빼앗은 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드는 것, 영광의 시절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것을 넘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사실'이라 주입하는 것, 이런 것들은 그릇된 과거로 회귀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을 앞장서서 하는 이시하라 도쿄도지사 같은 사람들이 일본 국민들의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강하지 않은 일본에서 '강한' 일본을 말하는 우익인사들에게 국민들이 상처 받은 자존심을 위로받는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자민당 의원들이 입국거부를 당할 지 뻔히 알면서도 김포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자신들이 한 때 지배했던 한국으로부터 입국거부를 몸소 당하며 자신들의 상처난 자존심을 부러 한번 자극하고, 그 상처로부터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열망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그들의 정치적 술수이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땅인지 일본 땅인지는 그들에게 크게 중요치 않다. 그저 그것이 과거의 영광에 대한 상징이기만 하면 된다. 그들에게 독도는 정치적 자산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진정으로 문제시 하고 싶은 것은 우리네 정치의 태도다.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한 '정치적 자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권의 상징이자 침탈당한 우리네 역사와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이다. 독도는 지켜도 그만, 잃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그 자체이다. 우리 국가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건국되었으며, 일본에게 강탈당한 모든 것을 회복하며 수립된 국가이다. 그런데 지금의 독도는 일본 정치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인들에게도 한낫 정치적 자산으로 대접받고 있다. 독도쇼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벌인 것이라기보다는 한일 합작극에 가깝다.  

 이번 독도쇼를 통해 한국 정치인들은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 출생으로 아키하로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명박은 강단있게 입국을 거부시키는 이미지로 자신의 친일 이미지를 털어냈다. 정권 2인자 이재오는 독도까지 직접 가서 독도쇼를 펼치며 급격히 추락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일부 의원들은 독도특위를 만들어 오는 12일 독도에서 회의를 갖겠다고 한다. 폭력 시위로 악명이 높은 어르신들의 보수단체들이 김포공항 앞에서 일본 의원들의 사진을 불태우며 거친 시위를 하는 모습이 구국의 위인들처럼 보도됐다. 

 하지만 이번에 입국거부 당한 일본 의원들은 일본의 '야당'의원이면서도 '야당의 야당'인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다. 일본에서 그들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일본 언론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스타가 됐다. 한국이 대통령까지 나서서 요란하게 입국을 거부하면서, 김포공항 대기실에 9시간 동안 밥 먹이고 구슬리면서 그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것이다. 일본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자국 국회의원이 옛 식민지 국가 공항에서 입국 거부당했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며 그 여운은 무의식적일지라도 강렬하다. 앞서 말했듯, 일본인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되새겼을 것이며,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초라함을 비교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일장기를 불태우려는 지난 피식민지 국민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국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분명하다. 일본은 지난 역사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와 그에 상응하는 배상을 확실하게 하고, 한국은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번에 벌어진 독도쇼는 이러한 해결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네 반일 감정은 더욱 심해졌고, 일본에서는 우익 인사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우리는 더 사과를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가 됐고, 그들은 더 사과를 안 하려는 상태가 됐다. 

 물론 혹자는 저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 오는데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을 수 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싸움을 걸어온다 해서 이런 식으로 이로울게 없는 싸움을 하는게 아니라 한 수 위의 전략으로 대응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리는 한 수 위기 때문이다. 독도지배에 대한 훨씬 더 탄탄한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다. 가장 크게 이기는 길은 그들에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울릉도까지 고생해서 가서 그들이 관심있는 오징어나 먹고 오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별 이름도 없는 의원이 아무 일 없이 울릉도에 가서 오징어만 먹고 온다면 그게 기삿거리나 되겠는가. 그들이 만약 독도를 방문한다면 그건 더할나위 없이 우리의 큰 승리이다. 독도에 가기 위해선 한국 공항으로 입국해 한국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한국의 섬을 거쳐야만 갈 수 있다는 사실, 즉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를 몸소 입증해주는 길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을 무시하기엔 쇼를 벌이고 싶어하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너무 많다. 반일 감정은 거의 모든 국민들이 공유하는 감정이기에 그 감정을 자극할 수만 있다면 쿡쿡 찔러 자신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높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네들을 말릴 순 없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 나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미래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대통령이었다면, 자신의 인기를 위해 국민 감정을 조작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이득이 되는 단호하고 적절한 대처를 했어야 한다고 본다. 입국거부를 하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하며 요란을 떠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물밑으로 진행하거나 페인트 모션을 넣어 그들이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물 먹게 했어야 한다.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일본에 대한 단호하고 적절한 대처는 그들이 독도에 함정을 보내거나 한다면 전쟁을 불사하고 우리 함정을 내보내는 것, 별것도 아닌 꼴통 우익들이 오징어 먹으러 온다고 하면 오징어나 잔뜩 먹고 허탕치게 하는 것 그 둘 다이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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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2011-09-14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독도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유용한 정보 읽고 갑니다. 독도 쇼가 빨리 잠잠해졌으면 좋겠네요^^*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외면할 수 없는 진리를 외면하지 않은 자의 이야기
(<라이너스 폴링 평전>,
 테드 고어츨, 벤 고어츨 지음, 박경서 옮김, 실천문학사)

 라이너스 폴링은 노벨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걸로 유명하다. 그는 1954년에 노벨화학상을, 1962년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생화학의 개척자이자 반핵운동가인 그는 과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그렇게 그가 보여준 삶은 나의 지향점이다. 과학적 진리 추구와 사회적 정의 실현은 외면할 수 없는 진리를 외면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공통점을 공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핵전쟁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란 사실은 단백질이 아미노산 서열에 따라 특이한 3차원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자명한 진리이다. 자신의 이성과 양심이 진리라고 가리키는 것을 좇는 삶, 그 과학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삶의 표본, 라이너스 폴링의 내밀한 삶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한반도의 땅, 생명, 그리고 역사 
(<한반도 자연사 기행>, 조홍섭 지음, 한겨레출판)

 한국은 자연사의 불모지다. 서구의 과학은 자연사의 뿌리를 갖고 있지만 우리는 그 뿌리 없이 바로 그 뿌리에서 피어난 꽃인 현대과학에서부터 과학이 시작됐다. 그래서 우리네 과학은 불안하다. 늘 무언가를 쫓길 바쁘다. 과학이 자연을 향해 있지 않고 돈을 향해 있다. 한국에서 뛰어난 인재가 진화학을 하거나 생태학이나 분류학 같은 필드웍(Field Work)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반도 자연사 기행>이 자연사학자나 박물학자가 아닌, 기자의 손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이해가 된다.  그리고 고맙다. 과학자들도 잊고 사는 사실, 이 땅에도 고유의 생명과 자연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속살을 보여주고 들려준다니 말이다.

 

인간은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유사 이래 인류는 진보를 거듭해왔지만, 인간은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았다. 그것은 유한성을 운명으로 하는 인간의 불가피한 결론이다. 끝없는 탐욕이 파멸을 가져와도 인간은 이내 그 파멸의 기억을 망각하고 또 다시 탐욕의 길을 걸어왔다. 전쟁의 역사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역사학의 아버지인 투퀴디데스는 인간의 운명을 예리하게 직감하고 자신이 경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냉철하게 서술했다. 같은 일이 후대에 되풀이될 것이기에 후세에 하나의 거울을 제공하기 위하야. 그 거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정말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았다. 

   
불안한 시대의 불온한 인문학
(<불온한 인문학 >, 손기태 외, 휴머니스트> 

  수유너머 사람들이 인문학에 싸움을 걸어왔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란 기치 아래 본질을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인문학과의 싸움이다. 모든 것이 '쓸모'로 재단되는 시대에 인문학 역시 쓸모 있는 학문이 되려고 몸부림쳐왔다. 인문학의 위기론은 인문학 대중화 같은 담론의 대두로 이어졌으나 도무지 인문학이 대중화가 되고 있는지, 혹은 대중이 인문화가 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 그것은 이러한 인문학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헷갈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수유너머 사람들은 누구보다 그 길에 대해 많이 고민해왔을 터이니, 그들이 생각하는 길이 궁금하다. 

 

 

모든 길은 인간으로 통한다 
(<로드-여섯 개의 도로가 말하는 길의 사회학>, 테드 코노버 지음, 박혜원 옮김, 21세기북스) 

  인간은 길을 만들며, 길은 인간이 다닌다. 길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회적 본질이며 온갖 역사적 사건을 매개하는 역사 그 자체이다. 테드 코노버는 여섯 갈래의 길을 통해 지금, 여기 인간과 역사를 걸어 보이려 한다. 아마존의 원시림에서 파크애비뉴까지, 잔스카르의 얼음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로 난 길 등을 걸으며 그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는 길 위로 어떤 길을 내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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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킹 우드스탁(2009), 이안 감독> 

오는 목, 금 총장잔디에서 '본부스탁'이 열린단다. 본부스탁은 우드스탁을 패러디한 것인데, 사실 본부스탁 얘기를 들을 때까지 우드스탁이 무언지 알지 못했다.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도중, 우드스탁 탄생 일화를 그린 '테이킹 우드스탁'이라는 영화를 발견하고 감상에 들어갔다. 

영화는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운집한 히피들 가운데 화려한 무대에서 지미 핸드릭스 같은 전설들이 열광적인 공연을 펼치는 장면들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공연 장면은 단 한 순간도, 심지어 스쳐지나가지도 않았다. 프레임은 축제 언저리를 맴돌던, 하지만 그 축제를 가능하게 했던 엘리엇이라는 한 청년을 좇았다.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나는 우드스탁 무대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우드스탁을 보았다. 주인공 엘리엇처럼. 무대를 향하던 그는 한 히피 청년들의 캠핑카에 붙잡힌다. 그리하여 우주의 중심을 본다. 그것은 혼돈 속의 자유였다. 절제되지 않은 무질서함, 그 안에서 그는 우주의 창조를 보았다. 무질서로부터 질서가 창조되던 우주 탄생 그 자체처럼. 

테이킹 우드스탁을 빠져나오니 나는 질서 안에 있었다. 혼돈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그 덕택에 자유도 찾기가 쉽지 않다. 내 위치가 결정되어 있고 내 선택은 예정돼 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이것들이 다 무어란 말인가. 이 질서는 집착이다. 불안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집착. 엘리엇의 엄마가 집이 은행에 넘어갈 상황에 이르기까지 절대 숨기고 내놓지 않았던 옷장의 10만달러처럼. 우리는 각자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가기 위해 집착을 쌓아 질서를 만든다. 

이 질서들은 그 자체가 선인양 행세한다.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선이고, 히피들이 몰려오는 우드스탁은 악이다. 그러나 우드스탁은 보여준다. 선함을 넘은 무질서함의 아름다움을. 관점(perspective)은 우리의 인식을 제한한다는 한 등장인물의 말처럼, 모든 관점에 저항하는 반문화의 중심 우드스탁은 인식을 넘은 우주 그 자체의 중심으로 상상되기 충분하다. 

김사과 작가와 인터뷰했던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 때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LA의 히피로 살다가 죽는게 꿈이라고. 나는 그 때보다 지금, 그 말의 의미와 느낌을 더 이해하게 됐다. 이 영화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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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우주의 풍경>(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김낙우 옮김, 사이언스북스)

우주는 모든 것이다. 어떤 존재도 우주를 넘어설 수 없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 그 자체이며 우리의 정신작용 역시 우주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우주 너머를 상상할 수 있으나 그 상상 마저도 우주에 귀속되니, 그야말로 우주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주는 무어란 말인가? 공간은 무엇이고 시간은 무엇이고 존재란 무엇인가. 물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존재론에 천착해왔다. 우주의 존재론은 결국 인간의 존재론과 맞닿아있기에 그들의 열정은 더 빛이난다. 우주란 무엇이기에 인간을 잉태하게 되었는가. 끈 이론의 선구자 레너드 서스킨드는 한 편의 풍경화로 이 존재론을 얘기한단다. '메가버스(Megaverse)'를 그리는 그의 풍경(landscape)가 사뭇 궁금해진다. 

  

<원자력 딜레마>(김명자 지음, 사이언스북스) 

전 환경부 장관의 원자력 이야기.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원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요즘, 김명자 전 장관의 이야기가 궁금한 이유는 그의 의미심장한 위치 때문이다. 그는 학자와 정치인, 관료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다. 원자력에 대한 학자적, 정치적, 정책적 견지를 모두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정부에서도 '환경부' 장관으로 일했다. 원자력은 환경적 측면에서 득이 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친원자력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관련 부처 장관으로써 그는 무조건 적인 원자력 반대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을 고려한, 즉 한국적 맥락에서의 원자력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잘 파악할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마을 회사>(박원순 지음, 검둥소) 

 '마을'과 '회사'의 결합이라니. 사회적 기업도 아직 잘 와닿지도, 보이지도 않는데 마을 회사는 더 생소하다. 일명 '소셜 디자이너'인 박원순 변호사가 이번에는 또 무슨 '디자인'을 내 놓은걸까. 책의 부제가 힌트가 되겠다. '공동체를 살리는 대안 경제'. 
 도시와 대기업 중심의 경제체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주체라기 보다는 객체로서의 삶을 산다. 그들이 주체가 될 때는 물건을 사는 잠시의 순간뿐이다. 마을 회사는 소비 주체를 넘어 생산 주체로의 회복을 꿈꾸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인다. 필연적으로 객체를 생산해내는 집중화 대신, '마을'이라는 공간에서 개성과 풍요를 동시에 구가하는 전략을 그는 실제 사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업이라면, 나는 기꺼이 기업화 바람을 맞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문화는 정치다>(장 미셀 지앙 지음, 목수정 옮김, 동녘)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정치의 수단은 무력이었다. 그러나 무력은 이제 한국을 포함한 많은 지역에서'최종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뿐 그 권력을 '문화'에 넘겨주었다.
 무력은 영토를 지배하나 문화는 일상을 지배한다. 이데올로기는 일상을 지배하는 자의 편이다. 따라서 이제 문화는 정치적 투쟁의 장이다. 문화를 장악하는 자가 일상을 지배하고 이데올로기를 결정한다. 
 아직까지 문화정치에 대한 이론적 작업은 한국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여기, 번역된 텍스트로나마 '치맛 속까지 정치적인' 나라 프랑스의 한 학자가 내 놓은 문화정치론을 만나게 됐다. 아직까지 거칠고 좁은 프레임을 세련되게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수에 대한 두려움>(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장희권 옮김, 에코리브로)
    
 민주주의의 제도적 난점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 '소수'의 지위가 가장 문제적이라 생각한다. 집단의 의사와 개인의 의사를 매개하는 과정은 대개 다수결이라는 형태로 이뤄지며, 민주국가는 다수의 의지로 굴러간다.
 문제는 국가에게 폭력의 합법적 행사라는 권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소수에게는 사회가 자신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변해갈 가능성을 넘어, 자신에게 폭력이 행사될 가능성도 있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도 이 양상은 재현된다. 민주주의를 표명하는 국제사회에서도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은 빈번히 벌어진다. 대부분의 강대국이 공조하는 테러와의 전쟁 같은 경우가 그 예시다.   

그러나 이 책은 '소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주로 폭력의 대상인 소수를 폭력의 주체로 인식한다는 뜻일 게다. 테러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다. 테러리즘은 소수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폭력이다. 

이 역설적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 궁금증이 이 책을 선택하게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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