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을 대비하여 스파링

 

1

 

전반적으로 무료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끔 정말 아무런 바람도 불지 않는 기간이 잠깐씩 찾아오곤 했다. 요즘처럼. 매실차 온더락이나 마시고, 멍뭉이와 멍뭉어로 멍뭉멍뭉 대화나 나누고, 동네 빵집에 뭐 맛있는 빵이 나왔나 순찰이나 하고 다니는 느긋한 시간. 그러나 이런 다음에는 꼭 뭔가 몰아치곤 했다. 미리 짐작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방학식 날 교문을 박차고 달려 나오는 초딩 떼처럼 쉴 새 없이 분주하게 밀려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적이듯이, 이 사건들 역시 아무리 단단한 마음을 갖추고 기다려도 현명하게 돌파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냥 실컷 얻어터지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쩐지 지나치게 평화롭더라니.

 

얻어터지다 보면, 죽지 않을 만큼만 괴롭히고 시간은 간다. 생선 구이를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리면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남은 밥을 다 먹는다. 먹다 보면 밥이 밀어내든 국물이 씻어내든, 위장행 음식물 열차가 가시를 싣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가시가 목구멍을 애절하게 붙들고 끝끝내 버티어 낸다면? 그땐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지만 그건 그때 일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은 밥을 먹는 동안 목에 걸린 가시에게 관심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칵칵거리거나 과량의 물을 들이켜면 가시에게 오래 머물 빌미를 제공하기 쉽다. 가시놈도 제가 시방 얼마나 위험한 짐승인지 눈치를 채고 나면 아무래도 기세가 등등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혹은 이런 일은 너무 잦아서 하찮다는 듯, 쿨하게 식사를 마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가시도 낙담하여 터덜터덜 십이지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어쨌든 얻어터지다 보면, 시간은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두덩이가 눈세덩이 눈네덩이가 될 때까지 퉁퉁 붓고 옥수수가 우수수 털려나가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우겨본다. 간지럽군. 너의 펀치는 내게 전혀 데미지를 주지 못하고 있지. 보아라, 아직 살아 있는 나의 이 현란한 풋워크를.

 

한복판에서 나를 또 얼마나 맵게 쥐어 패려고, 올 가을은 초입에 이렇게 아늑한가.


 

 

2

 


-가와카미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무라카미 : 그저 내키는 대로 썼을 뿐이지요.

-가와카미 : 우와, 정말요?

-무라카미 : . .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저러저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요러요렇게 쓰기 시작했더니 저절로 그러그러하게 되더군요.

-가와카미 : 역시 무라카미 선생님이세요.

 

전체적으로 이런 구도의 대화가 자꾸 발견된다. 내키는 대로 썼는데 이래. 그게 나, 무라카미지.

 

 



 문득 어떤 기억들은 황인숙

 

 산탄총이 되어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기는 거예요.

 산산이 뇌세포를

 부숴버리는 거예요.

 지져버리는 거예요.

 

 자욱한 포연 속에서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거예요.

 새들도거리의 소음도 비틀거리며

 막 분홍빛이 되는아침이 비틀거리며.

 

아픔이 기필코 행복의 뒷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바로 거기가 가장 아픈 자리임을 잘 알아서 그러는 거지. 제 딴에 평생 잊기 힘든 아픔이 되려고 애쓰는 거지. 우리는 수많은 아픔을 만나 최선을 다해 아파하지만 이내 흘려보내고, 가장 아팠던 아픔 몇 개만 잘 골라서 평생 간직하거든.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아픔은 잊힌 아픔이니까, 아픔도 제 깜냥에는 머리를 쓰는 거지. 행복의 뒤에 숨어 낙차를 이용하는 거지. 최대로 큰 행복 뒤에서 최대로 큰 눈물의 위치에너지가 되려는 거지. 행복도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야. 가장 큰 아픔이 찾아오기 직전이 바로 가장 큰 행복의 자리거든. 그렇게 행복과 아픔은 오랫동안 묵직하게 추억되려 손잡는 거지. 그러면 우리는 그 무게에 눌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거야. 부숴도 지져도 잊히지 않으니 끝도 없이 부수고 지지는 거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는 거야. 부수고 지져서라도 잊고 싶다고 생각하는 어떤 기억들을 사실은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끝없이 자신을 부수고 지지고 있다는 이상한 진실을. 잊고 싶어서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는 게, 잊지 않고 싶어서 잊고 싶은 기억이라는 게 있다는 서늘한 현실을.

 

 

 

3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와카미 미에코의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샤를 보들레르의 샤를 보들레르 :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황인숙의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박완규가 풀어 쓴 홉스의 리바이어던』, 이사카 고타로의 『악스』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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