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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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신기한 소설이다. 흑인 소년이 수풀 뒤에 숨은 듯 살짝 얼굴을 내민 표지 이미지와 ‘압둘라자크 구르나’라는 작가의 이름과  얼굴만 보면 굉장히 익숙한 내용이 펼쳐질 것만 같다. 아프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한, 억압받는 흑인 노예의 삶이 펼쳐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백인들에게 수탈당하고 고통받는 흑인들의 삶, 인종 차별에 시달리는 흑인들의 삶이 그려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 책을 선뜻 읽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 책은 아프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전까지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그 어떤 작품과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분명 흑인도 나오고 백인도 나오는데, 그들만이 아니다 좀 더 많은 인종이 등장한다. 아랍인, 인도인, 남아시아인 등등 아, 아프리카, 동아프리카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내가 너무 아프리카를 몰랐구나 몇 페이지만 넘기고도 깨닫게 된다. 그런 데다가 백인이 화자가 아니다. 백인의 눈으로 이 땅을 묘사하지 않는다. 도리어 아프리카 대륙 출신인 소년 ‘유수프’의 눈으로 그 땅에 발을 디딘 백인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소년의 눈에는 낯설기만 한 그들의 모습은 ‘대상화’되어 스치듯 묘사되기에 이 시선은 때로 무척 전복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유수프가 겪는, 바라보는 아프리카 땅이 지상 낙원이기만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도 분명 착취와 피착취가 있고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있고, 민족 간의 다툼과 분쟁도 있으며, 백인의 노예가 아니더라도 다른 민족이나 돈이 많은 자에게 노예처럼 팔려가 하인 노릇을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유수프도 그런 이들 중 하나이다. 소년에게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먹고살만한 집과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게다가 그가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는 부유한 상인 ‘아지즈’도 있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소년에게 이 집이라는 공간은 그가 태어나 별다른 결핍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었던 첫 번째 낙원이다.

그런데 낙원은 영원하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부서지고 깨지기 쉽기 때문에 낙원을 낙원이라 부를 수 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년의 행복한 삶은 곧 깨지고 만다. 여느 때처럼 아지즈 아저씨가 그의 집을 방문한 어느 날, 소년은 아저씨가 떠날 때면 으레 주곤 하는 동전을 받을 생각에 들떠 있는데, 그날따라 어머니는 자신을 품에 꼭 껴안고 슬픈 표정을 짓는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대상(隊商) 즉, 잘나가는 카라반인 아지즈에게 큰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을 수 없자 아들인 유수프를 노예로 보내게 된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애초부터 아들을 담보로 아지즈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렸다. 갚을 수도 없을 만큼의 돈을…. 그렇게 낙원과도 같았던 집을 떠나게 되는 소년 유수프-

이 작품은 유수프가 집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소년은 카라반인 아지즈를 따라 아프리카 내륙을 여행하면서 집 가까이에서만 보아오던 것과는 다른 풍경을 마주하고, 온갖 사람들(다양한 인종)을 만나고,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면서 세상에 눈을 떠간다. <낙원>은 이렇게 여기저기 떠도는 소년의 눈을 통해 그간 우리가 알던 아프리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낯선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예컨대 그 땅은 단지 흑백 대결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이슬람교도들과 인도 상인, 유럽인 농부, 원주민 부족들 간의 적대감으로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곳이며 서양의 백인들(영국국과 독일군이)이 호시탐탐 이 땅을 노리고 있어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박한 곳이다.



어디를 가나 그들은 유럽인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장사꾼들은 유럽인들에 대해 얘기하며 놀라워했다. 그들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에 기가 질려 있었다. 그들은 한 푼도 내지 않고 최고의 땅을 가져가고 이런저런 술수를 부려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만들죠. 그 사람들은 아무리 질기고 냄새가 나도 그냥 아무것이나 먹어요. 그 사람들 식욕은 메뚜기떼처럼 끝도 없고 품위도 없죠. 여기도 세금, 저기도 세금을 매기고 어기는 자는 감옥에 처넣거나 매질을 하고 심지어 목매달아 죽여요. 그 사람들이 세우는 첫 번째 것은 감옥이고, 다음은 교회고, 다음은 모든 거래를 지켜보고 세금을 매기기 위한 시장 건물이죠. 살 집을 짓기도 전에 그런 것부터 만드는 거죠. (100쪽)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말하는 유럽인이란 위 구절과 같다. 이제까지 주로 백인의 눈으로 그려졌던 아프리카인의 묘사 방식과 아주 다르다. 게다가 그들은 백인의 속셈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유럽인들은 “땅을 번창시키는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짓뭉갤” 것이며 “그들이 노리는 건 장사가 아니라 땅 자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이다.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은 금과 다이아몬드뿐”으로 그들은 “논쟁하고 말다툼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훔치고 소규모 전쟁을 몇 번 하고 나서 지치면 집으로 갈 것”(119쪽)이다. 이 얼마나 날카로운 묘사인가. 그러나 아프리카의 문제가 꼭 백인들의 알력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부족끼리도 칼을 겨누고, 계급 차별도 존재하며, “노예들조차 노예제를 옹호”(121쪽)하는 모순도 갖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약자는 이 가진 것 없는 소년, 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자유를 잃어버린 소년이 아닐까. 유수프처럼 부모가 빚을 지는 바람에 담보처럼 ‘아지즈’에게 팔려온 아이들은 또 있다. 유수프와 비슷한 처지인 칼릴은 아지즈를 아저씨라 부르며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유수프에게 끊임없이 경고한다. 너는 그의 실체를 모른다고.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데 정말 아지즈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유수프의 눈에는 부와 성공을 거머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이 ‘사이드 아지즈’의 비밀을 추적하는 데에도 이 책의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사이드의 집, 정확히 말하면 그의 정원에서 두 번째 낙원을 발견한 유수프는 어느덧 자신이 떠나온 집, 고향을 잊어가면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나간다. 그리고 그 정원에서 어쩌면 진짜 낙원이라고 여길만한 존재도 발견한다. 그러나 첫 번째 낙원이 소년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서져버렸듯이 이 두 번째 낙원도 영원히 소년의 것일 수 없다.  소년이 살아가는 세계는 ‘음모와 증오와 보복적인 탐욕이 단순한 미덕들조차 교환과 교역의 상징’이 되어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탄탄한 삼나무들과 끊임없는 수풀, 과일나무들과 화사한 꽃들이 있는 담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원- 오렌지나무 수액의 쌉싸름한 향과 재스민향,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대추나무 숲 등 유수프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던 그 정원은 억압과 착취, 탐욕을 배제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낙원일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더 나은 곳을 찾아 또다시 떠날 수밖에 없다. 모든 억압적인 것들을 피해서….

소년의 이 또 다른 떠남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시 발견하는 낙원 또한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년은 또 다시 거기에서 길을 떠날 것이다.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고자’ 또 떠날 것이다. 유수프의 이 끝없는 떠남의 반복은 더 나은 삶, 더 안락한 삶, 자기만의 낙원을 꿈꾸며 나날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그 삶과 닮았기에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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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5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이 책 읽으려고 내놔서 흐린 눈으로 리뷰 읽고 갑니다. 다보고 와서 다시 볼래요. ^^

잠자냥 2022-06-27 16:04   좋아요 0 | URL
네~ 흐린 눈~ 잘하셨어요. 다 읽으신 후 리뷰도 올려주세요!

케이 2022-06-27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사를 접할 때마다 유럽놈들은 전쟁에 미쳐버린 놈들 아닐까? 하는 생각 자주 했어요. 잘 살고 있는 나라 쳐들어가서 약탈 강간 전쟁만 일삼은 주제에 세상 고상한 척 다 하며 시혜를 베푸는 듯 구는 모습을 보면 울화가 치밉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쓴 책이 압도적으로 많이 번역되어 있다보니...그들 시선으로만 세상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인사가 늦었어요. 잠자냥님 저는 여전히 육아에 찌들어 살고 있고 여전히 잠선생님 글 잘 읽고 있어요. 눅눅한 계절 상쾌하게 지내시길.

잠자냥 2022-06-27 16:0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말입니다. 요즘도 아주 그냥 시혜를 베푸느라 바쁘신 그들. 나참....
그래서 비백인 남성들이 쓴 책 읽다 보면 가끔 깜짝 놀랍니다. ㅎㅎㅎ
더운데 육아하느라 힘들죠? 아기들이 건강하게 빨리 크길 바랄게요! ㅎㅎㅎㅎ
 
비평가 / 눈송이의 유언
후안 마요르가 지음, 김재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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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사이의 권력 관계를 들여다 본 수작 <비평가>와 동물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성찰한 <눈송이의 유언> 두 작품이 담겼다. 후안 마요르가 희곡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글들도 실려 있어 그의 작품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보너스 같은 책이랄까. 그나저나 눈송이가 고릴라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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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6-21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기억나요 알비노 고릴라 ㅠㅠ 그 고릴라 이야기군요. DNA보관하고 있다고 하던데. 언젠가 복제될려나요 헉. 이 책 평가가 다들 좋네요 ~

잠자냥 2022-06-21 20:59   좋아요 1 | URL
네, 스페인에 그런 고릴라가 있는 줄 전 이 책 보고 처음 알았어요!

바람돌이 2022-06-22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모르는 책이긴 한데 눈송이가 고릴라라는건 강력한 스포 아닌가요? ㅎㅎ

잠자냥 2022-06-22 22: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렇지는 않습니다!
 
낙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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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들‘- 즉 대상으로서 그려지던 아프리카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 주체적 시선으로 그리고 있어 무척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백인과 흑인,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를 벗어난, 아프리카 땅 사람들의 진짜 ‘삶‘을 담은 작품. 첫 문장부터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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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20 10: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의 책을 한 권 정도는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자냥 님이 역시 먼저 똭- 읽고 이렇게 써주셨네요. 오케바리. 알겠습니다.

잠자냥 2022-06-20 11:00   좋아요 2 | URL
이 작가 책 3종이 한꺼번에 나왔잖아요? 그중 가장 땡기던 작품이 이 <낙원>인데(성장소설이라)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나머지 작품도 다 읽으려고요~ ㅎㅎ

다부장님은 8월 9일까지 이 책 사지 마세요. 다른 분들이 사줄 거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 이거 메모해놓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6-20 11:05   좋아요 3 | URL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확실히 각인시켰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푸아뉴기니 쿠아 마운틴 #4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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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미한 풍미와 고소한 맛이 잘 느껴진다. 산미는 상대적으로 적은 느낌.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커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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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6-19 2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먹고 싶어요!! 🤪🤪🤪
 
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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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모든 집단은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고 비인간화하고, 격렬히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또는 권력이 생겼다고 착각한다. 거기서 모든 차별이 발생한다. 토니 모리슨의 이 명민한 사유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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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6-18 20: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신간 나왔다고 본지 며칠 안 됐는데 벌써 다 읽으시다니.. 역시 잠자냥님!!👍

잠자냥 2022-06-19 00:07   좋아요 4 | URL
아, 저도 오늘 서점 나갔다가 이 책 발견하고 깜놀!해서 읽었어요. 미안해요, 모리슨 언니 서점에 앉아서 다 읽을 수 있을 분량이라 서점에서 다 읽고 대신 다른 책 사옴….;; 이 출판사에 미안한 건가;; 암튼 이 책은 가볍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은 묵직합니다! 역시 토니 모리슨!

바람돌이 2022-06-19 0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며칠 전에 보관함에 넣어뒀는데 역시 빠르시군요.

잠자냥 2022-06-19 00:09   좋아요 2 | URL
서점 나간 덕분입니다! ㅎㅎ 꼭 읽어보세요~~

mini74 2022-06-19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노사이드 요건이 사물화란 글이 생각나요. 타자의 비인간화 ㅎㅎ 근데 서점에서 다 읽으셨다는 자냥님 댓글에 ㅋㅋ 암요. 딴 책 사셨음 된거죠. 저 어릴적 동네 서점 아저씨가 나름 단골인 저에게 한 권 사면 한권은 조심스레 읽고 가는걸 허락하셔서 ㅎㅎ 애거서 크리스티 책 정말 열심히 읽었더랬죠.

잠자냥 2022-06-19 13:02   좋아요 2 | URL
네 사실 서점에서 다 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앉아서 좀만 훑어야지 하던 게 그만 끝까지 쭉~ 읽고 말았네요. 그만큼 흡인력 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