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결국, 유교에 앞서 경전을 인쇄하고 포교활동을 하였던 불교에 대한 반감, 그리고 또 유교 측에 있었던 경전 인쇄에 대한 일종의 저항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불교가 포교를 중시한 것과 달리, 유교 경전은 소위 당시 지배계급의 특권적인 학습과 교육 내용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널리 세상 사람들 일반에게 전달할 필요가 없었으며, 또 그것을 지나치게 널리 전달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유교 경전에 대한 수요가 당대에는 아직 인쇄를 하지 않고서도 지탱할 수 있는 정도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윽고 오대, 송에 이르러 그것이 인쇄되었다는 것은 수요가 그만큼 증가하였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19)
앞에서 인용한... 청대 초기의 고증학자인 고염무의 경우에도 그 장서의 적지 않은 부분이 총서이었음이 틀림없다. 많은 자료, 많은 판본을 이용하여 문헌연구를 행하는 고증학이라는 학문이 원래 많은 서적을 참고할 수없을 때에는 성립될 수 없는 학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청대의 고증학은 명말의 미디어 혁명, 특히 총서의 간행에 의하여 자극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32)
장정의 변화 외에, 명말 서적 형태의 변화 가운데 하나가 소위 명조체라는 자체... 완성이다. 다케무라 신이치...의 <명조체의 역사...>에 의하면, 명조체가 탄생한 것은 정덕...으로부터 가정...에 걸친 시기라고 한다. 기하학적인,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몰개성적인 명조체가 판목을 새기는 작업의 신속화,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분업화의 필요성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다. (52)
그 밖에 도상이 필요한 경우는 명소나 유적일 것이다. 세계 도처에는 재미있는 곳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 누구든지 쉽게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미리 관광 명소를 선전하여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 화본이 많이 만들어진 명말, 이와 같은 명소와 유적을 테마로 한 화본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책이 나온 배경에는 당시 실제로 명소 유적을 돌아다니는 관광 여행객이 증가하여, 가이드북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는 사정도 존재한다. (74)
당대, 송대에 비하여 명대에는 시인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가령 당대의 이백이나 두보에 필적할만한 명대의 시인을 열거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시인들 개인의 성과를 생각한다면, 명대의 시인은 분명히 당대, 혹은 송대에 비하여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단에는 그때까지는 시를 짓지 않았을 것 같은 서민들이 시를 짓게 된 것도 분명하며, 이점에 있어서는 진보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모범을 충실히 본뜨면 좋을[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고문사파의 주장은 일종의 문학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매뉴얼이 요구된 배경에는 당시 나타난 수많은 일요시인[??]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이 시문을 지을 때 모범이 되어줄 당시... 선집...을 필요로 하였다. (81)
그러면 도대체 왜 명말에 이와 같은 대작 백화소설들이 산더미처럼 나왔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나, 무엇보다도 수요가 있어서, 모두들 사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러한 소설들을 사서 읽은 것은 누구이었을까? ... "옛날에는 유..., 석..., 도...의 삼교...가 있었는데, 명 이래 또 하나가 늘었다. 즉 소설이다. 소설책은 아직껏 한 번도 자신을 가르침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사농공상... 모두가 이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글자를 모르는 아동과 부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귀로 들어서 마치 읽은 것과 같다. 이 가르침은 유, 석, 도보다 더욱 널리 퍼져있다." (97)
명말에 간행되었든 백화소설 작품에서, 비평과 삽화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명말에 간행된 대부분 백화소설 작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본문에 대한 비평이 가해져 있다. 비평은 독자에 대한 안내의 의미를 지니는데, 비평 자체가 독서의 대상이 되어서 그것을 즐기려고 책을 구입하는 독자가 있었다. 명말 간행된 소설을 보면, 당인..., 이탁오..., 진계유..., 탕현조..., 풍몽룡..., 김성탄... 등 유명인의 비평이 달려있는 것을 자랑거리로 내건 작품이 적지 않다. (101)
그리하여 그날 무도두...가 뒤돌아서 그 사람을 보더니 덤벼들 듯한 기세로 인사하였습니다. [김성탄 비평. 기묘하다!] 그 사람이야말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무송과 피를 나눈 형 무대랑...이었습니다. 무송은 인사를 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년 남짓 형님을 뵙지 못했습니다만, 어인 일로 이런 곳에 계십니까?" [김성탄 비평. 이 말에 대해서는 바로 뒤의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말속에서, (무대가) 대답하지 않는 듯 대답하고 있다.] 무대가 말합니다. "동생, 동생이 없어지고 나서 시간이 꽤 지났는데 왜 편지 한 장 보내주지 않았어? 나는 동생을 원망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네." [김성탄 비평. 이 여섯 글자...는 <서상기...>의 전체 내용을 총괄하고 있다. 무대의 입에서 이렇게 묘한 말이 나올 줄이야. 그를 생각하느라 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원망할 시간이 있었을까? [뭔 소리??] (이것은) 무대를 위한 하나의 전구...가 되어 준다.] (110)
또한 명말의 소설 삽화는 대부분 이야기 중의 명장면을 그리는 것에 비하여, 청대 소설 삽화는 장면보다는 등장인물의 초상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만큼 간단하며 품을 덜 들인 것이 도어 있다. 이것도 청대 출판문화 쇠퇴를 나타내주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4)
<녹모란>은 연극을 통한 인신공격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상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각본이 출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격에는 때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희곡이 만들어지고, 바로 인쇄되어 유통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공격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만큼의 스피드로 각본이 출판되고 있다. ...... 책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인쇄물이 생겨나서, 정보가 보다 넓게 보다 빠르게 전달됨과 동시에 인쇄물이 세론 형성 등을 위하여 사용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혹은 지금부터 일어나려고 하는 일에 관한 정보가 인쇄물이라는 매체에 의하여 시간을 두지 않고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명말 당시의 정보전달은 오늘날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사회가 그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명말의 미디어 혁명‘이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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