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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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가 평민으로 해방되었어도 자신의 가계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때는 ‘부지‘나 그 비슷한 용어로 호적에 기재되었다. 때로는 호적을 만들었던 이들이 다소 장난스럽게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 이런 용어를 채워넣기도 했다. 1759년 김재중이란 인물의 부인인 고조이는 자신의 아버지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나머지 조상 가운데 조부는 ‘안지...‘, 증조부는 ‘하지...‘, 외조부는 ‘전부지...‘였다. ‘안지‘나 ‘하지‘는 어찌 알겠느냐는 의미다. 모른다는 표현을 ‘안지‘나 ‘하지‘로 바꾸어 쓴 것이다. 외조부는 전주 전씨였으나 역시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지‘라고 했다. (25)

하지만 차별에 대한 서얼들의 집단적인 도전과 저항으로 양반 관료들은 서얼들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했다. 어떤 사회든 저항 없이 자유가 확대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와 더불어 영조나 정조처럼 서얼 허통에 관심을 보인 군주의 노력으로, 강고한 신분 제도는 서서히 허물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역 내에서 혹은 한 가문 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이라는 오랜 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50)

네 노비의 아버지인 막동은 가계를 계승하는 이에게 주는 숭중... 명목의 노비였다. 그의 첫째 아이는 김광려 형제 가운데 장남, 둘째는 장녀, 셋째는 차남, 넷째는 장녀가 각각 상속받았다. 특히 넷째는 막동의 부인 배 속에 있어 아직 출산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김광려 남매는 철저하게 균분상속을 실현하고 상속받은 노비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쉽게 하기 위해 이처럼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노비 가족을 해체시켰던 것이다.
물론 아직 막동의 아이들이 어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있어 이들 가족이 바로 흩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가족들이 상당 기간 같이 지내면서 각자의 주인에게 신공만 바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인들의 필요에 따라 이들은 얼마든지 이별을 맞을 수 있었다. 노비들이 친족 간에 모여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양반가에서는 딸을 상속에서 점차 배제시키고 아들들이 같은 마을에 모여 살게 되면서, 그들의 노비들도 일상에서 친 인척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57)

반면 수봉의 이종형...이었던 사노 실동은 양반 전시국의 사비와 결혼을 했다. 수봉과 마찬가지로 남의 집 비와 결혼을 한 것이다. 이때는 앞서 말했듯이 자녀들이 그들 어머니의 주인 소유가 되어 심정량에게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을 재산 일부를 심정량에게 바쳐 손해를 보상해주어야 했다.
......
"아침 일찍 뜰에서 가지, 상이, 상실, 석지 등 4명의 노가 남의 집 비를 처로 얻어 자식을 낳고 기른 죄로 벌을 주었다. 노 석지는 5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그의 재산을 바치도록 했다." (58)

1678년은 물론이고 1717년에도 도산면에 거주했던 김해 김씨 가운데 양반이나 중인은 단 1호도 없었다. 1717년에는 9명의 주호가 노비였고, 37명의 평민 가운데 원래 노비였던 이들도 여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이 지역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김해 김씨 구성원들이 모두 하천민 출신이었다는 점, 이로 인해 노비들이 이 성관을 선호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비 수봉 역시 흔하면서도 신분적 장벽이 높지 않았던 김해 김씨를 자신의 성관으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김해 김씨 전체가 다 하천민 출신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수봉이 살았던 시기 도산면의 김해 김씨는 양반 성씨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 지역의 양반 성관이었던 남원 양씨도 다른 곳에서는 얼마든지 노비가 선호하는 성관이 될 수 있었단 것이다. 수봉은 그의 거주 지역에서 가장 흔했던 김해 김씨라는 성관을 얻어 평민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외형적 조건을 구비했다. (94)

등광은 수봉의 후손들이 정착한 주요 지역들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곳이었다. 마을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대부분 그와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었다. 평민들 중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선대가 노비로 연결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늘 허리를 굽히고 살아야 하는 대상인 양만들을 일상적으로 마주칠 일은 적었다. ......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수봉의 여러 후손들 가운데 호적에 가장 오랫동안 꾸준히 등장하고 사회적 성장도 활발했던 일파가 바로 등광에 자리 잡은 이들이었다. 물론 양반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일은 그들의 몫이었다. 당시에는 미곡이나 상품성이 있는 작물의 재배와 거래가 이전 시기보다 활발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평민들도 재산을 늘려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호적에 꾸준히 등장하며서 직역을 상승시켜 나간 이들은 바로 이러한 부류에 해당했다. (104)

이때 박종이 처의 외조부는 김수봉이 아닌 정수봉으로 기재되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김해 김씨에서 진주 정씨로 바뀌었으므로 외조부도 정수봉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수봉이라는 동일 인물이 한 가계에서는 김수봉으로, 또 다른 가계에서는 정수봉으로 기재되었다. 수봉이 김해 김씨가 되면서 새로운 가계가 탄생했지만, 그가 다시 정수봉이 되면서 또 다른 가계가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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