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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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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정록은 서랍을 갖고 있다고 고백했는데 소설가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머릿속에 많은 서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잘한 에피소드, 사소한 지식, 작은 기억, 개인적인 세계관(같은 것)... 등등. 그런 걸 에세이에서 다 써 버리면 소설 쓸 때 궁핍해지니 서랍 속에 아껴 두는데, 소설을 다 쓰고 나도 쓰지 않은 서랍이 몇 개씩 나온다고. 그중 몇 개는 에세이 재료로 쓸 만하다 싶은 게 생기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본업이 소설가인 하루키는 '맥주 회사에서 만드는 우롱차' 같은 에세이를,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이 에세이를 썼다(지만),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했다. 이 책은 정말 어깨 힘 빼고 다리 뻗고 누워 히죽거리며 읽어야 제격이다. 휴가지에 이 책을 가져간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분 좋을 정도로 가볍고 예쁜 '책'이다. 손에 쏘옥 쥐어지는 깨끗한 책의 외모도 흡족하다는 말. (근데 일본에서는 우롱차가 대중적으로 많이 소비되는 차인가? 우리나라에도 캔으로 나와있듯이)

 

'채소의 기분'은 이 책의 첫 이야기다. 용두사미식의 대화를 좋아한다는 하루키는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은 채소나 다름없다'라는 영화 대사에 매료되었지만 "채소도 채소 나름, 어떤 채소요? "라고 물으면 돌이켜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생각에 잠기게 될 때가 있다고. 나는 이 대목에서 영화 '아멜리에'가 떠올랐다. 막돼먹은 채소 가게 주인의 최대 욕이 '채소같은 것!' 뭐 이런 대사였는데 주인에게 핍박받던 점원이 들고온 꽃양배추는 마치 하나의 '등장인물' 같았다. 갖가지 채소 중에 하필 꽃양배추라니. 대단한 걸! (꽃양배추님 이름 불러 죄송해요^^)  하루키의 결론은 "채소도 채소의 마음과 사정이 있으니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라는 말이다. 첫 장의 채소 이야기는 나중에 나오는 굉장히 초현실적인 일본식 커다란 순무 이야기에서 다시 채소를 들먹이며 배꼽 잡게 하는데, '순무에게도 인격이 있다(179p)'고 농담하는 바람에 그만 또 우스워 킬킬댔다.

 

이 책은 첫 장의 채소 이야기부터 <먼 북소리>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와는 조금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데 가볍게 후후~ 하면서도 얕지만은 않은 생각의 타래에 고수의 글맛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에서 작은 교훈이나마 얻기를 원하는 독자는 그런대로, 그냥 킥킥 웃으며 소소한 이야기에서 일상의 여유와 농담을 즐기길 원하는 독자는 또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다.

 

음식, 옷입기, 음악, 취침, 운동(달리기), 사람(여자, 남자), 대인관계의 기술 등 하루키의 취향이 두루 드러나는 데, 특히 본업인 소설 쓰기나 번역의 일보다 더 고민하게 된다는 에세이 쓰기에는 그만의 세가지 법칙이 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뭐가 자랑에 해당하는지 정의 내리긴 복잡하지만)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물론 내게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그걸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진다)

(34p)

 

이런 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려니 화제가 제한되고 '쓸데없는 이야기'나 쓰게 되어 피판 받을 때도 있지만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너무 화내지 말고 적당히 넘겨주시길. 무라카미도 무라카미 나름대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35p)"라고 번죽 좋게 능청을 부리는 저자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긴 책으로 내기에 좀 시시하지 않나,라고 살짝 의심 들 때마다 이 문장이 생각나게 마련. 역시 에세이는 '어려운 글'이다. 글의 경중을 저울질 해가는 일도, 내용의 솔직함과 가감의 조절도. 나도 경험자이고 주위에서도 듣는 이야기지만 에세이는 개인적인 고백성이 강한 글이다 보니 자신과 독자 사이 가슴과 머리의 간격을 조절하는 일이 쉽지 않다. 고백성의 정도도 그렇거니와 글쓴이 자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니 위선이나 가장, 미화 같은 심리적인 작업을 하기가 더 용이하다. 그걸 경계해야 된다. 에세이는 어떤 방식이든 어떤 내용이든 글쓴이 자신의 생각이 맑고 자신에게 솔직한 명분이 서시 않는다면 호감을 끌어내기에 힘든 글쓰기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소설가든 시인이든 에세이를 쓰지 않고는 글쓰는 사람의 궁극에 가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하루키의 에세이는 그런 점에서도 그래서 더 솔깃하다.

 

번역에 대한 생각도 들어볼 만하다. 오역보다 나쁜 것은 '읽기 힘든 나쁜 문장으로 나열된 번역과 맛이 결여된 지루한 번역'이라고. 그렇다고 오역을 봐주기엔 난감하다고.  비단 번역글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읽기 힘든 나쁜 문장의 나열과 맛이 결여된 지루한 글은 글쎄다. 나도 갈고 닦아야할 사항이다. 번역서를 읽다가 가끔 난감한 게, 지시대명사가 난삽하게 쓰였을 때다. 최근 무척 흥미로운 책 <케빈에 대하여>를 읽다가도 이게 어떤 걸 지시하는 거지,라며 다시 앞뒤를 읽어보게 되는 부분이 종종 있었다. 지시 대명사 경우가 아니어도 좀 풀어서 앞 뒤 맥락에 맞게 번역해 주면 이해가 더 잘 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되씹어 읽어보며 머물러있을 때가 있다. 소설 같은 경우, 죽죽 이야기를 따라 나가고 싶은데 덜커덕 걸리는 것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표지와 삽화도 생뚱맞은 매력을 발산하는데 알고 보니 일본 동판화가의 동판화다. 글과 잘 어울린다.

 

각 이야기 아래 사족 한 마디가 달려있는데 그것도 뜬금없다. 이런 게 바로 하루키식(?!!) 꺾기도 같은 것. 유쾌하고 발랄하게, 여름날을 사는 우리에게 한 줄기 살랑바람 같은 글!  바짝바짝 마르는 입안에서 한 입 베어문 보석바 같은 글!  레스토랑에서 갑자기 정전이 되면 마주 앉은 여성의 손에 가만히 손을 포개는 게 '세상에서 가장 타당하고 자연스럽고 예의바른 행동의 하나'라고 믿는 엉큼한 하루키. 그러나 생각만 하다 불이 번쩍 켜지고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버리는 소심한 하루키. 무라카미는 무라카미대로 채소는 채소 나름대로 우리는 각자 우리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러니 잘 못 산다고 총은 쏘지 맙시다,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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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8-2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힝,,,부러워요. 김연수 책도 그렇고 하루키의 이 책도 그렇고 다 평간단이라 받았다는 거죠!!!
저 옛날에 평가단 할 때는 이렇게 좋은 책 안 걸리더만,,,
암튼 이 책을 새책으로 사 중고로 사,,,이러면서 어제부터 망설이고 있어요.
그런데 "유쾌하고 발랄하게, 여름날을 사는 우리에게 한 줄기 살랑바람같은 글! 바짝바짝 마르는 입안에서 한 입 베어문 보석바 같은 글!" 바로 저에게 필요한 글이에요!!!갑자기 마음이 조급해 지고 있는 나비아줌마,,ㅋㅎㅎㅎㅎ

프레이야 2012-08-21 15:41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고 그게 또 누군가에겐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한 권쯤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에요. 책 자체가 이~~뻐~~요.ㅎㅎ
당장 생일선물로 새 것으로 보내드릴 테니 꼼짝마욧!!ㅋㅋ

비로그인 2012-08-2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던 머그컵 증정이 오늘 주문할려고보니 글쎄 재고소진이래요 맘상할까말까 하고있는데 ㅎㅎ글 잘보고갑니다^^

프레이야 2012-08-21 15:15   좋아요 0 | URL
앗, 머그컵이 있었어요? 그럼 기다렸다가 구매할까나요...
재고소진이면 이제 다신 안 하나요? 그렇겠군요. 다시 안 하겠어요.ㅎㅎ
고맙습니다. 머그컵에 맘 상하진 마시구요.^^

댈러웨이 2012-08-2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리뷰 제목 보고 한참 웃었어요. 채소도 채소 나름,이 아니라 채소는 채소 나름으로,구나... --
전 왜 이제 하루키 책을 주문하지 않게 된 걸까요, 프레이야님? 그 빨간 책이랑(제목 기억 안남요. 미치겠다.), 달리기 책이랑도 함께 사고 싶었는데 최종 클릭에서 자꾸 빠지네요.

프레이야 2012-08-22 07:43   좋아요 0 | URL
리뷰제목은 채소도로 썼어요.ㅎㅎ
댈러웨이님 말씀하신 책은 하루키 잡문집 같은데 저도 그건 안 읽었구요. 최종클릭에서 자꾸 빠지는책, 있지요. 저도 그런게 많아요. 한정된 시간에 모든 걸 다 읽을 순 없죠. 전 댈러웨이님의 문학도서읽기 페이퍼가 참 좋아요. 럭셔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