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되던 해, 내 마음은 깊은 병을 얻었다. 마음의 병을 내 몸이 받아 안고 온 겨울을 혹독하게 앓았다.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뜨면 뜰수록 여자로 태어난 것이 두려웠다. 무서웠다. 억울했다. 남자 다음 여자. 주민번호 2번, 영원한 피해자, 이등 시민……. 제 아무리 잘나봤자 여자로 태어난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의 문들이 그렇게 나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 검은 기운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갈 즈음, 혼자서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통장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서 배낭 하나 메고 길을 나섰다. 딱히 마음먹은 바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가 너무도 힘들어서 어디라도 옮겨가보면 조금이라도 삶의 궤도를 비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 때문이었다.




 그 바람이 나를 배신하지 않은 덕에 여행하는 동안 나는 불평등한 세상에 대처하는 방법을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부려놓고 쉬어보니, 세상을 보는 눈에 여유도 생겼다. 그렇게 차츰 차츰 병을 치유해나갔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남해 금산에 다다랐을 때다. 일찍 잠 깬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바닷가로 나섰다. 바다 앞에 서니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겨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어디까지 바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하늘의 경계까지 총총히 박혀 있는 별들을. 그랬다. 별이 떠 있는 그 곳까지가 하늘이었다. 별이 떠 있는 한, 검은 어둠 속에서도 하늘은 하늘로서 그렇게 존재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까닭도 내 삶에 별처럼 떠 있는 내 꿈들 때문이겠지. 꿈이 있는 한 지금의 어두운 현실이 나를 집어삼켜버리지 못하는 것이겠지.’

 남들이 들으면 참으로 궁색한 메타포라고 비웃을지도 모를 그 깨달음 덕에 나는 지금껏 참으로 무사히 살아왔다.




 그 뒤로 나는 하루라도 꿈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숨 쉬는 일처럼 꿈을 꾸었다. 내가 꿈꾸는 세상 안에서 나는 무한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살았다. 꿈꾸는 순간만은, 그 꿈을 향해 노력하는 순간만은,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평화를 맛보았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나를 억압한다고 느끼는 순간도 나는 꿈을 꾸었다. 사랑과 성이 제도에 구속당하지 않는 세상을. 비혼주의자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것은 그 꿈 가운데 하나였다. 그 덕분에 나는 내게 온 사랑을 기꺼이 맞아 행복하게 살았고, 나를 떠나가는 사랑을 축복하며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또 내 행복을 좇아 그렇게 살다보니 뜻하지 않은 수확도 있다. 이혼한 뒤, 혼자 살아가는 씩씩한 친구가 “내 딸이 나중에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해도, 기꺼이 지지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널 보니.”라고 한다. 그 친구 덕에 내 꿈이 나만을 자유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자유롭게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멈추는 날까지 더 많은 꿈을 꾸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내 꿈을 나 혼자만 소유하지 않고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하나를 행복하게 하는 꿈은 둘을 행복하게 하고, 백을 행복하게 하고, 천을 행복하게 하고, 마침내 모두를 행복하게 하니까.




 그리고 꿈을 나누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 되길 소망한다. 가진 돈을 나누는 사람, 가진 재능을 나누는 사람이 많은 세상도 아름다운 곳이겠지만, 가진 꿈을 나누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 가장 희망이 있는 세상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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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9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이유선 지음 / 라티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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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사는 즐거움 가운데 첫 번째를 꼽으라면 ‘자유’가 단연 으뜸일 것이다. 주위 사람들도 혼자서 살아가는 나에게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부러워하는 ‘자유’가 내가 누리고 있는 그 ‘자유’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퇴근 후에도 마음껏 놀 수 있잖아. 집에 일찍 들어가서 밥해야 할 필요도 없고.”
 “너는 혼자서 차 몰고 여행도 갈 수 있잖아. 나는 애들 때문에 동네 밖에도 마음대로 못 나가.”
 “넌 혼자니까 네가 번 돈 네 마음대로 쓸 수 있잖아. 난 내 옷 사 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내 자유는 이런 것들이다. 놀 수 있는 자유, 혼자서 여행하는 자유, 내 옷을 마음껏 살 수 있는 자유…….  

 근데 그게 자유라면 나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친구들의 상상과는 달리, 나는 퇴근 후에는 늘 일찍 들어가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한다.  

 채식주의자로 살다보니 바깥에서 음식을 먹는 일이 너무도 괴롭기에 내 손으로 먹을 것을 요리하는 데 드는 시간과 품이 많다.  

 또 아무리 시간이 남아도 차를 몰고 멀리 훌쩍 떠나는 일은 좀체 없다. 일 때문에 하는 운전도 괴로워서 죽을 지경인데 놀러가면서 차를 몰고 나가다니……. 시간이 나면 집 주위를 산책하면서 걷는 일이 가장 즐겁다.  

 그리고 내가 번 돈으로 비싼 옷을 사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20년 동안 가계부를 꼬박꼬박 쓰면서 살았다. 비싼 옷을 사고 나서 가계부 정리를 하면서 괴로워해본 기억만 있는데, 자유롭다니. 어림없는 소리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자유로운 삶을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나는 그럼 자유롭지 않은 걸까?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워하는 조건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도 늘 자유롭다. 그럼 내가 느끼는 이 자유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그러다가 최근 읽은 책에서 이 책에서 사유의 실마리가 얻었다. 

 저자는 리처드 로티의 철학을 해석하면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최인훈의 광장과 밀실을 예로 들면서.  

 그의 친절한 해석을 따라 읽고서 나는 내게 와 닿은 자유의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자유란 괴로움이 멈추고, 다른 인간들에 의해 굴욕당하지 않는 삶’. 그 책 어디에도 자유란 이러이러한 외적 조건의 결과라고 정의해 놓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자유로운 삶이란 어떠한 외적 조건이 갖추어지면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굴욕과 괴로움을 없애나가는 현재진형형의 능동태란 말이겠지.
 그렇다면, 스스로가 굴욕을 느끼지 않게끔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 그게 자유의 정체다.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자유로운 것이구나.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굴욕감을 강요하는 사회인식으로부터 내 인식을 확장시키며 살아왔다. 결혼 못한 여자가 아니라 비혼주의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나는 내 사랑이 불륜이란 이름으로 굴욕당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 또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추구하면서 내 가난이 무능함의 결과라고 굴욕당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또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를 꿈꾸는 환경운동을 하면서, 내 소박한 소망들이 헛된 욕망이라고 굴욕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도 쟁취했다.  

 결국, 내 삶은 자유로운 조건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굴욕을 벗어난 내 사유의 확장 덕에 자유롭다.  

 시집과의 관계로부터, 남편과의 관계로부터, 직장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돈으로부터, 인습으로부터 느끼는 굴욕들은 우리를 늘 자유롭지 못하게끔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혼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며 자유를 꿈꾸는 것이겠지. 그러나 우리가 정녕 자유롭고 싶다면, 그런 이들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주어져 있는 자유를 인식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옳지 않나.  

 조금만 인식을 전환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넘치도록 많은 자유가 있다. 고기를 덜 먹고 소박한 밥상으로 만족할 자유, 차를 두고 걸어 다녀서 행복할 자유, 내 손으로 공들여 요리하는 시간을 즐거워할 자유, 비싼 옷 사는데 돈 쓰지 않아 흡족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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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0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하는 것이 적으면 괴로움도 적지요..
소박한 삶은 작은 기쁨, 작은 즐거움을 증폭시킵니다. 하하


산딸나무 2009-01-09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요즘 더 적게 가져서 더 많이 행복해지고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9-01-24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삶이네요^^ 저는 이 책을 사놓고 처음 욕망과 환상편만 읽었어요.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

산딸나무 2009-01-2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요즘 제 삶과 책의 내용이 준 사유의 거리들이 좀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덕분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tuksaly 2023-05-06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제게 참 많이 와닿네요. 덕분에 이 책을 더 읽고 싶어졌습니다. 구매하러 갑니다! 14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자유롭게, 인식의 지평을 넓히며 살고 계시길 바라봅니다^^

산딸나무 2023-05-1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예전 제 모습을 다시 볼 기회가 됐습니다~~ ^^
 

 

 새해다. 해마다 새 다이어리를 장만하면 맨 앞 장에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 편지의 말미에는 한 해 동안 잊지 말고 살아야 할 실천들을 적어둔다. 바쁘다는 핑계로 살면서 외면하기 쉬운 가치들은 나에게 계속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날마다 들고 다니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펼쳐보는 다이어리라, 그 편지는 의외로 큰 도움이 된다.




 지난해 내가 나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니, 내가 가진 것들을 일깨우면서 감사하며 살라고 적어두고 있었다. 많이 지쳐있던 나를 위로해 주던 편지였다. 그리고 그 밑에는 ‘사유하기’라는 항목을 가장 앞에 써 두었다. “쉬지 말고 사유하자. 매순간 살아있음을 느끼자.”라는 말도 덧붙여서 그 실천이 지니는 가치도 확인시켜 주었다.




 일 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글귀를 적을 때 내 마음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삶이란 살아있어도 살아있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한 해를 ‘허송세월’이란 놈에게 도둑질 당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니, 그 글귀 덕에 ‘남들이 다 하니까’하는 일, ‘남들이 다 가지니까’ 가지는 관계. ‘남들이 다 추구하니까’ 추구하는 욕망 따위에 시간 뺏길 일이 없어 좋았다. 매 순간 내 사유의 결과로 얻은 일, 관계, 욕망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올 해는 무엇을 가장 중요한 다짐으로 정할까, 12월 시작할 때부터 고민했다. 한 달 내내 사유하다가 크리스마스 즈음에야 깨달음을 얻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국채보상공원 앞을 지나오다 보니 색색의 전등이 나무마다 불을 밝히고 있었다. 썰매를 끌고 가는 루돌프가 크리스마스 시즌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내게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마음이 편치 않다.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는 것도 안타깝고, 전기가 낭비되는 것도 언짢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 아닐 텐데, 왜 저런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저 화려한 색색의 불빛은 무슨 까닭으로 밝혀지고 있는 걸까?




 “저런 것이라도 없으면 연말 분위기가 안 나잖아.”

 같이 있던 친구가 내 쓸데없는 생각을 타박하고 나섰다.

 연말 분위기라……. 그렇구나. 저 불빛이 연말의 분위기를 돋우어주기 위해 있는 거구나.




 그런데 연말의 분위기라는 것의 정체는 결국 화려함과 흥성거림으로 치장된 자본과 도시의 욕망이 아닐까? 한 해를 돌아보기 위해 자기 속으로 빠져드는 명상 따위에 저 화려함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평소와 다른 들뜸과 흥성거림으로 더 많은 욕망을 소비하게끔 하기 위해, 저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불꽃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처럼 인간들도 저 불빛을 보며 소비의 욕망에 홀려 들어가는 것이겠지.




 그 순간, 자본과 도시가 강요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나로 살고 싶었다. 그 무엇에도 홀리지 않고 깨어있고 싶었다. 내 욕망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세상에서 그것들을 욕망하는 내가 과연 진짜 ‘나’일 수 있을까? '내가 욕망하는 현실'이 ‘욕망하고 있는 나’라는 실재가 아닌 세상, 섬뜩하다.

 그 깨달음을 통해서 올 해 내 실천을 ‘깨어 있기’라고 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올 한해, 깨어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온전한 나로 살고 싶다. 다이어리 앞에 ‘깨어있기’라고 적은 다음에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을 모아 본다. 눈을 뜨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자본이 강요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눈을 닫고 살아야겠다. 눈을 닫고 살다보면 내 중심과, 내 마음으로 난 길이 보이리라.




 새해에는 내  마음속에 난 고즈넉한 길을 따라 걸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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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06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는 산딸나무님께서 원하는 고즈넉함과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하


산딸나무 2009-01-0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근데 이 까칠한 성격 땜에 잘 될란가 모르겠어요. ㅎㅎ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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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중반, 일기장에 그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주체인 나와 사랑하는 주체인 너가 이루어내는 그 무엇인 사랑은 주고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말은 웃기는 말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누가 줄 수 있으며 그걸 누가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시 나는 한 번도 사랑을 해 본적이 없는 초짜였음에도 이론으로는 대단한 내공을 쌓고 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친구들이 놀려댔지만, 웬 걸, 나는 그 뒤 10여년을 줄기차게 누군가를 사랑하며 내 이론이 삶과 괴리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아니, 증명했다기 보다는 나 스스로 깨달았다.  

뭐든지 공부하면 되는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때 그 깨달음이 떠오른다. 사랑도 열심히 공부한 놈이 더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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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6 17:20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비로그인 2008-12-3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는 복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산딸나무님. 하하


산딸나무 2009-01-0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한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친한 친구가 결혼식 사회를 부탁해왔다. 비혼주의자인 내게 결혼식 사회를 봐 달라니…….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을 했다.




 결혼식 당일, 여자 사회자를 처음 본 하객들이 좀 당황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정작 당황스러웠던 건 나 자신이었다.

 사회자를 찾는 안내방송에 앞으로 나갔더니, 예식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사회자가 맞느냐고 재차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제야 사회자가 읽을 식순과 문구들을 건네준다. 그걸 받아서 스윽 훑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 했다. 그러나 양가 혼주들이 엄숙하게 앉아있는 앞에서 웃을 수가 없어서 목을 가다듬는 척하며 억지로 참았다. 




 신랑, 신부의 이름 뒤에 붙는 호칭이 문제였다. ‘군’과 ‘양’. 신랑은 서른아홉, 신부는 서른 넷. 우리 사회에서 그 호칭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청소년들에게는 조금의 예의를 갖추는 호칭일진 모르지만, 마흔을 앞둔 사람에게 붙이는 건 모욕이 아닌가? 결혼 유무와는 상관없이 이미 사회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성인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군과, 양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상황 앞에서 어떻게 실소가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결국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아이로 취급해도 된다는 말인데, 결혼만 하면 어른으로 대접하겠다는 단순함을 넘어서는 무식함 앞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신랑 신부가 입장하고 주례사를 들을 차례가 왔다. 주례사사 시작되는 순간, ‘아차’ 싶다. 결혼식에 참석해서 단 한 번도 주례사를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주례사가 시작되면 늘 밥을 먹으러 가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그 주례사를 끝까지 다 듣고 있어야 했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주례사 내용이 나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 남편은 열심히 돈 벌어서 가정을 지키고 아내는 애교부리면서 남편의 기분을 잘 맞추어야 한다, 아이를 낳는 것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적 행동이다 등등 평소 사석에서 들었으면 당장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고 말았을 이야기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순간, 모든 게 황당하고 우스웠던 기분이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서글프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듣는 ‘좋은 말씀’이 저런 반인권적인 얘기들이라니, 게다가 저런 말씀들을 깊이 새기고 살라니, 처참하다. 나 뿐 아니라 결혼식에 대해서 입대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만치 결혼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어 있는데 도대체 왜 이런 악습들은 반복되는 걸까?




 결혼식이란 어차피 혼주들이 지인들에게 부조금 챙기는 자리니, 형식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결혼이란 게 원래 제도 앞에 무릎 꿇는 행위이니, 이런 저런 폐단 따위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일까?      




 나 같은 비혼주의자는 결혼이란 제도 자체를 거부하기에, 결혼식에 대해서까지 이러쿵저러쿵 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러나 결혼이란 걸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제발 결혼식과 그를 둘러싼 각종 반인권적 악습들에 대해서 좀 분노하고 저항했으면 좋겠다. 결혼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자리라고 하지 않나. 그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이렇게 마구잡이로 시작되어도 좋다는 건가? 정말 다들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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