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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데리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듯, 데리다는 이 시대에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 이를테면 뜨거운 감자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를 현재 철학사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가로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적절한 단어들의 무의미한 조합으로 정말 자신의 철학이 추구한 목표라는 해체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는 아마도 두 극단적인 평가 가운데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모습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단편적인 소개나 다른 비평의 도구나 이름의 차용으로서만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 데리다에 대해 이만한 연구서가 소개되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신간평가단으로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나를 제외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읽고 싶은 책으로 이 『데리다 평전』 을 골라주어, 꽤 무게와 값이 나가는 이 책을 신간평가단 명목으로 받아서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론으로서만 알려진 데리다에 대해, 이 책은 원제 ‘Jacques Derrida : A Biography’ 가 말해주듯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간간히 끼어있어 (데리다를 다룬 다른 책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조금이나마) 편하다. 당연하게도 그도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면서 철학을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분명히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을 성장의 과정을 엿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데리다를 다룬 책 치고는 매우 쉽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서 책장 위를 한 발 한 발 밟아나갔다. 

  하지만 이런 일종의 ‘착각’은 몇 페이지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문학과 철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한 이후의 부분은, 전기라는 제목이 무색하리만치 그의 저작에 대한 압축·요약에 숨이 가쁘다. 본격적으로 철학적 저작이 등장한 이후 그의 삶은, (이 책만 보았을 때는) 고민과 저술, 그리고 정말 피곤하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여러 운동들에 참여한 내용만이 간간히 언급될 뿐이다. 대개 전기라 함은 그 책에서 다루는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주로 다루게되며, 따라서 주변인물의 인터뷰나 뒷이야기 등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전기라기보다는 데리다 입문서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로 학술적 내용에 비중이 치우쳐져 있다. 따라서 삶의 궤적을 추적하며 사상의 편린을 엿보고자 하는 의도로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사실 ‘평전’이란 이름에서 기대하는 내용은, 전기적 사실들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그의 저서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책에 매우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제목을 평전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야말로 ‘데리다’ 라는 이름만 붙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제목으로는 이미 여러 책이 나왔기 때문에 메리트가 없는 것일까.


관계

  이 책의 표지에는, ‘데리다는 탁월한 문화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오랜 전통의 연속이다.’ 라는 말이 써있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 데리다의 인상은, 철학사의 가장 마지막 언저리에서 모든 이론과 학설에 대한 해체와 파괴를 기획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해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은 현재까지 세워진 여러 체계들에 대해 그 정합성을 아주 면밀하게 검토해보는 일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사실 이런 분석의 다른 이름이다. 이 방법에 대해서, 이 책에서는 ‘그는 (분석철학의 논리적 연결 검토와는 달리) 어떤 이론에서 제기하는 세계를 그에 따라 아주 크게 그려본 뒤에, 그것이 정합적이지 않고 언제나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데리다의 이런 철학사적 위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이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말이지만 아마도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겹쳐있다. 하나는 데리다가 연구하고 분석했던 여러 입장들과의 관계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대표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후설과 하이데거, 그리고 니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 관계는 데리다가 자신의 기획을 펼치는 데 기초가 되며 따라서 그를 규정하는 어떤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또 다른 대적자이기도 했던 구조주의가 세계에 대한 과학의 대상, 세계의 본질로서 제시하는 바로 그 관계이다. 그의 대적은 위에 말한 선배 철학자들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온 구조주의 학자들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관계는, 그가 해체하고 싶었던 종류의 그런 관계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며 그의 작업을 구성해나간다. 그의 해체란 사실 후설이 추구하고자 했던 철학의 목표, 바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의식 자체로부터 길어낼 수 있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기나긴 여정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단순히 해체라는 파괴적 어감으로만 길어낼 수 없는 그의 철학‘함’은, 후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을 어떤 지점에서,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동의 원동자를 가정한 것처럼 후설은 현상학이라는 체계에서 완결의 지점을 상정했다면 데리다는 같은 탐구의 과정을 밟아가면서 그 상정이 없었을 뿐인 것 아닐까? 적어도 이 책은 데리다의 해체에 대해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듯 하며, 설득력있는 설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니체와 하이데거는 미완의 대가들이다. 그들이 미완인 이유는, 데리다에게 와서야 완결되는 해체의 프로젝트를 아직 다 꽃이 피지 않은 형태로 철학의 역사에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입장과 해체의 연걸고리는, 사실 다른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매우 직관적이기까지 하다. 데리다가 ‘유럽적인 것’이라고 통칭하는 여러 속성들 – 이성, 남자(남근)적, 비혁명적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완결된 것으로 보여졌다. 그것에 대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분석철학과는 달리, 니체는 시적인 강론을 통해 그것이 내적 공백으로 인해 무너질 것임을 예언자적으로 선포했다. 물론 이것은 해석에 따라 그 공백의 위치가 달라질 수 있기에, (데리다조차도 여기에 해당할) 끊임없는 오독과 왜곡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유럽적인 것의 파괴라는 주제로 전유한 데리다 또한 어느 정도의 오독일지도 모른다.

  이 유럽적인 것과 관련해서, 하이데거는 후설의 적통이면서 일종의 이단이다. 인식론에서 출발해 인식의 종착점을 존재의 근원으로 삼은 후설과는 달리, 하이데거는 물구나무선 현상학을 존재론적으로 전회시킨다. 인식(론)의 근거는 결국 존재의, 존재자의 문제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의 현상, 존재자의 현상을 규명하는 것이 현상학의 제1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 현상학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 존재는 결국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통찰에서도 드러나는데, 그가 끝내는 기초로서의 존재론을 정초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존재론이 은근하게 감추어진 독일 민족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이데거가 부활시키고 싶었던 ‘위대한 본질 연구의 전통’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이것이 더해져서, 그는 그리스-로마적 철학, 즉 유럽적인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타자

  데리다를 어느 정도 규정지을 수 있는 학문적 위치라는 의미에서의 관계와는 달리, 그가 명시적으로(또는 암묵적으로) 부정하고자 했던 구조주의 학풍에서 쓰는 ‘관계’라는 말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들에게 타자란 중첩적 관계의 총체이다. 소쉬르에게는 각 기호들이 차이에 의해서 맺는 관계들의 총체이며, 푸코에게는 다양한 사회적 권력 관계들의 총체이다. 이 책에 따르면 데리다와 평생동안 인연이 있었다는 알튀세르는, (그가 분석한 마르크스의 교설에 따라) 최종심급의 수준에서 구조화된 경제적 관계의 총합으로서 타자를 규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를 논할 때는 반드시 그 관계의 목표이자 대상으로서 타자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데리다가 타자에 대해 논할 때는 이들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성과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데리다의 존재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널리 알려진 ‘차연’이다. 차연의 개념은 구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반구조주의적이다. 구조주의자들이 부정하였으며 부정하고 싶었던 전통은, 구체적 존재자로서의 타자 그리고 그 타자의 존재(성)을 규명해내는 것을 타자 자체가 발현하는 여러 속성들에 대한 명석판명한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던 순진함이다. 타자는 관계들의 총합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알튀세르의 개념을 빌리자면, 철학은, 그것이 세계를 올바로 통찰하는 철학이라면 더 이상 철학일 수 없으며, 과학 – 구조에 대한 과학, 관계에 대한 과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구조의 과학은 세계로부터 시간을 축출해낸다. 시간이 빠진 세계는 변화하지 않고 그 모습을 영원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태적으로 구조분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데리다가 구조주의로부터 얻어낸 결론은 바로 이 지점이다 - 시간의 배제는, 관념으로 세계를 붙잡으려는 고대 그리스 특히 플라톤의 부활이다. 세계는 곧 주체에게 타자인 모든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명백하게도 시간이 있거나 변화가 있다(사실 이 둘은 동의어이다.) 존재자 자체의 변화만큼이나 구조의 변화도 너무나 뚜렷하다. 따라서 존재자 자체로부터 인식을 구하던 전통만큼이나, 구조주의의 과학도 그 실패가 필연적이다. 존재자에 의해서든 구조에 의해서든 그 존재자 자체는 명확하게 밝혀질 수 없다는, 데리다가 내세운 대표적인 학술적 개념인 ‘차연’은 여기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데리다에 따르면) 이미 하이데거에 의해 어느 정도는 예언적으로 선포되었다.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한 내용이란, 타자란 관계든 의식이든 1차원적이고 평면적인 속성에 의지한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의 목소리로 타자에게 웅변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이성이나 합리 같은 분석의 방식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작품을 공표하는 것과 같이 함축적이고 은유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데리다의 수사법에 따라, 타자에게 닿을 수도,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잘못 배달될 가능성이 있는 우편의 은유는 이같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닿는 사건에 더 힘을 주어 말하고 있다면, 데리다는 필연이 아니가 우연에 달려있고 핵심은 그것이 ‘우연’이라는 점에 무게를 싣는다.

  이와 같은 서술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은 데리다가 그 스스로가 고유한 철학의 구축자이자 동시에 ‘충분히 급진화된’ 하이데거 또는 후설이라는 점이다. 그는 앞에서 살펴보았둣 구조주의에 의지하면서 그것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고 있다. 이런 결론은 그가 하이데거에서 종결되는 타자에 대한 의식철학의 전통에 충분히 기대고 있다는 반증이지만, 동시에 그 전통으로부터도 이탈한다.


글쓰기

  규명할 수 없는 타자라는 존재론적 결론은 수사학으로 넘어오면서 확정될 수 없는 텍스트의 의미라는 것으로 그 위상이 변화한다. 어떤 기호는 그것이 담지하는 의미를 그 어떤 순간에도 불변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기호를 읽으며 떠올리는 그 의미는, 이미 내가 읽은 그 시간의 의미이며 따라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리고 전혀 현재적이지 않은 ‘과거’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호의 해석에 있어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실수를 범한다. 즉 그 ‘과거’의 기호가 과거로서 종결되지 않고 현재에도 동일한 의미를 계속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는 습관이다.

  하지만 의미가 현전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존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의 현전 또한 우연적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끝없는 표지판으로서 의미를 향해 나아가야 할 길을 지속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을 데리다는 ‘말소 하에 두기’, 즉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간주되는 기호 위에 X 표시를 함으로써 드러낸다. 무의미하지 않기에 종이 위에서 말끔히 지워서 드러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의미를 현전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것이 문학이든 철학이든 관계없이 이런 의미론적 상태에 대한 지속적 실천이다. 다시 말하면, 현전하는 의미를 향한 무한한 접근의 실천이다. 의미론과 존재론을 넘나들면, 글쓰기는 차연의 길을 따라 현전하는 존재를 향해 무한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에게도 그들에게 철학을 하는 고유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데리다는 글쓰기라는 아주 평범하지만 복잡한 방법을 철학의 ‘방법’으로서 제시한다.

  그가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글쓰기라는 테마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평생동안 철학을 하는 동시에 문학에 대한 주제 또한 지속적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철학에 대한 글 이외에도, 문학과 그 비평에 대한 글 역시 지속적으로 생산해내었다. 그가 후설을 자신의 첫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도, 문학 – 넓은 의미에서 기호에 드러나는 의식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현상학을 택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미국에서 그가 주로 문학비평의 방법론으로서 인용되었다는 것이 그 반증이 아닐까. 이것은 이 책의 목차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평론가에 가까운 폴 드 만과 친교를 유지했고, 그에 의해 미국에 소개된(?) 데리다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평론가였다. 이것은 (아마도) 현재의 경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면이 어느 정도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래서 데리다의 이름을 철학서적보다는 문학서적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강조하는 사실 한 가지는, 이 주제 또한 하이데거를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후기의 주제는 다름아닌 시학이다. 철학의 방법이 데리다에게 있어서 글쓰기라면, 그에 비견될만한 하이데거의 방법은 시쓰기, 즉 시학인 것이다. 시는 영원히 드러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알레고리라는 특성 때문에 모든 주체들에게서 다르게 현전한다. 타자는 그 알레고리를 매개로 드러나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주체들이 대면하는 각각의 타자들의 총합 또는 그 이상이다. 일면 데리다적인 이 이야기는, 사실은 데리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이데거의 이야기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는 전반적으로 데리다와 하이데거와의 학술적 관계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물론 20세기 전체를 뒤흔들었던 철학자이니만큼 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특히 강조되는 것은 데리다가 어떤 면에서 ‘하이데거의 적통’이라는 사실이다. 확실히 그의 연구는 데카르트-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적 전통에서도 벗어나있고, 당시의 주류라고 할 레비나스에게서도 조금 비켜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가 거장이면서 동시에 데리다를 예견한, ‘신화-문학적 선구자’이다.


『데리다 평전』

  이 책을 읽었으면서도, 데리다는 여전히 모호한 존재로 내게 남아있다. 그 스스로가 의미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결과일지도 모르고, 또는 이 책이 데리다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책에는 유령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현전하지 않았지만 현전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막상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한들 결코 파악되지 않을 존재자들의 본성에 관한 은유로서 쓰이는 듯하다. 데리다는 그 스스로가 유령이면서, 유령을 좇아 자신의 철학을 펼쳤지만 그것은 유령을 유령이라고 규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으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을까?

  당대의 분위기와 데리다의 저술을 천천히 따라서 밟아나간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아쉬운 것은, 어느 정도의 편향이나 내용의 누락이 보인다는 것이다. 데리다에 대한 평전이니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감안하기는 해야하겠지만, 대립점을 명확히 소개함으로써 데리다의 입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낼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구조주의와의 화합과 갈등 같은 국면이라든가, 후기의 대담집인 『테러 시대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하버마스부분을 건너뛴 것 같은 부분이 그렇다.

  헤겔 이후 대륙의 철학이 그렇듯 모순어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질적 변화와 다층적 세계를 지지하는 이론의 구조는 분석철학의 방법론에서는 수용되기가 약간 힘들고,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서로의 언어로 번역되기는 힘든 것인지, 이 책은 아예 그것에 대해 포기하고 있으며 (데리다 스스로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분석철학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군데군데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단순히 이렇게 치부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닌데, 하는 불만 또한 드문드문 들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데리다는, 특히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주류의 철학 – 분석철학 – 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는 내겐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대륙의 철학의 어법에 익숙하다면, 이 책은 데리다의 일생과 그 저서에 대한 좋은 압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주로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매우 힘든 벽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만큼 데리다의 저서가 어렵다는 것, 어려운 책을 압축해놓으니 그것이 결코 쉬울 리는 없으며 오히려 앞뒤의 맥락이 빠져있어 더 어려워진다는 것, 그리고 작업의 양이 워낙에 많으니 그것을 머리에 다 새겨넣기가 어렵다는 것이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난점이다. 내게는 공부를 하도록 이끄는 자극이 되었지만, 다른 이에겐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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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쿠리 2011-07-2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알라딘 메인 신간 안내에 떠서 리뷰를 보는데 또 선배님의 글이. 아 저는 05 ㅈㅇㅈ이에요.

박효진 2011-07-23 20:4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구나... 알라딘이 지금 나한테 공부시키는 중... 매달 마감 다가올 때마다 죽겠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