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귀찜을 무지 좋아한다.

언젠가 동네 어물전에서 깨끗하게 손질 된 아귀를 싸게 팔길래 한 마리 사와서

무 넣고 탕을 끓여 먹었다.

소금 간에 대파만 쑹덩쑹덩 썰어넣었는데도 시원하고 참 맛있었다.

(지난 여름 묵호에서 사먹은 곰국(아귀탕)과 비슷했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다음엔 뻘겋게 아귀찜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얼마 전 마트 앞을 지나는데 소쿠리에 담은 아귀 두 마리를 5000원에 파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덥석 그것을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집에 오는 내내 뭔가 찜찜했다.

조금 전에 지나온  마트 앞으로 기억을 되돌렸더니 맙소사!

손질이 되지 않은 통아귀가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되겠지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아귀찜 맛있게 해줄테니 집으로 빨리 와서 아귀 손질해줘!"

공교롭게도 남편은 그날부터 꼬박 사흘을 밤늦게 돌아왔고,

아귀는 봉지째 그대로 조그만 김치냉장고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얼 하든  아귀가 머리속을  맴도는 것이다.

'저 아귀를 네 손으로 직접 손질하지 않으면 너는 결코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거야!'

하는 밑도끝도 없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또,

"두려움이 많으면 세상 살기가 힘들어지는 거야!" 하는

채플린의 영화  '라임라이트'의 대사도.

 

그 다음날, 나는 용기를 내어 그걸 도마 위에 올려놓고 봉지를 풀었다.

흐물흐물하고 퀘퀘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흐린 그 눈.

나는 마음속으로 "으악!" 소리를 지르고 서둘러 다시 봉지를 묶었다.

그리고 그대로 밖에 가지고 나가  음식물찌꺼기 통 속에 풀어넣었다.

결국 아귀를 손질하지 못했으니 나는 진정한 어른이 못 되는 것인가?

두려움이 이렇게 많으니 겁장이로 비겁하게 살다 죽을 건가?

걱정이 밀려왔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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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7-0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에 한 표.ㅠ.ㅠ
여기도 그런 인간 또 하나 있습니다.

40일백 2004-07-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운 아귀를 그렇게 버리시다니요.
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옵니다
보기에는 흉물스럽게 생겼지만 생긴거하고는 반비례로 엄청 맛있다는 걸 잘 아시면서

제사는 동네에서는 아구라고 부르고 그래서 저도 아구찜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반갑습니다. 자주 들르겠습니다. ^.^

로드무비 2004-07-0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구찜님, 죄송해요.
없어서 못 먹는 아귀지만,
그래도 직접 내장을 꺼내야 하는 건 너무 무서웠어요.
앞으론 잘 손질 된 아귀만 사다가
맛있는 아귀찜 만들어 먹을게요.

마냐 2004-07-12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정말 아깝습니다. 무섭지만, 저는 아무래도 아낙스피릿이 먼저인듯 합니다. ^^;;;

로드무비 2004-07-1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아낙 스피릿이 뭔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아낙스피릿이라면 저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만,
아귀의 감촉은 정말 무섭더군요.^^;;;

panda78 2004-08-02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귀를 사신 것만으로도 저는 존경합니다. 아구찜 같은 음식을 저는 언제쯤이면 만들어 볼 수 있을런지.. ㅡ..ㅡ;;;

로드무비 2004-08-1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잉? 언제 판다님이 글을...
판다님은 아귀 같은 것 사지 마세요.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집 것만 사서 드세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미모로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