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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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해외여행을 갔을 때였다. 배낭여행을 간 것도 아니고 그럴싸한 호텔 예약까지 한 자유여행이었다. 여자 둘이 가니 위험하지 않은 나라로 가자고 친구랑 골라 간 곳이었다. 싱가포르, 그야말로 도시의 나라다. 서울과 별다를 게 하나도 없었고 안전을 걱정하자면 정말 나무랄 데가 없는 곳이 아니던가. 더구나 우린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었고 난 호기심이 많았다. 친구는 힘드니 택시를 타자하고, 나는 웬만하면 걸어 다녀야 한다고 했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라고 이 나라 구석구석 걸어 다니면서 경험을 해야 하는 거라고 큰소리 뻥뻥 쳤다. 그런데 관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터졌다. 길 찾는 데는 어느 누구보다도 도사라고 자부하던 나는, 아침에도 걸어서 갔으니 지하철역에서 호텔까지 걸어가자고 한 것이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친구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길을 다 아니까 걱정을 말라며, 나만 따라오라고 큰소리 쳤다. 그런데 골목만 돌면 나올 것 같던 호텔이 어찌된 일이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길이 분명 맞는데 이상하다며 돌고 돌았다. 관광하느라 종일 돌아다닌 친구는 투덜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마음이 급했다. 결국 헤매 다닌 지 30분 만에 호텔을 겨우 찾았지만 친구와 나는 대판 싸웠다. 무서워서 죽을 뻔! 했다는 친구와 그 정도로 죽을 것 같으면 여행 같은 것은 다시는! 다니지 말라는 나와. 그러곤 여행의 맛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그 친구랑 두 번 다시 여행 같은 것은 안 가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 이후를 말하자면 우리 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죽이 맞아 여행을 다녔다.

내가 이 책 『도시의 기억』에 관심이 간 것은 저자인 고종석이 ‘외국 도시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그런 교감의 기억을 서술’한 것이라는 거다. 일반적인 여행 서적처럼 어느 나라를 가면 이걸 봐야 하고 이곳은 반드시 들려야 한다는 둥 관광 코스를 미리 짜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사로운, 편파적인 기억을 서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무나 알려진 세계 곳곳의 관광 명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가서 느낀 그의 사적인 감상을 듣는 것. 그러니 어쩌면 그 수다에 지루함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의 수다는 언제나 그렇듯이 즐거운 거다. 더구나 일과 관련한 출장에서 느끼는 여행의 매력은 새롭다. 그래서일까? 고종석의 도시에 대한 기억들이 내게는 그 어떤 여행기보다 구석구석 제대로 된 여행의 기억을 선사하여 읽으면서 내내 그가 다녀온 그 도시들이 궁금해졌다.


난생 처음 가 보았다던 <오사카>에서 북한학자 김석형 선생을 만나기 위해 시도한 오버액션으로 제임스 본드라도 된 듯 착각하며 사건을 만들고, <교토> 금각사에선 누구나 그러하듯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었다. 친구들과 떠난 이베리아 반도의 <말라가>에선 보잘것없는 피카소의 생가를 보며 피카소를 제대로 보려면 파리로 가야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또 저자 고종석은 도시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풀어 놓는다. <세비야>를 말할 때는 예술가인 벨라스케스, 극작가 보마르셰,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와 세비야의 관계에 대해 술술 이야기 하고 <알헤시라스>를 떠올리면서 알헤시라스의 역사와 무슬림, 오늘날까지 스페인에 남아 있는 아랍어 차용어를 죽 늘어놓는다. 그뿐인가? 알람브라의 궁전으로 유명한 <그라나다>에선 오래 전 펜팔을 하다가 그만 둔 수사나를 생각하며(하, 정말 미인이었단다) 추억에 잠기더니 급기야 이 책의 맨 앞 장에 ‘서른 해 전, 그 싱그러운 나이의 수사나 페레스 렌돈 게레로에게’라는 헌정사까지 바쳐 미소를 짓게 한다.


<리스본>에 가서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를 알면서도 포르투갈의 대중음악이 ‘파두’라는 것을 모른 내게 파두가 포르투갈어로 ‘숙명’이라는 뜻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으며 <빈>에는 비엔나커피라는 게 없다는 것과^^;1945년 <드레스덴>에서 있었던 미국과 영국의  대규모 민간인 살육과 파괴의 기록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콩피에뉴>의 아름다운 풍경, 저자가 가본 도시 중 가장 아름다웠다는 <암스테르담>,『플랜더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루벤스의 그림이 있는 <앤트워프>의 성모대성당 등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가 말하는 모든 도시들이 내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와 가 보지도 않은 도시들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비슷한 일상 속의 도시인들, 그들의 영혼은 그 도시를 찾은 이방인들과 교감한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함을 느끼기 위해 헤매며 겪는 많은 경험들로 인해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은 내 첫 해외여행의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하여 나 또한 그와 같은 아니, 그와 비슷한 도시로의 여행을 꼭 해보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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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5-0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오랜만이에요.

readersu 2008-05-04 18:05   좋아요 0 | URL
와~! 리뷰 당선이라닛! 몰랐어요. 알려줘서 넘 감사해요;;
잘 지내시죠? 저도 오랜만입니다.^^

마늘빵 2008-05-0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욧. :) 오랫만이에욤.

readersu 2008-05-05 18:40   좋아요 0 | URL
아하;;감사합니다. 고종석 님의 책으로 이주의 리뷰가 되다니..영광인걸요. 덕분에 아프님이 댓글까지 달아주시고.ㅋㅋ 고종석 님 덕이에요.ㅎㅎ

릴리 2008-05-0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readersu 2008-05-06 13:49   좋아요 0 | URL
릴리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