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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벤드에서 느린 왈츠를
로버트 제임스 월러 / 시공사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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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틸먼은 주유소를 꾸려가는 아버지 밑에서 터프하게 성장했다. 고등학교 때는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대학도 장학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경제학으로 방향을 돌려 1970년에 교수 자격증을 따고, 1978년에는 정교수가 된다.

어느 날, 마이클 틸먼은 새로 부임한 교수 지미의 아내 젤리 브래든을 우연히 모임에서 만나게 된다. 둘은 처음 본 순간 서로에게 끌린다.

젤리 브래든은 마이클 틸먼이 '세상에 섞여 살기에는 뭔가 잘못 디자인된 것 같은 사람' , '두주불사에 19세기 뱃사람을 1980년대 세상에 조물주가 잘못 옮겨 놓은 듯한 사람' 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남자에게 매력을 느꼈다.

둘의 끌림이 마침내 고백으로 이어지지만 남편과 가정에 대한 의무감으로 젤리는 한 발 빼고, 둘은 그렇게 정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대학측에서 오리 연못을 폐쇄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자 마이클 틸먼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고, 젤리가 오리 옮기는 것을 도와주게 되어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젤리는 그날 틸먼의 아파트로 간다.

하지만 젤리가 지미를 떠나 마이클에게로 오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젤리는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나라 인도로 갑자기 떠나버리고, 지미도 그녀가 무엇 때문에 떠난 지 알지 못한다.

마이클은 즉시 본능에 따라 그녀를 찾기 위해 인도로 떠나고 그곳에서 벨라유둠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호텔에 투숙한 젤리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자야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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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월러의 본업이 경제학과 교수였는데, 작품의 주인공 마이클이 그렇다. 어쩌면 작가의 내밀한 욕망을 한껏 반영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시종일관 <채털리 부인의 연인> 플롯을 차용하여 진행되던 소설은 약간의 변주를 가하는데, 이로써 소설은 '야성을 가진 마이클 틸먼 교수 對 거세된 현대의 지미 교수' 가 아니라 '오토바이맨 對 혁명가 디렌 벨라유둠'의 게임이었음이 밝혀진다. 누가 승자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작가는 젤리가 프랑스로 떠나 한동안 방황하고 심지어 프랑스 남자와 침대에 갈 뻔한 짧은 에피소드를 삽입함으로서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작가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도 나흘간의 짧은 만남을 - 어쩌면 인생 전체를 놓고 본다면 순간에 불과한 시간 - 발전시키지 않은 이유도 사랑이란 그 충만한 순간을 벗어나면 결국 변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랑의 감정이 충일한 나흘간의 순간을 곧 완성이라고 보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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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재원 아트북 8
박덕흠 지음, 박서보.오광수 감수 / 재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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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철도의 고급 관료였던 아돌프 실레와 어머니 마리 실레 사이에서 두 명의 누이인 멜라니와 엘피라 실레를 두고, 빈에서 40킬로 떨어진 도나우 강변의 작은 도시 툴른(Tulln)에서 "성적(性的) 열정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로 혹은 "매우 비극적이며 신경증적인 화가"로 일생을 살았다고 혹평을 받기도 한 에곤 실레가 태어났다.

에곤 실레의 그림을 처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게 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어머니 집에 갔다가 작은형 내외와 우연히 담양 메타프로방스 인근 카페에 갔는데, 주인이 에곤 실레를 애호하는 모양이었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의 복사본을 실내 곳곳에 걸어 두었는데 묘하게 눈이 갔다.

한동안 그림만 찾아 보다가 그의 생애가 궁금해서 책을 샀는데, 실레의 다양한 그림들이 연대기 순으로 삽입되어 있어 꽤 만 족스럽다.

에곤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이 모두 철도 고급 관리였다. 실레는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재능도 이써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곳의 보수적인 교수 방법에 실레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한편, 당시 화단의 대표 화가는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실레는 클림트를 동경해서 끊임없이 <빈 분리파>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런 노력 끝에 실레가 17세 되던 해 45세의 클림트를 만나는 데 성공하고, 클림트는 실레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클림트는 실레에게 요세프 호프만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데, 호프만은 그후 실레의 재정을 돕게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철도 감독관이던 하인리히 베네슈(Heinrich Benesch)와 인연을 맺는데, 그 역시 미술 애호가로 실레의 작품을 다수 수집하게 된다.

1909년 4월 실레는 끝내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결성한 것이 <신(新) 예술 그룹> 이었다. 당시 주로 모델로 삼았던 인물은 후에 화가 안톤 페쉬카(Anton Peschka)와 결혼하는 여동생 게르티였는데, 확실하게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근친 혐의가 있었다.

이 시기 실레는 국제 무대인 <군스트 샤우>에 작품을 출품하는데, "병든 뇌의 기형"을 보여준다"는 혹독한 비평이 주를 이루었지만 아더 뢰쓸러 같은 일부 비평가는 그의 천재성에 주목했다.

이후 실레는 <빈 분리파>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비틀림의 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노출시키기 시작했고, 어린 소녀들의 신체에 대한 열망을 그림에 담기 시작한다. 찡그리거나 비명을 지르는 얼굴, 웅크린 몸, 긴장되어 폭발 직전인 신체, 남근상을 보여주며 자위하는 자신의 치부 등이 작품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성기나 배꼽, 유두와 눈동자가 선홍색으로 강조되고 배와 겨드랑이 근육은 노란색으로 표현된다. 훗날 미술사가들이 '실레만의 선'으로 부르는 단호한 선들도 이 때 나타난 특징이다.

또한 극단적인 몸짓들이 작품에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당시 빈의 사교계를 울리던 무용수들(루스 생드니스, 이사도라 덩컨), 판토마임을 하던 동료 오젠 등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작품 성향과 달리 사람들은 실레를 무척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라고 판단했으며, 실레 역시 스스로를 이중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실레가 자화상 못지 않게 집중했던 분야가 누드화였다. 인체의 뒤틀림을 극한으로 몰아간 누드화 들을 통해서 실레는 성(性)에 대한 절박한 관심을 나타냈다.

1911년 발리 노이질을 만나 동거를 하며 그녀를 모델로 다수의 누드화를 그리게 되고, 모친의 고향인 크루마우로 이주를 한다.

하지만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누드화를 그리는 것에 대해 주민들이 반대하고, 비틀린 자화상들이 의뢰인들로 부터 외면받자 실레는 노일렝바흐라는 전원도시로 이주한다.

이 시기 실레는 랭보의 시에 영향을 받는 한편, 죽음이라는 주제를 차츰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1912년 4월, 마침내 실레는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고 유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구속된다. 노일렝바흐 주민들도 실레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작품실에서 발견된 그림들은 그를 곤란하게 했다. 결국 21일간의 구금과 3일간의 징역형으로 끝났지만 실레 인생에서 충격적인 경험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실레의 구속은 뜻밖에도 '오해받는 천재화가', '박해받는 예술적 순교자', '불우한 시대의 고독자' 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노엘바흐 사건 이후인 1912년 11월, 실레는 빈의 부유한 제13지역에 새 거주지와 작업실을 마련했다. <하겐분트(Hagenbund)> 전시회에서 만난 사업가 아우구스트 레데러와 프란츠 하우어 등이 전시회 작품 상당수를 구입해 준 덕에 재정상태가 무척 좋아졌고, 하인리히 베네슈의 지원 등에 힘입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시기 실레는 예술가협회 <제마(Sema)> 회원이 되었고, <위대한 독일 예술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하였으며, 드레스덴의 아르놀트(Arnold), 함부르크예술협회, <뮌헨 시세션>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1914년 쾰른의 <미술공예협회>에 작품을 보냈고, <디 악티온(Die Aktion)>에서 실레 특집을 마련하는 등 클림트의 뒤를 잇는 또다른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대가로서 자리를 굳혀가게 된다.

1914년 6월 합스부르크 왕조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공작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유럽은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실레의 나이 24세였다. 실레는 두 차례 징병검사를 받지만 건강이 좋지 못해 징집대상에서는 제외되어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 해에 철도 공무원 집안의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 동안 동거하며 모델로 헌신했던 발리 노이질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결별이었을 것이다. 발리 노이질은 적십자 간호병으로 지원하여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1917년 군병원에서 병사한다.

1914년과 1915년에 노골적 성 행위가 그려진 작품들을 그리던 실레는 1916년 징집된다. 오스트리아 남부 뮐링에 배치된 실레는 이곳에서 군인들의 인물화만을 그리다가 1917년 귀향하게 된다.

1918년 2월 클림트가 사망한 후 1918년 3월 개최된 <빈 시세션>은 실레가 클림트의 뒤를 잇는 대가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서 팔려나간 작품들 덕에 실레는 명성과 돈 모두를 갖게 된다. 이에 따라 실레의 감정과 정서도 차츰 '안정' 쪽으로 향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대작 <가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성공은 1918년 10월 31일, 스페인 독감이 실레의 생을 앗아감에 따라 끝이 난다. 실레의 아이를 임신한 에디트 실레가 죽은 지 3일 후의 일이었고, 실레의 나이 28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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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아이라 레빈 지음, 이창식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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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4년 9월 어느 이른 저녁, 브라질의 상파울루 중앙에 위치한 일본식당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회합을 갖는다. 그 자리에서 리더인 듯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한다.

"지금으로부터 2년 반 사이에 94명이 어떤 특정한 날에 죽어야 한다"

이 말을 내뱉은 자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천사>로 알려진, 의학박사이자 철학박사인 멩겔레였다.

이러한 음모는 용감한 유대인 청년 배리에 의해 녹음된다. 하지만 배리가 녹음본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호텔에서 전화를 건 직후 나치 잔당들에게 살해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전달되지는 못한다.

배리가 전화한 사람은 리베르만이라는 사람으로, 나치 전범들을 추적해 이들을 법정에 세우는 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리베르만도 처음엔 배리의 제보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진짜로 죽어나가기 시작하자 대륙을 오가며 조사에 착수한다. 그리고 7~8명이 죽어나간 뒤에야 리베르만은 멩겔레가 저지른 가공할 범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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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발표된 소설로 냉전시대 영향으로 나치 잔당과 공산권이 함께 악의 축으로 다뤄진다. 어딘지 프래드릭 포사이어스의 <자칼의 날>,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멩겔레 박사의 범죄는 브라질에서 히틀러의 유전자를 단핵 복제하여 94명의 아이들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 소년들을 히틀러의 유년시절과 유사한 집에 입양을 보낸 후 히틀러의 아버지가 52세에 사망한 것과 같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 살인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리베르만과 함께 멩겔레를 추적하지만 입장 차이로 대립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유대인 랍비 고린이다. 고린은 94명의 아이들을 모두 추적해서 살해하자고 하지만 리베르만은 이에 반대하여 명단을 없애버린다.

리베르만은 30년대와 같은 사회적 조건, 히틀러의 등장, 그리고 추종자의 존재가 맞물려야 비극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TV 매체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더 똑똑해 졌기 때문에 그런 확률이 낮다고 주장한다.

TV가 결국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더욱 효율적인 수단으로 기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편 리베르만은 "복수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라고 주장한다. 복수는 휘발유와 같아 한순간 타오르는 폭발성은 있지만 지속력이 없다. 기억은 세대를 이어가며 재발을 방지하는 열쇠이다. 최근 들어 일본제국주의의 강점기 기억 자체를 잊자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으니, 리베르만의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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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숲
스가 히로에 지음, 이윤정 옮김 / 포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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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미래, 예술품을 소장한 박물관 소행성 아프로디테가 작품의 배경이다.

주인공 다카히로는 이 박물관의 학예원으로 신체에 컴퓨터가 이식되어 있다는 설정으로, 그는 갖가지 예술품과 연관된 소소한 사건들을 맡아 해결해 나가게 된다.

<천상의 음악을 듣다> 에서는 <어린 아이에게 바치는 선율>이라는 그림을 보고 특정한 사람들이 천상의 음악을 듣는 경험을 하는 내용이다. 행성 이름만 '아프로디테'인게 아니라 음악과 무대를 관할하는 부서는 '뮤즈', 회화 공예담당 부서는 '아테나', 공식물 부문 담당은 '데메테르', 컴퓨터 이름은 '므네모시네(기억의 여신)' 라는 식으로 작품 전체의 컨셉을 풀어놓는 도입부이다.

<이 아이는 누구?>는 어딘지 모르게 Uriah Heep의 노래 'Come Away Melinda'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낡은 인형의 이름을 찾아달라는 부탁으로 인형의 과거를 추적하다 보니 과거 지구에서는 행방불명의 미아를 찾기 위해 똑같은 모습의 인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은 피리 명인의 습명공연과 관련한 에피소드인데 각종 기모노와 기모노 문양을 활용해 일본적 느낌을 살린 소설이다.

<꿈을 보여주는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진 인도계 무용가가 '고독한 예술'에서 벗어나 '스스로 빛나는 예술'로 거듭나는 내용이, <포옹>은 올드스쿨 학예원이 진정한 예술품 감상을 위해 자신의 남은 생을 바치는 얘기이다.

작품의 표제작인 <영원의 숲>은 생체시계라는 가상의 시계 시스템을 둘러싼 표절 시비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은 지극히 서로를 연모했던 두 연인이 한 시계에 비슷한 모티프를 다루게 된 사연이 소개된다.

<라리사의 거짓말>은 인어공주를 테마로 한 짧은 소품이고, <반짝반짝 작은별>은 우주에 있는 미지의 존재가 보내는 메시지에 관한 소설이다.

마지막 작품 <러브송>은 작품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소개되는 '97 건반의 흑천사'라는 피아노의 해머에 이달고의 연꽃 홀씨가 붙어서 해머의 스펀지 역할을 대신 하다가 러브송과 함께 홀씨가 되어 공기중에 눈꽃송이처럼 흩뿌려지는 환상적인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컨셉이 과도해서 자칫 오글거릴 수 있는 작품인데 상복은 많아서 일본 SF 작가와 서평가들이 뽑는 '베스트 SF 2000', SF 독자의 인기투표로 선정되는 '세이운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등을 수상했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17904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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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글씨 - 이윤기 소설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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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남녀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다 은행원인 남편과 결혼한다. 남편은 '남성우월주의 자의 성향'을 보이지만, '이성적인 사유 습관에 따라 행동할 때는 남녀동권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남자가 병역과 노역의 주체 노릇을 하던 과거와 달리 현대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어 육체적·물리적 힘이 생존을 좌우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 말할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이 어느 날 '컨베이어 벨트'에 얹혀져 흘러가는 삶이 싫다며, 육 개월 말미를 얻어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난다. 초기엔 서로 애틋해하며 메일을 주고 받았지만 어느 순간 남편으로 부터 연락이 뜸해진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화자는 남편의 부정을 알게된다. 보아서는 안되는 제우스의 본 모습을 보고 타죽은 '세멜레의 운명'이자, 목욕하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의 운명'을 맞게 된 것.

남편은 자신과 한자 표기가 똑같은 아키코(명자)라는 일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변변한 변명도 하지 못하는 남편이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 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려던 순간, 화자는 무심결에 벼루를 집어 남편의 머리를 내리치고 만다.

그리고 화자는 쓴다.

사랑하라. 이것은 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싸워라. 이것은 딸들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특권을 원칙에 앞세워서는 안 된다. 그러면 둘 다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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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 출판사가 단편소설 하나에 비평을 덧붙여 비싼 값에 팔던 책이다.

이윤기는 소설가 보다는 번역가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소개자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나는 소설가 이윤기를 더 선호한다.

그가 번역한 움베르토 에코 소설의 영문판 재번역은 번역가로서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

어찌되었든, <진홍글씨>는 남녀 문제를 다룬 기존 소설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씌여져서 다소 참신한 맛이 있다.

90년대 이전 소설에서는 남자의 물리적 폭력성과 이로 인한 여성의 피폐해진 삶이 주조를 이루었다면, <진홍글씨>의 남편은 화자 보다도 오히려 남녀차별의 부당함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바람 피우기'는 진부하다. 남편이 유학 가기 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던 '컨베이어 벨트' 이론을 보자.

정교하게 짜여진 거대한 망상 조직의 '컨베이어 벨트'... 초중고 차례로 졸업하면 좋든 싫든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그것도 좀 쓸 만한 놈을 좋은 성적으로 쑥 나오면 학계 관계 재계 언론계 법조계 같은 거대 망상 조직과 합류하고... 일단 합류하면 조직의 '컨베이어 시스템'에 올라간다. 그러면 된다. 조직은 생리상 거기에 합류한 동아리를 외방인들로부터 차별화하고 신변을 철저하게 보호해 준다.

남편은 그렇게 흘러가기 싫다며 공부를 하러 떠났지만 결국 가부장제 사회에 순응하여 지극히 통속적인 방식으로 바람을 피운다. 벨트에서 벗어나기를 스스로 거부한 것.

한편, 이 소설 역시 남녀의 문제를 성의 문제로 국한해서 설명하다 보니 복잡한 권력관계와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갈등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남성의 머리를 벼루로 내리치는' 형태로 소설은 끝이 난다.

이러한 경향성은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조잡한 소설에서 찬란한 결실을 맺는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177110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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