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재원 아트북 8
박덕흠 지음, 박서보.오광수 감수 / 재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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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철도의 고급 관료였던 아돌프 실레와 어머니 마리 실레 사이에서 두 명의 누이인 멜라니와 엘피라 실레를 두고, 빈에서 40킬로 떨어진 도나우 강변의 작은 도시 툴른(Tulln)에서 "성적(性的) 열정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로 혹은 "매우 비극적이며 신경증적인 화가"로 일생을 살았다고 혹평을 받기도 한 에곤 실레가 태어났다.

에곤 실레의 그림을 처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게 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어머니 집에 갔다가 작은형 내외와 우연히 담양 메타프로방스 인근 카페에 갔는데, 주인이 에곤 실레를 애호하는 모양이었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의 복사본을 실내 곳곳에 걸어 두었는데 묘하게 눈이 갔다.

한동안 그림만 찾아 보다가 그의 생애가 궁금해서 책을 샀는데, 실레의 다양한 그림들이 연대기 순으로 삽입되어 있어 꽤 만 족스럽다.

에곤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이 모두 철도 고급 관리였다. 실레는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재능도 이써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곳의 보수적인 교수 방법에 실레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한편, 당시 화단의 대표 화가는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실레는 클림트를 동경해서 끊임없이 <빈 분리파>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런 노력 끝에 실레가 17세 되던 해 45세의 클림트를 만나는 데 성공하고, 클림트는 실레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클림트는 실레에게 요세프 호프만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데, 호프만은 그후 실레의 재정을 돕게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철도 감독관이던 하인리히 베네슈(Heinrich Benesch)와 인연을 맺는데, 그 역시 미술 애호가로 실레의 작품을 다수 수집하게 된다.

1909년 4월 실레는 끝내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결성한 것이 <신(新) 예술 그룹> 이었다. 당시 주로 모델로 삼았던 인물은 후에 화가 안톤 페쉬카(Anton Peschka)와 결혼하는 여동생 게르티였는데, 확실하게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근친 혐의가 있었다.

이 시기 실레는 국제 무대인 <군스트 샤우>에 작품을 출품하는데, "병든 뇌의 기형"을 보여준다"는 혹독한 비평이 주를 이루었지만 아더 뢰쓸러 같은 일부 비평가는 그의 천재성에 주목했다.

이후 실레는 <빈 분리파>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비틀림의 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노출시키기 시작했고, 어린 소녀들의 신체에 대한 열망을 그림에 담기 시작한다. 찡그리거나 비명을 지르는 얼굴, 웅크린 몸, 긴장되어 폭발 직전인 신체, 남근상을 보여주며 자위하는 자신의 치부 등이 작품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성기나 배꼽, 유두와 눈동자가 선홍색으로 강조되고 배와 겨드랑이 근육은 노란색으로 표현된다. 훗날 미술사가들이 '실레만의 선'으로 부르는 단호한 선들도 이 때 나타난 특징이다.

또한 극단적인 몸짓들이 작품에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당시 빈의 사교계를 울리던 무용수들(루스 생드니스, 이사도라 덩컨), 판토마임을 하던 동료 오젠 등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작품 성향과 달리 사람들은 실레를 무척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라고 판단했으며, 실레 역시 스스로를 이중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실레가 자화상 못지 않게 집중했던 분야가 누드화였다. 인체의 뒤틀림을 극한으로 몰아간 누드화 들을 통해서 실레는 성(性)에 대한 절박한 관심을 나타냈다.

1911년 발리 노이질을 만나 동거를 하며 그녀를 모델로 다수의 누드화를 그리게 되고, 모친의 고향인 크루마우로 이주를 한다.

하지만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누드화를 그리는 것에 대해 주민들이 반대하고, 비틀린 자화상들이 의뢰인들로 부터 외면받자 실레는 노일렝바흐라는 전원도시로 이주한다.

이 시기 실레는 랭보의 시에 영향을 받는 한편, 죽음이라는 주제를 차츰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1912년 4월, 마침내 실레는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고 유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구속된다. 노일렝바흐 주민들도 실레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작품실에서 발견된 그림들은 그를 곤란하게 했다. 결국 21일간의 구금과 3일간의 징역형으로 끝났지만 실레 인생에서 충격적인 경험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실레의 구속은 뜻밖에도 '오해받는 천재화가', '박해받는 예술적 순교자', '불우한 시대의 고독자' 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노엘바흐 사건 이후인 1912년 11월, 실레는 빈의 부유한 제13지역에 새 거주지와 작업실을 마련했다. <하겐분트(Hagenbund)> 전시회에서 만난 사업가 아우구스트 레데러와 프란츠 하우어 등이 전시회 작품 상당수를 구입해 준 덕에 재정상태가 무척 좋아졌고, 하인리히 베네슈의 지원 등에 힘입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시기 실레는 예술가협회 <제마(Sema)> 회원이 되었고, <위대한 독일 예술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하였으며, 드레스덴의 아르놀트(Arnold), 함부르크예술협회, <뮌헨 시세션>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1914년 쾰른의 <미술공예협회>에 작품을 보냈고, <디 악티온(Die Aktion)>에서 실레 특집을 마련하는 등 클림트의 뒤를 잇는 또다른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대가로서 자리를 굳혀가게 된다.

1914년 6월 합스부르크 왕조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공작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유럽은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실레의 나이 24세였다. 실레는 두 차례 징병검사를 받지만 건강이 좋지 못해 징집대상에서는 제외되어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 해에 철도 공무원 집안의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 동안 동거하며 모델로 헌신했던 발리 노이질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결별이었을 것이다. 발리 노이질은 적십자 간호병으로 지원하여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1917년 군병원에서 병사한다.

1914년과 1915년에 노골적 성 행위가 그려진 작품들을 그리던 실레는 1916년 징집된다. 오스트리아 남부 뮐링에 배치된 실레는 이곳에서 군인들의 인물화만을 그리다가 1917년 귀향하게 된다.

1918년 2월 클림트가 사망한 후 1918년 3월 개최된 <빈 시세션>은 실레가 클림트의 뒤를 잇는 대가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서 팔려나간 작품들 덕에 실레는 명성과 돈 모두를 갖게 된다. 이에 따라 실레의 감정과 정서도 차츰 '안정' 쪽으로 향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대작 <가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성공은 1918년 10월 31일, 스페인 독감이 실레의 생을 앗아감에 따라 끝이 난다. 실레의 아이를 임신한 에디트 실레가 죽은 지 3일 후의 일이었고, 실레의 나이 28세 였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1848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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