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자기전, 전등을 최소한으로 켜두고 책에 북라이트를 끼운 채로 누워서 읽는 거요. 책 고르는 게 중요해요. 읽던 책이 있을 땐 어쩔 수 없이 이어서 읽지만, 끊어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해요. 잠이 올랑말랑할 때 책을 옆에 딱 놓는 그 타이밍도 중요해요. 자칫하면 북라이트 건전지를 켜두고 잠들어버릴 수가 있거든요. 아까운 배터리!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종이책이 좋아요. 최근에 전자책 리더기를 사용한 적이 있긴 한데, 읽고 싶은 책이 종이책으론 다 절판이 되어 구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용했어요. 물론 전자책이 대중교통에서나 밖에서나 편리하지만, 그래도 페이지를 넘기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정말로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종이책이 훨씬 좋아요. (수집욕을 채워주기도 하고요, 책장을 채우는 그 기쁨이란..)
그리고, 올해는 메모하면서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중요하다 생각하는 서평(?)을 쓰기 위해서 꽤 많은 메모를 하기도 하는데, 책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순간 반짝 떠오르는 단상들을 놓치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을 요즘 부쩍 많이 해요.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리뷰를 쓰고 아직 책꽂이에 넣지 못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곧 읽을 예정인 진연주 작가의 『코케인』,
리뷰를 쓰려고 준비중인 『잊지 않겠습니다』.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어느 정도가 간소하게인지 잘 모르겠군요. ㅠㅠ 그래도 제딴에는 간소하게 줄이겠다고 항상 생각은 해요. 산 책은 팔거나 나눔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빈공간이 고프고 고픕니다. 책은 일단 시리즈로 묶을 수 있는 '세계문학'이나 '세트 도서'들은 모아두고, 분류별로 꽂아두었어요. 한국소설, 외국소설, 에세이, 추리소설 등. 물론 꽂는 방법은 가로 세로 실속있게 쌓은지 오래되었어요.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단언컨대 『제인 에어』.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책을 많이 읽진 않았지만요.) 어릴 때 뭘 안다고 이 성숙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역경을 이겨내고 오로지 사랑만으로 '로체스터'의 손을 잡은 '제인'이 그렇게 멋져보일 수가 없었어요. 물론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은 학교에서 '제인'이 엄청난 수모를 당하던 모습과, 텍스트로도 넘어오는 학교 수프의 맛.

최근에 이 책을 다시 읽었는데 내용면에서도, 문학적으로도 여러모로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놀랄 만한 책은 없는데. 사봤자 소설, 에세이, 요즘은 더 소설이라서요...
책 한 권을 고를 수는 없지만, 놀랄 게 있다면 거의 모든 책들이 비닐로 싸여 있다는 것?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만나고 싶은 작가는 정말 많지만, 최근엔 한강 작가님에 꽂혔어요. 사진으로 봤을 때도 뭔가 파리하고 창백한 느낌인데, 그가 슬픔과 관련하여 '쓸 때' 어떻게 그 슬픔을 받아들이면서 쓰는지 엿보고 싶어요. 그러고보니 한강 작가님도 문창과 교수직을 하셨네요. 예전 이승우 작가님때도 그렇고, 수업받는 학생들 부럽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해요.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볼라뇨 책은 올해 안에 꼭 읽겠다고 블로그에 써놓기까지 했는데 이뤄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책 중단하는 건 예전부터 너무 싫어했는데 요즘엔 끝까지 부여잡고 있으면 이것도 스트레스다, 하며 자유롭게 읽고 있어요. 그래서 최근 중단했던 책은 『1913년 세기의 여름』이에요. 정말로 흥미로운 책임엔 분명한데, 아직 받아들일 때가 안되었나 싶어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평이 많더라고요. 아무리 작가가 필력 좋게, 재밌게 써냈다 하더라도 시간별 배열이라 지루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요. 이 책이 책장 속에 옆으로 꽂혀 늘 째려보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 싶어요.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8번에 답한 책을 들고가서 무인도에서라도 읽고 오겠습니다. 과연 가능할까요.
읽으면서 맨날 잠들고 잠들어, 야생동물의 습격을 받는 건 아닐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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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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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많은 책들이 한데 얽혀 있던 한 에세이에서, 나는 이 작품을 처음 만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접했던 것 같다. 글자가 만들어낸 문장들은 아름다웠고, 꽃으로 온전히 변해가는 '그녀'의 이미지는 관능적이고도 엄숙하리만큼 진지했다. 한순간에 강렬하게 기억 속에 각인되어버린 이미지는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만들었지만, 그 상상은 짧은 순간에 멈췄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꽃으로 변하고 싶었던, 꽃으로 '변해버려야만 했던' 그녀의 모습이 두렵기도 했으므로.


연작으로 이어지는 세 편의 소설은, 단행본의 가장 처음에 배치된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꿈을 꾼다. 시뻘건 고깃덩어리들, 살인, 뚝뚝 떨어지는 피, 끔찍하고 환멸스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입속에 느껴지던 미지근하고 물컹거리는 날고기의 감촉. 하룻밤의 악몽으로 날려버리기에는 어딘가 낯설고도 너무나 익숙한 그 광경들이어서, 그녀는 꿈을 꾼 이후로 고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했다는 식으로, 의지가 아닌 의무인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견디지 못 했던 가족들이 그녀의 입에 고기를 쑤셔 넣었을 때쯤, 덮어만 놓았던 곪은 상처는 살갗을 찢고 그 끔찍한 모습을 드러낸다. 어린 날의 그녀를 물었던 그 나쁜 놈의 개가 참혹한 모습으로 끝끝내 고기가 되어 자신의 입으로 들어왔을 때, 너무나 당연하게 그릇을 쓱쓱 긁어먹었던 흉포한 자신의 모습을.

 

마치 정상적인 여자 같았다. 아니, 실제로 정상적인 여자야.
그는 생각했다. 미친 건 내 쪽이지.

 

트라우마와 맞닥트린 '영혜'의 반응은 분명 소설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어지는 <몽고반점>, <나무 불꽃>에서 우리는 고기를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보다 더욱 보기 힘든 어떤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예술에 대한 갈망과 육체적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몽고반점> 속 '영혜'의 형부, 폭력의 굴레에 서 있었지만 생존을 위해 회피하고 외면했던 <나무 불꽃> 속 '영혜' 언니의 이야기까지……. 이 모든 것이 '영혜'의 '미친듯한' 행동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비틀려있는 지점을 깨닫는 순간 알게 된다. 그녀는 단지 상처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발버둥치던 '그들' 중 한 명이었음을.


'정상적'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미친 것은 무엇일까. '영혜'의 행동이 어떤 신념이나 의지였든, 악몽으로 인한 의무 혹은 운명적이었든, 그것을 미친 것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어떤 사람이, 특정한 범주에 끼워지는 것 그 자체가 억압이고 폭력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현실의 이미지와 부합하기에 이 소설은 슬프고 아름다우며, 청초하게 꽃으로 변해 끝끝내 땅 속에 뿌리를 내려버리는 '영혜'의 모습이 애처로울 수밖에 없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140쪽)" <몽고반점> 속의 문장처럼, '한강' 작가는 아릿하고 쓰디쓴 상처를 독자로 하여금 함께 앓게 하고야 만다.

 

 

60쪽, <채식주의자>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104쪽, <몽고반점>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188쪽, <나무 불꽃>
그녀는 영혜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수박조각을 문지른다. 두 손가락으로 동생의 입을 벌려보려 하지만 굳게 다물려 있다.
…… 영혜야.
그녀는 낮은 소리로 부른다.
대답해. 영혜야.
동생의 굳은 어깨를 흔들고, 억지로 입을 벌리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고막이 찢어지게 영혜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싶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죽고 싶니. 정말 죽고 싶어? 자신의 안에서 뜨거운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녀는 망연히 들여다본다.

207쪽, <나무 불꽃>
저 껍데기 같은 육체 너머, 영혜의 영혼은 어떤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그녀는 꼿꼿하게 물구나무서 있던 영혜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혜는 그곳이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숲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을까. 영혜의 몸에서 검질긴 줄기가 돋고, 흰 뿌리가 손에서 뻗어나와 검은 흙을 움켜쥐었을까. 다리는 허공으로, 손은 땅속의 핵으로 뻗어나갔을까. 팽팽히 늘어난 허리가 온힘으로 그 양쪽의 힘을 버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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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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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제목을 보고 '공부'라는 단어의 의미를 스스로도 제한해놓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는, 이를테면 학력을 쌓아올리는 행위 같은 것들이요. 그다음은 저자의 이름을 보고 '공부'라는 단어에 새겨져 있는 폭넓은 정의를 떠올렸죠. 비록 우리에겐 '공부'의 의미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퍽 제한적인 의미의 것이 되어버렸지만,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깨닫고 미래의 삶을 개척"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공부'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정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지긋지긋한 그 이미지를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한 책의 느낌은, 그동안 정여울 작가의 다른 책에서 본 느낌과 비슷했어요. 책과 인문학이 적절하게 조합된, 독서 에세이 같은 느낌이랄까요. 사실은 최근 독서 에세이를 멀리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느낌만 계속 읽으면 뭐 해? 내가 읽지! 하는 마음으로요) 처음에는 살짝 투덜투덜 대기는 했지만, 참 어이없게도 빠른 시간 안에 작가의 글에 설득당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공부'를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인 것들을 적절하고 시원시원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솜씨, 고작 한 페이지와 한 문장에 거론된 책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그 책에 매료되어 한 번이라도 검색해보고 읽어볼 수 있게 만드는 설득력. 그런 점에서 정여울 작가의 연륜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작가의 수많은 문장들 속에서, 제가 가장 잊지 못할 부분이자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 '동경(Sehnsucht)'은 작가에 의해 이렇게 표현되었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고(故) 박완서 선생님을 향한 오랜 동경을 해소하였고,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 가슴 쿵쾅거리며 좋아했던 책의 작가들을 (지금도) 사랑하지만 동경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그 뜨거웠던 가슴이 식었다 끓었다 하는 루틴이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것에 서운해하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온도가 조금 낮아졌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죠.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 진짜 배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여울 작가는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과 작은 경험들을 통해, 이 힘든 세상에서 '공부할 권리'를 되찾으라고 전언하고 있어요. 서울대학교,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등의 내용들로 채워지는 그의 프로필이지만, 작가 자신이 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절망감을 이겨내게 만든 것은 '문제 풀이의 기술'이 아닌 '진짜 공부'였음을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죠.


'진짜 공부'란 무엇일까요. 어감은 좀 이상하지만, 내가 정말로 즐겁게 몰입할 수 있고 신명 나게 빠져들 수 있는 위로의 것이 '진짜 공부'가 아닐까요. 물론 '문제풀이의 기술'도 이 개떡같은 세상에 필요하지만, 작가는 인생을 공부할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삶의 숭고한 가치를 배울 수 있는 시간, 나약함과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용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성숙한 마음가짐을 말이죠.

 

45쪽,
『일리아드』를 읽으며 의아하면서도 더욱 감동적이던 대목은 작가 호메로스의 태도입니다. 호메로스의 조국은 그리스였지만 그는 자기 나라 편에 서서 전쟁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가 아킬레우스의 최후나 파리스의 최후가 아닌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이 거대한 이야기를 끝맺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어느 편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은 후 남기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헥토르를 잃고 목놓아 우는 트로이 사람들의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눈물을 닮았습니다.

69쪽,
정의가 실현되기 이전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은 바로 `불의(不義)`의 사건입니다.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기에 앞서 일어나는 사건은 참을 수 없는 불의인 경우가 많지요.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우스가 고의로 불을 숨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우스가 불을 숨겼다"는 단순한 문장 속에는 엄청난 폭력과 압제, 불의와 억압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지요.

187쪽,
끝나지 않은 이 공포와 절망을 끊어낼 수 있는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우리의 관심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말했지요. 역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짜증 나는 아우성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의 오싹한 침묵 때문에 일어난다고. 우리는 끊임없이 분노하고 고발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한국 정부가 두 손 두 발 다 들 때까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 정의와 자유의 깃발이 바로 서는 날까지.

343쪽,
프로필은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를 최대한 가리기 위한 `분장술`인 것 같습니다. 제 프로필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낀 절망감,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좌절감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지만, 겉으로는 `문학평론가`라는 정체성을 고수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했지요. 늘 일은 했지만 어디에도 소속된 적이 없으니, 저는 항상 허공에 매달린 덧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쓸쓸함의 밑바닥에는 `공부로는 취직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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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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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여 쪽이라는 방대한 분량보다, 이 책에 붙은 여러 수식어가 오히려 약간의 두려움을 갖게 했다. 빨간책방 강력 추천, 전미도서상 수상작, 그리고 미국의 대표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이름까지.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컸기에, 이 책을 읽고야 말았다.

 

어떻게 이 책을 말해야 할까. 두꺼운 책의 위풍당당함이야 감수하고 읽어나가긴 했으나, 책은 '이야기적으로' 내게 흥미를 주진 못했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는 혹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초반이 가장 힘들다는 혹자의 말도 나와는 반대였다. 오히려 초반보다 후반부, 더 흥미로운 서술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쉴 새 없이 박아놓은 머릿속의 글들로 지쳐있을 때였다) 마지막 페이지를 어떻게 덮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끝내고 나서, 이 책이 '역사소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폭력으로 얼룩진 격동의 세계에 있었던 그들, '로레타', '모린', '줄스' 그들의 삶은 책 속에 쓰인 대로 "갑자기 풍선이 위로 부풀어 오르는 (341쪽)"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파격이기만 해서, 책 속의 그들을 따라가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 의아한 감정을 계속 품었다.

 

그러나 '이야기적'으로 불만만 늘어놓아선 안 될 것이, 소설은 문학적으로는 황홀한 경험을 선사한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던 사건들과 시점 변화, 순간순간 멈칫하게 하는 수많은 구절은 '조이스 캐롤 오츠'라는 이름의 명성이 어떻게 얻어졌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중반부쯤 나오는 '모린'의 편지다. 작가인 '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 책에 관한 영감을 얻었던 실제 경험 (편지의 수신), 그리고 큰 상처를 받았던 '모린'이 깨어나는 이 부분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아주 짜릿한 부분이다. 그들(them)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지 않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냉소적인 말들을 던지는 '모린'의 모습은 묘하게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텍스트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현실'과 '환상'이 줄타기하고 있는 듯 상상이 되는 부분이랄까.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야?

 

사랑을 갈구하고, 충동적인 선택을 반복하고, 집착하고, 끝끝내 살아가고, 때로는 사악하기까지 했던 '그들'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기로 한 '모린'은 행복했을까? 끊어질듯 아슬아슬한 줄이라도 부여잡고 각박한 인생을 살아가야 했던 그들의 모습을, 언젠가 다시 천천히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129쪽,
나중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언뜻언뜻 기억했다. 마치 화면이 뚝뚝 끊기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웃기는 영화에 나오는, 웃기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고통도 고뇌도 느끼지 못했다. 저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을까? 줄스 웬들은 과연 아이였던 적이 있을까? 정말로 아이였을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의미의 아이였던 적이 있을까? 그런데 아이였던 적이란 과연 무슨 의미지? 예전 아이였을 때의 줄스가 그의 골격 안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뜻일까?

197쪽,
이제 그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시내의 성당들이 지나가는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우울한 유혹.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을 신비로운 물살로, 비밀, 보상,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특별한 지식에 대한 약속으로 꾀어들인다는 전설 속의 거대한 동굴 같았다. 줄스는 개이치 않았다. 아버지도 그런 일에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 안에는 분노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두개골 위에 하얀 피부가 팽팽하게 덮여 있는, 매끈한 공백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였다.

341쪽,
그는 자신이 육체라는 늪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몸부림치는 순수한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육체라는 지구, 중력의 힘, 죽음과 씨름하는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그는 자신을 이렇게 보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폐한 순간들, 예를 들어 사우스웨스트 일대에서 설치고 다닐 때나 병원 침대에 누워 다시 살아나려고 애쓰고 있을 때에만 자신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은 미친놈이 상상한 이야기 같구나!`

449쪽,
모린의 몸의 조각들, 축축하고 따뜻한 그 조각들이 짝을 맞춰서 덩치 큰 그녀의 몸이 된다. 변장이다. 그녀는 불편한 잠을 잔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릴까 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텔레비전의 단조로운 소리 너머로 새로운 소리들이 들린다. 바깥의 소리들, 계단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밖에 있는 사람들……. 아주 많은 사람들……. 따뜻한 날씨로 창문들이 열리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귀를 기울인다. 호기심과 수줍음과 약간의 분노, 두려움으로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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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며 NFF (New Face of Fiction)
카릴 필립스 지음, 안지현 옮김 / 시공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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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F (New Face of Fiction) 라는 시공사의 문학 시리즈의 이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소설에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소설이었다. 한 권의 책, 한 편의 장편소설에, 인물과 형식이 다른 네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으면서도 조화롭지 못하거나 생뚱맞지 않았다. 문체 또한,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러 개의 악장이 모여 하나의 교향곡이 이루어지듯, 이야기는 작가가 말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통해 강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장편소설로 탄생되어 있었다.

 

절박한 어리석음이었다. 흉년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팔아넘겼다. (11쪽)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네 편의 이야기는 미국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흑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서문'과 공통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강 건너, 미국 남부 혹은 또 다른 어떤 곳으로 도피하고 떠나야만 했던 그들의 흔적을 추적한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그저 '보이는 대로' 추적하고 잔잔한 문체로 전해주며, 그 속에 품은 '경고'나 '물음'을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먼저,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1부는 자신이 교육하고 지원하여 아프리카로 선교를 보낸 노예 '내시'를 찾아 나서는 주인 '에드워드'의 이야기다. 미국에서 얻은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창조된 땅에 뿌리내리려 했던 모순된 자신감을, 그로 인해 아프리카인이자 선교사였던 '내시'가 받은 상처와 병폐를 지적한다. 2부와 3부에 숨은 이야기는 가장 끔찍하다. 흑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2부는 강 건너 지옥으로 떠나지 않기 위해 개척자로 향하다가 죽어갔던 마사의 이야기를 아주 생생한 증언으로 다룬다. 그리고 3부는 노예를 수송하고 '무역'했던 선박의 항해일지로, 아주 건조하게 당시의 (잔혹한) 일상을 전한다. 가장 분량이 많았던 4부는 언뜻 '흑인 디아스포라'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소외된 한 여성과 그가 사랑했던 흑인 병사와의 이야기를 통해 '흑인 디아스포라'에서 더욱 대상을 확대한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메시지로 목소리를 높인다.

 

버림받고, 뿔뿔이 흩어지고, 상처받고, 차별받고, 소외되었던 모든 사람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소설 『강을 건너며』. 작가가 남겨놓은 어떤 '여지'와 관련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내시. 나의 마사. 나의 트레비스. 그들의 부서진 삶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또 다른 '내시', '마사', '트레비스'의 삶의 기록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105쪽,
매디슨은 이 모든 질문을 빨아들인 후 뒤로 돌아 자신의 전 주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드워드의 얼굴 반쯤은 짙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고, 다른 한쪽은 춤추는 불길에 따라 그 색깔과 형태가 바뀌었다. 매디슨이 질문 세례를 받고 답을 하려고 하는 찰나에 에드워드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손을 위로 올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매디슨의 손을 맞잡았다. 고향과 자신과 같은 사람들로부터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매디슨에게 부드럽게 속삭였고, 백인과 흑인을 포함하여 자신의 종족이 있는 곳에 있길 원한다고 말했다. 매디슨은 에드워드를 쳐다보며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점점 더 꽉 쥐어오는 손을 신호로 보고 매디슨은 '아니요'라고 답했다. 작은 오두막에 그 말이 퍼져 나갔고, 그 묵직함과 의도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압도했다.

 

118쪽,
이제 다시 그는 우리 쪽으로 몸짓을 한다. 내 목은 타 들어간다. 일라이자 메이는 몸을 뒤척이고 나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아이가 운다. 조용히 하라고 아이를 꼬집는다. 미안하지만, 아이를 위해 그렇게 한다. 경매인은 상인들을 향해 오라고 손짓한다. 그들은 처음엔 남자들을 구경한다. 상인 한 명이 막대기로 루카스의 알통을 찌른다. 상인이 남자를 사면, 강 아래로 데려간다. 죽음을 향해. 그 정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집안일을 할 노예가 필요한 가족이나 번식할 처녀가 필요한 농부들은 건너편에 있는 우리를 보고 차례를 기다린다. 나는 번식하기엔 너무 늙었다.

 

183쪽,
사랑하는 당신, 나 역시 심한 역겨움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하오. 하지만 증오심이야말로 나의 자연스러운 열정을 설명하기엔 그 표현이 지나치게 과격한 듯하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무역을 계속 마음껏 하면서 깊은 신앙심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듯, 실로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사랑과 증오심이 서로 싸우며 공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오.

 

215쪽,
그는 서른 하고도 일곱의 나이였다. 그들이 내가 있는 걸 잊고 끄덕거릴 때가 난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랜을 보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는지 난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랜과 나는 한 몸이어야만 하니까, 세상에 대항해 한 팀이 되어야 하니까. 남자와 부인. 그이와 나. 내가 그들 편을 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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