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복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가 지난 2009년에 낸 <파리를 생각한다>(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읽고 한 블로거는 "나는 서울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책을 읽어갈수록 마음이 무겁다"는 촌평을 내놨다. 이제 그는 한번 더 마음이 무거워질지 모르겠다. 정수복 교수가 '파리 연작' 2권으로 <파리의 장소들>(문학과지성사 펴냄)이라는 책을 들고 돌아왔다.

<파리를 생각한다>가 정수복 교수가 파리를 걸으며 느끼고 생각한 점을 망라한 일종의 '총론'이라면 2권 <파리의 장소들>은 정 교수가 걸은 16개 장소 각각에 대한 세밀한 기록, 즉 '각론'이다. 그래서 파리를 추상화로 바라봤던 1권보다는 세밀화인 2권에서 그의 '파리 사랑'이 더 많이 묻어난다. 그는 이들 장소를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파리와 파리 사람에 얽힌 사연을 유려하게 풀어낸다.

형식상으로는 여행기와 비슷한 듯하지만 정수복 교수는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파리를 서술하기 때문에 독자에게도 마냥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앞의 블로거가 말한 것처럼 책을 읽다 보면, 한국의 도시, 가장 대표적으로는 서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정 교수가 높게 평가하는 파리의 특성, 매력은 한국에선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정수복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2002년부터 파리에서 산 지 8년 째가 된다. 그간 '파리 읽기' 책도 두 권이나 냈다. 정 교수를 이렇게 사로잡은 파리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얼마 전에 파리에 왔던 신경숙 작가가 '파리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쓴 것은 파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더라. 맞다. 이 책은 파리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파리에 살면서 대부분 두발로 걸어다녔다. 파리는 서울의 6분의 1밖에 안되는 곳이라 걸어다니기에 아주 좋다. 파리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다. 걷기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 직접 들어가는 일이고 어디든 가까이 걸어다니다 보면 그 공간과의 친근감이 생기고 애정이 묻어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파리에는 파리만의 특별한 것이 있다.

파리의 역사는 세느 강의 시테 섬에서 시작해 동심원을 넓혀간 확장의 과정이이었다. 지금의 파리에는 그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있다. 노트르담 성당으로 대표되는 중세 유적과 17세기 절대왕정기, 계몽주의 18세기, 격정적인 19세기, 급격한 변동을 거친 20세기 등 누적된 역사 층들이 켜켜히 겹쳐 있다. 파리에서는 한 장소에서 2000년의 역사와 함께 생활할 수 있다. 파리의 '아우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 층이 겹쳐가며 생겨난다. 그리고 파리 내에서도 각 구역마다 특징이 다른 '다양성'도 파리의 매력이다."

파리와 달리 서울에선 이러한 '기억의 공간'을 찾기가 무척 어렵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서울을 보고 나서 "600년 된 도시라는데 마치 30년 된 신도시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울에는 고궁과 종묘, 4대문이나 북촌과 같은 마을을 제외하고는 일상 생활의 공간에서 좀처럼 지난 역사의 흔적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서울에서는 과거를 떠올리지 않고 살았다는 정수복 교수는 오히려 파리에서 좁은 골목길이나 언덕길을 걷다 자신의 유년기, 1950년대 말과 1960년 대 초의 기억에 젖는다고 고백한다.

"살지 않은 공간이 내가 살았던 공간을 생각나게 하는 까닭은 바로 그 시간의 흔적에 있었다. 나의 유년의 기억이 식민지 근대도시의 잔해 위에 이뤄진 것이라면 파리는 그런 도시 공간에 나타나는 근대성의 원형일 것이다" (<파리를 생각한다>)

"그런 식민지 근대성의 분위기에서 형성된 기본 정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잘라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나의 정서만이 아니라 오늘 한국의 근대성 안에 이미 식민지 근대성이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파리를 생각한다>)

이러한 정 교수의 질문은 서울, 더 나아가 한국의 모든 도시들이 갖고 있는 질문이다. 식민지 근대성의 기억은 '보존해야할 기억'인가 청산해야할 기억인가? 그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식민지 시대의 것이라고 청산하다 보면 시민들은 '기억의 장소'에 얽힌 정서적 뿌리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기억과 의미가 남아 있지 않은 공간들로만 남아 있는 것이 오늘의 서울이다. 마르크 오제의 개념을 빌자면 서울은 '비장소'로 가득찬 도시인 셈이다.

- 마르크 오제는 고유한 느낌이 있는 도시의 공간들을 '장소'로, 획일적으로 디자인된 유용하지만 무의미한 공간을 '비장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울은 대표적인 '비장소'의 도시가 될 텐데, 과연 시간이 쌓이면 '장소'로 거듭날 수 있을까?

"글쎄… 서울에서 24시 편의점이 50년 넘게 있을 까닭도 없고 카페만해도 2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도록 자꾸 이름이 바뀌지 않나. 장소가 되려면 공간이 오랜 시간 유지되어야 하는데 빠르게 바뀐다는 게 서울의 특징이다. 그래서 비장소가 장소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파리에는 예외가 있다. 책에도 소개했지만 19세기 파리에는 공중 위생 차원에서 도로변에 남성용 변소 '데스파지엥'을 만들었다. 이것은 19세기 도시 곳곳에 다 있었는데 다 철거하고 상테 감옥 옆에 딱 한 개만 남겨놨다. 그로써 고유한 의미를 갖게 됐다. 19세기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맥도날드가 다 없어지고 딱 하나만 남아있다면 '비장소'가 '장소'로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 않은가." (웃음)


▲ <파리의 장소들>(정수복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서울은 살기에 편리하고 실용적이지만 특색없고 역사가 없는 도시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에 랜드마크를 만들어야 한다'며 많은 예산을 들여 반포대교 분수를 설치하는 등 여러가지 사업을 추구하는 것도 '밋밋한 서울에 특색을 부여하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 교수의 두 번째 책 <파리의 장소들>에는 서울의 랜드마크를 추구하는 오세훈 시장이 읽어봤으면 하는 대목이 있다. 파리의 랜드마크 '에펠탑'에 관한 이야기다.

"에펠탑이 파리의 상징이 된 두번째 이유는 무용성에 있다. 궁전이나 사원, 현재의 고층건물들은 어떤 기능이 있다. 그러나 에펠탑은 아무런 기능이 없는 순수한 상징이다. 에펠탑은 그 안에 볼 것이 없다. 그러나 방문의 장소로서의 에펠탑은 파리 전체를 보여준다. 순수한 상징으로 지어진 에펠탑이 파리 전체를 조망하는 장소가 됨으로써 에펠탑은 자연스럽게 파리의 상징이 되어 있다. 파리라는 도시가 가진 명성에 비례해 에펠탑의 상징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 에펠탑이 파리의 상징이 되는 과정에는 파리가 이미 오래된 기념비들로 꽉찬 기억의 도시라는 점이 작용했다." (<파리의 장소들>)

- 에펠탑과 같은 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도시 계획뿐아니라 창조적 영감과 우연성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에펠탑은 원래 1889년 박람회 이후 철거될 것이었는데 도시의 전체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면서 파리의 상징이 됐다. 파리 도심의 나즈막한 6,7층 건물 사이에 높이 치솟아 있고 오래된 건물 사이에 새롭게 튀어나와 있다. 도시의 의미와 예술적 영감이 조응한 것이다. 그러면서 화가나 사진작가가 에펠탑의 이미지를 재해석한 작품을 여럿 내놨고 점점 세계로 퍼져나갔다. 결국 랜드마크는 만들고자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고 의미가 커지면서 랜드마크가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 오세훈 서울시장은 '디자인 서울' 정책을 내세우면서 반포대교 반포분수 등이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디자인 서울' 정책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포분수'를 보셨는지.

"일단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과연 저 분수가 오래갈 수 있을지, 시간이 좀 지나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이라는 말이 패션에서 나온 것처럼 디자인이란 결국 유행을 따르게 된다. 그런데 분수는 5년마다 바꿀 것도 아닌데 10년 뒤까지 지속 가능성이 있을지. 물론 랜드마크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오세훈 시장의 사업들이 과연 서울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할 수 있느냐에는 의문이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정 교수는 <파리의 장소들>에서도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 서울'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어메너티(삶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장소의 양태나 특성)나 삶의 질보다는 시각적 효과를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며 "우리 삶의 공간은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통해 온몸으로 쾌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월이 흐를 수록 의미와 기억이 누적되고 퇴적되는 '장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미 오랜시간 '퇴적'된 파리는 서울이 따라가기에 어려운 이상향 아닐까.

"서울이 연구해야할 도시로는 베를린을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베를린은 독일이 통일된 다음에 굉장히 바뀌고 있다. 길도 다시 만들고 좋은 건물도 세우고 도시 계획을 세운다. 베를린은 위치상 유럽의 중앙에 있기 때문에 베를린 사람들은 '지금이야 도시가 새것이지만 세월의 이끼가 끼고 의미가 붙여지게 되면 훗날 파리보다 좋은 도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도시는 살아있는 유기체니까 시장 임기 5년이 아니라 50년 후, 100년 후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아시아의 서울'이라는 별칭을 받고 싶다면 최소한 베이징이나 도쿄와 비교해서 서울이 어떤 특이성, 고유성을 가질 것이냐, 서울에서의 삶의 질은 어떻게 더 나은가 등을 고민해야 한다."


▲ <파리를 생각한다>(정수복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정 교수의 첫 책 <파리를 생각한다>에는 오세훈 시장이 참고 할만한 중요한 지적이 나온다. 파리에서 도시 계획을 어떻게 수립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파리 특유의 다양성은 바로 '참여'와 민주주의 속에서 나온다는 발견이기도 하다.

"2001년 자크 시라크의 후계자인 장 티베리를 제치고 파리 시장에 당선된 베르트랑 들라노에는 2008년 선거에서 재임되었다.(…) 들라노에 시장은 2004년 '정열로 사는 삶'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도 했는데, 시민들의 참여를 통한 도시 행정을 자신의 주된 첧학으로 삼고 있다. '시민과 함께하는 도시계획, 당신의 의견을 주십시오' 파리 시가 도시 발전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보낸 설문조사지의 제목이다. 앞으로 20년 동안 파리의 신규 건축, 개축, 보수, 토지 점유, 문화재 보전 등에 관련된 도시계획법을 만들기 위한 설문조사다. (…) 들라노에 시장은 파리 시의 도시계획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면서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파리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솔직하게 내보이고 그 문제에 대한 시의 대처 방안을 제시한 다음에 그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나의 책을 한단어로 말하자면 '목적 없는 방황'"

정 교수가 에펠탑을 두고 '무용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은 것처럼 파리 연작 두 권에서는 공통적으로 '쓸모 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정 교수의 전작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동아일보사 펴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책 곳곳에서 '쓸모 없음', '목적 없음'에 관한 성찰과 사색을 발견할 수 있다. 정 교수 역시 자신의 책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aimless wandering', 즉 '목적 없는 방황' 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쓸모 없음'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60년대 이후 한국이 산업화를 거치며 외친 '선진국이 되자'는 구호에서 나온 개념이 '실용성' 즉 쓸모 있음이 아닐까 한다. 구체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화폐로 환산되고 양으로 잴 수 있는 것,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을 쓸모 있다고 한다. 반면 쓸모 없다는 것은 가까운 시일 내에 구체적으로 용도가 없는 것,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쓸모 있음'을 지나치게 추구하면서 쓸모 없는 걸 다 버렸다. 마당 없는 집으로 이사가면서 장독대, 댓돌, 다듬이, 이불을 다 버렸다. 오래된 것, 예전 부터 있던 것을 '쓸데 없다'고 버린 것이다.

유학에는 '군자불기'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구체적인 쓸모 있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연경관 앞에서 서늘하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 경관이란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쓸모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들은 쓸모 없다고 버리고 경시한 것들이 아닐까."


ⓒ프레시안(최형락)
그의 '쓸모 없음'에 대한 찬양은 한국 사회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2002년 그가 파리로 떠난 이유와도 연결된다. 그는 자신의 파리 체류를 '자발적 망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파리로 망명온 수많은 망명 작가들에게 애정을 표했다.

"20대의 풋풋한 나이에 파리에 유학 왔다가 망명 작가로 일생을 보낸 시오랑. 파리 정착 이후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만 글을 쓴 사람. (…) 그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했다. 가난하지만 자기 세계를 지킨 고집스러운 전업 작가였던 셈이다. 그렇게 산 그의 삶에 나는 커다란 공감과 연민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다.(…) 파리에 다시 온 이후 나는 자기가 태어나서 살던 익숙한 장소를 떠나 자기가 선택한 낯선 땅에 와서 망명생활을 한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파리의 장소들>)

-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힌 시오랑에 관힌 글을 보면 망명 작가에 대해서 동질감, 애정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책에 '자발적 망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한국에서 무엇을 피해서 망명을 떠났나?

"나는 나의 망명을 '정신적 망명'이라고 한다. (웃음) 앞서 낸 책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생각의나무 펴냄)에도 썼지만 한국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피해 망명을 떠났다. 유학 생활을 하고 나서 귀국해 여러 대학의 교수 채용에 응할 때 한국 사회를 깊게 느꼈다. 나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 나의 능력이 아닌 어떤 이유로 교수 자리를 얻지 못했고 그 이후 시민운동도 하면서 한국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피하려 한 것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쓴 것들이다.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 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 회피주의,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 중심주의, 속도 지상주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 수단 방법 중심주의, 이중 규범주의 등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추사 김정일, 마르크스도 유배나 망명을 가서 작품을 쓴 것처럼 나도 자발적으로 살던 곳에서 떠나서 내가 살던 곳을 객관화, 대상화 해볼 필요가 있었다."

- 2002년 파리로 '망명' 하기 직전 시민운동과 생태 운동을 열심히 했다. 한국에서 대안 운동을 하다 '망명'을 떠난 셈인데 한국의 시민운동에서도 한계를 느낀 것이라고 보면 될까?

"환경운동을 하면서 느낀 건 이중적 태도다. '환경이 악화되서 인간이 못살게 된다'는 주장은 모두 맞다고 하면서 내 자식이 좋은 학교를, 내가 좋은 직장을 다녀야 하고 승진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더라. 말하자면 운동은 하고 있는데 그에 맞는 사고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어떤 시민운동이든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작동하고 있는 가운데에서 운동을 하면 겉만 운동이 되는 거지 속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로 콕 집어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그에 대한 좌절감이 깊다. 그래서 반정부 운동을 하면 금방 불이 붙는다. 택시운전사부터 대학 교수까지 이명박 비판하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자기 생활은 그대로 두고 이명박 대통령만 비판하니까 촛불 집회처럼 일시적으로 끝나고 마는 거다.

결국 모든 시민운동과 함께 일반 시민의 살아가는 방식 자체, 우리 안의 문법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성찰하는 운동을 해야할 시점인 셈이다. 인터넷이든 소규모 집단이든 진정한 토론이 일어나고 격려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그래야 전체와 부분, 거시와 미시를 오가며 제대로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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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영상물등급위원회 국정 감사에서 조진형 의원은 "남성끼리 목욕하면서 애무하고 키스하는 장면"이 있는 영화 <친구사이?>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화 <친구사이?>에는 이와 같은 장면이 아예 없었다.

그렇다면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가며 비난한 이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성애자 남성의 '19금' 상상력에서? 답은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이라는 단체가 지난달에 발표한 '동성애 영화 <친구사이?> 15세 관람가 판결을 규탄한다'는 성명서이다. 조 의원은 이 성명서의 한 구절을 그대로 읊었던 것이다.

그의 발언은 성 소수자 차별에 대한 정돈된 논거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은 성명서에서 "동성애가 선천적이고 유전적이라는 근거는 거의 없"고, "동성애는 문화적 요인으로 인해 학습되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혐오는 이렇게 세련되게 한 국회의원에게 보지 않은 영화를 비난할 언어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 혐오 언어는 우리의 무지에 의해 지탱된다. 동성애가 유전적이라는 근거가 정말 없는가? 혹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성 소수자의 인권 논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동성애는 학습되는가? 애당초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가 '정상'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뉴스나 드라마를 보면서라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떠올렸다가, 내 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무지를 느끼고 흠칫 물러서 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독자에게 MTF(male to female : 남성에서 여성으로) 트랜스젠더이자 생물학자인 조안 러프가든의 책 <진화의 무지개>(노태복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는 풍성한 답을 내어 놓는다.


▲ <진화의 무지개>(조안 러프가든 지음, 노태복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저자는 우선 '진화에는 다양성이 좋은 것'이라는 다양성 긍정 이론의 관점에서, 생물학적 범주인 암컷과 수컷을 사회적 범주인 젠더와 구분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유성생식에서 생식세포의 크기는 보편적인 이분법을 따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수컷의 정자는 작고 암컷의 난자는 크다는 기준으로 암수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암수의 구분은 생식세포 크기 차원에서 끝난다.

저자는 많은 편견이 생식세포 크기 범주가 '성화된 생물체의 외모, 행동, 생활사'인 젠더 범주의 논의로까지 확산되는데서 출발했음을 지적한다. 해마와 같이 새끼를 수컷이 돌보는 '성 역할 뒤바뀜'은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이와 같은 성 역할 뒤바뀜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은 없는 식이다.

젠더 역할에 대한 이분법적 해석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컷이나 암컷의 고정관념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파랑볼우럭은 큰 수컷, 중간 크기의 수컷, 작은 수컷, 암컷 네 가지 형태를 갖는다. 이중 중간 크기의 수컷은 큰 수컷의 영역에 접근해 구애 행동 후 함께 산다. 큰 수컷은 작은 수컷은 쫓아내지만 중간 크기의 수컷은 쫓아내지 않고, 암컷이 함께 있을 때는 셋이 함께 구애 행동과 짝짓기를 하기도 하며 영역을 공유한다.

이에 대해 기존의 이론은 큰 수컷이 암컷인 척 하는 중간 크기의 수컷에게 속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떻게 낮에 작은 새우를 잡아먹고 사는 파랑볼우럭 수컷이 바로 옆에 있는 물고기가 암컷인지 수컷인지도 구분하지 못할까? 그리고 정말 착각했다면 셋이서 함께 구애 행동과 짝짓기를 하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슷한 예로, 수컷은 색이 다양하고 암컷은 갈색인 알락딱새에 대해 갈색 알락딱새는 암컷 흉내쟁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사람이 봐도 암수가 구별되는 마당에 새가 자기 종의 성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설명이 타당할까?'

저자는 이와 같은 기존의 속임수 이론은 한쪽은 흉내를 내고 속일 수 있을 만큼 교활하고, 다른 한쪽은 어처구니없이 속을 만큼 멍청하다는 비대칭성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관점은 단지 중간 크기의 수컷과 구애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 큰 수컷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배제하고 둘로 딱 떨어지지 않는 다른 모든 현상을 속고 속이는 생존 경쟁의 이형으로 몰아간다. 저자는 이와 같은 암컷 흉내가 '일종의 신화'라고 단언한다.

또한 인간이 못 알아봤거나 흉내에 속았다고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동성 간의 구애와 짝짓기도 자연에는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큰뿔양은 거의 모든 수컷이 동성애 구애, 교미에 가담하는데, 겉보기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은 동성 간 구애와 교미는 사육 양에서도 발견되는데, 오랫동안 이런 행동은 나중에 암수 간 교미를 위해 동성끼리 연습한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러나 동성애 숫양은 그냥 게이이지 게이인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게이 숫양의 호르몬 반응을 보면, 게이 수컷은 다른 수컷을 암컷으로 여기지도 그렇게 반응하지도 않고, 그저 암컷과 수컷 중 수컷을 선택해 호감을 표시한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다양한 젠더 관계가 성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처럼 재생산할 수 없는 관계는 다윈의 성 선택 이론에 따르면 도태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저자가 제시하는 수많은 예에서 보듯이, 자연에는 다양한 동성애 관계와 젠더 가족 결합이 있다. 다윈은 수컷들은 보편적으로 암컷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려고 다툰다고 했고, 현대의 이론은 설명을 위해 속임수와 흉내 내기를 남발했다.

러프가든은 이에 대해 '사회적 선택'이라는 다른 답을 제시하고, '사회 통합형 특성'이라는 말로 이를 설명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 중 하나인 보노보 암컷들의 다양한 동성애 활동이 그 좋은 예다. 보노보는 수신호로 선호를 알리고 서로의 생식기를 문지르고 서로 올라타며 같이 식사를 한다.

보노보는 왜 이런 활동을 할까? 보노보 암컷의 동성 섹슈얼리티는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함께 먹이를 나누어 먹고 수컷을 공격하는 등 무리의 혜택을 공유하며 더 잘 생존한다. 레즈비언이 아닌 보노보는 공유 자원에 접근하지 못해 생존이 어렵다. 단지 유전자 결정 단계의 문제가 아니다. 번식에 필요한 자원을 통제하고 지속적으로 확보할 통제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정자를 배달하는 것보다 번식 기회의 획득과 거래가 중요하다는 이 관점에 따르면, 다양한 젠더의 존재는 비정상적이지 않다.

인간의 경우는 어떨까?

이 책의 2부는 다양한 동물들의 예를 지나, 생명들 중 특히 인간의 젠더가 언제 어떻게 결정되며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불확실한 편견들이 실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견은 단지 성에 대한 편견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인간의 뇌가 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차 커졌다는 (어디선가 읽은) 상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뇌가 급속히 진화하는 사이에 기술은 거의 발전하지 않았고, 진화가 끝나고 나서야 기술이 발전했다. 남성과 여성의 뇌는 서로 비슷한데, 저자는 이런 유사성을 인간이 거의 동일한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구성원을 위한 사회 통합형 특성의 하나라고 본다.

젠더 이분법의 근거인 'XX/XY' 체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비록 성염색체 시스템은 이분법적이지만, 몸의 형태는 젠더들 간에 상당히 겹치고 심지어 교차할 수도 있다. 성 결정에는 다양한 유전자가 관여하고, 모든 인간의 몸은 서로 다르다. 성적 이형성에 관계된 세 가지 신경세포 다발은 서로 독립적이다. 여기에 역시 독립적인 몸 유형까지 결합하면 그것만으로도 열여섯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올 수 있다.

성적 지향은 단일한 주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거나 유전되지 않는다. 또 영국에서 성 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의 수에서 추정한 성 전환자 추정 비율과 인도의 약 100만 명의 히즈라(hijra) 비율은 비슷한 수치를 가리키는 바, 트랜스젠더의 비율도 인구 1000명 당 1명보다는 높다.

(히즈라는 원래 남자로 태어났으나 거세 등의 방법을 통해서 남자의 성을 포기하고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힌두교 신앙의 전통 속에서 종교적 공동체로 인정을 받아서 존중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편집자>)

그렇기에 다양한 젠더는 돌연변이나 기형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다양성의 일부이다. 그럼에도 이성애주의 이분법은 이들을 스스로도 기형이나 변태로 여기게 만든다. 특히 간성으로 태어난 경우 아이 당사자가 아니라 부모가 주도하는 성 결정, 유전자 결정을 통제하려는 욕망, 이분법 외의 현상을 질병으로 여겨 전형에 끼워 맞추고자 하는 사회의 압박은 치료할 필요가 없는 대상에게 치료를 강요하고 건강한 사람을 정신적, 신체적으로 아픈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 젠더, 섹슈얼리티와 사회적 선택 및 사회 통합형 특성으로서의 다양성을 본 후, 인간의 성 결정과 젠더 결정 과정과 그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들,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통계와 기존 생물학에 대한 비판을 검토한 다음, 이 책은 성적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여러 문화의 예를 보여준다. 아메리카의 두 영혼 사람들, 폴리네시아의 마후, 인도의 히즈라, 고대 로마의 고자, 이슬람의 무나카툰, 인도네시아의 레즈비언 공동체와 멕시코시티의 베스티다, 고대의 성행위와 잔다르크와 같은 역사 속의 트랜스젠더……. 다양한 문화에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무지개처럼 펼쳐진다.

저자는 다양한 젠더 개념을 보여 주며, 학계가 당사자의 목소리를 잘 듣지 않는 연구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페미니스트인 비에링가는 자바 섬의 동성애자/트랜스젠더들이 전형적인 부치/팸의 양태를 보이자 충격을 받았다. 때로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방하는 성 소수자들은 급진적이거나 용감하지 않다고 비난 받는다. 또한 많은 연구자들이 생물학적인 성 결정론을 부담스러워하며, 트랜스젠더들이 다른 성으로 살기를 '선택' 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성이나 젠더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트랜스젠더 본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레즈비언 커플 중에서 남성/여성의 역할을 하는 이들을 '부치/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잣대로 나뉘는 레즈비언 커플이 있는 반면에 상당수 커플은 부치/팸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편집자>)

책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우리 사회의 성적 다양성과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알고 싶다면 퀴어아카이브(☞바로 가기)를 이 제3부를 읽고서 방문해 보면 생활에 밀착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마지막 한 장을 미국의 트랜스젠더 정책사에 할애하고 부록으로 정책 제언을 붙이고 있는데, 아직 이와 같은 논의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먼 이야기라고는 해도 너무 일찍 책을 덮지 말고 끝까지 읽어 보면 좋겠다.

또 책 말미 후주에서 소개한 미국의 성 소수자(특히 트랜스젠더) 혐오 범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웹사이트에(☞바로 가기) 꼭 한 번 들러 보길 권한다. 동성애 혐오 발언이 무슨 피해가 될까 고개를 갸웃했다면, 이해의 결여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문제임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5월에 여자친구가 MTF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안 애인이 충동 살해한 사건이 기사화된 바 있고,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 이분법적 법제도로 인해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스스로 경계하는 바와 같이, 러프가든은 자연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적응주의적 관점을 취하는 생물학자로서, 진화 과정에서 성적 다양성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러나 성 소수자 이슈에서 '자연스러움, 섭리, 신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갖는 무게를 생각할 때, 이 모든 것이 일단 '자연스럽다'는 말의 가치는 가늠할 수 없을 만치 크고, 이 풍성하고 재미있는 책을 잘 다듬어진 한국어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더없이 감사한 일이다. 때로 앎은 그 자체로 변화를 앞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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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가 죽음을 맞이하던 1989년 1월 7일 나는 도쿄에 있었다. 병석에 누운 다음부터 긴급 뉴스로 시시각각 전해지는 "하혈 ○○cc, 체온 ○○도" 같은 병상 소식을 밥상머리에서 들으면서 느꼈던 위화감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상가는 철시하고 모든 행사가 취소되는 등, 일본 전체가 이른바 '자숙(自肅)' 무드에 휩싸였다.

그리고 언론들은 히로히토가 얼마나 평화주의자였는가를 앞 다투어 보도하였다. 히로히토의 죽음 후, 당시 수상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는 히로히토가 "언제나 평화주의자였고 입헌군주였다"는 애도사를 발표하였다. 히로히토의 죽음에 대한 '애도' 이외에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언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광풍'이었다.

히로히토가 병석에 누워있던 1988년 12월 7일,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가 시의회에서 "나의 군대 생활의 경험에서 볼 때,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였다. '광풍'에 숨죽이고 있었던 히로히토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모토시마의 용기 있는 발언에 소리 없는 성원을 보내겠지만, 이 용기 있는 발언이 자숙과 추모 일변도의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모토시마는 자민당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정치가였다. 하지만 모토시마의 용기 있는 발언과 이 발언을 성원하던 사람들의 '소리 없는 소리'도 그로부터 1년 후에 우익단체가 모토시마 시장에게 가한 총격 테러로 더욱 어둠으로 사라졌다. 모토시마 시장은 중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렇게 해서 '히로히토=평화주의자'라는 등식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다.

히로히토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본 사회에 벌어진 소동 아닌 소동을 보면,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를 평화주의자로 '각색'하기 위해 1945년부터 시작된 거대한 프로젝트가 드디어 1989년 그의 죽음으로 '완성'을 맞이한 것이다.

히로히토는 1901년에 태어나서 1926년에 천황이 되어 1989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무려 63년 동안 일본의 최고 자리에 군림했던 인물이다. 20살이 되던 1921년에 병석에 누워있던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관의 자리에 올랐으니 실제로 최고 권력 기관의 수장으로 군림한 것은 근 70년에 이른다.

히로히토의 인생 전반기는 침략 전쟁으로 점철되던 '야만'의 시대였고 1945년 패전 이후인 인생의 후반기는 '상징'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야만의 시대에 점철되었던 수없는 침략 전쟁에 대해서는 일부 몰지각한 군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놀아난 힘없는 '꼭두각시 군주'라는 이유를 들어 전쟁 책임에서 벗어났고, 인생의 후반기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상징 천황제로서 살아남았다. 인생의 후반기는 미국의 일본 연구자 존 다워가 말한 '천황제 민주주의'로 살아남은 것이다.

이 말썽 많은 인물을 '꼭두각시'로, 혹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상징적 군주로 살아남게 만든 것은 물론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합작'의 결과였다. 도요시타 나라히코에 따르면, 히로히토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던 미국과 그런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자신의 자리는 물론, 천황제를 유지하려 했던 히로히토 간의 전략적 거래의 산물이 '꼭두각시'와 '평화주의자'로서의 히로히토였던 것이다.

히로히토가 전쟁 행위에 대해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으리라는 것은 당시의 정황 증거로 볼 때도 상상하기 힘든 일도 아니다. 또 대일본제국헌법 하에서 모든 권력을 지닌 그가 침략 전쟁에 대해 그 어떤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형식 논리로 보면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온화한 천황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 <히로히토 평전>(허버트 빅스 지음, 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 ⓒ삼인
이 불편한 허구에 정면으로 도전한 책이 바로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 : 근대 일본의 형성>(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이다. 2000년에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으로 출간되어 퓰리처상을 받았고, 2002년에는 <쇼와덴노(昭和天皇)>(講談社 펴냄)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번역·출간되었으니, 한국 출판은 원저 출판에서 10년이 지난 셈이다.

무려 940쪽이 넘는 방대한 이 책은 이른바 온화하고 평화적이며 비정치적인 히로히토에 대한 일본 사회의 공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상을 실증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이 책을 가리켜 "역사의 폭탄"이라고 평한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히로히토가 어떻게 호전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능동적 군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밝히는데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은 매우 뛰어난 히로히토 평전이다. 또 히로히토의 개인사가 이 책의 한글판 부제에 붙어 있는 것처럼 근대 일본의 형성에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밝혀내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일본 근·현대사 연구라 할 수 있다. 히로히토라는 개인과 근대 일본의 형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시점은 히로히토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한다는 것을 뜻한다.

히로히토라는 천황을 정치적 주체로 설정하는 시점은 물론 허버트 빅스의 연구가 효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로 '천황 기관설'에 입각한 기존의 학설에서 보면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황 기관설은 대일본제국헌법 하에서 통치권은 국가라는 법인에 있으며 천황은 국가라는 법인의 최고 기관으로서 통치한다는 국가법인설에 입각한 학설이다.

따라서 천황은 헌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상의 한 기관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 천황제는 절대군주제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라는 주장이다. 대체로 1930년대 중반까지 미노베 다쓰기치(美濃部達吉)가 채용했던 학설이다. 1930년대 중반 미노베는 천황 기관설을 주창한 책임을 지고 귀족원에서 물러났고 우익 테러로 중상을 입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빅스는 실증적인 논거를 제시하면서 히로히토 자신이 헌법의 제약을 받는 입헌군주제라는 자각을 가진 적이 없으며, 항상 자신을 헌법 위에 군림하는 절대군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매우 정교하게 전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 하에 히로히토가 정치적 주체로서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일어났던 수 없이 많은 침략 행위에 정책 입안자로서 최고 결정권자로 관여했음을 밝힌다. 따라서 입헌군주제 설에 입각한 '평화주의자=히로히토'라는 불편한 허구로 가득 찬 항간의 이미지는 이 책으로 완전히 붕괴된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는 빅스의 주장이 미국에서 출판되었던 2000년에는 매우 신선한 새로운 실증 분석이었지만, 그 후 일본에서 진행된 새로운 자료 발굴과 실증 연구 수준에서 보면 2010년 단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의의는 '평화주의자=히로히토'라는 항간의 이미지를 붕괴시키는 대중적인 실증서의 효시로 자리매김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이 책의 분석이 주로 1945년 이전의 히로히토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평화주의자=히로히토'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실증적으로 붕괴시키는데 히로히토의 전전의 행적이 결정적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쟁 책임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동원된 '평화주의자=히로히토=입헌군주=꼭두각시'라는 등식이 전후에 만들어지는 과정과 전후의 냉전 체제 하에서 천황제가 이른바 친미 반공의 보루로서 살아남는 과정이 연동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전후 냉전 체제 하에서의 히로히토의 행적 또한 매우 중요하다. 빅스는 제4장에서 히로히토의 전후사를 담고 있는데, 책 전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낮다. 이런 점에서 히로히토의 전후 행적을 다룬 도요시타 나라히코의 <맥아더와 히로히토>(권혁태 옮김, 개마고원 펴냄)와 같이 읽을 것을 권한다.

빅스에 견해에 대한 비판은 물론 일본에 아주 많다. 이 책이 일으킨 반향도 적지 않았다. 대체로 위에서 말한 입헌군주설에 입각한 반론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서구 학자 중에 빅스를 비판하는 독일 출신의 피터 웨츨러(Peter Wetzler)는 "천황이 카이저처럼 명령하면서", "전전의 천황이 언제나 어둠 속에 숨어 인형을 조정하는 것처럼 군부를 움직였다는 '전쟁하는 대원수'이며, 전후의 평화주의자의 이미지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빅스의) 설에는 찬성할 수 없다"면서 히로히토는 언제나 "황통(皇統)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일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産経新聞>, 2002년 12월 1일).

인상적인 것은 빅스와 대립되는 입장을 지닌 피터 웨츨러의 책이 빅스에 대적하듯이 빅스 책이 출판된 2002년 같은 해에 일본에서 <쇼와천황과 전쟁(Hirohito and War: Imperial Tradition and Military Decision Making in Prewar Japan)>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매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히로히토는 죽어서도 여전히 논쟁적이다.

하지만 빅스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히로히토를 개인으로 정치적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메이지 유신 이후에 개시된 근대 천황제의 역사가 히로히토라는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어 천황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점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빅스는 마지막에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현상을 언급하면서 천황제가 "민주주의의 심화와 인민의 주권의식 성장을 가로막는 방향으로" 이용당할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아울러서 일본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이 귀중하면서도 방대한 책을 번역한 역자(오현숙)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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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망명객 정경모(86)의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 펴냄)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내가 다니던 에모리 대학은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있었는데, 거기서 날마다 들여다보던 신문인 <애틀랜타 컨스티투션>에 퍽 자주 나오는 W. H. 워커라는 군인의 글을 읽으면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소이다. 그때가 아마 띄엄띄엄 한일 회담이 열리던 때였지 싶은데, 워커는 완전히 일본을 치켜세우면서 한국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렸어요. 일본은 억울하게도 한국 땅에 막대한 재산을 남겨두고 왔는데, 한국이 일본에 무슨 청구권 같은 것을 요구한다는 건 뻔뻔하고 파렴치한 행위라는 식으로 말이외다."

일제 말기 경기중학교를 나와 1942년 도쿄로 유학을 가 게이오 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간 정경모. 일본 패전과 함께 귀국해 서울대학교 의대로 간 그는 1947년 8월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에모리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애틀랜타 컨스티투션>을 열심히 읽고 있었던 건 에모리 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 <시대의 불침번>(정경모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1950년 어느 날 당시 주미 대사였던 장면(4·19혁명 뒤 제2공화국 총리가 된다)이 긴급 전화로 "이것은 프란체스카 부인(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34년 이승만과 결혼)의 특명이니만치 가타부타 잔소리 말고 곧 도쿄로 떠나 맥아더 사령부(GHQ)로 들어가라!"고 명했다. 그해 10월 하순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 간 그는 깜짝 놀랐다. <애틀랜타 컨스티투션>을 통해 일본을 두둔하며 한국 때리기에 열심이던 그 군인이 한국에서 미군을 이끌고 있던 '제너럴 워커',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월턴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1950년). 텍사스 주 벨턴 출신으로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제1, 2차 세계 대전에 참전.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때, 조지 스코트가 열연한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으로도 널리 알려진 패튼 장군 휘하 제20군단장으로 벌지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쳐 3성 장군으로 출세한 인물. 전후 제5군 사령관이 됐다가 1948년 일본 점령군인 미 제8군의 사령관이 됐다.

워커가 애틀랜타에서 공부하던 정경모의 피를 끓게 만든 글을 썼던 게 바로 그때부터 한국전쟁 발발 전후 시기일 것이다. 워커가 제8군 사령관으로 도쿄에 부임했을 무렵 미국은 그 전해 3월 '트루먼 독트린'으로 유럽에서 냉전 채비를 시작하고 나서 동아시아에서도 이른바 '역 코스'를 통해 징벌적 일본 개조를 시혜적 개조 쪽으로 대일 정책을 전환하고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 교두보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일본과의 사실상 단독 강화(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를 추진하고 있던 미국은 요시다 시게루 등 일본 우파 민족주의자들을 대거 공직에 재기용해 일본 재건과 재무장을 적극 밀어주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애초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초안에 연합 전승국 일원으로 포함시켰던 한국을 일본 쪽 요구대로 빼버렸다.

미국의 냉전 기지로 재무장하는 일본을 지키는 또 다른 전초 기지(방파제)로서의 역할만 주어진 한국의 요구를 미국은 깔아뭉갰다. 대신 자신들의 죄업이 만들어낸 재일 동포라는 희생자들을 모조리 '빨갱이'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면서 한반도인을 열등 민족으로 능멸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하늘이 일본을 도왔다(천우신조)'고 환호한 요시다 등 군국 일본의 후예들을 전폭적으로 밀었다.

일본과 한국을 바라보는 워커의 시선 왜곡은, 조지 케넌이 설계하고 맥아더 사령부가 앞장선 그 냉전 초기 미국의 친일반한 캠페인(오늘의 독도 문제도 거기서 비롯됐다)의 선봉에 서야 했던, '머리보다는 주먹'이 장기였던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워커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동아시아 정책 실세들에게 그들 마음대로 반토막낸 한반도는 냉전 교두보 일본을 지키기 위한 기지였을 뿐, 그 안에서 수천 년간 나름의 고유한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해온 수천만 한반도인의 삶과 운명은 관심밖이었다는 것은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 점령군의 이후 행태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야심만만한 전략가 맥아더와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한국전쟁 뒤 낙동강 방어선을 가까스로 지켜내고 승승장구 38선을 넘어 북진하던 워커 군단은 그해 10월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터키군의 분전 속에 평양에 쌓아두었던 방대한 전쟁 물자들을 내버린 채 만신창이로 남쪽으로 탈출한 워커 군단이 어디에 방어선을 설정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1950년 12월 23일, 패튼 휘하에 있을 때처럼 지프차를 고속으로 과감하게 몰며 미군 24사단과 영국군 29사단을 시찰하던 워커는 의정부 인근에서 한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소속 트럭(민간 트럭이라는 설도 있다)과 접촉 사고를 일으켜 전복된 지프차에 깔려 숨졌다.

1963년, 쿠데타로 집권한 지 2년쯤 지난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이 제8군 초대 사령관을 기려온 미군 전통에 따라 서울 아차산 일원에 '워커 힐(Walker Hill)'이란 이름을 붙여 기념키로 했고, 지금 그곳에 들어서 있는 쉐라톤 워커힐 호텔 등이 다 거기서 비롯됐다.

<한국 전쟁의 기원> 지은이 브루스 커밍스가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 제13호 파일 상자에서 찾아낸, 정경모가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한 문서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생각한다면 일본의 영향력과 제반 활동이 조선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날은 우리 예상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압력을 완화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현실적인 유일한 방도인 까닭이다. (…) 현재의 국제 정세에 비추어 이와 같은 정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이러한 정책을 채용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의 일치된 견해다."

일제 식민지였던 한반도, 나아가 가능하다면 만주까지 다시 일본이 지배하는 땅으로 만들고 그런 일본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종하겠다는 미국의 이 구상은 냉전의 설계자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조지 케넌의 작품, 이른바 '케넌 설계도'다. 1947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일 단독강화 방침과 1948년의 '역 코스', 그리고 1949년 중국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이르는 기간에 미국이 한국 정부에 종용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케넌의 설계도에 따른 것이었고, 그것을 관철해낸 세력이, 결국 미국이 지원한 5·16 쿠데타 세력이었다.

한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힘으로 제압하며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포기하고 몇 푼의 돈에 일본에 면죄부를 쥐어주고, 그 일본 '엔 경제권'에 포섭돼 '식민지 근대화(예찬)론'까지 읊조리게 된 치욕이 미국의 냉전 구상에 맞춰 작성한 동아시아 설계도의 소산이었다고 정경모는 얘기하고 있다. <무사도>의 니토베 이나조나 <일본의 각성> 따위를 쓴 오카쿠라 덴신, 제4차 한·일 회담 일본 대표 사와다 렌조, 요시다 쇼인, 요시다 시게루 등 '천민'이 사는 한반도가 '천손민족' 일본의 옛 영토이고 자신들의 사명이 고토 회복임을 공공연히 주장해온 패권주의 '망언'의 발설자들, 그들을 승계한 일본 외교의 흑막 오카자키 히사히코와 일제의 만주 괴뢰국 설계자였으며 미·일 군사 동맹과 자민당 '55년 체제' 주모자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 요시다 시게루의 손자 아소 다로…. 그리고 그들에 동조한 한국 내 실세들.

<시대의 불침번>이 숱한 일인칭 체험과 취재에 바탕을 둔 생생한 일화들을 통해 드러내려는 것은 결국 이 기막힌 구조와 그 구조를 만들고 운용한 인간들, 그리고 그 희생자들 얘기다. 개인 체험을 중심으로 서술된 그 비통한 얘기가 바로 한국 근·현대사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온 주류 역사책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잊혀진 우리 역사다. <시대의 불침번>은 '역사책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아니 오히려 '이게 더 역사다운 역사 이야기일 수 있겠구나'를 느끼게 하는 역사 쓰기의 새로운 한 전형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정경모가 맥아더의 도쿄 GHQ 사무실에 갔을 때 거기엔 서울대학교 총장이던 장리욱, 문교장관 오천석, 몽양의 측근이었던 황진남 등이 있었고, 목사 문익환과 박형규도 있었다. 그 직전 낙동강 방어선까지 무너지면 한반도 내 미군 교두보가 완전히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미국은 최악의 경우 한반도 재상륙을 위한 망명 정부를 구상했고, 그때 정경모 자신을 포함해 GHQ 사무실에 불려와 있던 한국인들은 만일의 사태 때 그 망명 정부를 짜게 할 인사들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브루스 커밍스가 정경모에게 얘기해준 사실이다. 그 망명정부 소재지가 동사모아 섬이었다는 사실까지도.

누가 먼저 한국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느냐보다 누가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기획하고 있었던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정경모는 한반도를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했던 '애치슨 라인' 등이 언표한 공식 의도와는 달리 미국은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 그 중에서도 한반도 절반 이남을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며(일본 우파들이 늘 공언해온 것이기도 하다), 워커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해 압록강변까지 북진한 데서도 보듯 가능하면 한반도 전체, 어쩌면 만주 일원까지(맥아더는 만주 지역에 대한 원폭 공격을 주장했다) 일본의 대미종속 친미 우파 세력이 관리하는 지역으로 확보하려 했다고 보는 듯하다.

그때 도쿄 GHQ에 불려갔던 한국인들 중에서 두 명의 목사, 즉 문익환과 박형규, 그리고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정경모 세 사람이 나중에 바로 그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이 환호했던 '케넌 설계도'와 거기에 빌붙어 그들과 한통속이 됐던 한국 내 친일·친미 종속 세력에 격렬하게 저항한 '민주화 운동' 최일선에 서게 된 것은 뒤틀린 한국 현대사 그 자체만큼이나 기구하다.

정경모가 생각하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미국 사람들이 멋대로 그어놓은 38선을 걷어치우고, 그 38선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부자·형제 간에 피로 피를 씻은 비극을 극복함으로써 지금은 소멸된 민족공동체를 되찾겠다는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민주화 운동이란 결국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민족 통일 운동의 하위개념이다.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던 명민한 소년 정경모가 성장해가는 줄기를 따라 다양한 일화들이 씨줄 날줄로 엮이는 <시대의 불침번> 얘기는 그 운동에 생애를 걸고 싸우다 스러져간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장준하, 문익환 등에 대한 눈물어린 헌사이고, 그들과 대척점에 서서 그들을 탄압하다 끝내 죽이고 만 사람들의 죄업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다. 그런 그들과 이리저리 얽히며 80여년을 살아온 눈 밝은 민족주의자 정경모의 체험기요 증언집이다. 판문점 정전협상 장에 미군 통역관으로 참석했던 그가 목격한, 한국말 한 마디 못해 일본어 통역관을 대동해야 했던 한국군 대표 옵저버, 일본 우파들의 야비한 언동과 그들을 두둔하는 미국 패권주의세력, 6·15선언의 모태가 됐던 4·2선언 전말기, 한민통의 실체, 민주화 운동가임을 자처했던 사람들의 이면 등 정경모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한국 현대사가 거기엔 펄펄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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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그라네의 <중국 사유>(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가 최근에 번역되었다. 먼저 이 책을 본 소감 두 가지부터 말해보자.

하나는 병사가 땅위에서 총칼을 가지고 한 치의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적과 다투는 각개전투가 아니라 전투기를 이용해서 적지에다 정밀 타격을 하여 적의 예기를 꺾고서 전투에 나서는 공중전을 연상시킨다. 다른 하나는 외국 서적 중에 늦게 쓰인 책이 먼저 번역되고 일찍 쓰인 책이 늦게 번역되는 것을 보면서 뒤바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바람을 품어본다.

마르셀 그라네(1884~1940)는 일반 사람에게 낯설지 몰라도 적어도 구미에서 동양학을 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학자들 중의 한 명이다.

그라네는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1985년/국역 1996년)의 벤자민 슈워츠(1916~1999년), <도의 논쟁자들>(1989년/국역 2001년)의 앤거스 그레이엄(1919~1991년), 자크 제르네(1921~)의 <몽골 침략 전의 중국인의 일상생활>(1959년/국역 1995년)보다 선배이지만 그의 주저가 늦게 번역되었다. 거꾸로 되었더라면 세 사람의 책을 읽기에 훨씬 수월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의 번역으로 인해 그라네와 활동 시기가 겹치는 앙리 마스페로(1883~1945년)의 <고대 중국>(1925년/국역 1995년) 등을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무척 다행스럽다.

중국의 다양한 사상의 차이를 알고 싶거나 사상가들이 최상의 진리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것을 기대한다면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낫다. 또 서양 사람이 쓴 만큼 동서양 비교 철학을 기대한다면 역시 이 책을 들추지 않는 편이 좋다. 그렇지 않고 책을 본다면 "이게 아니잖아!"라는 말을 하기 십상이다.

▲ <중국 사유>(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이 책은 기획 의도가 문명사에 있는 만큼 두 가지 기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학술사나 사상사를 쓴다면 당연히 작은 차이도 의미를 부여해서 크게 말해야 한다. <중국 사유>는 그게 아닌 만큼 작은 차이에 현미경을 들이대지 않고 커다란 틀에 망원경을 대고서 같은 점을 훑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작은 차이를 무시한다고 투덜거려도 소용이 없다. 너무 불만을 갖지는 말자.

한국에서 전라도·경상도의 차이를 목청껏 외쳐도 외국 나가면 똑같은 한국 사람이고, 동아시아에서 역사와 영토 문제로 한·중·일 세 나라가 으르렁거려도 외국 나가면 별 차이가 없는 엇비슷한 아시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가!

잠깐 이 책 출생의 뒷이야기를 알아보자. <중국 사유>는 총서 <인류의 발전>(전4권) 중 네 번째 책이다. 앞의 세 권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 문명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예외적으로 유럽의 외부로서 중국 문명을 다루고 있다. 문명을 다루면서 제목은 왜 '사유'로 했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사유'는 중국 사람들이 고유한 방식으로 정신 활동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전제하는 서양 사람과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전통의 의미에 가깝다. 즉 사유는 개별 주체가 진리를 찾아가는 길도 세계를 새롭게 조직하는 인식도 아니라 집단적 자아, 즉 중국인이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밟아가야 하는 지도 또는 공통 지반이다.

그라네는 이 지도의 거점으로 1장에서 언어와 문자로 드러나는 사유의 표현을 다루고, 2장에서 시간과 공간, 음양, 수(數), 도(道) 등의 주개념에 대한 오해를 벗겨내고, 3장에서 대우주, 소우주의 세계 체계를 다루고, 마지막 4장에서 전국 시대에서 한제국의 초기에 이르는 다양한 학파를 스케치하고 있다.

책이 촘촘하고 방대하여 내용을 일일이 소개할 길이 없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문명사의 관점에서 본 '중국 사유'의 독특성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잊기 전에 먼저 이 책의 미덕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이 쓰일 당시 세계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자존심이 많이 깎였지만 유럽은 근대 문명을 열어서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의하지 않았다. 그 연장선에서 유럽인은 비유럽 지역의 사람살이와 문명을 모두 유럽의 기준으로 재단하면서, 함량 미달만큼이나 신비적이니 신화적이니 비논리적이니 하는 차가운 평가를 내렸다(44, 97쪽). 더 나아가 원시적 사고니 주술적 사고니 하는 말들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오늘날은 이를 두고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그렇게 낯설지 않고 또 문화 상대주의의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그라네는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창하는 흐름 속에서도 중국 내부의 시각으로 중국을 들여다보자고 주장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비유럽의 문명을 유럽으로 환원하지 않아야 한다. 아울러 왜 이것이 없느냐라는 무의미한 비교 연구를 해서도 안 된다. 또 중국의 사유를 서양 철학의 용어로 번역해서 읽는 관성도 반성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한 말'들'의 일관성을 지키려고 하고 뭔가 약속하면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중국 사람만이 아니라 좁게는 동아시아 넓게는 세계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철학에서 유독 언행일치, 즉 말과 행동이 일치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리하여 말과 행동이 다를 경우 공적 임무를 맡기에 부적당하거나 사람답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 인식의 밑바탕에는 단순히 "말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좋다"를 넘어서서 "말은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말은 행동과 구별해서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없는 말, 행동과 무관한 말은 순수한 지적 사고이지만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라네는 중국의 이러한 언어관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행동을 끌어내는 데 목적이 있다." "중국 단어는 관념을 가리키기 위한 기호와는 무관하며, 추상성과 일반성이 최대한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하는 개념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53쪽)

이로써 중국인은 이론적 사고와 순수 지식보다는 실천적 사고와 효용성에 중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을 많이 알거나 적게 알거나 '음양'이 중국을 넘어서 동아시인들의 공통 언어이자 사유 체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라네는 이를 "중국 철학은 음양 개념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단정했다(127쪽). 그는 나아가 "주석자나 서구의 연구자들은 중국의 상징들, 예컨대 음양을 서구 철학자들의 확정된 언어에서 빌려온 용어들로 섣불리 규정지으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127쪽). 그러한 실례로 음양을 '힘' 또는 '실체'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들 수 있다.

그라네는 기존의 음양 이해가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역경> '계사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 주목했다.

"한 때(쪽)는 음, 한 때(쪽)는 양, 이것이 곧 도이다." (一陰一陽之謂道)

훗날 성리학자들은 이 구절에 많은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평심으로 쳐다보면 실체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이, 주기적 변화, 상호 융통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실례는 "우선은 빛, 다음은 어둠! 또는 이쪽은 빛, 저쪽은 어둠!"의 일명일회(一明一晦)만이 아니라 청탁 등 수많은 예시를 찾을 수 있다.

'계사전'을 통해서 그는 중국의 "세계에는 상호교대와 상보적인 두 양상의 공조에 따른 총체적인 순환 질서(도(道), 변(變), 통(通))에 부응하지 않는 어떠한 현상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138쪽). 이 결론은 통상적인 사상사에서 도달하는 마지막 귀결이다. 하지만 그라네는 장기 지속과 생활사를 강조하는 아날학파의 세례를 받은 만큼 이 결론을 현상의 종합에 그치지 않고 다시 성축제의 생활양식과 연결시킨다.

고대 중국의 남성과 여성은 성별과 직능의 차이로 인해 경합 관계의 단체처럼 양립했다. 각 집단은 서로 뒤섞이지 않는 시공간을 나누어서 일을 분담했다. 예컨대 여성은 겨울에 베를 짜면서 노동을 하는 반면에 남성은 농사가 재개되기까지 휴식을 취했다. "봄이면 사람들은 마을의 출입문을 열고, 농부들은 여름 농사를 위해 들판으로 떠났다." 이때 "양은 문이 열린 모습을 불러오고 생식과 생산을 그리고 발산하는 힘을 환기시킨다." "겨울이면 마을의 출입문은 닫힌다. 겨울은 닫힌 문을 상징으로 하는 음의 계절이다." (150쪽)

이를 통해서 그라네는 음양을 자연철학의 힘이나 철학의 실체로 보는 해석을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음양은 "사회 조직의 두 구성체 간에 분할된 역할 또는 속성 그 자체이다." (155쪽) 더 나아가 중국 사유는 음양을 초월하거나 추상화하지 않고 실체화하지도 않는다.

전적으로 효능성을 추구하는 중국인의 사유는 조응과 대립의 논리 속에 형성된 상징 세계를 떠나지 않으므로 행동과 인식은 상징 세계를 작동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징 세계를 작동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당기거나 밀어내는 일련의 한 쌍의 상징을 알아야 한다"(155쪽)는 것이고 그 한 쌍이 바로 음과 양인 것이다.

이 이외에도 중국 사유에서 수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양(量)의 개념으로 고려되지 않았다(160쪽). 그 결과 수는 상징적 가치로 쓰이었지만 균질적 단위로 나누는 사고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 사유>의 결론에 해당되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질서, 총체, 효능성 이 세 가지 개념은 서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이루며 중국인의 사유를 관장한다. 중국인은 자연을 나누어 구분 짓는 데 유념하지 않았다. 각 실재는 모두 본래 총체적이며, 우주 속의 모든 것은 곧 우주와 같다." (342쪽)

이 책은 폭넓은 분야를 다루는 방대한 성과를 한국어로 옮긴 노작이다. 번역어를 보면 통상적인 학계의 관행을 벗어나는 경우나 오류가 많아서 편안한 책읽기를 방해하는 곳이 눈에 띈다. 프랑스 말을 한국어로 옮기기는 했지만 사실과 다르거나 너무 주관적이어서 불편했다.

책의 앞부분을 뒤적여서 몇 가지를 찾아보았다. 잘못의 사례를 든다면 <장자>의 '설검편'이 '자객편'(25쪽), 제후의 죽음을 나타내는 훙(薨)이―발음이 고인데―훙(薧)(58쪽), 문헌의 신뢰성과 확실성이 진정성(authenticity)(69쪽), <회남자>의 편명은 훈(訓)인데 장(74쪽), <초사>에 수록된 시가로 예혼(禮魂)이 없는데도 제시하고(79쪽), 은대의 창시가 성탕(成湯)이 승탕(勝湯)(100쪽) 등이 있다. 어색한 사례를 든다면 집수(26쪽), 집성(集性)적(37쪽), 묘사조동사(55쪽), 환술가(幻術家)(70쪽), 악학가(樂學家)(128) 등이 있다.

최근 중국은 세계 경제에 일본을 제치고 G2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의 중국은 이 책에 다룬 한제국 초기를 넘어서 청제국의 황제 체제가 끝나고 다시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서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다.

아날학파의 장기 지속에 따른다면 혁명을 통해 구체제의 종식과 신중국의 건설이 일어났더라도 변하지 않는 심층이 있다. 이 심층이 있는지 없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이 책의 출간을 기회로 그라네의 <중국 고대의 축제와 가요>를 비롯해서 동양학에 대한 프랑스어권의 성과를 일별했으면 좋겠다. 뭔가 빠진 듯하지만 내버려두었던 인식의 그물망을 얼마간 메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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