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망명객 정경모(86)의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 펴냄)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내가 다니던 에모리 대학은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있었는데, 거기서 날마다 들여다보던 신문인 <애틀랜타 컨스티투션>에 퍽 자주 나오는 W. H. 워커라는 군인의 글을 읽으면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소이다. 그때가 아마 띄엄띄엄 한일 회담이 열리던 때였지 싶은데, 워커는 완전히 일본을 치켜세우면서 한국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렸어요. 일본은 억울하게도 한국 땅에 막대한 재산을 남겨두고 왔는데, 한국이 일본에 무슨 청구권 같은 것을 요구한다는 건 뻔뻔하고 파렴치한 행위라는 식으로 말이외다."

일제 말기 경기중학교를 나와 1942년 도쿄로 유학을 가 게이오 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간 정경모. 일본 패전과 함께 귀국해 서울대학교 의대로 간 그는 1947년 8월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에모리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애틀랜타 컨스티투션>을 열심히 읽고 있었던 건 에모리 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 <시대의 불침번>(정경모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1950년 어느 날 당시 주미 대사였던 장면(4·19혁명 뒤 제2공화국 총리가 된다)이 긴급 전화로 "이것은 프란체스카 부인(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34년 이승만과 결혼)의 특명이니만치 가타부타 잔소리 말고 곧 도쿄로 떠나 맥아더 사령부(GHQ)로 들어가라!"고 명했다. 그해 10월 하순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 간 그는 깜짝 놀랐다. <애틀랜타 컨스티투션>을 통해 일본을 두둔하며 한국 때리기에 열심이던 그 군인이 한국에서 미군을 이끌고 있던 '제너럴 워커',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월턴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1950년). 텍사스 주 벨턴 출신으로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제1, 2차 세계 대전에 참전.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때, 조지 스코트가 열연한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으로도 널리 알려진 패튼 장군 휘하 제20군단장으로 벌지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쳐 3성 장군으로 출세한 인물. 전후 제5군 사령관이 됐다가 1948년 일본 점령군인 미 제8군의 사령관이 됐다.

워커가 애틀랜타에서 공부하던 정경모의 피를 끓게 만든 글을 썼던 게 바로 그때부터 한국전쟁 발발 전후 시기일 것이다. 워커가 제8군 사령관으로 도쿄에 부임했을 무렵 미국은 그 전해 3월 '트루먼 독트린'으로 유럽에서 냉전 채비를 시작하고 나서 동아시아에서도 이른바 '역 코스'를 통해 징벌적 일본 개조를 시혜적 개조 쪽으로 대일 정책을 전환하고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 교두보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일본과의 사실상 단독 강화(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를 추진하고 있던 미국은 요시다 시게루 등 일본 우파 민족주의자들을 대거 공직에 재기용해 일본 재건과 재무장을 적극 밀어주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애초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초안에 연합 전승국 일원으로 포함시켰던 한국을 일본 쪽 요구대로 빼버렸다.

미국의 냉전 기지로 재무장하는 일본을 지키는 또 다른 전초 기지(방파제)로서의 역할만 주어진 한국의 요구를 미국은 깔아뭉갰다. 대신 자신들의 죄업이 만들어낸 재일 동포라는 희생자들을 모조리 '빨갱이'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면서 한반도인을 열등 민족으로 능멸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하늘이 일본을 도왔다(천우신조)'고 환호한 요시다 등 군국 일본의 후예들을 전폭적으로 밀었다.

일본과 한국을 바라보는 워커의 시선 왜곡은, 조지 케넌이 설계하고 맥아더 사령부가 앞장선 그 냉전 초기 미국의 친일반한 캠페인(오늘의 독도 문제도 거기서 비롯됐다)의 선봉에 서야 했던, '머리보다는 주먹'이 장기였던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워커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동아시아 정책 실세들에게 그들 마음대로 반토막낸 한반도는 냉전 교두보 일본을 지키기 위한 기지였을 뿐, 그 안에서 수천 년간 나름의 고유한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해온 수천만 한반도인의 삶과 운명은 관심밖이었다는 것은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 점령군의 이후 행태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야심만만한 전략가 맥아더와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한국전쟁 뒤 낙동강 방어선을 가까스로 지켜내고 승승장구 38선을 넘어 북진하던 워커 군단은 그해 10월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터키군의 분전 속에 평양에 쌓아두었던 방대한 전쟁 물자들을 내버린 채 만신창이로 남쪽으로 탈출한 워커 군단이 어디에 방어선을 설정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1950년 12월 23일, 패튼 휘하에 있을 때처럼 지프차를 고속으로 과감하게 몰며 미군 24사단과 영국군 29사단을 시찰하던 워커는 의정부 인근에서 한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소속 트럭(민간 트럭이라는 설도 있다)과 접촉 사고를 일으켜 전복된 지프차에 깔려 숨졌다.

1963년, 쿠데타로 집권한 지 2년쯤 지난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이 제8군 초대 사령관을 기려온 미군 전통에 따라 서울 아차산 일원에 '워커 힐(Walker Hill)'이란 이름을 붙여 기념키로 했고, 지금 그곳에 들어서 있는 쉐라톤 워커힐 호텔 등이 다 거기서 비롯됐다.

<한국 전쟁의 기원> 지은이 브루스 커밍스가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 제13호 파일 상자에서 찾아낸, 정경모가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한 문서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생각한다면 일본의 영향력과 제반 활동이 조선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날은 우리 예상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압력을 완화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현실적인 유일한 방도인 까닭이다. (…) 현재의 국제 정세에 비추어 이와 같은 정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이러한 정책을 채용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의 일치된 견해다."

일제 식민지였던 한반도, 나아가 가능하다면 만주까지 다시 일본이 지배하는 땅으로 만들고 그런 일본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종하겠다는 미국의 이 구상은 냉전의 설계자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조지 케넌의 작품, 이른바 '케넌 설계도'다. 1947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일 단독강화 방침과 1948년의 '역 코스', 그리고 1949년 중국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이르는 기간에 미국이 한국 정부에 종용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케넌의 설계도에 따른 것이었고, 그것을 관철해낸 세력이, 결국 미국이 지원한 5·16 쿠데타 세력이었다.

한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힘으로 제압하며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포기하고 몇 푼의 돈에 일본에 면죄부를 쥐어주고, 그 일본 '엔 경제권'에 포섭돼 '식민지 근대화(예찬)론'까지 읊조리게 된 치욕이 미국의 냉전 구상에 맞춰 작성한 동아시아 설계도의 소산이었다고 정경모는 얘기하고 있다. <무사도>의 니토베 이나조나 <일본의 각성> 따위를 쓴 오카쿠라 덴신, 제4차 한·일 회담 일본 대표 사와다 렌조, 요시다 쇼인, 요시다 시게루 등 '천민'이 사는 한반도가 '천손민족' 일본의 옛 영토이고 자신들의 사명이 고토 회복임을 공공연히 주장해온 패권주의 '망언'의 발설자들, 그들을 승계한 일본 외교의 흑막 오카자키 히사히코와 일제의 만주 괴뢰국 설계자였으며 미·일 군사 동맹과 자민당 '55년 체제' 주모자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 요시다 시게루의 손자 아소 다로…. 그리고 그들에 동조한 한국 내 실세들.

<시대의 불침번>이 숱한 일인칭 체험과 취재에 바탕을 둔 생생한 일화들을 통해 드러내려는 것은 결국 이 기막힌 구조와 그 구조를 만들고 운용한 인간들, 그리고 그 희생자들 얘기다. 개인 체험을 중심으로 서술된 그 비통한 얘기가 바로 한국 근·현대사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온 주류 역사책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잊혀진 우리 역사다. <시대의 불침번>은 '역사책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아니 오히려 '이게 더 역사다운 역사 이야기일 수 있겠구나'를 느끼게 하는 역사 쓰기의 새로운 한 전형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정경모가 맥아더의 도쿄 GHQ 사무실에 갔을 때 거기엔 서울대학교 총장이던 장리욱, 문교장관 오천석, 몽양의 측근이었던 황진남 등이 있었고, 목사 문익환과 박형규도 있었다. 그 직전 낙동강 방어선까지 무너지면 한반도 내 미군 교두보가 완전히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미국은 최악의 경우 한반도 재상륙을 위한 망명 정부를 구상했고, 그때 정경모 자신을 포함해 GHQ 사무실에 불려와 있던 한국인들은 만일의 사태 때 그 망명 정부를 짜게 할 인사들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브루스 커밍스가 정경모에게 얘기해준 사실이다. 그 망명정부 소재지가 동사모아 섬이었다는 사실까지도.

누가 먼저 한국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느냐보다 누가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기획하고 있었던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정경모는 한반도를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했던 '애치슨 라인' 등이 언표한 공식 의도와는 달리 미국은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 그 중에서도 한반도 절반 이남을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며(일본 우파들이 늘 공언해온 것이기도 하다), 워커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해 압록강변까지 북진한 데서도 보듯 가능하면 한반도 전체, 어쩌면 만주 일원까지(맥아더는 만주 지역에 대한 원폭 공격을 주장했다) 일본의 대미종속 친미 우파 세력이 관리하는 지역으로 확보하려 했다고 보는 듯하다.

그때 도쿄 GHQ에 불려갔던 한국인들 중에서 두 명의 목사, 즉 문익환과 박형규, 그리고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정경모 세 사람이 나중에 바로 그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이 환호했던 '케넌 설계도'와 거기에 빌붙어 그들과 한통속이 됐던 한국 내 친일·친미 종속 세력에 격렬하게 저항한 '민주화 운동' 최일선에 서게 된 것은 뒤틀린 한국 현대사 그 자체만큼이나 기구하다.

정경모가 생각하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미국 사람들이 멋대로 그어놓은 38선을 걷어치우고, 그 38선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부자·형제 간에 피로 피를 씻은 비극을 극복함으로써 지금은 소멸된 민족공동체를 되찾겠다는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민주화 운동이란 결국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민족 통일 운동의 하위개념이다.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던 명민한 소년 정경모가 성장해가는 줄기를 따라 다양한 일화들이 씨줄 날줄로 엮이는 <시대의 불침번> 얘기는 그 운동에 생애를 걸고 싸우다 스러져간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장준하, 문익환 등에 대한 눈물어린 헌사이고, 그들과 대척점에 서서 그들을 탄압하다 끝내 죽이고 만 사람들의 죄업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다. 그런 그들과 이리저리 얽히며 80여년을 살아온 눈 밝은 민족주의자 정경모의 체험기요 증언집이다. 판문점 정전협상 장에 미군 통역관으로 참석했던 그가 목격한, 한국말 한 마디 못해 일본어 통역관을 대동해야 했던 한국군 대표 옵저버, 일본 우파들의 야비한 언동과 그들을 두둔하는 미국 패권주의세력, 6·15선언의 모태가 됐던 4·2선언 전말기, 한민통의 실체, 민주화 운동가임을 자처했던 사람들의 이면 등 정경모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한국 현대사가 거기엔 펄펄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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