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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페미니즘의 도전> 공/사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근대적 인권 개념은, 성차별을 옹호하는 가부장제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사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개인, 인간의 위치로 승격시키는 것과 가부장제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전략이었다. ‘여성적 공간’이라고 간주되는 사적인 영역에서는 인권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 근대 이후, 여성은 가족을 대표하고 남성은 사회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것이 공/사 영역 분리의 성별화이다. 모성이나 아동기의 개념도 이때 탄생한 것인데, 여성은 모성의 담지자로 ‘노동자로서 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성의 가사 노동은 비가사화되고, 산업 예비군, ‘유휴‘노동력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 P161

공/사 분리 제도를 통해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형태로 국가, 사회와 관계를 맺게 된다. 공적 영역은 남성만을 주체로 세우기 때문에 여성이 공적 영역과 관계를 맺거나 경찰, 법 같은 공적 자원을 이용하려면 가족 제도를 통해 남편을 매개 할 때 가능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써 보다는 ‘누구의 아내’일 때 정상성을 획득 하고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된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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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 제목은 <Approaching Eye Level>인 모양인데 한국어판 제목은 본문 앞부분의 문장을 그대로 따온,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이다. 도시 생활과 도시 그 자체(이 책에서는 저자가 사는 뉴욕)를 묘사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저자의 에세이 첫꼭지 내용의 정수가 담긴 문장이라 생각했는데 이를 책제목으로 고르다니... 편집자분들의 센스에 박수를.

뉴욕에서의 친구 관계는 우울에 몰두하는 일과 표현하는 능력에 매혹되는 일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내게 가르쳐준다. 어떻게든 좀 더 높은 수준의 균형 상태에 도달하는 일, 나는 친구 사이에서는 그 일이 일반적인 부부 사이에서와 다르게 일어날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우리는 모두 예전에 결혼이란 걸 해본 사람들 아닌가. 많은 사람들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내면의 싸움을,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결론이 나는 전쟁을 하며 삶을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는 우위를 차지하는 한두 가지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도시는 이런 역학의 영향 아래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 P22

(...)아침 열 시에 여기 8번로에서,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이 선명히 새겨진 얼굴로 그 거리를 등지고 선 여자는 내게 화려한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 호화로운 방식으로 추췌한 자연 그대로의 환경 속 보석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것은 오직 도시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 P23

그 머리칼, 그 뉴욕 스타일 곱슬머리. 그 머리에는 우리 상상 이상으로 ‘한데 모인 풍성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 P24

도시에서 사회적 유동성이란 ‘누구도 다른 누구에서도 도망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 P33

"난 이제 어떡하죠?" 나는 여자의 두눈을 들여다 보았따. "알게 되실 거예요" 내가 말했다.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엘레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몸을 돌려 밤 한복판으로 걸어 나갔다. - P35

(도시에서 스쳐 지나간 모든 행인들은)그들은 내게 서사적인 충동을 되돌려준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준다. 내 삶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도록 나를 일꺠워준다. - P46

사랑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준비된 순간‘이란 여전히 삶의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다.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여러 요소가 충분히 결합하는 그 순간 말이다. 그 순간에 응답하는 사람은 결코 그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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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이 책의 2장 중 인종차별 파트를 읽고 있다. 왜 나는 이 책을 전자책으로밖에 읽을 수 없어서 모든 책에 펜을 들고 밑줄을 좍좍 그을 수 없는 것인가...

문장들을 통째로 외울 수만 있다면 좋겠다.

인종차별은 당신의 피해망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인종차별이 당신이 말하는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방법이다. 마치 우리가 배제된 느낌을 설명하기 위해 인종차별을 발명해 내기라도 한 것 처럼, 마치 어떤 장소에 가지 못하는 책임을 인종차별주의에 덮어씌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내 내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피해망상과, 나쁜 느낌을 가질 만한 타당한 이유들이다. 아마도 문제는 이 피해망상에 합리적 근거가 있음을 내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가 정말 피해망상인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 벌어지고 있고 또 벌어질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일종의 피해망상적 불안을 느낀다.

x라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인종차별의 문제인지, 인종차별의 결과인지 나는 결코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x는 인종차별에 관한 것일 가능성이 있는 것, 당신이 몸담고 있는 세게에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몸담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경험된다. 인종차별은 피해망상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인종차별이 하는 일이다.

백인성은 피해망상 판타지에 의해서, 그리고 피해망상 판타지의 효과에 의해서 재생산되고 그것이 우리를 피해망상적으로 만든다. 우리가 그렇게 느낌으로써 피해망상은 진실이 된다. 그리고 그 진실을 외칠 때 아픈 것은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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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는 행복의 불의를 읽어 내면서 책을 다 읽지 못한다. 행복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간주되는 누군가에게만 주어지고 다른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금발여자가 행복을 모두 가져가는 그런 책은 이제 더 이상 익지 않을 거야. 금발 여자에 대한 편견이 생기려고 해. 이제부터는 검은 여자들이 승리하는 그런 이야기를 좀 줘. 균형을 맞추게. 난 레베카와 플로라 매키버, 미나같은 불행한 검은 여자들의 복수를 하고 싶어.

행복을 삶과 상상력과 욕망의 포기로 서술하는 것이다.

행복이 무엇을 포기하게 하는지, 누구를 포기하는지 보여 주면서 행복의 불의를 환기하고 있기도 하다. 행복으 포기하는 사람들을 포기하면서 행복은 그 일관성을 얻는다. 우리는 행복을 아주 단순히 관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페미니즘은 가족 형태의 재생산을 중심으로 뭉쳐지지 않는 여성들의 욕망에 시간과 공간을 부여한다. 결국 페미니스트들은 기꺼이 소란을 일으키겠다는 사람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심지어 고집을 부려야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주체의 의지가 다른 사람들의 의지, 즉 그 의지가 일반의지 또는 사회의지로 물화된 이들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으 때 고집스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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