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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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영웅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

 

최근에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이 재조명 받고 있다. 영화 명량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이 있다. 살자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자고 하면 살 것이라는 이러한 용기로 국란을 이겨낸 모습에 감명을 받아 칼의 노래를 다시 읽게 되었다.

 

소설에서 이순신 장군의 투옥된 장면부터 시작한다. 선조의 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투옥된 이후에 조선 수군 연합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후에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한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루지 못한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관에 직접 누우셨다는 것과 시신이 가랑잎처럼 가벼웠다는 사실을 듣자, 홀로 술을 마시며 슬픔을 삼킨다.

 

두 달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보았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얼른 떠나라는 말씀보다는 차라리,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셨다면 그의 마음이 이토록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과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대한 부담감은 그를 짓누른다.

 

그 이후에 이순신 장군은 고작 12척의 배로 명량으로 출전을 하게 된다. 왜적의 330척의 배를 이겨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그는 죽음을 본다. 자신의 여종이었던 여진의 시체를 보고 개별적인 죽음들 앞에서 수많은 죽음을 본다. 그 수많은 죽음들을 위로할 수 없음을 안다.

 

정유년 명량해전이 끝나고 난후 아들 면은 아산 고향에서 죽는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지키기에 앞서 자신의 아들을 지켜낼 수 없었다는 사실에 홀로 눈물을 훔친다. 아들의 어릴 적 옹알이를 하던 모습을 추억한다. 죽기 전에 홀로 싸우던 면의 분노를 떠올린다. 그리고 칼을 받고 혼자서 죽어갈 때의 면의 무서움을 생각했고, 쓰러져 통곡하던 늙은 아내를 떠올렸다.

 

정유년에 잠시 전쟁이 멈추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멈추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아들 면의 모습과, 여종 여진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출전의 날이 다가온다. 백성들은 수영을 또 버리시는 것이냐며 애원을 하고 다시 돌아와 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무사히 귀환할 것을 약속하지 못한다. 노량에서 자신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것일까? 그는 서서히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끝내 죽지만, 끝까지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부하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죽음도 개별적인 죽음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 소설 속에서 이순신장군에 대해 영웅으로서의 면모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을 이기기 위한 외적인 과정보다, 개인의 내적인 고뇌에 대해서 서술한다. 개인이 느끼는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그러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를 얻게 되는데 얼마나 많은 각오가 필요한 것 인지를... 

 

인상적인 구절

p70

명량에서는 순류와 역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명량에서는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였다. 수만 년을 거꾸로 뒤채는 그 물살을 내려다보면서, 우수영 언덕에서 나는 생사와 존망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을 만한 한줄기 역류가 내 몸속의 먼 곳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몸의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바람이었을까. 희미했지만, 그것은 확실했다. 내 몸이 그 희미한 역류를 증거하고 있었다. 그것이 삶에 대한 증거인지 죽음에 대한 증거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여기는 사지였다. 일출 무렵의 아침 바다에서는 늘 숨을 곳이 없었다. 사지에서, 죽음은 명료했고, 그림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역류 속에서 삶 또한 명료했다. 사지에서, 삶과 죽음은 뒤엉켜 부딪혔다. 그것은 순류도 아니었고 역류도 아니었다. 거기서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것인지, 삶을 각오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 모호함을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p81

송만호, 어떤 진이 좋겠는가?

송여종은 머뭇거렸다.

이제 배가 열두 척이온즉....

안위가 말했다.

열두 척으로 진을 짠다면 대체 어떤...?

내가 말했다.

아무런 방책이 없다. 일자진뿐이다. 열두 척으로는 다른 진법이없다.

수령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 김응함이 입을 열었다.

일자진이라 하심은....?

횡렬진이다. 모르는가?

열두 척을 다만 일렬횡대로 적 앞에 펼치신다는 말씀이시온지?

그렇다. 밝는 날 명량에서 일자진으로 적을 맞겠다.

수령들이 다시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했다.

적의 선두를 부수면서. 물살이 바뀌기를 기다려라. 지휘체계가 무너지면 적은 삼백 척이 아니라. 다만 삼백 개의 한 척일 뿐이다. 이제 돌아가 쉬어라. 곧 날이 밝는다.

 

p106

나는 겨우 말했다.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여자가 죽으면 어디가 먼저 썩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 썩음에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나의편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모든 산 자의 적인 듯도 싶었다. 내 몸은 여진의 죽은 몸 앞에서 작게 움츠러들었다.

 

p124

나는 칼로써 지켜내야 하고 칼로써 막아내야 할 세상의 의미를 돌이켜볼 수 없었고, 그 하찮음들은 끝끝내 베어지지 않는다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p159

(아버님, 저는 죽었습니다.)

면이 말할 때, 죽은 머리는 옆으로 꺾여져 있었다. 눈썹과 이마가 나를 닮아 있었다. 저것이 나로구나, 라고 나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저것이 나로구나, 라고 나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나는 면을 꾸짖었다.

(죽은 녀석이 너뿐이더냐? 내가 죽인 적이 헤아릴 수 없고 네가 죽인 적 또한 적지 않거늘, 네 어찌 내꿈을 어지럽히느냐.)

(아버님, 저의 칼을 찾아주십시오.)

(칼을 어찌했느냐?)

(칼을 놓쳤습니다. 눈이 멀어서 찾울 수가 없습니다.)

(물러가라. 무인이 칼을 놓쳤으면 죽어 마땅하지 않겠느냐.)

면은 다가와 내 다리에 매달려 울었다. 면은 잘려진 어깨로 울었고, 거기서 눈물이 흘렀다.

(아버님. 죽을 때 무서웠습니다. 칼을 찾아주십시오.)

(가거라, 죽었으면 가거라. 목숨은 물리지 못한다. 칼 또한 그러하다. 다시는 내 꿈에 얼씬거리지 말아라.)

면은 울면서 돌아섰다. 무릎걸음으로 면은 멀어져갔다. 면이 엉덩이를 밀어서 멀어져가는 쪽으로 노을이 붉었다. 노을 진 갈대숲 속으로 면이 기어들어갈 때 나는 면을 불렀다.

(면아, 면아.)

 

p209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이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을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 있지 않았다.

 

p340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전부터 내 몸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 북을······· 계속······울려라. 관음포······ 멀었느냐?

 

·····(중략)·····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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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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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상처를 안고 산다..

 

자신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두 남녀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했다. 유정은 자신이 강간당한 사실을 알면서도, 집안을 위해 끝끝내 숨겨온 어머니를, 윤수는 자신과 동범이자, 두 여자와 한 아이를 죽인 선배를 용서한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산다. 아니,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산다. 자신의 상처를 숨기면, 그 상처는 더더욱 벌이지고 흉터가 남는다.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생기는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바로 치료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자랐더라도, 평생을 불우하게 컸더라도, 사람들은 가지각색으로 자신의 상처를 안고 산다. 하지만, 그러한 상처는 흉터가 생기지 않게 치료가 가능하다. 스스로 그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끝내 그 상처를 받아들이고, 두 남녀는 치유를 하게 된다.

 

유정에게는 15, 윤수에게는 평생이라는 세월을 고통을 받아왔지만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는 이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야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을 만났지만, 바로 헤어짐이라니, 참 슬프다.

 

소설의 전개가 아쉬운 점이 많다. 윤수가 자신이 불우하다면서, 그 전에 했던 범죄를 정당화하는 모습이 조금 보이고, 사형수들을 옹호하는 모습이 조금 불쾌하다. 물론 사형수들 중에서 억울한 사람이 있겠지만, 그래도 윤수는 잘못을 했다. 애초에 범죄의 목적을 갖고, 그 집에 찾아간 것이며, 범죄를 저지른 후에 도주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잡힌 장소에서 인질을 잡고 칼을 들고 협박한 것도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형제 존치론자로서, 소설의 시각이 불편했다.

 

감명깊은 구절

p7

그날 두 여자와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죽어 마땅하며 살 가치가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저런 여자에게 돈이 많다는 것은 벌레에게 비단을 감아 놓은 것과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내가 그 돈을 좋은 일에 사용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평생을 자기 것이라고는 가져본 일이 없던 여자였습니다. 평생을 남에게 빼앗기고만 살던 여자, 그 여자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삼백만원 만 있으면 그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게는 삼백만 원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날마다 죽어가는데, 하늘이 있다 해도, 하늘이 있는지 하늘을 바라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르고 살았지만, 나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정의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정의 말입니다.

 

p15

나로 말하자면, 나에 관해 굳이 말하자면, 나는 엉망이었던 사람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고,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하는 이름이로 내 생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나만을 위해 존재하다가 심지어 나 자신만을 위해 죽고자 했다. 나는 쾌락의 신도였다. 자신을 잃고 감각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언제나 내 견고한 가족의 성곽으로 발길을 내지르곤 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밤새 춤을 추었다. 그 사소한 일상이 실은 나 자신을 차근차근 파괴해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설사 알았다 해도 멈추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온 은하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만 성이 차던 존재, 술에 취한 날이면, 닫힌 문들을 발길로 차면서 나는 진실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P32

고모·······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루하고 진부했어.

지겹고 짜증났어·········· 이렇게 더 살면 지루한 세상에 진부한 일상이 하루 더 보태질 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렇게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이어서 고모 말대로 언젠가는 죽는 거니까. 나는 내 삶 전체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었어. 그리곤 세상을 향해 외치는 거야. 그래, 나는 쓰레기다! 난 실패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도저히 구제불능이다·····,”

모니카 고모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뜻 밖에도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실은 그 무연한 그 눈길이 나는 언제나 두려웠었고 진정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거기에는 그녀를 향한 내 존경심이 분명히 있었다.

유정아, ····· 그 강검사인가 하는 사람을 사랑했었니?”

고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촌뜨기를?”

······ 상처받았잖아.”

나는 가만히 있었다.

다시 생각해볼 테냐?”

“·······용서할 수 없었지. ·······근데 고모, 내가 생각해봤는데 사랑은 아닌 거 같았어. 사랑하면 마음이 아프잖아. 그런데 아프지는 않았어. 사랑하면 나랑 헤어져도 그 사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해야잖아? 그런데 그런 생각 안 들었어····· 그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배경만 보고 쉽게 그 사람을 믿어버린 나를, 실은 십오 년 동안 반항이란 걸 죽도록 한 내가 겨우 다시 오빠나 새언니나 그런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게 싫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싫은 감정에마저 배반당했다는게 싫었어·····.”

 

p267 ~ P268

사형수였던 사람이 대통령 당선되었대요. 그 사람이 자기 재임 기간중에 사형집행 안 할 거라구 했거든. 우리 형제들이 그러니까 우리 어쩌면 집행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사람이 이제 대통령 당선자니까····· 그러더라구. 유정이 누님, 나 생각했는데····· 나 수갑 찬 손이라도 아이들한테 편지 쓰고, 나 수갑찬 몸이라도 여기서 있는 힘껏 사람들에게 내가 받았던 사랑전하면서····· 여길 수도원처럼 생각하면서 살면······ 나그렇게라도 살아 있으면 혹시 안 될까, 염치없지만, 정말 염치없지만 나 처음 그런 생각했어요·····.”

그것이 내가 윤수를 본 마지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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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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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한층 더 성장하기 위해-

 

소설에서 싱클레어는 하루를 백년같이 보낸다. 크로머라는 일진에게 약점을 잡혔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싱클레어는 금전을 갈취당하며, 그 액수가 점점 커지게 되고, 나중에는 누나까지 데리고 오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는다.

 

싱클레어는 스스로 대항하거나,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라면, 크로머와의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을 일이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크로머의 괴롭힘에 대한 걱정으로 자주 아프기까지 한다. 그런데 데미안이 갑작스럽게 독심술로 싱클레어의 마음을 간파한 것처럼, 싱클레어가 자신의 고민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깔끔하게 해결해준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나타나서 크로머를 물리쳐준 것에 대해서, 감사함보다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성서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내용에 집착을 하고, 자신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라는 호기심을 갖게 된다. 데미안과의 대화에서 데미안이 카인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데,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데미안은 카인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어떤 강한 사람이 어떤 약한 사람 하나를 때려죽인 행위를, 무조건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행위에 대한 책임이 크로머에게 일방적으로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애초에 싱클레어가 비겁하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들을 늘어놓지 않았더라면 크로머가 그것을 약점을 잡고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 원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아벨이라고 여겼던 싱클레어는 큰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고 밝은 세계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물론 사람이라면,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과 회한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만 적어도 비겁해지지는 않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두려움을 비겁함이 아닌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풍파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동경하게 되지만, 호의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데미안을 계속 피해 다니게 되고, 데미안은 그 유명한 구절을 싱클레어에게 쪽지로 전해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그리고 싱클레어는 고통의 시기를 겪는다. 주변에 몇몇의 친구가 있지만, 진정한 친구는 없는 것이다. 진정한 친구는 데미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사춘기라는 성장통으로 인해 마음을 잡지 못하고, 학교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방황을 한다. 그러던 어느 봄날 공원에서 본 소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소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만, 자기연민에 빠지고 고통에 시달리며, 데미안만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떠오른다.

한참 성장통에 시달리던, 싱클레어는 이제야 압락사스에 대해 의문을 품고 압락사스가 무엇인지 알기위해 피스토리우스를 찾아간다. 피스토리우스는 압락사스에 대해 쉽사리 알려주지 않으며,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압락사스란 스스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 위에 또 한 걸음이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만을 받지 않고, 나 자신이 도움을 받았으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대학생으로 성장한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보고 싶어진다. 데미안이 살던 집으로 찾아가고 에바 부인과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에바 부인과 데미안 그리고 싱클레어는 영혼이 서로 소속되어 있는 것처럼 유대감을 나눈다. 성숙해진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는데,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람이라고 믿었던 데미안이 자신과 같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유대를 나누며 행복하게 지내지만, 데미안은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싱클레어가 낯선 사람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마지막 장의 장면은 남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만큼 성장한 싱클레어를 의미하는 것 같다.

 

비록 청소년기에 비겁하고, 아프고, 끝임 없는 성장통을 겪는 싱클레어일지라도, 자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남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자신에게로 가는 길 위에 한 걸음 내딛을 뿐만 아니라, 쓰러져서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 인상깊은 구절

p42 ~ p44

그는 나를 내버려두고 알트 가세로 접어들었고, 혼자 남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그가 가버리자마자 내게는 그가 했던 모든 말이 터무니 없어 보였다!

카인이 고귀한 인간이고, 아벨이 비겁자라구! 카인의 표적이 표창이라구! 그건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신성한 모독이고 극악무도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 가버리신거야?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가, 아벨을 사랑하시지 않았던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하여 나는 데미안이 나를 놀렸으며 나를 골탕먹일 속셈이었다고 추측했다. 실로 빌어먹게 영리한 녀석이었다. 말은 잘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ㆍ ㆍ ㆍ 아니다ㆍ ㆍ ㆍ ㆍ .

 

ㆍㆍㆍㆍㆍ(중략)ㆍㆍㆍㆍㆍ

 

물론 나 자신도 아주 정삭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심지어 몹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나 자신이 일종의 아벨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이토록 깊이 <다른> 것에 박혀 있었다. 이렇게 심하게 떨어지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이런 것에 그렇게 찬성할 수 없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 그때 마음속에서 기억하나가 번쩍 떠올라, 한순간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비참한 이 상황이 시작되었던 저 고약한 저녁, 그때 나는 한순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밝은 세계 그리고 지혜를 문든 꿰뚫어본 듯 경멸했다! 그렇다, 그때 나는 카인이었고, 그의 표적을 달았던 나는 이 표적은 치욕이 아니라고, 이건 표창이라고 함부로 상상했다. 악의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곳에,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다고.

ㆍㆍㆍㆍㆍ(중략)ㆍㆍㆍㆍㆍ

찬찬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이상하게 데미안은 겁 없는 사람들과 비겁한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했던가! 얼마나 기이하게 그는 카인의 이마에 찍힌 표적을 풀이했던가! 그때 그의 눈, 그 독특한 어른의 눈은 얼마나 놀랍게 빛을 뿜었던가! 그리고 어렴풋하게 이런 생각이 나의 뇌리를 꿰뚫고 갔다. 그 자신이, 데미안이 카인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 자신이 그와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왜 그는 카인을 옹호했을까? 왜 그의 눈에는 그런 힘이 있는 걸까? 왜 그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 겁 많은 사람들, 사실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경건한 사람들에 대하여 비웃음을 띠고 말했던가?

이런 생각을 나는 끝없이 했다. 돌 하나가 우물 안에 던져졌고, 그 우물은 나의 젊은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긴, 몹시 긴 시간 동안 카인, 쳐죽임, 표적은 바로 인식, 회의, 비판에 이르려는 나의 시도들의 출발점이었다.

 

p102 ~ p103

내게 가장 결핍된 한 가지, 그건 친구였다. 내가 바라보기를 아주 좋아하는 두셋의 친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한 사람들에 속했고, 나의 악덕은 오래전부터 이미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피했다. 모든 학우들에게 나는 두 발 밑의 땅이 흔들거리는, 희망 없이 노는 학생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몇 차례 엄하게 벌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만 남았는데 그건 내쪽에서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더 이상 좋은 학생이 아니다. 퇴학당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느낌으로 근근히 건들건들 헤쳐가고 있었다.

신이 우리를 외롭게 만들어 우리들 자신에게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은 많이 있다. 그런 길을 그때 신이 나와 함께 갔던 것이다. 악몽과도 같았다. 더러움과 끈적거림 너머로, 깨진 맥주 잔과 독설로 지새운 밤 너머로 내 모습이 보였다. 내가, 주문에 걸린 몽상가가, 추하고 더러운 길을 쉬지 않고 고통당하며 기어가는 모습이 공주님을 찾아가는 길인데, 오물 웅덩이에, 악취와 쓰레기 가득한 뒷골목에 박혀 있는 그럼 꿈들이었다. 내 형편이 그랬다.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이런 식으로 나는, 외로워지도록, 그리고 무정하게 환히 웃는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는 잠긴 낙원의 문 하나를 나와 유년 사이로 세우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 향수의 눈뜸이었다.

 

          p129 ~ p130

자주 나는 내 꿈속 강렬한 사랑의 영상을 그려보려 했다. 그러나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했더라면, 나는 그 그림 종이를 데미안에게 보냈을 텐데.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알지 못했다.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베아트리체 시절의 저 몇 주일, 몇 달의 다정한 안정이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나의 꿈이 내게 편안해지자마자, 그것은 어느새 벌써 시들고 흐려졌다. 부질없다, 그 뒷모습을 보며 탄식함은! 나는 이제 가라앉지 않은 욕망, 팽팽한 기대의 불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것은 자주 나를 완전히 난폭하게 미치게 만들었다. 꿈의 연인의 영상이 자주 살아 있는 연인의 모습보다 더 똑똑하게 눈앞에 보였다. 내 자신의 손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그 영상과 더불어 나는 이야기 했고, 그 앞에서 울었고, 거기서부터 도피했다. 나는 그것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그 앞에서 눈물 흘리며 무릎 꿇었다. 연인이라고 불렀고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그 성숙한 입맞춤을 예감했다. 그것을 악마며 창녀, 흡혈귀며 살인자라고 부르면, 그 영상은 더할 나위 없이 애정 어린 사랑의 꿈으로 파렴치한 황음으로 나를 유혹했다. 그 무엇도 그 영상에게는 지나치게 선하고 귀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너무 나쁘고 저열하지 않았다.

 

p146

특이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로부터 압락사스에 대하여 들은 것을 짧게 다시 들려줄 수 없지만 그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 위에 또 한 걸음이었다.

나는 당시에, 열여덟 살의 평범치 않은 젊은이였다.

수백 가지 일에서 조숙하고, 다른 수백 가지 일에서 몹시 뒤처지고 무력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주 우쭐하고 교만했으나, 다른 수백 가지 일에서 몹시 뒤처지고 무력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주 우쭐하고 교만했으나, 또 꼭 그만큼 자주 의기소침하고 굴욕스러워했다. 어떤 때는 자신을 천재로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절반쯤 돌았다고 생각했다. 또래들의 기쁨과 생활을 같이 하는 것이 잘 되질 않았고 자주 비난과 근심으로 자신을 소모했다. 마치 내가 절망적으로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기라도 하듯이, 마치 내게 삶이 닫혀져 있기라도 하듯이.

그 자신이 성숙한 괴짜였던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용기와 스스로에 대한 존경을 간직하는 법을 가르쳤다. 내가 한말들, 내가 꾼 꿈들, 나의 환상과 생각에서 늘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언제나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논평하면서 그는 나에게 예를 제시했다.

 

p221 ~ p222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게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네 자신 안으로 귀기울여야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듣겠니?

그리고 또 뭔가 있어! 에바 부인이 말했어. 네가 언젠가 잘 지내지 못하면 날더러 네게 당신의 키스를 해달라고. 나에게 함께 해준 키스를....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조금씩, 그러나 결코 줄어들지 않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사람들이 깨웠다. 붕대를 감아야 했던 것이다.

마침내 완전히 잠이 깼을 때, 나는 얼른 옆 매트리스로 몸을 돌렸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거기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을 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1194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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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 ㆍㆍㆍ만인을 위한 구원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서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단 한사람, 최초에 그것을 자각한 자는 반드시 자살해야 한다.

-<악령>. 도스토옙스키

 

소설속에서 작가는 표백 세대를 정의한다. 표백세대란 이미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객관식 문항에서 우리 세대들이 이미 정해진 답을 고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날 외모며, 학벌이며, 학점이며 완벽한 면모를 보여주는 세연이 어이없게도 50cm도 안되는 깊이에 연못에 빠져 자살하면서 소설은 전개된다. 세연은 자신의 자살을 표백세대의 구원해줄 예수그리스도에 재림으로 여기며, 표백세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자살 전에 그러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을 자살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세연은 자살을 강요하지는 않는데 5년이라는 시간을 주고,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게 한 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자살을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약 없는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들이지만 세연이 죽은 후로, 세연의 망령에 휘둘린다. 세연은 모두가 자살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애초에 주인공 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해 놓는다.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처럼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주변에 인물들의 신앙심을 휘둘러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한 것 같다. 세연은 자신이 예언한대로, 5년 뒤에 자살을 약속한 인물들 중 몇몇이 죽음에 이르고 자살사이트인 와이두유리브 닷컴도 활발하게 운영되었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자살을 하질 원길 바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프루더나, 루비에게 5년이라는 시간을 준 것과 사회에서 촉망받는 직업을 하길 바란 것과 적그리스도로 규정해놓은 라는 인물을 가장 자살확률이 높은 루비에게 연인이 되라며 붙여 놓은 것은 주변 사람들이 사회에 적응하여 열심히 살길 바란 것 같다. 표백세대를 혐오하는 세연이 기성세대가 이미 정해놓은 틀에서 살기는 싫어하면서 자살선언을 하며 사회의 변혁을 바란 것은 이미 모순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세연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주인공인 적그리스도조차도 밴드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7급 공무원을 선택하고 만다. 우리가 사는 삶속에서 이상은 현실에 맞춰서 조금씩 개조되어간다. 이미 Show me the money를 치고 미네랄 10000, 가스 10000을 갖고 사는 삶은 재미없지 않는가? 위화의 인생이라는 소설의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는 구절같이 나는 치열하게 살고 싶다.

 

>인물과 구성

재키 = 세연(소설속에서 최초의 자살 선언자, 와이두유리브닷컴의 창시자, 외모에 학점까지 완벽하며 삼성전자에 합격 했으나 자살)

적그리스도 = (공무원) = 3년간 낙방 끝에 공무원이 됨(주인공의 시각에서 소설이 전개됨)

소크라테스 = 휘영(기자) - 세연이 하라는 대로 기자가 됨.

재프루더 = 병권(공인회계사) - 세연에게 자살을 약속함. 공인회계사 합격 후 5년이 되는 날 자살

루비 = 추윤영(세연을 동경하며 레즈적인 성향이 있음, 세연에게 자살을 약속하고 5년뒤에 자살) : 세연의 지시로 적그리스도와 연예 및 동거를 하나 헤어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감

하비 = 박선우(대기업의 장남) - 세연이 자살하고 나서 최초로 죽은 인물

제리 = 세화 = 세연의 동생(와이두유리브닷컴의 운영자)

메리 = 세연의 친구이나 소설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음(와이두유리브닷컴의 2대운영자가 됨)

와이두유리브닷컴 = 사이트 이용자들은 자살 선언을 통해 예고된 시간과 설계된 자살로 죽음을 중계한다.

 

 

 

>인상깊은 페이지

16p ~ 19p

찰스 맨슨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인 범죄자는 그 전에도 그 뒤에도 얼마든지 있었어. 테드 번디는 최소한 36명에서 60명 가까이 죽였고, 존 웨인 게이시는 33명을 죽였지.

그런데 왜 찰스 맨슨만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샤론 테이트 같은 유명인을 죽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연쇄살인범들이 변태 성욕이나 저급한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한 저능아였던 데 비해 찰스 맨슨 일당은 일단 멀쩡해 보였고, 자기들의 행위에 조잡하나마 어떤 주장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일 거야.

 

ㆍㆍㆍ(중략)ㆍㆍㆍ

 

하지만 사람을 8명이나 죽이는 것은, 그것도 맨슨 패밀리처럼 증거를 숨기려는 노력 따위 하지 않고 되는 대로 저질러버릴 거라면, 그냥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할 수 있지. 자동차 한 대나 어쩌면 식칼 한 자루만으로도 할 수 있어.

단지 정상인이라면 감히 넘을 생각조차 못하는 어떤 선을 살짝 넘기만 하면돼.

에드 게인이나 존 웨인 게이시처럼 완전히 미쳐버린 놈이 그 선을 넘는건 의미가 없어. 그런 자들의 행위는 샴쌍둥이나 늑대인간증후군처럼 희귀한 유전병, 기이한 사건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니까. 대개 사람들은 그 선을 넘은 자들을 완전히 미쳐버린 놈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성의 정의를 보호하려 하지. 순환논법이야.

그러나 가끔은, 완전히 미친 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그선을 넘어.

그러면 많은 것이 바뀌지. 처음으로 변기통을 미술관 안으로 갖고 들어온 사람은 예술의 개념을 바꿨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납치해 건물에 처박은 놈들은 전쟁과 테러의 개념을 바꿨어.

만약 찰스 맨슨에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조리에 닿는 메시지가 있었다면, 그의 말은 얼마나 파급력이 있었을까. 그는 정말로 세상을 조금 바꿀 수도 있었어. 그러기 위해서는 단 8명만 죽이면 됐어. 8명을 죽였더니 온 세상이 덜 떨어진 몽상가인 그에게 귀를 기울였지.

어떤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그해에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하고 스무 권짜리 대하소설을 펴내도 그렇게 매스컴을 타지는 못할거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을 넘으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메시지를 외치는 것.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은 수만 명이지만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와 베드로만 기억하지.

그리스도교는 단 한 사람의 메시지와 단 한사건의 십자가형에서 비롯됐어.

계획을 잘만 세운다면, 사악한 상상력이 따른다면, 단 몇 명의 죽음으로도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찰스 맨슨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젊은이를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이나 그네들의 주장이 어설픈 추종자들을 낳은 원인에 대해 히피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지적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한 사람이 멀쩡한 젊은이들을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저지를 만큼 광적인 정신 상태를 빠뜨리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그런 비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우리는 히피즘보다 더 거대한 정신적 유령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우리는 위대한 좌절의 시대를 세연의 표현을 빌리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살고 있다고.

그런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국가 대표 축구선수들을 응원하거나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던 게 아닌가.

 

77p~78p

가끔 내가 세상에 뭘 보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렸을 때 나는 사람이 저마다 검거나 붉거나 푸른 색깔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 색들이 어울려서 세상이라는 화폭에 어떤 이미지를 그려낸다는 상상을 했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압도적인 재능을 펼쳐 그 주변으로 그 개인이 지닌 색의 빛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렸어.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그래서 자살하려는 거야? 아무것도 할게 없어서?”

아니! 난 뭔가 위대한 일을 할거야. 생각해놓은 일도 있고.”

 

143p

난 내가 많은 재능과 가능성을 타고났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삶을 어떤 작품으로 만들어내고 싶어. 그런데 그게 실현될 가능성은 원래도 아주 작고, 특히나 이 사회에서 내가 가진 이조건들로 그걸 이뤄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 나뿐 아니라 우리 세대의 모든 젊은이가 그래. 그런 의미에서 내가 바로 우리 세대야.

물론 그렇게 계속 삶을 유지하는 게 자살하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건 알아. 그런데 그렇다고 그런 삶을 선택해야 되?

그런 걸 이뤄봤자 별거 없으리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어. 이런 저런 운이 따르고 내가 지금처럼 계속 도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뭔가 다른 대단한 일을 이뤄낼 수 있을 가능성이 눈곱만큼 있기는 하겠지. 반면 지금 내앞에 있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고, 지금 하지 않으면 이 기회는 지나가버려.

나는 순교할 기회를 잡은 예비 성인이야. 이 죽음은 내 인생을 완성하는 거야. 같잖은 시인이나 로커들의 죽음보다 이게 훨씬 의미 있는거야. 왜 내가 이 기회를 저버려야 해? 다른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닳고 닳아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야.

나는 내가 지금처럼 날카로울 때 죽고싶어.

게다가 지금의 나를 봐. 앞으로 살 날이 정해져 있고 목숨을 바쳐 추진해야 할 목적이 생기니 지금 얼마나 활기에 차 있는지. 지금 껏 이렇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제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재키는 제리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 들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계획은 너 자신을 위해서인 거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건 아니지?”

어떤 일이 위대해지려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어야 해.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위대하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내가 시대정신을 꿰뚫어봤다는 뜻이 되는 거야.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할 때 그 동기가 그저 순수하기만 했을까,

아무런 정치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도스토옙스키가 도박 빚을 갚으려고 <죄와 벌>을 썼다고 해서 그 책의 가치가 달라져?”

 

p159 ~ p161(‘자살 선언은 언제 하는 것이 좋은가)

절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 했을 때 자살하지 마라. 그런 때 자살하면 세상은 당신의 선언을 그저 패배자의 개인적인 도피로 여길 것이다. 여태까지 인터넷 자살사이트나 집단 자살자가 그렇게 많았건만 모두 잊힌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자살하든 세상은 뭔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심적 갈등이 심했고 도피처를 찾던 중이었다라고 우겨댈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참았다가 당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실행하라. 이 선언이 분명한 사회적 저항임을 전달하려면 그래야만 한다.

 

p172(자살선언은 범죄인가)

자살 선언이 과연 폭행이나 강간, 절도, 강도, 방화, 납치, 공갈협박, 횡령, 뇌물 수수, 살인과 같은 대열의 범죄인가?

자살이 범죄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 중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논리를 먼저 폐기 처분하도록 하자.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은 없다.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은 신과 같은 절대자가 있을때에만 성립하는 것이고, 그런 절대 기준이 있다면 아마 자살 외에도 자위 행위나 태만, 공상, 인본주의 서적을 읽거나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는 등 다른 많은 일도 스스로에 대한 범죄가 될 것이다. 같은 논리로 잘못된 사회의 사고방식에 순응해 아무런 거부도 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존엄성을 한낱 사회의 부품 또는 노동자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주장도 성립한다.

그렇다면 자살로 자기 자신 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당신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얼마간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부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친지와 친구, 심지어 형제나 이성 친구까지도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정도 상처는 극복해낼 수 있다. 냉정히 생각해보라. 당신 삶에 그렇게 대단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다. 자신의 죽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끼칠 상처가 우려돼 자살 선언을 할 수없다면, 그런 경우는 이해하겠다.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마지막으로, 자살이 공동체에 해가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자살은 공동체에 해가 된다. 자살은 그 공동체가 믿고 있는 신화에 의문을 제기해 결속을 무너뜨린다. 바로 그렇기 떄문에 우리가 자살 선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러므로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그걸 범죄로 규정한다. 자살 선언에 동참하든 하지 않든, 그런 규정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지는 여러분 마음이다.

 

p191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할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정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 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여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p196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싶나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 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 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양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생활에서 문화예술 및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행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도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한 사회에서 표백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p202

표백세대가 완성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사는 것이다. 존경받은 인물로 여겨지는 법조인, 정치가, 성공한 기업인이 속하는 반면에, ‘고시폐인’, 실패한 사업가나 장사꾼들도 속한다. 타협이란 완성된 가치관에 약간의 의심을 품으나 어느정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소극적 저항은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부류로 정의된다.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사회에서 존경받을 없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류의 일부는 순응형또는 타협형으로 돌아설 준비가 되어있다. 마지막으로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완성된 사회는 이들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데 망설임이 없으며 이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껏해야 그들은 기억에 남는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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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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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궤짝 위엔 열다섯 사람

얼씨구 좋다, 럼주가 한병!

나머지 술과 악마가 이미 해치웠네.

얼씨구 좋다, 럼주가 한병!

 

소설속에서 주인공 짐 호킨스는 자신은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존 실버를 동경한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해적들을 통솔하며, 굽힐 때는 굽힐 줄 아는 처세술과 뛰어난 지략으로 집단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모를 본 짐 호킨스는 가끔씩 책임감 없이 일탈행위를 하는데, 존 실버처럼 자신도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일탈행위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책임있고 정의로운 인물인 리브지와 강직한 스몰렛 선장보다 존 실버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듯이, 알 수 없는 매력에 매료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인물은 존 실버와 같은 인물인 것 같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면모와 호탕한 카리스마와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은 얻고 만다는 승부욕까지 갖추었기 때문이다. 굽힐 때는 굽힐 줄 알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지 다하는 모습은 참 매력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여정 속에서 얻는 것은 과연 보물이 전부일까?

우리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가끔씩 모험을 떠나고자 하는 충동이 생기곤 하지만, 마음먹은 것처럼 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을 하고 만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상의 모든 짐을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부담을 안고 사는데, 자신이 가진 여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살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모험을 떠나게 된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보물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놓치곤 한다.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면 열매만 보고, 나무의 줄기와 뿌리를 보지 못하듯이, 주변의 것들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모험속에서 얻는 것은 보물뿐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인연과 잊지 못할 추억과 그러한 순간자체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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