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0 명량에서는 순류와 역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명량에서는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였다. 수만 년을 거꾸로 뒤채는 그 물살을 내려다보면서, 우수영 언덕에서 나는 생사와 존망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을 만한 한줄기 역류가 내 몸속의 먼 곳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몸의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바람이었을까. 희미했지만, 그것은 확실했다. 내 몸이 그 희미한 역류를 증거하고 있었다. 그것이 삶에 대한 증거인지 죽음에 대한 증거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여기는 사지였다. 일출 무렵의 아침 바다에서는 늘 숨을 곳이 없었다. 사지에서, 죽음은 명료했고, 그림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역류 속에서 삶 또한 명료했다. 사지에서, 삶과 죽음은 뒤엉켜 부딪혔다. 그것은 순류도 아니었고 역류도 아니었다. 거기서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것인지, 삶을 각오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 모호함을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p81 송만호, 어떤 진이 좋겠는가? 송여종은 머뭇거렸다. 이제 배가 열두 척이온즉.... 안위가 말했다. 열두 척으로 진을 짠다면 대체 어떤...? 내가 말했다. 아무런 방책이 없다. 일자진뿐이다. 열두 척으로는 다른 진법이없다. 수령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 김응함이 입을 열었다. 일자진이라 하심은....? 횡렬진이다. 모르는가? 열두 척을 다만 일렬횡대로 적 앞에 펼치신다는 말씀이시온지? 그렇다. 밝는 날 명량에서 일자진으로 적을 맞겠다. 수령들이 다시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했다. 적의 선두를 부수면서. 물살이 바뀌기를 기다려라. 지휘체계가 무너지면 적은 삼백 척이 아니라. 다만 삼백 개의 한 척일 뿐이다. 이제 돌아가 쉬어라. 곧 날이 밝는다. p106 나는 겨우 말했다.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여자가 죽으면 어디가 먼저 썩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 썩음에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나의편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모든 산 자의 적인 듯도 싶었다. 내 몸은 여진의 죽은 몸 앞에서 작게 움츠러들었다. p124 나는 칼로써 지켜내야 하고 칼로써 막아내야 할 세상의 의미를 돌이켜볼 수 없었고, 그 하찮음들은 끝끝내 베어지지 않는다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p159 (아버님, 저는 죽었습니다.) 면이 말할 때, 죽은 머리는 옆으로 꺾여져 있었다. 눈썹과 이마가 나를 닮아 있었다. 저것이 나로구나, 라고 나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저것이 나로구나, 라고 나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나는 면을 꾸짖었다. (죽은 녀석이 너뿐이더냐? 내가 죽인 적이 헤아릴 수 없고 네가 죽인 적 또한 적지 않거늘, 네 어찌 내꿈을 어지럽히느냐.) (아버님, 저의 칼을 찾아주십시오.) (칼을 어찌했느냐?) (칼을 놓쳤습니다. 눈이 멀어서 찾울 수가 없습니다.) (물러가라. 무인이 칼을 놓쳤으면 죽어 마땅하지 않겠느냐.) 면은 다가와 내 다리에 매달려 울었다. 면은 잘려진 어깨로 울었고, 거기서 눈물이 흘렀다. (아버님. 죽을 때 무서웠습니다. 칼을 찾아주십시오.) (가거라, 죽었으면 가거라. 목숨은 물리지 못한다. 칼 또한 그러하다. 다시는 내 꿈에 얼씬거리지 말아라.) 면은 울면서 돌아섰다. 무릎걸음으로 면은 멀어져갔다. 면이 엉덩이를 밀어서 멀어져가는 쪽으로 노을이 붉었다. 노을 진 갈대숲 속으로 면이 기어들어갈 때 나는 면을 불렀다. (면아, 면아.) p209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이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을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 있지 않았다. p340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전부터 내 몸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 북을······· 계속······울려라. 관음포······ 멀었느냐? ·····(중략)·····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