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 ㆍㆍㆍ만인을 위한 구원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서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단 한사람, 최초에 그것을 자각한 자는 반드시 자살해야 한다.

-<악령>. 도스토옙스키

 

소설속에서 작가는 표백 세대를 정의한다. 표백세대란 이미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객관식 문항에서 우리 세대들이 이미 정해진 답을 고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날 외모며, 학벌이며, 학점이며 완벽한 면모를 보여주는 세연이 어이없게도 50cm도 안되는 깊이에 연못에 빠져 자살하면서 소설은 전개된다. 세연은 자신의 자살을 표백세대의 구원해줄 예수그리스도에 재림으로 여기며, 표백세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자살 전에 그러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을 자살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세연은 자살을 강요하지는 않는데 5년이라는 시간을 주고,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게 한 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자살을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약 없는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들이지만 세연이 죽은 후로, 세연의 망령에 휘둘린다. 세연은 모두가 자살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애초에 주인공 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해 놓는다.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처럼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주변에 인물들의 신앙심을 휘둘러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한 것 같다. 세연은 자신이 예언한대로, 5년 뒤에 자살을 약속한 인물들 중 몇몇이 죽음에 이르고 자살사이트인 와이두유리브 닷컴도 활발하게 운영되었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자살을 하질 원길 바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프루더나, 루비에게 5년이라는 시간을 준 것과 사회에서 촉망받는 직업을 하길 바란 것과 적그리스도로 규정해놓은 라는 인물을 가장 자살확률이 높은 루비에게 연인이 되라며 붙여 놓은 것은 주변 사람들이 사회에 적응하여 열심히 살길 바란 것 같다. 표백세대를 혐오하는 세연이 기성세대가 이미 정해놓은 틀에서 살기는 싫어하면서 자살선언을 하며 사회의 변혁을 바란 것은 이미 모순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세연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주인공인 적그리스도조차도 밴드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7급 공무원을 선택하고 만다. 우리가 사는 삶속에서 이상은 현실에 맞춰서 조금씩 개조되어간다. 이미 Show me the money를 치고 미네랄 10000, 가스 10000을 갖고 사는 삶은 재미없지 않는가? 위화의 인생이라는 소설의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는 구절같이 나는 치열하게 살고 싶다.

 

>인물과 구성

재키 = 세연(소설속에서 최초의 자살 선언자, 와이두유리브닷컴의 창시자, 외모에 학점까지 완벽하며 삼성전자에 합격 했으나 자살)

적그리스도 = (공무원) = 3년간 낙방 끝에 공무원이 됨(주인공의 시각에서 소설이 전개됨)

소크라테스 = 휘영(기자) - 세연이 하라는 대로 기자가 됨.

재프루더 = 병권(공인회계사) - 세연에게 자살을 약속함. 공인회계사 합격 후 5년이 되는 날 자살

루비 = 추윤영(세연을 동경하며 레즈적인 성향이 있음, 세연에게 자살을 약속하고 5년뒤에 자살) : 세연의 지시로 적그리스도와 연예 및 동거를 하나 헤어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감

하비 = 박선우(대기업의 장남) - 세연이 자살하고 나서 최초로 죽은 인물

제리 = 세화 = 세연의 동생(와이두유리브닷컴의 운영자)

메리 = 세연의 친구이나 소설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음(와이두유리브닷컴의 2대운영자가 됨)

와이두유리브닷컴 = 사이트 이용자들은 자살 선언을 통해 예고된 시간과 설계된 자살로 죽음을 중계한다.

 

 

 

>인상깊은 페이지

16p ~ 19p

찰스 맨슨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인 범죄자는 그 전에도 그 뒤에도 얼마든지 있었어. 테드 번디는 최소한 36명에서 60명 가까이 죽였고, 존 웨인 게이시는 33명을 죽였지.

그런데 왜 찰스 맨슨만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샤론 테이트 같은 유명인을 죽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연쇄살인범들이 변태 성욕이나 저급한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한 저능아였던 데 비해 찰스 맨슨 일당은 일단 멀쩡해 보였고, 자기들의 행위에 조잡하나마 어떤 주장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일 거야.

 

ㆍㆍㆍ(중략)ㆍㆍㆍ

 

하지만 사람을 8명이나 죽이는 것은, 그것도 맨슨 패밀리처럼 증거를 숨기려는 노력 따위 하지 않고 되는 대로 저질러버릴 거라면, 그냥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할 수 있지. 자동차 한 대나 어쩌면 식칼 한 자루만으로도 할 수 있어.

단지 정상인이라면 감히 넘을 생각조차 못하는 어떤 선을 살짝 넘기만 하면돼.

에드 게인이나 존 웨인 게이시처럼 완전히 미쳐버린 놈이 그 선을 넘는건 의미가 없어. 그런 자들의 행위는 샴쌍둥이나 늑대인간증후군처럼 희귀한 유전병, 기이한 사건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니까. 대개 사람들은 그 선을 넘은 자들을 완전히 미쳐버린 놈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성의 정의를 보호하려 하지. 순환논법이야.

그러나 가끔은, 완전히 미친 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그선을 넘어.

그러면 많은 것이 바뀌지. 처음으로 변기통을 미술관 안으로 갖고 들어온 사람은 예술의 개념을 바꿨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납치해 건물에 처박은 놈들은 전쟁과 테러의 개념을 바꿨어.

만약 찰스 맨슨에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조리에 닿는 메시지가 있었다면, 그의 말은 얼마나 파급력이 있었을까. 그는 정말로 세상을 조금 바꿀 수도 있었어. 그러기 위해서는 단 8명만 죽이면 됐어. 8명을 죽였더니 온 세상이 덜 떨어진 몽상가인 그에게 귀를 기울였지.

어떤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그해에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하고 스무 권짜리 대하소설을 펴내도 그렇게 매스컴을 타지는 못할거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을 넘으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메시지를 외치는 것.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은 수만 명이지만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와 베드로만 기억하지.

그리스도교는 단 한 사람의 메시지와 단 한사건의 십자가형에서 비롯됐어.

계획을 잘만 세운다면, 사악한 상상력이 따른다면, 단 몇 명의 죽음으로도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찰스 맨슨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젊은이를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이나 그네들의 주장이 어설픈 추종자들을 낳은 원인에 대해 히피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지적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한 사람이 멀쩡한 젊은이들을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저지를 만큼 광적인 정신 상태를 빠뜨리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그런 비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우리는 히피즘보다 더 거대한 정신적 유령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우리는 위대한 좌절의 시대를 세연의 표현을 빌리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살고 있다고.

그런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국가 대표 축구선수들을 응원하거나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던 게 아닌가.

 

77p~78p

가끔 내가 세상에 뭘 보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렸을 때 나는 사람이 저마다 검거나 붉거나 푸른 색깔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 색들이 어울려서 세상이라는 화폭에 어떤 이미지를 그려낸다는 상상을 했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압도적인 재능을 펼쳐 그 주변으로 그 개인이 지닌 색의 빛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렸어.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그래서 자살하려는 거야? 아무것도 할게 없어서?”

아니! 난 뭔가 위대한 일을 할거야. 생각해놓은 일도 있고.”

 

143p

난 내가 많은 재능과 가능성을 타고났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삶을 어떤 작품으로 만들어내고 싶어. 그런데 그게 실현될 가능성은 원래도 아주 작고, 특히나 이 사회에서 내가 가진 이조건들로 그걸 이뤄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 나뿐 아니라 우리 세대의 모든 젊은이가 그래. 그런 의미에서 내가 바로 우리 세대야.

물론 그렇게 계속 삶을 유지하는 게 자살하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건 알아. 그런데 그렇다고 그런 삶을 선택해야 되?

그런 걸 이뤄봤자 별거 없으리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어. 이런 저런 운이 따르고 내가 지금처럼 계속 도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뭔가 다른 대단한 일을 이뤄낼 수 있을 가능성이 눈곱만큼 있기는 하겠지. 반면 지금 내앞에 있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고, 지금 하지 않으면 이 기회는 지나가버려.

나는 순교할 기회를 잡은 예비 성인이야. 이 죽음은 내 인생을 완성하는 거야. 같잖은 시인이나 로커들의 죽음보다 이게 훨씬 의미 있는거야. 왜 내가 이 기회를 저버려야 해? 다른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닳고 닳아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야.

나는 내가 지금처럼 날카로울 때 죽고싶어.

게다가 지금의 나를 봐. 앞으로 살 날이 정해져 있고 목숨을 바쳐 추진해야 할 목적이 생기니 지금 얼마나 활기에 차 있는지. 지금 껏 이렇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제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재키는 제리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 들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계획은 너 자신을 위해서인 거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건 아니지?”

어떤 일이 위대해지려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어야 해.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위대하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내가 시대정신을 꿰뚫어봤다는 뜻이 되는 거야.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할 때 그 동기가 그저 순수하기만 했을까,

아무런 정치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도스토옙스키가 도박 빚을 갚으려고 <죄와 벌>을 썼다고 해서 그 책의 가치가 달라져?”

 

p159 ~ p161(‘자살 선언은 언제 하는 것이 좋은가)

절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 했을 때 자살하지 마라. 그런 때 자살하면 세상은 당신의 선언을 그저 패배자의 개인적인 도피로 여길 것이다. 여태까지 인터넷 자살사이트나 집단 자살자가 그렇게 많았건만 모두 잊힌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자살하든 세상은 뭔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심적 갈등이 심했고 도피처를 찾던 중이었다라고 우겨댈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참았다가 당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실행하라. 이 선언이 분명한 사회적 저항임을 전달하려면 그래야만 한다.

 

p172(자살선언은 범죄인가)

자살 선언이 과연 폭행이나 강간, 절도, 강도, 방화, 납치, 공갈협박, 횡령, 뇌물 수수, 살인과 같은 대열의 범죄인가?

자살이 범죄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 중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논리를 먼저 폐기 처분하도록 하자.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은 없다.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은 신과 같은 절대자가 있을때에만 성립하는 것이고, 그런 절대 기준이 있다면 아마 자살 외에도 자위 행위나 태만, 공상, 인본주의 서적을 읽거나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는 등 다른 많은 일도 스스로에 대한 범죄가 될 것이다. 같은 논리로 잘못된 사회의 사고방식에 순응해 아무런 거부도 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존엄성을 한낱 사회의 부품 또는 노동자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주장도 성립한다.

그렇다면 자살로 자기 자신 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당신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얼마간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부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친지와 친구, 심지어 형제나 이성 친구까지도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정도 상처는 극복해낼 수 있다. 냉정히 생각해보라. 당신 삶에 그렇게 대단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다. 자신의 죽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끼칠 상처가 우려돼 자살 선언을 할 수없다면, 그런 경우는 이해하겠다.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마지막으로, 자살이 공동체에 해가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자살은 공동체에 해가 된다. 자살은 그 공동체가 믿고 있는 신화에 의문을 제기해 결속을 무너뜨린다. 바로 그렇기 떄문에 우리가 자살 선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러므로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그걸 범죄로 규정한다. 자살 선언에 동참하든 하지 않든, 그런 규정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지는 여러분 마음이다.

 

p191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할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정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 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여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p196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싶나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 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 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양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생활에서 문화예술 및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행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도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한 사회에서 표백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p202

표백세대가 완성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사는 것이다. 존경받은 인물로 여겨지는 법조인, 정치가, 성공한 기업인이 속하는 반면에, ‘고시폐인’, 실패한 사업가나 장사꾼들도 속한다. 타협이란 완성된 가치관에 약간의 의심을 품으나 어느정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소극적 저항은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부류로 정의된다.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사회에서 존경받을 없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류의 일부는 순응형또는 타협형으로 돌아설 준비가 되어있다. 마지막으로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완성된 사회는 이들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데 망설임이 없으며 이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껏해야 그들은 기억에 남는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11837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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