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 정말 괜찮은 것일까? 


아이들을 기르다 보니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이 유난히도 눈에 들어 온다. 그러다 찾은 책이 바로 [엄마수업]이란 책이다. 내용도 괜찮고 많은 분들이 추천한 책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자가???? 법륜??? 그럼 스님??? 승려가 엄마 수업을 써.??? 처음 받은 충격은 그랬다. 그런데 이 분이 참 특이한 분인가 보다. 작년에 참 유명했던 책이 바로 스님의 주례사라는 책이다. 저자는 역시 법륜이다. 스님이 주례를 서???? 이건 뭐야??? 결혼도 하지 않고 여자와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주례를 해???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거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아함이 자꾸 생겨났다. 


참 톡특한 분이다. 기발한 분이라고 해야할까? 하여튼 법륜이란 분은 약간의 의외성과 함께 뭔가 께림찍함이 묻어있다. 아... 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들은 마시길...


스님이라면 뭐 이런 책을 써야하지 않을까?

득도, 깨달음, 착하게 살자. 등등의 제목이 붙어 있는 교훈적인 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륜스님은 약간의 의외성을 추구하는 분이다. 아니다. 더욱 현실에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인다. 


청년들과 청소년들위해서는 특강을 하고 책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이분은 결코 보통은 아닌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서 일까? 방황하는 이들에게 던져주는 그의 가르침은 감동적이다. 가정과 현실을 떠나지 않으려는 법륜의 열정은 그가 지은 모든 책들에 깊이 스며있다.



















법륜의 책이 모두 이런 일상 만을 주제로 하지는 않는다. 붓다의 경전을 풀어낸 책들과 기도와 깨달음을 담은 책들도 있다. 중세의 천주교가 성과 속을 분리하여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추한 것으로 정죄했다면 개신교는 그것을 하나로 봄으로 속을 성으로 혼돈 시킨 죄가 있다. 둘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고 중용의 도를 추구하는 것을 결코 쉽지 않으리라. 법륜도 아마 이러한 중용을 추구하는 승려로서 고민이 묻어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경험이 진리라고 말한다. 경험할 수 없다면 거짓이라고 말한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오감을 통해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해야할까? 그러면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무도 자신이 경험한 것 밖에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경험도 오류가 있고 편견이 있기 때문에... 참 지식이란 어떤 의미에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해 보자. 비록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자신의 생각을 풀어낼 자격은 있다고.... 

하여튼 내게 법륜스님의 책들은 모두 공감이 가고 특별한 깨달음을 준다. 종교는 달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면에서는 모두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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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셋째주


중국의 고전을 파악해 보면 세 가지의 중요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가장 주 흐름은 공자, 맹자를 중심으로한 유가사상이고, 그 반대의 극단에는 노자, 장자를 중심으로 한 도가이다. 다른 한 흐름은 순자와 한비자로 이어진 법가사상이다. 물론 이 외에는 다른 부류의 사상이 있다.  그럼 묵자는 어느 부류에 넣어햐 할까? 분면 묵자는 공자와 맹자와는 다르고 사실, 많은 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묵자는 반대편인 노자와 장자와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노장사상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면 묵자는 오히려 가정과 삶에 대한 애착이 강열하다. 



공자와의 대결에서 묵자가 공자를 비판한 이유를 가정을 해하는 공자의 허례허식을 실날하게 비판한다. 한 예로 공자는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주장한다. 그러나 묵자는 그것을 실날하게 비판하면서 죽은 자를 위하여 산자를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3년 동안 가장 일도 하지 않고 무덤을 지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3년 동안 무덤 옆 초막에서 거하면 당사자가 건강을 잃고, 일을 하지 못함으로 가정과 나라가 가난해지고, 가장을 돌봐야 하는 다른 가족들 또한 큰 피해를 입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만 보아도 유가와 묵가 사상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유가사상은 예와 법도를 중요시하고, 전통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비해 묵가사상은 철저하게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사상이다. 

전쟁론에서도 유가사상은 전쟁의 반대편에선다. 이부분은 묵가사상도 동일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전쟁은 할 수 있다고 묵자는 주장한다. 공자가 이상향을 추구하는 철학적 관념주의자라고 한다면 묵자는 현실주의자이며 서민적이다. 묵자의 묵도 검은 것을 뜩하며 서민과 별볼일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묵자를 상상의 인물이거나 대명사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다. 


하여튼 이번에 새로 출간되는 묵자편은  국내 제자백가 연구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고 이운구 선생의 유고작이나 다름없다. 다른 출판사의 책과 뭐가 다른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한자는 우리나라 고유의 글자도 아니고, 특히 사상관련 서적은 그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을 때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렌츠 케에자의 라캉연구서인 <주체성과 타자성>이 새롭게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아직 라깡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나에게 이 책은 귀한 선물과 같다. 촘스키를 넘어 라깡에게 배우는 고독한 존재로서의 언어를 들어 볼 참이다. 이탈리아 출신이면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총망받는 석학인 로렌츠 키에자의 라깡에 대한 열정을 들어보자.








마이클 샌델의 신간이 나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제목으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추적한다.

가치는 사전적 정으로 쓸모, 용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정의 측면에서 가치를 논한다면 그것은 정의와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공동체 정의를 지향하는 샌델는 이 책을 통해서 사장의 가치를 묻고 있다. 시장은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곳이다. 가격은 곧 가치를 뜻한다. 그렇다면 사람까지도 가격이 정해지는 것은 어떤가? 샌델은 시장이 가진 어둡고도 탁한 폭력성을 고발한다. 

시장은 도덕이 없다. 아니 지켜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돈이라는 척도에의해 결정되고 가치가 정해진다. 그런의미에서 시장을 통해 경제를 주도하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하고 비인간적인가. 복지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돈이 되지 않는다면 병원도 문을 닫아야하고,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복지도 없어져야 한다. 시장을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돈이 된다면, 마약도 담배도, 술도 괜찬아 진다. 시장은 통제되어야할 위험한 곳이다. 약육강식의 FTA 시장 개방은 윤리가 사라진 오직 물신만을 섬기는 가진 자들의 은밀한 폭력이다.



그림책이다. 특이한... 마치 높은 빌딩이나 행글라이더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 느낌이다. 이 책을 보는 순간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나 혼자만의 공간은 아닌 것이다. 출퇴근하는 길만 유일하게 알고 있는 20년 지기 친구는 자기집 뒤에 문구점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하이야 길고 다르고 그 길로 갈 일이 지금까지 한 번 도 없었느니... 우리의 주변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문득 그 생각이 든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이다. 아니 이미 읽은 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읽고 싶은 책이다. 이제 막 십대 중반으로 올라가는 두 아이들 때문에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아이 키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빠 말도 잘 듣지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까먹었어요라고 얼버부린다. 이런 괘씸한! 

그래도 아이를 잘 키우는 방법은 있지 않을까? 딸은 엄마를 보며 자란다. 아니 닮아간다. 지적인 부분도, 정서적인 부분도... 엄마 속에 잘못 각인되 생각과 편견들이 딸을 망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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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권력, 기독교는 왜 타락했는가?



'서구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적들의 목차를 보면 대체로 이렇게 되어있다.

원시시대(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사대문명, 고대사회, 중세사회, 근대와 현대사회

원시사회와 청동 철기 시대까지의 구분은 동서양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고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역사를 그리스와 중동의 초승달 지역으로 한정된다. 중세와 근현대는 말할 것도 없이 유럽중심의 역사이다. 동양사에서 중세의 개념은 없다. 고대에서 곧바로 근현대로 넘어가 버린다. 이러한 역사 편견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동안 역사를 주도해온 역사가들이 대부분 서양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역사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문명 이야기와 그리스와 헤브라이즘, 그리고 이집트의 역사이다.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 가기는 하지만 고대 후반부에 자리잡은 나라들은 모두 중세와 근현대의 지평을 열어갈 초석이되는 나라들이다.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로 접어들면 역사는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역사로 변형된다. 서양의 역사는 곧 기독교의 역사가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멸망 시기로부터 루터의 종교개혁과 시민계급의 등장으로 인해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과학혁명 등은 모두 기독교라는 배경을 깔고 있다. 장미전쟁, 30년 전쟁 등등 서구 역사의 걸죽한 사건들은 모두 기독교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중세는 기독교가 종교와 세속정치를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시대이다. 이곳에서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독교은 초심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권력에 유혹되어 정신적인 유배를 당한 시기였다. 중세의 시작을 역사가들은 대부분 그레고리1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른 시점으로 시작한다. 중세로 구분하는 기준은 종교와 권력이 일치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는 그 전부터 암시되었지만 그레고리1세는 그것을 혈실화햇고, 실제로 로마의 붕귀로 인한 권랙 부재의 시기에 교회의 힘을 빌어 스스로 세속권력까지 교회가 손에 넣은 것이다. 초기의 교회권력은 혼란의 시기에 세상을 중재하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수단으로서 이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세속정치에 중독되어 손을 놓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리하여 중세는 교회가 종교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타락한 시기요 암흠의 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지금의 로마천주교회를 말한다. 


중세의 천년이 될 즈음에 양심적인 한 명의 수사가 비텐베르크에 95개조를 걸어 놓고 도전했다. 그가바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이다. 루터의 개혁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물러나고 옥캄의 유명론이 대세가 된 것이다. 하나가 아닌 다양성을 추구하는 좀더 근대화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종교개혁과 근대는 정신을 같이한다.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해 고대로 돌아가려는 욕망은 그동안 신비에 갇혀있던 원전에대한 욕구, 호기심이 일어났고 이것은 다시 사본학과 과학적 수단으로서의 분석이 요구되었다. 칼빈의 등장은 루터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민정신을 가져왔다. 칼빈은 직업과 소명을 하나로 보았고, 성과 속을 구분했던 중세의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성속이 하나라고 말했다. 이러한 근대적이고 파격적인 선언은 세속직업을 하찬케 여겼던 중세의 사상을 벗어 던지게 했고, 세속 일하는 시민들의 열열한 반응을 얻어냈다. 실제로 프랑승의 자유와 이성, 영국의 합리주의와 시민정신은 모두 칼빈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개신교 역시 완전한 탈권력을 이루지 못한다. 지금 한국의 장로교는 칼빈의 후예들이 영국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자인 존 낙스의 작품이다. 장로교라는 자체가 권력적인이고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대표인 장로와 목사가 하나의 당회를 이루고 교회정치를 하는 것이다. 
















개신교가 가장 꽃을 피웠던 화란-네덜란드는 중세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갔다. 역사적 배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라는 상황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화란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근대의 시작은 천주교와 개신교와의 싸움이며, 이분법적 성속관과 근대적 정신을 가진 개신교와의 싸움이었다. 승리는 자명했다. 개신교의 승리였다. 그러나 개신교는 자신이 처음부터 분열과 옥캄의 유명론적 개체주의가 하나됨의 불가능을 안고 있었다. 자신의 의견과 견해가 다르면 개신교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다시 분열하는 속성을 자체적으로 가지게 된 것이다. 


근대의 합리주의와 이성이 시대이다. 계몽과 시민정으로 똘똘 뭉친 프랑스의 지식층들은 시대를 주도했다. 영국과 미국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대대적인 근대적 정신과 사물을 받아 들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화란-네덜란드와의 무역을 통해 신신 무기인 조총을 만들어 임진왜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근대정신은 곧 과학정신이고, 성과 속이 일치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정신의 속성상 교회는 다시 세속 권력으로의 발판을 놓을 수 있었고, 신의 이름으로 정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처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 올 때는 정치적인 성향이 거의 없었다. 초기 일제강점기 때의 기독교는 계명과 신앙이라는 타이틀로 나라와 민족을 개화하고 정신을 근대화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이 부분은 심훈의 장편소설인 <상록수>에 잘 그려져 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실도피적인 성향이 두드러졌다. 아무래도 일본과 부딪히지 않으려는 선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행보였을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던 민족지도자들은 개화된 정신과 과학정신으로 무장되었다. 독립선언서를 기록한 33인의 대표중 16명이 기독교인인 것은 당시의 기독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문제는 해방 이후에 찾아온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인이다. 현대인들은 그를 싸잡아 욕을 하지만 그의 초기 시절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친미적 성향의 정권 수립과 친일파의 청산의 제대로 이루지지 않는 상태에서 '안정'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라를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로인해 집권층은 '기독교' '친일파'라는 두 큰 기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일제시대 당시에는 탈 권력적이던 기독교가 집권층?이 된 다음부터 권력화되고 세미정치권력집단처럼 변질되기 시작했다.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기 보다는 안정과 복을 구하는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욕망의 도가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 군부시절을 지나오면서 권력과의 결탁이 아니며, 정치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는 현실도피적 형태로 갈라지게 된다. 보수적인 장로교는 정치를 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강해지고, 진보적인 기장측은 구원을 사회적 구원으로까지 확장시킴으로 정치와의 대결구도로 나아갔다. 이승만, 김대중, 김영삼, 이명박 등은 기독교인들이며, 기독교적인 성향의 대통령들이다. 기독교 대통령의 당선은 기독교의 정치적 결탁을 더욱 부추겼고, 세속적인 성공을 신앙의 성공인 것처럼 꾸며대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한국교회는 탈권력화로 나아가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중심부로 향한 권력지향이 아니라 주변부로의 치유지향이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도록 부름받았다. 세상을 치유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의와 정죄를 일삼는 권력자가 아닌, 작은 자들과 소수자들을 향한 섬기는 자로 서야 하는 것이다. 대형화로 인해 교회 안에 소외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교인수가 권력과 힘이되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가 스스로 높은 곳에 앉아 '체'하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인다. 교회는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논어에 이른 말이 있다.

자식어유상자지측 하매, 미상포야요, 자어시일에 곡즉불가라

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子於是日 哭則不歌

상을 당한 사람 앞에서 배불리 먹은 적 없고, 곡을 하면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곧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예수도 진즉에 '슬픈 자들과 함께 울고, 기쁜 자들고 함께 웃으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이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자. 낮은 곳으로, 소외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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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독서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어제부터 <초등 읽기능력이 평생성적을 좌우한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읽기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주고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상식에서 부터 시작해 봅시다. 읽기는 '힌 종이 위에 문자를 눈으로 읽고, 눈으로 들어온 문자는 뇌로 가서 이해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가장 단순한 원리이면서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나 독서는 이러한 단순한 앎은 넘어 더 광대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순한 문자를 뇌에 집어 넣기 위한 수동저인 의미로만 독서를 이해하게 된다면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종요한 것은 독서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이해할 때 독서의 힘은 무한대로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읽기능력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온 박수자 박사는 2001년에 출간한 <읽기 지도의 이해>란 책에서 '높은 수준의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핵심이 되는 것은 글을 완전히 이해하며 읽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래서 '읽기 능력에 대한 관심은 교육분야에서 지대한 관심의 관심의 대상이 도리 수밖에 없고 읽기 능력과 사고력의 관계 또한 지속적인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19쪽)


이 책은 아무래도 공부라는 주제 억지로 꿰맞추어진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읽기란 무엇인가는 곧 이해를 전제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읽기는 곧 이해하는 것이다.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의 특징은 '난독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글을 제대로 대하지 못하고 문자 자체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을 가진 학부모로서 읽기능력의 중요성을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어제는 아이들과 문제집을 함께 풀면서 느낀 것은 아이들이 문제가 의도하는 바를 정학하게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답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답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런 문제이다. 초등학교 5학년 수학에 나오는 문제를 바꾸어 봅니다.


*문제, 철수네 반의 학생들은 모두 35명이다. 이 중에서 남자 학생들은 21명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학생들의 수와 남자 학생들의 수의 차이는 얼마인가? 

풀이과정1) 35-21=14

풀이과정 2) 21-14=7

답은 2이다. 

아이들은 문제를 읽고 생각을 하고, 풀이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문제를 풀수 있다. 아들은 이 문제를 읽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엉뚱한 답을 했다. 풀이과정 1에서 더이상 응용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풀이과정2로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풀이과정 2는 응용의 단계이다. 문제안에는 35와 21만을 말하고, 여학생의 숫자인 19는 상상의 산물이다. 아들을 상상하지 못함으로 문제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읽기가 아닌 식으로 문제를 주었더니 쉽게 풀어냈다.

1) 35-21=14

2) 21-14=7


읽기란 결국 문제가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읽기에서 수동적인 자세는 진정한 읽기가 아니다. 독서기술의 고전이라 할만한 모티머 애들러 <독서의 기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독서에는 정보를 얻기 위한 독서와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한 독서가 있다. ... 신문. 잡지와 같은 것을 읽는 경우... 정보의 양을 증카시켜 줄 뿐이지 이해를 깊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저자가 말한 것뿐만 아니라 그 의도나 이유를 이해야만 비로서 무엇인가 가르침을 받은 것이 된다."

애들러 역시 단순한 정보의 양만을 불려가는 것을 독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독서는 이해하는 것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때 비로소 독서의 완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논어를 읽고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논어를 읽은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 독서의 목적은 처음부터 양이 아닌 질에 있다. 변화받고 변화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자기수양적 독서'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자기 수양적 책읽기는 음식에 비하면 인스턴트가 아니나 슬로우 푸드에 해당한다. 


자기 수양적 독서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처야얄 단계가 있다. 그 첫번째는 본이 스스로 겸허한 마음으로 책을 대해야 하고, 선별해야 한다. 자기욕망에 사로잡히 독서는 결국 패스트푸드는 잔뜩 먹고 몸을 망치는 것과 다름 없다. 오랜 시간동안 씹고 소화시켜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받아드릴 것을 각오 해야한다. 이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필자도 일년에 수백권의 책을 읽는 다독 중독에 빠져있다. 그럼에도 고전이나 중요한 책은 몇 번이고 재독하거나 곁에 두고 천천히 묵상하며 읽는다. 지금 필자의 책상에는 논어과 채근담, 안씨가훈, 다산의 목민심서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있다. 이러한 책들은 한 번 읽고 덮어둘 책이 아니라 거울과 같에서 끊임없이 읽고 또 읽는 책들이다.

















초등학생의 독서능력을 키우는 방법에는 몇 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번째는 호기심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골라 그 책을 중심으로 읽히되 비슷한 주제들로 확장 시켜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첫째 아들은 독서를 무척 싫어해서 한시 라도 책 앞에 있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올로나 레고같은 만들기 등은 무척 좋아해서 하루종일 해도 지겨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로봇관련 책인 <레고 아이디어북>을 사서 아빠와 함께 이야기하며 읽기 시작했다. 책이라면 질색을 하던 아이가 로봇관련 책은 아주 재미나게 읽었다. 이것이 아이의 특징이다. 얼마적에 읽은 레고응용 서적도 재미있어했다. 아무리 책 읽기를 실허해도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를 가진 책은 읽는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독서하기까지 읽어 주는 것도 좋다. 우리 부부는 독서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고민을 하다 우연하게 책 한 권을 접하게 되었다.  <아이의 두뇌를 깨우는 하루 15분 책 읽어 주기의 힘> 이란 책이었다.

그동안 독서의 중요성을 알았지만 그 방법에서 고민을 해본 분이라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독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독서하기까지 부모가 읽는 줄 필요가 있다. 처음이 아이들은 책 읽어주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규칙적으로 계속되자 아이들은 자기 전 책을 읽어달라고 강제적?으로 협박까지 한다. 그동안 자기 전 침대위에서 읽어준 책만해도 올들어 10권을 훌쩍 넘겼다. 분량을 보아도 작게는 수십페이지에서 두꺼운 책은 300페이지가 넘는 책들이다. 아이들에게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지만 하루에 정해진 분량대로만 읽어 주어도 좋아한다. 기억에 남는 책은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샬롯의 거미줄> <스튜어트 리틀> 등이 있다. 이러한 책들은 아이들의 나이와 정서에 딱 들어 맞는 책들이다. 2살 차이가 있어 이해도가 달라 어려울 것 같지만 모험과 이야기로 꾸며진 내용은 저학년들도 쉽고 재미나게 듣는다는 특징이 있다. 사실 읽어주는 나와 아내도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하루종일 밤을 기다린 적도 있다. 일부러 아이들과 함께 내용을 공유하고 싶어 읽지 않은 덕이다. 이래저래 함께 이야기를 공함으로 아이들과 많이 친해져서 정말 좋았다. 
















세 번째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독서시간을 정하고 가족끼리 독서를 함께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처음 시도할 때는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단지 아이들이 텔리비전과 게임에 빠진 것을 보고 책이라도 읽히려는 속셈이었다. 초기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한달을 넘어가자 스스로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책을 고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책을 그리 싫어하던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골라 그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독서 시간은 저녁 식사 후 약 2-30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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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경전의 종류와 구분


불교 경전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한다. 원시불경(초기불경)과 소승과 대승으로 구분되 이후  텍스트를 중요시하는  대승불경으로 나눈다. 


원시불경은 부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 적거나 당대의 가르침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경우다. 원시 불경에는아함경(阿含經), 열반경, 범망경, 법구경, 숫타니파타, 자타카, 백유경, 부모은중경, 유교경, 미린다왕문경 등이 있다.













대승경전

대품반야경 소품대양경, 대반양경,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관음경, 무량의경, 유마경, 화엄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정토, 밀교와 관련되 불경들이 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다수의 불경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현재 전산화를 모두 마친 상태이다.

불경란 무엇인가?

불경은 일차적으로 부처의 말씀이다. 더 넓은 의미로는 부처의 제자들의 말씀도 포함한다. 이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누어지면서 문자를 중요시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자기들만의 가르침을 설파하기 위한 수트라 즉 경을 만들었다.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부처의 직접적인 말씀이나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불경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을 확장시켰다는 의미에서 불경으로 받아 들인다.

불교에서 경전을 팔만사천법문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팔만사천은 실수가 아닌 무수 즉 많으므로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과련된 애환과 아픔이 팔만사천 처럼 셀수도 헤라릴 수도 없다는 뜻이고, 이에대한 부처의 가르침 역시 헤아릴 수 없다는 뜻에서 팔만사천문이라고 부른다. 해운사에 있는 고려대장경 역시 팔만여장에 가까운데 이것은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경의 언어

부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이 듣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어로 전하라고 했다. 당시 흔히 사용하던 언어는 마가다어였다고 한다. 부처가 입멸한 뒤 불법은 다시 팔리어로 전래 되었다. 그러나 입멸후 2-3세기가 지나면서 불경은 산스크리트어로 전래 된다. 산스크리트어는 전문가들의 언어이다. 이후로 불경은 평민들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립된 가르침으로 남게 된다. 이 때를 기준으로 대승불교가 확연하게 생겨나게 되었고, 학문적이고 교리적인 가르침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남방으로 전해진 불경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측면이 강해 팔리어 경전으로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를 넘어 서북과 북쪽으로 전파된 북방불교의 경우는 자신의 언어와 현대적 언어로 변환시켜 번역했다. 현재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등은 북방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이로 인해 직역이 아닌 그나라의 문화과 언어로 의역된 불경을 소지하고 있는 셈이다.
















불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의 성경의 역사와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도 초기에는 아람어로 예수님이 설교한 것을 제자들이 대중적인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한다. 성경에 사용된 헬라어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코이네 헬라어이다. 이후 성경이 교리적이고 체계적이 되면서 성경 원전은 그대로 보존되지만 교리적인 주석서들이 대거 편찬되면서 기독교의 화석화가 이루어진다. 중세의 기독교는 권력과 타협하여 철저하게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었으며, 라틴어로 번역되어 사제들에 의해서만 설교되고 가르치게 된다. 아직도 천주교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불과 얼마 전에 교인들도 성경을 읽도록 허락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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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y6200 2019-09-2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은중경‘은 원시불경이 아닙니다. 중국에서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유교 윤리를 수용하여 효를 강조하는 경전이 만들어졌는데, 그 경전이 바로 ‘부모은중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