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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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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탕녀같은 계집에게 걸려들어 육신이고 영혼이고 다 잡아 먹혀 결국 죽는 도리밖에 없었다 한다. 친 어미는 돈을 받고 기껍게 그를 넘겨주었고 그에 그는, 아름답지만 혼령같기만 한 양어머니 아래에서, 데려오기는 했으나 끝끝내 마뜩찮아하는 할아버지의 서슬 퍼런 눈빛 아래에서 반쪽의 어설픔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명 반암의 어리버리한 삶을 이어나갔다.

서안 조씨 17대 종손 상룡은 그러한 절반의 적자였다. 쇠락한 가문을 다시 융흥시키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할아버지가 그의 아비를 위해 손수 고른 단아한 종부가 아닌, 아비가 서울에서 만난 탕녀가 바로 그의 생모였기에, 뼛가루 한 점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속하며 뼈대있는 가문을 갈무리해온 할아버지가 보기에 그는 사실 종손이 되기에는 천부당만부당한 서자에 불과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비에게서 버림받은 부엌떼기, 뒤틀어진 발목에 쌀 한가마니의 살덩이 무게를 짊어지고 비치적거리며 걷는, 더럽고 바보같은 '정실'에게 달려든 것은. 그건 욕정이었을까. 정녕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자신과 화해하는 몸짓이었을까. 

제 친 어미에 대한 애증을 거두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죽창같은 성정아래 눌려지내며 상룡은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선산에서 나온 옛 언찰들을 하나씩 해독해간다. 그리고 하루하루 정실과의 애정의 난기류가 급한 곡선으로 춤을 추어 댈수록, 그 몇 백년 전의 옛 편지들도 하나씩 하나씩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조씨 문중의 종부였던 한 여인이 남긴 그 언찰들은 처음에는 그저 손녀가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만이 고즈넉이 담겨 있는 듯 했지만 사실 그 속에는, 
종가라는 것, 그 전통이며 대를 이어나간다는 것이 가부장적 권위 속에서 결국 얼마나 큰 희생과 얼마나 많은 눈물들을 밟고 가린 끝에 세워진 사상누각인가 하는, 험한 곡절들이 여실하게 담겨있었다. 결국 '진실은 추악하다'. 그러니 마침내  할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받들고 세우며 다시 누대로 올곧게 이어져 나가길 원했던 것은 어쩌면 추악한 진실 다름 아닌 것이다.
상룡과 그의 아비, 현재의 '정실'과 과거의 그 여인은 닮았다. 문득 한 몸이 된다. 그리고 언찰 속의 과거는 불현듯 현실이 되어버린다.

거대한 권위 아래에서 노르께하니 말라갔을 그의 아비와
비실비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욕정인지 사랑인지 구분도 못하는 허약한 상룡은 틀 속에 갇혀 키워진 또다른 희생량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 속의 모든, 그녀들은, 거대한 허위를 지속해 나가기 위해 바쳐진 서글픈 제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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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02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2-01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2-27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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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고전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하얀 책을 앞에다 두고 뜬금없이 <운수좋은 날> 이라는 옛 소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들고 들어온 남자의 찌든 얼굴과 이미 죽어버린 그 아내의 비루한 삶이 어째서 갑자기 떠올랐는지. '허삼관'이라는 촌스러운 이름과 '매혈'이라는 아픈 단어가 스르륵 머리 속으로 입력되자 자동으로 가난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라버렸던 것일까. 하지만, 나의 뜬금없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허삼관은 곧 단순한 어투로 남얘기나 하듯 실실 웃으며 그 실체를 드러냈다. [허삼관 매혈기]는 현진건의 반어적인 비극과는 전혀 달랐다. 허삼관은 찰리 채플린의 후예였다. 그는 진정 페이소스의 대가였다.

가난해서 몸 속의 피를 팔아야만 하는 이야기는 결코 유쾌하지 않다. 피를 팔아서 결혼을 하고 피를 팔아서 가뭄을 이기고 피를 팔아 쓰러지면서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는, 가련하고 무겁고 그래서 버겁다. 심지어 작위적이라는 생각까지도 들 수 있고 결국엔 그 눈물겨운 부성에 감동까지 받아줘야하나 고민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허삼관은 눈물의 신파극에는 관심이 없다. 철지난 슬랩스틱 코미디도 그의 것은 아니다. 그저 그는 조금 짖궃다. 피 판 돈은 큰 일에 쓰겠어요! 라고 말할 땐 언제고 뜬금없이 그 돈으로 장가나 가는 주제에, 나를 가만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저 눈으로 그를 졸졸 쫓아가기만 했을 뿐인데 어느새 나는 의자다리를 부셔먹으며 자빠질 듯이 웃고 있거나 또는 가슴을 부여잡고 아아 이건 너무 감동적이잖아 하며 스스로 신파의 주인공을 자처하고 있었다. 
읽는 동안 내내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웃다 울다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사이 간간히, 울다가 웃으면 생기는 민망한 일이 일어날까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나는 그런 그가 얄미워서 불과 세 시간만에 그를 다 읽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피는 힘이고 곧 돈이었다. 하지만 그 힘을 자꾸 써서 소진시켜 나가면 피는 곧 온기이고 생명과 같은 것이 된다. 그가 한창때 피를 팔아 그 돈으로 부인을 얻고 가뭄 때 국수를 사 먹고 한 것은 그에게 아직 스스로 대한 애정과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장에서 번 돈으로는 의붓아들인 일락이에게 옷 사주고 밥도 사줄 수 있지만, 피를 판 돈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어설픈 고집도 부려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점차 힘이 아닌 그의 온기와 생명을 내다 팔며 일말 남아있던 자신에 대한 애정까지도 모조리 자식들에게로 돌린다. 석달에 한 번씩 이라는 불문율을 깨고 한달 걸러 한 번, 심지어 사나흘에 한 번씩 피를 팔아 대며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더이상 피를 팔지 못하게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 남아 있어야하는 그의 삶에, 어찌 가슴이 북받치지 않으랴.

어디선가 볶은 돼지 간 냄새가 났다. 허삼관이 탁자를 탁탁 치며 나에게 말한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에게 뭘 해 줄 거란 기대 안한다. 다만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내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그래도 양심이 조금은 있다고 우겨본다. 당신이 관통해 살아나간 그 시절을, 그 속의 변화와 그 가난을 잘 알지도 못하며 안다해도 뭘 해줄 순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가슴이 많이 북받치고 눈물 여러 방울 흘려대었으니, 이 정도면 만족하지 않았나 눙을 쳐본다.

허삼관이 궁시렁거리며 데운 황주를 마시는 동안 나는 한 모금도 달라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피를 뽑지도 팔지도 않았으니 그건 넘보면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에게서 
아주 신선하고도 따뜻한 피를 잔뜩 수혈받았으니 내내 그저 든든한 마음으로, 그에게 술을 따라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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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mei 2004-11-1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셨군요..저는 아큐 정전을..

 
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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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래된 고서점의 주인이자 음양사인 교고쿠도. 어느 날 3류 글쟁이를 자처하는 친구 세키구치가 그에게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제시한다. 자신들의 동창인 후지노 마키오가 밀실로 들어간 후 홀연히 사라졌으며 그 후 이미 임신 중 이었던 그의 아내가 20개월이 지나도록 출산을 못하고 계속 임신 중이라는, 마치 거짓말 같은 난해한 사건. 딸랑, 하고 고서점의 풍경이 울린다. 야옹, 하고 금화고양이가 운다. 교코구도는 과자항아리를 끌어당기며 말문을 연다.

교코구도는 이성적이다. 해박하다. 그의 해박함은 그를 냉철하고 강하게 보이도록 한다. 이 세상에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그는 음양사라는 신분에 어울리지않게 주술적이라기보다는 과학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지나치게 매력적이다.
반면 세키구치는 감정적으로 보인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우유부단함이나 사건해결에 방해가 되는 듯한 감정과잉은 답답한 인상을 준다. 물론 그의 감정은 사건 해결을 위해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우부메라는 요괴에 의해 잔뜩 촉발된 등골 섬뜩한 이미지는 20개월이나 임신하고 있는 임산부와 만나 강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초반 내내 고요한 공포가 책 전체를 휘감도록 만들지만 결국 세상에 이상한 일,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다는 교코쿠도의 단호한 말은 이소설의 결말에 대한 매우 명징한 암시다.
그리고 뒤로 갈수로 급박하게 흘러가는 사건들과 서서히 파헤쳐져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건의 고리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허겁지겁 그것을 섭취하게 하고 거대한 물음표의 해답이 제시될 결말을 향해 집중력있게 매진하도록 만든다. 작가가 정교하게 짜넣은 날줄의 현실과 씨줄의 환상 사이에서 독자는 세키구치가 경험하는 공포를 동시에 체험하면서 시종일관 멀미가 날 것 같은 행복한 어지러움증을 선사받는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후반부의 사건해결과 그 결말이 지나치게 상징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빙의나 주술을 민속사회 상의 특수상황과 연계시켜 재해석해낸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모두 그렇게 컴플렉스로 점철된 과거를 통과하여 성인이 된 지금 다중인격, 마더 컴플렉스 등의 응어리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병들게한 원인을 그대로 차용한 것은 지나치게 아귀가 들어맞아 오히려 감흥을 갉아먹는 면이 있다.

초반, 양자역학과 뇌의 작용에 관한 교코구도와 세키구치의 대화야말로 이 책의 백미이며 핵심이며 주제이다. 을씨년스럽게 풍화되어가는 낡은 병원 건물에서 1년이 넘도록 배만 불러있는 기이한 임산부, 개구리 머리를 한 사라진 신생아들, 그리고 우부메. 현실에서는 쉽사리 융화되지 못하는 이런 요소들의 기괴한 접합으로 소설은 끊임없이 우리들을 환상으로 몰아가지만 결국 작가는 그러한 이미지들조차 결국에는 보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의식의 무대에 올리는 우리의 뇌에서 발생되는 문제일 뿐, 실제로는 과학적 혹은 현상적으로 진위를 밝혀낼 수 있는 것임을 말하면서, 소설 속에서 보고 읽는 것 조차도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이미지일뿐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잔인하고도 무서운, 그리고 아름답고도 슬픈 이미지로 가득하면서도 결국에는 딸랑, 하는 풍경소리처럼 단호하고도 명쾌한 이 소설은, 그 모든 이미지를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찾아 보고 싶도록 만드는, 자꾸만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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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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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헐리웃 액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일견 그것은 완벽해 보였다. 대중적인 인지도와 검증된 연기력을 자랑하는 남녀 주인공, 흥미로운 사건, 탄탄하고도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 그리고 철저하게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스펙타클한 액션과 정교한 CG. 영화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는 듯한 그 자신만만한 물량공세. 하지만 헐리웃이라는 꼬리표만 달고 있으면 무조건 볼만 할 것이며 돈도 별로 아깝지 않을 것 같던 그 믿음은 곧 역전이 되어 이제 그 꼬리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운다. 식상 혹은 도식. 한마디로 뻔함.

다빈치 코드는 마치 한 편의 헐리웃 영화 같다. 아니 아예 이 책 두 권을 가져다가 잘 변형시키면 바로 그럴 듯한 시나리오 한 편이 탄생할 것 같다. 각각의 작은 장이 모두 하나하나의 장면이 되고 그 속에서 인물들은 숨막히게 바삐 움직인다. 롱테이크는 절대 금물. 긴장감 넘치는 진행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 전환은 점점 빨라진다. 게다가 이 소설은 대단히 친절하게도 머리 속에 직접 화면을 구성해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며 막판에 상상못할 반전까지 제공해줌으로써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덧붙여 남자 주인공이 해리슨 포드를 닮았다고 초장부터 선언한 것을 보면 미리 캐스팅까지 신경을 써 놓은 듯한 세심함(?)까지도 엿보인다.

기호학의 대가인 로버트 랭던. 암호해독가 소피 느뵈. 두 사람이 어려운 몇 겹의 수수께끼들을 파헤치고 풀어내며 시온 수도회가 2000년을 지켜온 성배에 대한 비밀을 찾아 나서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 줄거리이다. 초반, 죽어가는 사람이 몸으로 직접 남긴 암호를 해독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두 사람의 고단한 원정은 살인사건과 결부되면서 끊임없이 추격을 당하는 긴장감 속에서 진행이 되고, 그 과정 속에 등장하는 복잡다단한 암호들의 향연과 그것의 해석을 위해 이끌어져 나오는 고대에서 현대에 걸친 종교와 기호에 관한 해박한 지식들은 실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 권이라는 분량이 무색하도록 순식간에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강한 흡인력을 지녔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맥이 죽죽 빠진다. 그리고 그 강한 흡인력이 사실은 내용의 긴박함과 흥미진진함 때문이 아닌 단지 호흡 가쁘게 구성된 장면전환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의구심이 고개를 쳐든다.

일단은 엉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오푸스데이와 바티칸 교회 그리고 시온 수도회가 얽혀 있는 것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성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문제이므로 매우 밀도있게 설명되어져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두 권 내내 그럴듯한 복선과 암시로 성배를 놓고 줄다리기하는 듯 전개되던 모든 것은 싸그리 무시한 채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너무나 단순하다. 그냥 누군가가- 아니라면 아닌거지, 하는 식의 해석은 똥줄타게 읽어제끼며 결말을 향해 달려간 독자들을 패대기치는 짓이 아닐까. 그리고 암호를 해석해나가는 과정 또한 내가 맞다면 맞는거지,의 정신으로 일관한다. 역사와 종교에 두루 능통한 기호학의 대가인 랭던과, 어렸을 때부터 숙달된 조교에 의해 양성된 암호해석의 대가인 느뵈가, 이건 이래서 이런거다 라고 하며 암호를 풀었는데 과연 누가 거기에 왜? 라는 물음을 달 수가 있겠는가. 전문가가 맞다는데, 전문가가 혼자 머리 속으로 명상을 하다가 앗!하고 암호해독의 실마리가 스치고 지나갔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말이다. 계속되는 사건들의 쓸데없어 보이는 꼬임과 우연의 남발은 사실 후반부의 반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장치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누구나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이 될 거라는 건 다 알고 있다. 다만 범인이 누군지, 혹은 진실은 무엇인지 하는 문제가 얼마나 멋들어지고 정교하게 (심지어 뒷통수까지 때려주면서) 결말에 이르는가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신없이 부풀었던 일말의 그러한 기대감은 후반부에 가서 바람빠진 풍선처럼 쉬식 소리를 내며 쪼글쪼글해져 버리고 만다.

사실 기호니 암호니 하는 것은 일상에서 늘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흥미로운 동시에 생소하고 어렵다. 게다가 종교의 역사와 연관되고, 라틴어도 잘 모르는 판국에 더 어려운 듣도보도 못한 언어까지 등장을 하면 일단 겁이 나면서 보통의 추리소설을 읽듯이 스스로 해결을 해보려는 시도를 조금은 접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의 지적 활동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류의 소설을 읽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지나치게 친절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빠른 장면 전환과, 모처럼 고민을 하려고 하면 전문가들이 구체적인 과정도 없이 바로 해답을 제시해주는 과잉친절. 압축과 여운없이 구구절절 읊어서 나열되는 사건과 해결들. 진심으로 안타깝다.

작가 댄 브라운은 이 책에 나오는 날조된 성서와 숨겨진 성배에 관한 이야기가 100% 진실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가려져 있던 순전한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 게다가 그것이 세계를 받치고 있는 기둥 하나를 뿌리채 흔들만큼 강력한 것이라면, 불의를 향해 일침을 날리는 그런 보물찾기 같은 소재는 언제나 사람을 매혹시킨다.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뭉개진 여성성의 비밀이, 댄 브라운의 말대로 진정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과 놀라움,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의 즐거움, 어쩌면 이것이 이 책이 준 가장 크고도 유일한 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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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7-20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 진짜 잘 썼어요^^^^

andy 2004-08-0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로서는 c 학점.. 푸코보단 가벼운 인문학적 교양의 재미로서는 a 학점. 그 둘을 엄청나게 급박한 편집으로 얽어놓은 작가의 구성은.. b 학점

어디에도 2004-08-03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dy님.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단 두 줄에 압축해주시네요. ^^
(님의 리뷰를 읽고나서, 저는, 좌절했다죠-_-)

sayonara 2004-10-2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도 역시 저를 주눅들게 하는군요.
저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다 빈치 코드'의 리뷰를 못쓰겠습니다. ㅎㅎㅎ

어디에도 2004-10-29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이세요.
리뷰 1000편도 넘으시는 분께서 칭찬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
 
H2 1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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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뎌져 가고 있다고 느낄 때, 예전 같으면 뒤집어지게 웃거나, 땅 파고 누울 듯이 울 만한 일에도 그저 피시시 웃음을 흘리고 달랑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도 나날이 덤덤해지며 세월을 쌓아가기만 하는 것이냐 하는 자조적인 혼잣말을 뇌까릴 때, '만화' 라는 녀석은 내게 묘한 힘으로 생기를 돋궈주는 참 신기하고도 고마운 존재다. 아끼면서 모아둔 마일리지와 적립금을 보태서 주문을 하고 일부러 안기다리는 척 외면을 하다가 한아름 책이 담긴 큰 상자를 편의점에서 받아 안고 간만에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예전의 나는 일본만화에 대해 전혀 출처를 알 수 없는(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그저 무조건 가볍고 재미없을 거라는 희한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스포츠 만화라고 하면 스포츠라는 말만 나와도 바로 라이벌, 좌절 그것의 극복과 눈물나는 승리의 감동적인 결말, 과 같은 뻔한 스토리가 머리 속에 자동으로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통에 그것들을 온통 뻔하다는 편견 속에 집어던져 버리고는 괜히 일부러 볼 필요 없다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역시, 빈약한 근거와 무모한 아집으로 버티는 편견덩어리는 항상 뒤통수를 얻어 맞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다. <H2>는 단숨에 잡다한 내 편견들을 장외로 날려버렸고, 이어서 나를 방망이로 얻어 맞은 것 마냥 녹진녹진하게 만들어 버렸다.

<H2>의 그림체는 전혀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진짜 단순하다 싶은 모양새를 지닌다. 오죽하면 머리 모양만 다를 뿐 주인공들의 생김새가 다 비슷비슷해서 헷갈린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게다가 대사도 그다지 많지 않고 헐렁헐렁하다.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야구 만화에다 삼각 관계가 등장하는 청춘물이니 뭐 대사가 촘촘할 필요가 있겠냐 할수도 있지만 흔히 등장할 법한 로맨틱한 혹은 인생격언류의 진지한 대사조차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H2>는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

미묘한 표정, 간결하지만 1000% 함축적인 대사, 무심한 듯 그려놓은 배경, 지나치기 쉬운 빈 공간까지도 이 만화에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단순하면서도 미묘한 인물들의 표정으로, 섬세하게 구성된 칸나눔으로 그리고 구구절절 필요없이 말줄임표 단 하나로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 수 있는 신선한 힘은 진정 이 만화만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장점이다.

심지어 늘상 쓰는 '왜' 나 '미안' 같은 단어들도 이 만화 속에서는 순식간에 인상적인 대사로 탈바꿈한다.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앞 뒤 상황에 맞물려 절묘한 타이밍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단어들, 즉 이 만화는 대사 하나하나가 아니라 온 몸(?)으로 말을 건네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여러 번 보면 볼 수록, 줄거리가 아니라 세부에 집중할 수록  이전에는 놓쳤던 작은 칸 하나, 말풍선 하나에도 또다른 감흥을 즐길 수 있다. 덧붙여 곳곳에서 튀어 나오는 어찌보면 어설프고 썰렁해 보이는 아다치 미츠루 특유의 유머는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음 짓게 만드는 따뜻한 에너지로 넘실거린다.

두 명의 야구소년 히로와 히데오, 그리고 둘 사이의 히까리. 서로 좋아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 늘상 느끼는 거지만,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어려운 말을 쉽게 만드는 것, 긴 이야기를 압축할 줄 아는 것, 똑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건넬 줄 아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능력이 아닐까.

34권이라는 분량이 조금도 많다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여백의 미, 행간의 묘미를 맛보기 위해 자꾸만 다시 들추게 만들고 눈을 가까이 들이대게 만드는 <H2>는, 여전히 내 눈을 계속 나빠지게 만드는 아주 고약한 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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