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광 故 정운영 `책갈피에 흘린 눈물`     -2006년 9월 27일 (수) 09:16   파이미디어



"추석 며칠 전날 한밤중에 정운영 선생의 전화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책들을 내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셨다. 어림잡아도 2만 권쯤 되는 장서는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모아오신 것으로 그 규모와 범위는 경제학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그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니..."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고(故) 정운영 선생의 후배 윤소영(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가 고인을 추억하며 <프레시안>(2005. 9.25)에 기고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의 머리글이다.

지난 24일은 고인의 1주기였다. <한겨레>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온 그의 칼럼은 저널리즘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토해낸 글은 바로 `책에 서린 세상과 정신에 띄우는 연서`였다.

`책사랑`이 대단했던 그는 유학시절 부터 책을 모으기 시작해, 무려 2만1천여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1972년 벨기에 루뱅대학으로 유학, 그 후로 30여년간 한해 평균 잡아 6백여권을 읽었단 소리다.

올봄 유가족은 고인이 분신처럼 아끼던 책 1만6천여권을 모교인 서울대에 기증한 바 있다. 독어, 프랑스어 등 외서를 비롯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포함 유럽 경제학의 고전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운영 선생의 막역지우(莫逆之友)인 작가 조정래는 <한겨레>("종이책을 절실히 사랑한 마지막 사람이 아닐까 한다", 2006. 7.19)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4년 전쯤에 정형과 유럽여행 갔다 서점에 들렀는데 체 게바라 관련 책이 54종이 있었다. 아무리 관심이 있는 사람도 대여섯권 사고 말 텐데 정형은 신용카드로 54권 모두 샀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일시적으로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다."

정운영 선생의 책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인데, "만약 정형이 책을 사지 않았다면 집안 형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고, 더 오래살지 않았을까 한다"고 조정래는 말했다. 2만여권을 어림잡아 1만원씩 계산해도 2억원. 정운영 선생의 가족은 평생 전세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헛말이 아닌 듯싶다.

최근 선생의 1주기를 기념해 딸 정유신씨가 펴낸 고인의 마지막 칼럼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발문을 봐도 선생의 `책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는 귀인을 대하듯 책을 다루셨다. 읽던 자리에서 서표를 끼우지 않고 책장을 접는 일이 없었다. 무슨 책이 어느 책장 몇 번째 칸에 있는지 까지 기억할 만큼 한권 한권을 소중히 여기셨으니 책을 다른 용도로-이를테면 무언가의 받침(!)으로-사용하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책 위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칸칸이 달력 종이를 고이 접어 올려놓은 것을 보고 집에 온 제자들이 신기해했던 일도 있었다."

유고집은 곧 정운영 선생의 독서편력을 말해준다. <중앙일보>에 글을 쓰면서 내건 칼럼의 제목은 `정운영의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렇게 전해 들었다`는 뜻으로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풀어내곤 했다.

선생은 2004년 칼럼을 쓰면서 최소한 두 번 이상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는 `10월의 크리스마스`(2004. 10.23)에서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샘터)을 읽고 눈시울이 붉어진 연유를 밝혔다.

그는 흔들리는 곳에선 책을 읽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조를 저버리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지하철에서 책을 펴들었다. 이날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여서 몸과 마음은 녹초가 된 상태. 그가 눈시울을 붉힌 대목은 이렇다.

`암 말기 환자인 젊은 엄마가 임종을 앞두고 아홉 살과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언제나 씩씩하고, 아빠가 새엄마를 모시고 오면 잘해드리라"고. 엄마를 묻고 온 날 형제는 아빠에게 "우리 항상 씩씩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새엄마를 데리고 오지 마세요"라고 편지를 쓴다.`

또 한번 정운영 선생을 울린 건 완연한 봄, 2004년 5월이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돈이 없어 꿈마저 작아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하 월세방에서 혼자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 주사를 찌르는 17세 당뇨병 소녀가 역시 중병으로 친정에 몸져누운 어머니를 향해 "엄마 아파서 미안해. 하지만 나를 왜 이렇게 외롭게 만들었어"하는 대목에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화끈했다..... 12세 우울증 소녀의 독백에도 마음이 스산했다. "부자가 아니라서 너무 싫어요. 공책도 아껴 써야 하고, 반찬도 김치하고 계란밖에 없어요."`(우리 모두 `도시락`을 풀자, 2004. 5.5)

칼럼에서 정운영 선생은 "생산력이 늘어났는데도 왜 부끄럽다는 생각은 점점 커지는가. 문제는 결국 소유의 많고 적음의 아니라 너와 나의 차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며 "이제 혼자 놓는 주사로 그을 외롭게 하지 말고, 김치 반찬에 퍼렇게 멍든 마음을 풀어주도록 하자. 그것은 성장이냐 분배냐 따위의 거창한 토론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시대 최고의 논객`이라 평가받는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남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진지로 불린 한신대 경상학부에서 교수로 재직, 이어 서울대 고려대 경기대에서 강의를 했다. 병석에서 구술로 완성한 마지막 칼럼 `영웅본색(2005. 9.8)`을 끝으로, 그는 보름 뒤 지병인 신부전증이 악화돼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혈연을 떠나 모든 인연을 얻는 삶, 작은 집을 버리고 세상의 집을 얻는 삶`(출가내인 이야기, 2004. 5.29)을 동경했고, `혁명시인` 김남주에게 빚진 마음(그가 남긴 칼과 피의 사랑, 2004. 7.10)이 있었던 고 정운영 선생. 역사적 사회주의가 실패할 즈음, 진보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세운 <이론>(1992)지 창간을 주도한 그는 평등주의에 가까운 학문(분배론)으로 학위를 받았다.

평생 가난한 지식인으로 살았지만 그의 왼쪽 심장은 언제나 힘없고, 돈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뜨거웠다.

[북데일리 백민호 기자] mino100@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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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9-28 08:20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2006-09-28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9-28 09:59   좋아요 0 | URL
잘 읽고 갑니다.
전 그러고보니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마구 접기도 하고 받침으로 쓰기도 하고;;
또 낙서도 많이하거든요 밑줄도 팍팍 긋고...
나름 제 손때가 묻은 책이 더 정감이 가는 것 같아서 그러는데
고인의 이야기를 읽으니 제 자신이 좀 부끄러워 지기도 합니다 ^^

선선하고 맑은 가을 하늘과 공기
충만히 누리고 계시죠? ^^

니르바나 2006-09-28 11:50   좋아요 0 | URL
달팽이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날이시길 빕니다.^^

니르바나 2006-09-28 14:22   좋아요 0 | URL
법구경님, 소련연방이 해체된 후 우리나라에 마르크스 경제학이 용도폐기된 것 처럼 굴던 시류가 가장 마음에 불편해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물에 발 담그고 있던 분들이 속절없이 떠나는 모습을 보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었겠지요. 변화니 개혁이니 하지만 우리 살림살이야 어디 그런가요. 지금도 우리주위를 돌아보면 여전히 마르크스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니르바나 2006-09-28 12:06   좋아요 0 | URL
체셔님, 책을 사랑하는 모습에 정석은 없다고 봅니다.
체셔님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됩니다.
저의 방식은 정운영 선생의 책사랑법에 가깝지만
책이 우상처럼 여겨질 때가 아주 많답니다.
그러니까 결코 부끄러워 하실 일이 아니랍니다.^^
체셔님, 전에 보여주신 해맑은 청년의 얼굴처럼
늘 행복한 나날 보내시라고 응원해 드립니다.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체셔님 얼굴처럼요.

2006-09-28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09-28 13:19   좋아요 0 | URL
전 솔직히 이 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예전에 tv에서 몇번 본적 밝엔 없었는데, 참 훌륭하신 분이시군요. 책을 좋아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분의 책사랑에 비하면 저는 아직도 멀었다는 말조차 꺼내기에도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니르바나 2006-09-28 14:3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도 잘 몰라요. 그저 오래 전에 몇 권 책으로 만난 기억밖에 없구만요.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 참으로 안타깝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그 힘든 공부를 하고서도 정년도 맞기 전인 향년 62세로
이 세상에서 떠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일 순 없어도 대부분의 애서가들은
스텔라님처럼 훌륭한 분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스텔라님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니까 부끄러워 마세요.^^
책사랑하기를 스텔라님만큼만 해라- 니르바나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ㅎㅎ

stella.K 2006-09-28 15:45   좋아요 0 | URL
아이고, 쑥스러워라~ ㅜ.ㅜ

혜덕화 2006-09-28 20:46   좋아요 0 | URL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절실하고 간절해야 하는데.....
좋은 글 읽고 갑니다._()_

마립간 2006-09-29 08:08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水巖 2006-09-29 09:07   좋아요 0 | URL
저도 퍼 갑니다.

프레이야 2006-09-29 11:42   좋아요 0 | URL
첫걸음에, 좋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 가져가겠습니다. ^^ 종이책을 절실히 사랑한 마지막 사람... 가슴이 찡해옵니다.

2006-09-29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09-30 09:30   좋아요 0 | URL
혜덕화님, 그렇지요. 정성, 정진, 정열 등등
그것이 일이 되었든, 수행이 되었든, 학업이 되었든간에
절절해야 무르익고 열매를 맺여지는 것 아니겠어요.
행복한 가을 시간 보내시길 빕니다.^^

니르바나 2006-09-30 09:32   좋아요 0 | URL
고명하신 마립간님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무 아래 졸고 있는 모습이 늘 인상적이군요.^^

니르바나 2006-09-30 09:36   좋아요 0 | URL
수암선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니르바나가 인사 올립니다.
수암선생님과 나누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행복한 시절입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니르바나 2006-09-30 11:10   좋아요 0 | URL
배혜경님, 참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이 주는 감동도
넘으면 넘었지 지나치지 않을겁니다.
책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정운영선생과 함께 세상걱정을 나누었던 시절이
기억에 남으리라 봅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배혜경님과의 첫걸음의 인연을 만들어 주시는군요.
이렇게 만나뵙게되어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