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탐사와 산책 15
유지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영화를 전공과목으로 공부를 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 대해 많이 안다던가 아니면 공부를 열심히 했다던가 하는건 전혀 아니다. 따라서 내가 영화를 보고 느끼는 수준은 영화에 대해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영화보기는 즐기는 사람의 수준 정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영화를 보는 잣대는 재밌느냐 재미 없느냐. 혹은 2시간과 7천원의 돈이 아깝냐 아깝지 않느냐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으며 영화를 텍스트로 분석해가며 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꾸지 않았었다.

그래도 대학 다닐때 한 삽질이 있는지라 영화 용어사전 같은게 나오면 새로 구입하고 소설가나 누가 영화에 대해 재밌는 글을 썼다고 하면 대체적으로 사서 읽어보는 편이었다. (정재승의 '물리학자는 영화에서도 과학을 본다' 와 이우일 김영하의 '영화 이야기' 등은 상당히 재밌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쓴 책은 전혀 사 보지 않았다. 이유는 딱 하나.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려운걸 싫어하니 내신 15등급이라는 찬란한 업적을 이룬게 아니겠는가!)

이번에 고른 유지나의 여성영화 산책은 순전히 친구의 '어렵지 않고 재밌다.' 라는 추천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한편은 꼭 영화를 보고 쉬는 날이면 비디오 두편씩 연달아 때리는 것을 겁나하지 않는 내가 이제서야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영화비평서를 읽는다는게 좀 그렇긴 하지만 뭐 어떤가.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이르다는 편리한 교훈을 따랐다고 우기면 되는것을.

유지나는 알다시피 유명한 영화평론가이다. 지금은 심영섭씨를 비롯해서 많은 여성 영화평론가들이 있지만 내가 대학을 다닐때만 해도 유지나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었고 그녀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영화평론가였다. 이런 유지나가 여성 영화에 대해 썼다고 하니 호기심이 일었다. 과거의 유지나는 너무 극단적으로 영화를 몰아부치는 경향이 있었는데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결혼을 하고 나서는 조금 둥글둥글 해 졌다. 남녀가 적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야 할 동지라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터득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도 역시 유지나는 옛날 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문체로 여성 영화를 말 하고 있다.

사실 영화라는 것이 상당히 남성의 판타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포르노만 두고 봤을때도 절대적인 남성의 눈으로본 포르노만 존재할 뿐이지 여성을 위한 포르노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요즘 한국영화들을 보면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입지는 고사하고 아예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들이 속출하고 있다. 얼마전 칸느에서 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만 하더라도 상당히 남성적인 영화이며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자인 강혜정은 (물론 최면술사가 있긴 하다.) 복수를 위한 장치로서 등장하는 것이지 영화 속에서 그녀가 가진 위치는 희박하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안에서 그려지는 여성상이나 남성상에 대해 따진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무의미하게 보일 지경이다. 여성이 등장을 하고 개뿔이나 무슨 역활을 맡아야 따지던가 말던가 할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토론들이 무의미하지 않은 것은 바로 언젠가는 달라질것이라는 희망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아직 변영주나 이정향 같은 여성 감독들이 있으니까. 앞으로 제 2의 제 3의 변영주와 이정향이 등장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의 영화부터 시작해서 헐리우드 영화, 제 3 세계 영화에 이르기까지. 영화 즉 시네마코프 안에서 존재하는 여성의 위치를 다루었다. 실제 세상에서도 엄청난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듯 영화라고 해서 다를바 없다. 여성 주인공이 이끌어 가는 보기 드문 영화들이 있긴 하지만 그 여성들 조차 철저하게 남성적 시선에서 본 여성. 혹은 남성의 판타지를 대변하는 여성이라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이 책을 보고 나서 좀 더 영화를 의미있게 또 다른 각도로 보게 되었다. 그저 재밌다와 재미 없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서 산 나로써는 상당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읽기에 그다지 부담스러운 문체도 아니며 어려운 영화 용어도 많이 등장하지 않아서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읽을 만 하다. (오히려 영화를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싱거울수도 있을 정도이다.)

페미니즘을 언제나 투쟁적으로 그리고 날카롭게만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방법의 차이일 뿐. 그들과 유지나가 내려고 하는 목소리는 하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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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6-19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창 페미니즘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제 동생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네요~ 사라고 해서 저도 옆에서 덤으로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추천 꾸욱~~^^

플라시보 2004-06-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페미니즘 서적을 많이 읽지는 않은 편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으면서도 영화라는 친숙한 매체를 이용한 페미니즘적 접근이라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책값도 좀 하고 하드커버인데도 내용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마태우스 2004-06-1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멋진 리뷰를 보니 저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사실은..전에 읽었어요. 흐흑.

꼬마요정 2004-06-19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하드커버를 하지 않아도 될 책들에다가 하니까 책 값만 비싸지는 것 같아요~ 좋은 책은 집에서 책커버를 각자 할 수도 있는데, 낭비같기두 하구, 돈 없는 사람들 책도 많이 못 사보기도 하고.. 그쵸??

플라시보 2004-06-19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흐흐. 이미 읽으셨군요.
꼬마요정님. 저도 책이 절판되고 난 다음에 굳이 하드커버로 개정판이란 이름을 달고 나오는 이유를 잘 모르겠더라구요. 우리나라도 영국처럼 문고판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드커버 사 볼 사람들은 사 보고 아닌 사람들은 싸고 가벼운 문고판을 보게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지 않는 이유는 책의 무게가 만만찮아서인것 같습니다.

클리오 2004-06-19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늘 이야기해요. 저는 '직업상' 돈이 있건없건 책을 많이 사야되는데... 하드커버 책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 가격으로 한번 , 그 무게로 또 한번(평소와 이사갈 때까지 포함하여..), 책을 사고 읽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예요. T.T
서평 감사합니다.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플라시보 2004-06-20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갈때 정말 골때리죠? 전 책을 전부 회사로 배달시키는데 한번에 5권을 넘기면 가져가기가 상당히 거시기합니다.^^

구름잡이 2004-06-20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영화와 페미니즘.
참 딱딱하네요.
영화를 왜 이렇게 쪼개서 봐야하는지 모르겠네요.

치니 2004-06-2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지나를 무척이나 싫어하는데, 책은 괜찮은가보네요. 하긴 그사람이 쓴 책도 안 읽어보고, 만났을 때나 대화 했을 때의 느낌만 갖고 싫어하면, 좀 불공평하죠?

플라시보 2004-06-2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름잡이님. 텍스트로 쪼개어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상당히 딱딱하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만. 뭐랄까요. 저는 그냥 한번쯤은 영화를 그렇게 보는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 책을 골랐습니다. 물론 저 책 하나를 본다고 해서 앞으로 쭉 영화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알고 보는것과 모르고 보는것의 차이 정도는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저 역시 영화는 재밌으면 땡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중 하나인지라 늘 심각하게 영화를 보지는 못합니다.^^
치니님. 솔직하게 고백을 하자면 저도 과거 유지나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유지나가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책은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적어도 제가 유지나에 관해 느낀것 보다는 책이 몇 배는 더 낫다고 말씀 드릴수 있겠네요^^

잃어버린우산 2004-09-3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두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