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선비는 둘 일 수 없다는 뜻으로 유방의 밑에 있던 소하가 한신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한신은 회음 사람으로 젊은 시절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그는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선 항우 밑에 들어갔는데, 그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도망쳐 유방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유방 밑에서도 변변찮은 대접을 받다 결국 재수 없는 일에 휘말려 사형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처형당하기 직전 대신 하후영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외쳐 간신히 처형을 면하였고, 하후영은 그를 유방에게 천거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방은 한신을 크게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재상 소하는 그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 밑에서도 자신의 큰 뜻을 펼치기 어렵다고 생각한 한신은 자신을 알아 줄 이를 찾아 도망을 쳤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소하는 유방에게 알릴 시간도 없이 한신을 찾으러 따라갔고, 영문을 모르는 신하들은 소하가 도망을 쳤다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알렸습니다. 놀라고 화가 난 유방은 이틀 뒤 돌아온 소하를 보며 왜 도망을 쳤는지 꾸짖었고, 소하는 한신을 좇아간 것이며 그는 국사무쌍의 인물이라 중하게 등용하라 말했습니다. 유방은 한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소하의 주청에 그를 대장군으로 삼았고, 결국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한신은 초· 한 전쟁 무렵에는 제왕에 봉해졌으며, 해하에서 항우를 격파하는 등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한나라가 건국되자 초왕에 봉해졌으나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가진 그를 두려워한 유방에 의해 회음후로 강등되었고, 후에 다시 모반의 죄를 쓰고 사형 당했습니다. 하지만 한신의 모반에는 여후와 소하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유능한 장군인 한신이 설마 그의 사인의 아우에게까지 알 수 있도록 모반을 계획하였다는 것이 이상할뿐더러 고변한 자가 그저 사인의 아우라고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이상합니다. 여후와 소하가 한신 같은 군사적 천재를 경계하여 희박하지만 모반의 죄를 씌워 고조가 없는 사이에 죽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난세에 걸출한 영웅이었던 한신은 여후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세 개의 고사성어를 남깁니다. 첫 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국사무쌍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다다익선(多多益善), 교토사 주구팽(狡兎死 走拘烹) 즉 토사구팽입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그 말을 고스란히 겪었던 한신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말합니다.〈젊은 시절 어머니의 장례를 지낼 비용조차 없었던 그였지만, 지금은 높고 넓은 땅에 묘지를 만들어 1만호를 들어설 수 있게 했다. 그런 그가 겸손을 배웠더라면 주공, 소공, 태공의 공훈에 비하였을 것이며 나라의 제사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천하통일 후 반역을 기도해 멸족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신이 혁혁한 공을 세운 뒤 모반죄로 죽었다면, 여후는 유방이 죽은 뒤 그 진가를 드러낸 여인이었습니다. 여걸이었던 그녀는 유방의 조강지처로서 유방이 한나라를 창업할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탕하지만 여자를 좋아했던 유방은 한고조가 된 뒤 여러 후궁들을 거느렸고, 특히 척부인을 총애하였습니다. 여후는 뒷방 신세가 된 꼴이었지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방이 죽을 때 여후는 승상의 재목에 대해 물어봅니다. 소하 다음에는 조참을, 그 뒤에는 진평과 왕릉에게 승상을 맡기라는 유방의 대답에 여후는 그 뒤에는 어찌 하냐는 질문을 합니다. 유방은 도대체 언제까지 살려고 그러느냐며 입을 다물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데 승상은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인 만큼 여후는 유방의 말대로 하여 자신이 죽은 뒤까지 자신의 아들인 효혜제가 아무 어려움 없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바랬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요. 여후는 유방이 죽자 개인적인 원한을 철저하게 갚습니다. 우유부단하고 심약하였던 효혜제는 그런 여후를 견디지 못하여 일찍 죽고 맙니다. 여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효혜제의 서자를 소제로 내세워 여전히 섭정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일족을 왕으로 봉하고 정권을 손에 움켜쥡니다. 유씨를 섬겼던 여러 신하들은 납작 엎드린 채 여후가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여씨 일족의 권세는 여후로부터 나왔으니 여후가 죽으면 자신들이 여씨 일족을 멸하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후는 악독한 인물이라 자신의 아들을 일찍 죽게 하였으며, 사사로운 원한을 앞세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후의 치세는 그리 암담하지 않았습니다. 한고조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한 지 8년 만에 세상을 뜨는데, 그것은 곧 새로운 왕조를 발족하는 단계에서 죽은 셈입니다. 뒤를 이은 혜제 역시 일찍 죽었으니 새로운 왕조인 한의 기반을 다진 사람은 유방과 여후 이 두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후는 사사로이 자신의 일족을 위해 유씨 일족을 살해하였으나, 유방이 만들어놓은 예악이나 승상 소하가 정비해놓은 법률 등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며(소규 조수), 한대 초기의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국가 정책을 고수하였고 그것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역사가들은 당시 상황을 의식은 풍족하고 형벌은 줄어들고 천하는 평온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여후는 황제 자리와 왕, 제후들의 자리를 놓고 일종의 집안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씨 일족은 여후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이지요. 여후가 죽은 뒤 다시 유씨 일족이 권력을 잡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들은 여후의 업적이나 그녀의 사생활, 그녀의 성격을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권력을 잡았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악녀였으니,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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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11-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여후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건 그녀가 남자였기 때문이겠지요...어제 술마시다가 여자들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꼬마요정 2005-11-0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여후가 남자라구요??
아마도 여권이 신장되다보니 기존에 권리를 가지고 있던 남성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거겠지요..그러니 여자들에게 반감을 가질 수 밖에 더 있나요.. 사실, 있는 자들의 부를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면 있는 자들이 반발하는 것처럼, 그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