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눈치를 채기는 했는데, 수상쩍을 정도로 한 가지에 진심인 출판사들이 있다. 내놓는 책을 보면 특정 주제나 장르나 작가에 집중하는 듯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진심이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과연 유지는 되려나 걱정스럽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논의하자면 하나하나 따로 글을 써야 할 것도 같은데, 아직 실물을 구입하지도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사다 놓은 것도 아직 읽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번역이나 편집이나 등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기도 뭐한데, 여하간, 자꾸 미적거리지 말고 간만에 알라딘 들어온 김에 대강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1. 혜움이음 - 수상쩍을 정도로 인디언 문학에 진심인 출판사


언제였나. 여기에서 새로 낸 소설을 보고 신기한 출판사다 싶었는데, 나중에 가서 그걸 알라딘에서 검색하려니 정확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사슴 머리 여자"로 검색했더니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사슴 대가리..."까지 쓰다가, 에이, 아니겠지 싶어서 신간 목록을 일일이 뒤지다 보니, 한참 뒤에야 "엘크 머리를 한 여자"라고 정확한 제목이 나온다. 이거... 제목이 헛갈린 이유는 표지에 나온 동물이 흔히 말하는 "엘크"보다는 오히려 "사슴"에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괜히 한 번 시비나 걸어 볼까 싶어 구글링해 보니, "엘크"라는 명칭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제각각이어서, 그중에는 말코손바닥사슴이라고 해서 넓데데한 뿔을 가진 동물도 있고, 이 책 표지에 나온 가느다란 뿔을 가진 동물도 있다고 해서, 오오, 그렇구나, 또 하나 배웠다 싶었다.


그나저나 혜움이음이란 낯선 출판사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네 권을 간행했는데, 하나같이 번역서일 뿐만 아니라 무려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문학에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과거 한길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다가 단행본으로도 재간행되었던 스콧 모머데이의 "여명으로 빚은 집"(한길사 시절에는 "모마데이"의 "새벽으로 만든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첫 책으로 내놓은 것을 보고, 오, 뭔가 좀 아는 출판사로군, 싶었는데 이후로도 줄곧 인디언 혈통 작가들의 인디언 소재 작품들을 내놓는 것을 보니, 아예 작정하고 이쪽으로 파고 드는 것인가 싶어서, 앞서 말했듯이 기대 반, 걱정 반, 뭐,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까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니, 솔 출판사의 SNS에 신간 홍보가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 계열사나 자회사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디언을 소재로 한 작품이야 적지 않겠지만, 추리소설가 토니 힐러먼의 경우처럼 (최근 그의 회고록이 중고샵에 있기에 구입했다. 그가 나바호족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는 참전 용사들의 정화 의식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실려 있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그의 첫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그 의식이 조지프 캠벨이 연구/기록했다는 인디언 참전 용사들의 출정 의식과도 한 쌍이 아닐까 싶어서 살펴보고 싶었던 것인데, 그 내용은 캠벨의 첫 저서에 집약되었고 훗날 "창작 신화"인지 "원시 신화"인지에도 구체적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는 인디언 혈통이 아닌 외지인 작가가 쓴 것도 많을 터이니, 혜움이음에서 연이어 간행하는 것처럼 실제로 인디언 혈통 작가가 쓴 작품만 모아 놓은 시리즈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2. 고딕서가 - 수상쩍을 정도로 고딕 문학에 진심인 출판사


여기는 제목 그대로 고딕 문학을 집중적으로 내고 있어서, 지금까지 나온 다섯 권 모두가 딱 그 장르에 해당한다. 그중 두 권은 장편이고 (그중 하나는 무려 르파뉴의 작품이다!), 세 권은 개스켈, 올컷, 셸리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다. 번역자가 모두 같은 사람인 것으로 미루어 이른바 "덕업일치"의 경지에 이른 1인 출판사인지도 모르겠다.(비슷한 경우가 과거 SF만 열심히 간행하다가 결국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던 "불새" 출판사인데, 아쉽게도 1인 출판사로 기획부터 제작까지 도맡다 보니 번역이나 편집에서는 어설픈 부분이 적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나중에 한 번 문을 닫았을 때,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며 발행인이 소장하던 "사이보그 009"와 "초인 로크" 전권을 매각하겠다고 SNS에 올리는 "패기"를 보여주었던 것이 각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왜 하필 고딕 문학 시리즈인지 궁금하다. "오트란토 성"이나 "몽크" 정도를 제외하면 본격적인 고딕 문학에 해당하는 작품은 의외로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고 기억하기 때문에 한층 더 궁금하고 신기하고, 뭐, 그렇다.(카포티와 오코너와 매컬러스로 대표되는 "남부 고딕"과는 또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고딕"의 정의를 뭐로 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기는 한데, 게이먼의 "죽음"이나 애덤스의 "웬즈데이" 같은 "고스"와는 또 뭐가 다른지도 따져봐야 할 것 같으니, 이것도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제법 공부를 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고딕서가의 책은 세 권쯤 이미 사다 놓았으니 조금 한가해질 때에 한 번 읽어보아야 하겠다.(하지만 현실은 아직 "자불어" 1권도 다 읽지 못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태평광기" 완질이 기다리고 있고!)




3. 디다스칼리 - 수상쩍을 정도로 몰리에르 희곡에 진심인 출판사


여기는 얼마 전에 북펀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몰리에르 희곡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그렇잖아도 대부분의 번역서가 "몰리에르 작품집"이니 "몰리에르 희곡선"이니 하는 이름이다 보니, 이것저것 중복되는 작품이 많아서 좀 솎아내려고 하던 참이었다. 급기야 갖고 있는 번역서를 찾아내서 마루에 쌓아두고 차일피일하던 참이었는데, 희한하게도 몰리에르를 집중적으로 간행하는 출판사가 있다기에 자연히 호기심이 생겼다. 현재 세 권까지 나왔는데 분량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으로 보인다. 몰리에르에 대한 관심은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돈 후안" 전설을 이용한 작품 예닐곱 종을 연이어 읽고, 비교적 최근에는 주디스 슈클라 책 때문에 덩달아 "타르튀프"까지 읽으면서 간만에 부활했는데, 그 와중에 이것저것 메모한 내용을 아직 다 정리하지는 못했다.


가만 보니 여기도 번역자가 같은 사람이다. 생각해 보니 울산대 출판부의 코르네유 희곡 선집도 전공자 한 명이 번역했는데, 결국 이런 종류의 책은 누군가 한 명이 작정하고 달려들어야만 뭔가 결과가 나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하의 플라톤도 이제이북스/정암학당 전집은 완간되지 못하고 출판사를 옮기고 말았는데 (근데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꾸준히 사 모은 독자들을 엿먹이는 것 아닌가? 최소한 판형이나 디자인만큼은 구판과 맞춰주었어야지!) 과연 몰리에르 시리즈는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궁금한데... 어째서인지 맨 처음 나온 책은 이미 품절이어서 벌써부터 살짝 불안해지기도 한다.




4. 파시클 - 수상쩍을 정도로 에밀리 디킨슨에 진심인 출판사


이 출판사에서는 다른 책들도 내고 있지만 디킨슨 시 선집을 다섯 권이나 내놓았다. 역시나 분량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인데, 특히 번역이 좋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디킨슨 시를 영어로 읽어보면 어떤 것은 쉬운 편이지만, 또 어떤 것은 단어가 끊기거나 도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나귀님도 종종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난감할 때가 많은데, 기존 번역서 중에서는 그런 난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영혼은 제 무리를 스스로 선택한다"라는 시의 경우, 민음사의 강은교 번역본에 수록된 내용은 1980년대 구판부터 2010년대 최신판까지 줄곧 오역으로 남아 있다.(나귀님이 확인한 것 중에서 가장 정확해 보이는 번역은 지만지의 디킨슨 선집에 수록된 것이었다. 근데 이 시의 해석에 대해서는 미국 사람들도 설왕설래하더라).


파시클의 디킨슨 선집은 계속해서 개정판이 나오고 있는데, 어쩌면 오역/오타 같은 문제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나귀님이야 구판과 신판 모두를 갖고 있지는 않으니, 내용이 정확히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번역/오역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라는 것이 그러한데, 나귀님이라면 십중팔구 "예쁜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안 예쁘더라" 정도로 옮겼을 것 같으니, 이 정도면 번역자의 센스가 작렬한 사례로 충분히 꼽을 만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오역은 큰 문제다. 예를 들어 "수탉 씨에게 죽음은 무슨 상관일까"라고 옮긴 시는 "죽은 자에게 수탉이 무슨 상관이랴" 정도로 옮겨야 맞을 것이다. 내용을 보면 죽은 자는 세상 일에 관심 없다는 것이니까.





위에서 소개한 몇 군데 말고도 지금 당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 희한한 출판사가 몇 군데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기억이 나면 다시 한 번 끄적끄적해 보고, 아니면 말고, 뭐, 그래야겠다. 그나저나 원래는 "마리루이제 플라이서의 길고도 화려했던 극작가 생활"이라는 제목만 달아놓고 본문에서는 영 딴판으로 "오카자키 교코와 자기 몸에 대한 혐오"에 대해서 끄적끄적해 보려고 했는데, 결국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서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고 떠나는 셈이 되었다. 왜 나는 새해부터 이렇게 정신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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