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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샵에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 신판 가운데 하나인 <미노스 (외)>가 올라왔기에 주문해 보았다. 이제이북스에서 완간을 코앞에 두고 있다가 갑자기 아카넷으로 출판사를 옮겼는데, 표지 디자인은 물론이고 판형까지 신국판 소프트커버에서 사륙판 하드커버로 바꿔버린 것을 보고, 참 신의 없는 행동이구나 싶어서 한동안 외면하던 차였다.


<미노스 (외)>는 이제이북스에서 나왔던 구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서 구입했는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을 새롭게 펴내며"라는 두 번째 서문을 보면 이제이북스의 사정으로 출간을 중단하고 출판사를 옮기게 되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검색해 보니 이제이북스는 2018년 이후로 신간을 내놓지 않았으니 사실상 문을 닫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출판사를 옮긴 사정까지는 감안하더라도, 판형까지 싹 바꿔서 재간행하는 것은 괘씸할 수밖에 없다. 이제이북스 구판을 가진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려 스무 권이나 모아 놓은 책들을 내버리고 다시 살 수도 없고, 막상 <미노스 (외)>처럼 원래 없던 책들만 구입해서 꽂아 놓으면 기존의 책들과 판형부터 다르니 "전집"이라기에는 영 꼴불견이다.


플라톤 전집의 구판과 신판 모두에는 후원회원인 개인과 단체의 명단이 서너 페이지에 걸쳐 나와 있는데, 거꾸로 보자면 졸지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구판을 떠안은 피해자 명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참여한 후원회원이라면 지금쯤 구판 스무 권에 신판 스물세 권까지, 완간되지 않은 플라톤 전집을 무려 두 종이나 갖고 있지 않을까.


출판계에서 한 작가, 또는 한 작품을 여러 권으로 나누어 출간하다 중단한다든지, 아니면 중간에 디자인을 바꾸어 통일성을 깨트린다든지, 최악의 경우에 한동안 출간을 중단했다 재개하여 완간하면서 디자인 변경은 물론이고 박스 세트나 가격 할인이나 특전 부록 같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꾸준히 구입한 독자를 농락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도 않다.


반면 한 작가의 작품을 두 출판사가 간행하면서 협의를 통해 판형은 물론이고 디자인까지 똑같이 맞추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북스피어와 모비딕에서 나눠서 간행하는 마츠모토 세이초 시리즈가 그렇다. 이런 선례를 감안할 때 출판사를 옮기더라도 외양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배려 부족의 결과로 보인다.


<미노스 (외)>처럼 짧은 작품까지도 한 권으로 간행하는 것을 보면 아카넷의 플라톤 전집은 전30권 내외로 완간되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그중 스무 권은 이제이북스에서 나왔던 것들이니, 권수로만 놓고 보면 60%가 중복 출판인 셈이다.(물론 분량으로는 전집의 4분의 1쯤을 차지할 법한 <국가>와 <법률>이 압도적이므로 그 비율도 더 떨어지겠지만).


물론 판형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책의 디자인은 읽기의 편의성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새로운 플라톤 전집을 굳이 작은 판형에 하드커버까지 씌워 가면서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지는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현재 판형으로 <국가>나 <법률>을 간행한다면 거뜬히 1,000페이지에 육박할 테니까.


역시나 아카넷에서 간행하는 대우고전총서 역시 처음에는 사륙판으로 제작되다가 <순수이성비판>에 이르자 뒤늦게야 실책을 깨달았는지 신국판으로 돌아와서 이후 칸트 전집을 신국판으로 내고 있는데, 플라톤 전집에서도 <국가>와 <법률>이 그 선례를 따른다면, 결국 시리즈의 통일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꼴이 되어 버릴 터이니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여하간 정암학당이 출판사를 옮기고 뭐하는 와중에 "국내 최초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 완간의 영예는 엉뚱하게도 후발 주자인 천병희가 가져가고 말았으니,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고 또 한편으로는 쌤통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심지어 철학 전공자도 아니라며 무시당하던 천병희에게 뒤처졌으니 전공자 모임인 정암학당으로선 참 민망하지 않겠나.


우스운 것은 후발 주자였던 숲 출판사의 천병희 번역 플라톤 전집 역시 독자를 농락한 바 있다는 점이다. 즉 원래는 전집을 의도하지 않고 두세 편씩 쪼개서 조금씩 간행하다가, 뒤늦게 전집으로 명명하고 합본을 만들고 표지를 교체하여 나머지 두 권을 내서 완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입한 독자는 통일된 디자인의 전집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암학당/이제이북스나 천병희/숲 모두 플라톤 전집이라는 거창한 시도를 하면서도 장기적인 계획이나 전략 부족/부재로 독자를 농락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이십 년 넘게 지속된 사업이 판형이나 표지 같은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일관성 없이 뒤바뀌면 과연 어떤 독자가 순순히 받아들이겠나.


개인적으로는 "국내 최초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 완간의 영예가 박종현에게 돌아갔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서광사의 <국가>가 1997년에 나왔으니 벌써 사반세기 전인데, 처음에는 플라톤의 주요 저서를 여러 전공자들이 나누어 번역하기로 했다가, 세월이 흐르며 공역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떨어져 나가서 사실상 박종현의 단독 번역이 되었다.


박종현도 처음부터 단독 완간을 목표로 매진했다면 충분히, 어쩌면 더 일찍 달성할 수 있었겠지만, 번역 후기 중 하나에서 동참을 약속한 동료 학자들을 믿는다며 당분간 본인의 저술에만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신의가 보답을 얻지 못한 형국이어서, 박종현의 플라톤 전집은 맨 먼저 시작했지만 아직 진행 중인 상황이다.


물론 학술서 번역 출판은 올림픽도 월드컵도 아니니 누가 먼저고 나중이고를 따져보았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3파전으로 벌어진 플라톤 전집 완간 경쟁의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니 새삼스레 신의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어 한 마디 해본다. 부디 박종현 선생의 단독 번역이 무사히 완간되기를 빈다.(정암학당이야 뭐, 완간을 하든가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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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중에 <신을 죽인 여자들>이라는 소설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 들여다보니, "보르헤스 이후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작품이라고 나온다. 무려 보르헤스 다음가는 아르헨티나 작가라는데 어째서 나는 영 모르고 있었던가 자책하는 마음에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구글링을 하다 보니, 묘하게도 위의 선전 문구에서는 어째서인지 빠져 버린 또 다른 작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작가는 바로 기이하고 환상적인 단편 소설로 유명한 훌리오 코르타사르이다. 비록 생애의 후반기를 유럽에서 보냈고, 나중에는 프랑스 국적까지 정식으로 취득했다는 점에서 (예를 들어 가오싱젠처럼) 프랑스 작가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스페인어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보르헤스, 마르케스, 요사 같은 남아메리카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음을 감안하면 아르헨티나 작가로 분류하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피녜이로의 책을 소개한 맨부커상 홈페이지에도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에 이어 세 번째로 가장 많이 번역된 아르헨티나 작가"(the third most translated Argentinean author, after Borges and Cortázar)라고 단언했을 정도이니, 정작 번역본 소개글에서 그 이름만 쏙 빼놓은 것이 무슨 이유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홍보를 위해서라면 코르타사르 정도의 유명 작가에게 2위를 빼앗겼어도 딱히 나쁠 것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신을 죽인 여자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 어마어마한 리뷰 개수다. 오늘 기준으로 판매지수는 3,500대인데 리뷰는 70개가 넘기 때문이다. 2023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세이노의 가르침>만 해도 판매지수는 673,000대로 어마어마하지만 리뷰는 35개에 불과해서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피녜이로가 누군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런 부조리한 현상만큼은 확실히 보르헤스나 코르타사르의 소설에 버금갈 만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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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눈치를 채기는 했는데, 수상쩍을 정도로 한 가지에 진심인 출판사들이 있다. 내놓는 책을 보면 특정 주제나 장르나 작가에 집중하는 듯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진심이 반가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과연 유지는 되려나 걱정스럽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논의하자면 하나하나 따로 글을 써야 할 것도 같은데, 아직 실물을 구입하지도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사다 놓은 것도 아직 읽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번역이나 편집이나 등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기도 뭐한데, 여하간, 자꾸 미적거리지 말고 간만에 알라딘 들어온 김에 대강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1. 혜움이음 - 수상쩍을 정도로 인디언 문학에 진심인 출판사


언제였나. 여기에서 새로 낸 소설을 보고 신기한 출판사다 싶었는데, 나중에 가서 그걸 알라딘에서 검색하려니 정확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사슴 머리 여자"로 검색했더니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사슴 대가리..."까지 쓰다가, 에이, 아니겠지 싶어서 신간 목록을 일일이 뒤지다 보니, 한참 뒤에야 "엘크 머리를 한 여자"라고 정확한 제목이 나온다. 이거... 제목이 헛갈린 이유는 표지에 나온 동물이 흔히 말하는 "엘크"보다는 오히려 "사슴"에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괜히 한 번 시비나 걸어 볼까 싶어 구글링해 보니, "엘크"라는 명칭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제각각이어서, 그중에는 말코손바닥사슴이라고 해서 넓데데한 뿔을 가진 동물도 있고, 이 책 표지에 나온 가느다란 뿔을 가진 동물도 있다고 해서, 오오, 그렇구나, 또 하나 배웠다 싶었다.


그나저나 혜움이음이란 낯선 출판사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네 권을 간행했는데, 하나같이 번역서일 뿐만 아니라 무려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문학에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과거 한길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다가 단행본으로도 재간행되었던 스콧 모머데이의 "여명으로 빚은 집"(한길사 시절에는 "모마데이"의 "새벽으로 만든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첫 책으로 내놓은 것을 보고, 오, 뭔가 좀 아는 출판사로군, 싶었는데 이후로도 줄곧 인디언 혈통 작가들의 인디언 소재 작품들을 내놓는 것을 보니, 아예 작정하고 이쪽으로 파고 드는 것인가 싶어서, 앞서 말했듯이 기대 반, 걱정 반, 뭐,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까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니, 솔 출판사의 SNS에 신간 홍보가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 계열사나 자회사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디언을 소재로 한 작품이야 적지 않겠지만, 추리소설가 토니 힐러먼의 경우처럼 (최근 그의 회고록이 중고샵에 있기에 구입했다. 그가 나바호족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는 참전 용사들의 정화 의식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실려 있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그의 첫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그 의식이 조지프 캠벨이 연구/기록했다는 인디언 참전 용사들의 출정 의식과도 한 쌍이 아닐까 싶어서 살펴보고 싶었던 것인데, 그 내용은 캠벨의 첫 저서에 집약되었고 훗날 "창작 신화"인지 "원시 신화"인지에도 구체적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는 인디언 혈통이 아닌 외지인 작가가 쓴 것도 많을 터이니, 혜움이음에서 연이어 간행하는 것처럼 실제로 인디언 혈통 작가가 쓴 작품만 모아 놓은 시리즈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2. 고딕서가 - 수상쩍을 정도로 고딕 문학에 진심인 출판사


여기는 제목 그대로 고딕 문학을 집중적으로 내고 있어서, 지금까지 나온 다섯 권 모두가 딱 그 장르에 해당한다. 그중 두 권은 장편이고 (그중 하나는 무려 르파뉴의 작품이다!), 세 권은 개스켈, 올컷, 셸리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다. 번역자가 모두 같은 사람인 것으로 미루어 이른바 "덕업일치"의 경지에 이른 1인 출판사인지도 모르겠다.(비슷한 경우가 과거 SF만 열심히 간행하다가 결국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던 "불새" 출판사인데, 아쉽게도 1인 출판사로 기획부터 제작까지 도맡다 보니 번역이나 편집에서는 어설픈 부분이 적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나중에 한 번 문을 닫았을 때,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며 발행인이 소장하던 "사이보그 009"와 "초인 로크" 전권을 매각하겠다고 SNS에 올리는 "패기"를 보여주었던 것이 각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왜 하필 고딕 문학 시리즈인지 궁금하다. "오트란토 성"이나 "몽크" 정도를 제외하면 본격적인 고딕 문학에 해당하는 작품은 의외로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고 기억하기 때문에 한층 더 궁금하고 신기하고, 뭐, 그렇다.(카포티와 오코너와 매컬러스로 대표되는 "남부 고딕"과는 또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고딕"의 정의를 뭐로 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기는 한데, 게이먼의 "죽음"이나 애덤스의 "웬즈데이" 같은 "고스"와는 또 뭐가 다른지도 따져봐야 할 것 같으니, 이것도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제법 공부를 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고딕서가의 책은 세 권쯤 이미 사다 놓았으니 조금 한가해질 때에 한 번 읽어보아야 하겠다.(하지만 현실은 아직 "자불어" 1권도 다 읽지 못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태평광기" 완질이 기다리고 있고!)




3. 디다스칼리 - 수상쩍을 정도로 몰리에르 희곡에 진심인 출판사


여기는 얼마 전에 북펀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몰리에르 희곡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그렇잖아도 대부분의 번역서가 "몰리에르 작품집"이니 "몰리에르 희곡선"이니 하는 이름이다 보니, 이것저것 중복되는 작품이 많아서 좀 솎아내려고 하던 참이었다. 급기야 갖고 있는 번역서를 찾아내서 마루에 쌓아두고 차일피일하던 참이었는데, 희한하게도 몰리에르를 집중적으로 간행하는 출판사가 있다기에 자연히 호기심이 생겼다. 현재 세 권까지 나왔는데 분량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으로 보인다. 몰리에르에 대한 관심은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돈 후안" 전설을 이용한 작품 예닐곱 종을 연이어 읽고, 비교적 최근에는 주디스 슈클라 책 때문에 덩달아 "타르튀프"까지 읽으면서 간만에 부활했는데, 그 와중에 이것저것 메모한 내용을 아직 다 정리하지는 못했다.


가만 보니 여기도 번역자가 같은 사람이다. 생각해 보니 울산대 출판부의 코르네유 희곡 선집도 전공자 한 명이 번역했는데, 결국 이런 종류의 책은 누군가 한 명이 작정하고 달려들어야만 뭔가 결과가 나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하의 플라톤도 이제이북스/정암학당 전집은 완간되지 못하고 출판사를 옮기고 말았는데 (근데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꾸준히 사 모은 독자들을 엿먹이는 것 아닌가? 최소한 판형이나 디자인만큼은 구판과 맞춰주었어야지!) 과연 몰리에르 시리즈는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궁금한데... 어째서인지 맨 처음 나온 책은 이미 품절이어서 벌써부터 살짝 불안해지기도 한다.




4. 파시클 - 수상쩍을 정도로 에밀리 디킨슨에 진심인 출판사


이 출판사에서는 다른 책들도 내고 있지만 디킨슨 시 선집을 다섯 권이나 내놓았다. 역시나 분량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인데, 특히 번역이 좋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디킨슨 시를 영어로 읽어보면 어떤 것은 쉬운 편이지만, 또 어떤 것은 단어가 끊기거나 도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나귀님도 종종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난감할 때가 많은데, 기존 번역서 중에서는 그런 난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영혼은 제 무리를 스스로 선택한다"라는 시의 경우, 민음사의 강은교 번역본에 수록된 내용은 1980년대 구판부터 2010년대 최신판까지 줄곧 오역으로 남아 있다.(나귀님이 확인한 것 중에서 가장 정확해 보이는 번역은 지만지의 디킨슨 선집에 수록된 것이었다. 근데 이 시의 해석에 대해서는 미국 사람들도 설왕설래하더라).


파시클의 디킨슨 선집은 계속해서 개정판이 나오고 있는데, 어쩌면 오역/오타 같은 문제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나귀님이야 구판과 신판 모두를 갖고 있지는 않으니, 내용이 정확히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번역/오역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라는 것이 그러한데, 나귀님이라면 십중팔구 "예쁜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안 예쁘더라" 정도로 옮겼을 것 같으니, 이 정도면 번역자의 센스가 작렬한 사례로 충분히 꼽을 만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오역은 큰 문제다. 예를 들어 "수탉 씨에게 죽음은 무슨 상관일까"라고 옮긴 시는 "죽은 자에게 수탉이 무슨 상관이랴" 정도로 옮겨야 맞을 것이다. 내용을 보면 죽은 자는 세상 일에 관심 없다는 것이니까.





위에서 소개한 몇 군데 말고도 지금 당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 희한한 출판사가 몇 군데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기억이 나면 다시 한 번 끄적끄적해 보고, 아니면 말고, 뭐, 그래야겠다. 그나저나 원래는 "마리루이제 플라이서의 길고도 화려했던 극작가 생활"이라는 제목만 달아놓고 본문에서는 영 딴판으로 "오카자키 교코와 자기 몸에 대한 혐오"에 대해서 끄적끄적해 보려고 했는데, 결국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서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고 떠나는 셈이 되었다. 왜 나는 새해부터 이렇게 정신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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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라는 제목 희한한 책이 나왔기에 플루타르코스 "비교 열전"의 부분역인가 뭔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영국의 역사가 에이드리언 골즈워디의 신작인 모양이다. 이미 여러 권 번역서가 나온 저자라고 기억해서 이름을 클릭해 보니 몇 권이 주르륵 나오는데, 나귀님 기억에는 이것 말고도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은 거다. Adrian Goldsworthy 로 검색해 보니 그제야 <카이사르>와 <로마전쟁영웅사>가 나오기에, 그러면 그렇지, 했다.


이거, 지난번에 출판사마다 제각각인 인명 표기를 그래도 알라딘에서만큼은 모두 검색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조너선 크래리/조나단 크레리, 루시 리퍼드/루시 리파드, 스크루턴/스크루튼/스크러턴/스크러튼을 예로 들었는데, 얼마 전에 확인해 보니 나귀님이 제안한 것처럼 이 가운데 어떤 이름을 눌러봐도 모든 책이 나오게 수정 조치되어 있었다. 십중팔구 에이드리언 골즈워디/아드리안 골즈워디도 조만간 슬그머니 고쳐 놓지 않을까.




[*] 알렉산드로스 전기는 꽤 오래 전에 삼성문화문고로 나온 것을 하나 읽은 것이 전부인데,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전기가 더 나왔으니 조만간 날 잡아서 싹 정리해 봐야 되겠다. <히스토리에>는 뭔가 좀 색다른 각도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독특하다고 할 만하지만, 아무래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내용까지는 아닌 듯하다. 그나저나 계속 나오고는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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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의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클릭해 보니, 책소개 설명 가운데 "꼭 필요한 주석만을 엄선하여 소설의 흐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주석은 면주로, 작품의 배경 이해에 도움을 주는 주석은 미주로 처리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완독률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면주"(面註)는 "주석"이 아니라 그 밑의 "쪽수 나오는 부분"을 가리킨다고 알고 있어서 살짝 의아해졌다.


새로 나온 <율리시스>를 예로 들어 보자면, 9쪽에서 "면주"는 "1장 텔레마코스 9"를 가리키고, 그 위에 나온 라틴어 설명 주석은 "각주"라고 해야 맞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온 정의처럼, "면주"란 "책에서 각 면의 위나 아래 또는 본문 바깥쪽에 넣는 편ㆍ절ㆍ장의 제목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위의 책소개 설명도 "면주"와 "미주"로 처리한 게 아니라, "각주"와 "미주"로 처리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출판계의 잘못된 일본식 용어로 지적되어 온 것 가운데 하나가 "하시라"인데, 원래는 "기둥"(柱)을 가리키는 일본어에서 비롯되었으며, 결과적으로는 "면주"(面註)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지금 굳이 이 책에 와서부터 "면주"를 "각주"의 동의어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혼란만 불러오는 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이미 국어사전에 "면주"의 정의가 전혀 다르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한자에 생소한 세대에서 나온 오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다. 즉 "뒤쪽[尾]에 있는 주석[註]"이 "미주"(尾註)이니 "페이지[面]에 있는 주석[註]"은 "면주"(面註)라고 나름 논리적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정작 "면주"(面註)가 같은 자리에 나오는 다른 대상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출판사에서 찾아와 우기듯이 나귀님이 또 오해한 거든가...



[*] <율리시스>의 김종건 번역본은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을 당시부터 오역 논란이 있었고, 범우사를 거쳐 생각의나무에서 대대적인 개역본(3판)이 나왔을 때에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현재는 4판쯤 나온 모양인데, 자칭 조이스 연구의 대가가 내놓은 다른 번역본(예를 들어 조이스의 아내 전기인 <노라>)을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수준의 오역이 난무하는 것으로 미루어, 김종건의 기존 번역 전부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남을 시켜서 한 것에 본인의 이름만 올렸다고 해도 문제고, 본인이 직접 했는데 오역이 난무했다면 더 문제가 아닌가!) 여하간 <율리시스> 번역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익히 인정하는 바이지만, 무려 사반세기 가까이 오역본만 붙들고 있었던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번역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물론 위의 "면주/각주" 이야기처럼 또 뭔가 이상한 데가 있다면 열심히 물고 늘어질 나귀님이긴 하다만...


[추가] "면주" 이야기를 쓰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기억하는 한자는 面柱였던 반면, 현재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面註로 나오기 때문에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꺼내기 귀찮아서 아까 글 쓸 때에는 참고하지 않았던 몇 가지 자료를 뒤늦게야 꺼내 보니,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에도 面柱라고 "기둥 주" 자를 써 놓았는데, "하시라"라는 일본식 표기를 감안해 보면 이쪽이 오히려 정확해 보인다. 내가 가진 출판 편집 관련 자료 중에 가장 두껍고 오래 된 매뉴얼인 <도서편집총람>(이종운 지음, 범우사, 1991)에도 역시나 面柱라고 나왔다. 구글링해 보니 面柱는 중국이나 일본의 용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일본 출판계에서는 해당 부분을 柱라고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원래는 面柱가 정확한 한자인데 나중에 가서 面註로 잘못 적혔고, 급기야 그게 올바른 표기인 것처럼 와전되어 널리 퍼졌으며, 급기야 각주나 후주 같은 註의 일종으로 오인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해 보인다. 당장 영어로도 면주를 running head, 각주/후주를 footnote/endnote로 지칭하는 것만 봐도 柱와 註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양식/일본식 근대 서적 조판이므로, 그 체제는 서양에서 따왔다고 간주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오인/와전은 일면 인터넷 특유의 도깨비 장난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일단 인터넷에 한 번 떴다 하면 오타나 오류가 섞인 잘못된 정보라도 삽시간에 퍼지는 것은 물론이고, A가 B를 무작정 베껴 쓰고 나면 다시 B가 A를 그 출전으로 명시하는 등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정확한 내용을 짐작하기 힘들게 만들어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내가 참고한 네이버 국어사전만 해도 기껏해야 10여 년, 길어야 20년밖에는 되지 않은 물건일 터이고, 텍스트 입력 과정에서 한자 한두 개가 엉뚱하게 바뀌어 있는 정도의 오류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여하간 面註이건 面柱이건 간에, 이미 그 이름으로 지칭되는 대상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누가 봐도 "각주"인 것을 굳이 "면주"라고 쓴 것이 잘못이기는 매한가지이긴 하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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