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문제들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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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책. 가슴이 너무 뻐근하다. 첫 페이지의 글부터, 견딜 수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불안하다. 나는 무기력해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작은 아이를. 우연히, 시간의 급류에 휩쓸려, 어른들의 세계로 빠져버린 그 아이를.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책을 읽어 나갈수록 5학년 권아영은 지워지고,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 으르렁거리는 인간의 모습만이 또렷히 드러날 때마다 섬뜩함을 느꼈다. 두려움을 지나 삶을 관조하고 무력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아영에게 더이상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얼굴을 숨긴 권력이 그 작은 아이를 두고 분노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관한 실험을 하는 듯,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헌책방에서 죽음을 꿈꾸는' 그녀는 고통의 퍼레이드를 겪으며 늙고 노쇠해져가고 있었다.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애들이 알려줬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슈렉. 슈레기. 냄새나. 저리 꺼져. 아영은 하나같이 뾰족하고 냉랭하던 목소리들을 떠올렸다. 그애들도 어느 순간 저절로 깨닫게 된 걸까. 교실 구석에 앉아 있는 권아영이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초록색 괴물이라는 것을.
"나 게이는 처음 봐요."
"나도 너처럼 뻔뻔스러운 애는 처음 본다."
"근데 좀 다르네요. 만화에 나오는 거랑."
아저씨는 만화에 나오는 어떤 주인공과도 닮지 않았다.(중략) 그들은 쾌활하고 가볍고 자유로웠다. 아저씨처럼 무겁고 느릿느릿하지 않았다. 상대방과 마주 보는 눈이 따스하고 행복해 그들이 동성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같은 게이라면서. 대꾸 없는 아저씨의 어깨가 더욱 좁아졌다. 헐렁한 흰색 셔츠가 아저씨 등을 더 휑하고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p.133~134, 「한뼘의 체온」 부분

 

헐값에 넘긴 책들이 넘쳐나는 곳. 그 책들이 위태롭게 이룬 기둥 사이에 세상으로부터 밀쳐진 두 사람이 있다. 둔한 체구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슈렉으로 불리며 놀림감이 된 아이 '아영'.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동성에게만 사랑을 느끼는 남자 '두식'. 그들의 주변인물들은 두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 갈취할 수 있는 모든 이득을 앗아가려 달려들었다. 폭력으로, 윽박지름으로, 때론 회유와 동정으로 그들을 이용했다. 처음부터 그랬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아영'과 '두식'. 자신들은 불완전하며 불길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했고, 그래서 그림자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늘 밑에 자신을 늘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으로 숨어들어온 아영과 헌책방으로 도망쳐온 두식이 하나의 공간을 나눠 쓰게 되면서 그들은 변화를 겪는다. 사람과 소통을 하는 일이, 서로를 걱정하며 일상의 체온을 나눠주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두식은 아영의 다리에 짓눌린 자신의 몸이 의외로 안정되기 시작하는 것에 놀란다. 꿰맨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 것과 상관없이 두식은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이 체온이 기쁜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살을 맞대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갈구해왔던 이만큼의 체온. 고작 이만큼, 이만큼의 체온을 원했을 뿐인데. 

-p.159, 「안개」 부분 

 

그들은 썩어가는 두 개의 물 웅덩이였다. 어떤 파문도 일 줄 모른 체 그들에게 던지는 행인의 쓰레기를, 욕지거리를 품은 채 가만히 고여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서로에게 작은 파문이 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그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흐리지만 분명한, 희망의 문을 향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잘 자리를 비켜주고, 아이의 옷가지와 간식을 사다주고, 목욕을 다녀올 돈을 넉넉히 쥐여준다. 아저씨의 일을 돕고, 어두운 안색을 살펴주며,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을 붙잡아 준다. 서로의 식사를 걱정하고 마주보며 밥을 먹는다. 두식은 아영이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개 속으로  아이를 찾으러 나선다.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 준 성현을 뒤로한 채로. 또 아영은 두식이 자신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까봐 자리를 비켜준다. 뻔뻔하게 아이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황순구가 있는 거리로. 
사소한 배려가 섞인 행동들은 그들 안에 잠식해있던 '위안'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안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한 것.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타인이다. 그 망가진 삶을 다시 어루만져줄 수 있는 것도 타인이다. 그렇게 그들은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를  서로에게 지피며 지금 이 자리를 떠날 용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들이 어둠과 안개, 그림자의 삶 밖으로 나가기 위해 피워올린 불길이 헌책방이 있는 건물을 뒤덮었을 때, 아영이 황순구 때문에 겪어야했던 공포는 누군가에게로 전이되어 여전히 살아 꿈틀데고 있었다. 약자에 대한 집단 폭행, 성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한 아이들이 성을 놀이개로 삼고,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현실은 어제 오늘 만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무섭게 자라나고, 사회는 점점 그 아이들을 제어하지 못한 채 휘둘리며 이글어져 가고 있는 현실. 기사화 된 일들에만 관심을 쏟고 정작 크고 작게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선 눈을 감아버리는 현실. 네티즌이 일어서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들고, 몇몇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건은 소동으로 치부해버리는 참혹. 아영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 아이들이 입을 열어 부모에게,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사회가 그 문제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주변에 서있는 사람으로써의 나는, 우리는, 스쳐지나는 그들의 사정을 조금은 따뜻하게 바라봐주어야 할텐데,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라는 이름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더 이상 슬프게 바라보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배웅하듯, 따뜻하게. 더 이상 이곳을 서성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속으로 속으로만 그들에게 화이팅을 보낸다. 우리가 그들이 겪은 고통을 안타깝게 여길 순 있지만 동정할 수는 없다. 누구도 그들의 고통 앞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 밖으로 밀려나 현실과 부딪히며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 까닭이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작가는 왜 이 글을 써 나갔을까. 무수히 많은 두식과 아영 들이 가마 속에서 터져나가는, 슬픈 모습을 감내하면서. 아마도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꾸려진 고요해 보이는 현실에 가려져 스스로 사그라지는 영혼들을 환한 조명 밖으로 꺼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저기 바쁘게 지나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걸음 앞에 용기라는 말을 붙여도 될지. 이제 막 어둠 밖으로 나서 그들의 삶이 다시 어둠이 찾아 오기 전에 조금이나마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글을 나서며 문득,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겨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듯 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가슴에 품어본다. 아영과 두식이 따뜻한 시선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었으면 싶은 바람. 오늘 속에서 내일을 기다리며,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하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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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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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연인지 요즘 만나는 소설들 대부분이 어린 화자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어린 그들이 책 속에서 겪는 일련의 일들은 나를 그와 같은 시절로 데려다놓기도 하고 때론 잊으려 애썼던 일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건너가는 경계선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해야했던 시절. 나는 요즘 그 시절들 속을 헤매고 있다.

그 때의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도 컸고 성숙했다. 그러나 운동을 잘하지 못하는 둔한 몸이나 이름들로 놀림을 받으며 상처를 입기도 했었다. 선생님 책상 위에 제출한 일기장을 몰래 읽은 아이들의 수군거림. 나를 괴롭히던 아이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어본 적도, 빨간펜을 들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 아이의 이름을 적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책 속 신이치와 같은 5학년이었을 때, 나는 매일 지각하는 친구를 그 애 집앞에서 기다렸다 함께 학교에 가야 했고, 아침자습의 과제를 대신 해주어야 할 때도 있었고, 시험답안이 적힌 쪽지를 선생님 몰래 그 아이에게 건내야 했던 적도 있었다. 너무나 연약하고 볼품없어서 지우고 싶은 그 시절. 나는 늘 그 친구에게 기가 죽어 있었다. 늘 그 아이가 하자는 데로, 싫다는 말도 못하고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던 1년은, 내게 너무나 비참하고 후회스러운 기억일 뿐이었다. 뭐가 부족해서 그토록 겁을 집어먹었던 것일까. 신이치를 보며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많이 불편했다. 그 아이의 내성적인 성격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엄마 때문에 마음조리는 모습도 안타까웠다. 언젠가의 나도 녀석과 비슷한 모습으로 일상을 대했었고, 같은 일은 아니지만 다른 일 때문에 마음조리면서도 누구에게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가슴앓이 했던 기억이 웅크린 모습으로 내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고요하게 시작된다. 한 가정의 식탁 위에서.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할아버지 쇼조와 엄마, 함께 있을 수 있는 신이치 가족의 전부다. 신이치의 아버지는 암투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집 안사정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그들. 전학온 신이치에겐 누구도 섣불리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고, 전학온 처지가 같은 하루야와 누구에게나 다정한 듯 보이는 나루미가 신이치에게 말을 걸어오는 친구의 전부였다. 신이치와 소라게를 지지는 장난을 치는 하루야, 아버지와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는 나루미는 여느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점점 그들이 가까워지고 서로의 속내를 나누가 되면서 드러나는 각자의 상처들은 어린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려 한다. 마음을 숨긴 채 상대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오히려 더 그 상대에게 마음을 나눠주려 애쓰기도 하면서. 


 

이건 누구냐.

꿈에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얼굴을 한 소년이 바로 맞은편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볼을 추하게 끌어올리고, 입술 틈새로 이를 내보이며. 그 이 사이에 타액으로 만들어진 실을 늘어뜨린 채 검은자위 태두리가 몽땅 드러날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그 얼굴 이외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하얗게 지워져 사라지자, 신이치는 무슨 실이라도 툭 끊어진 것처럼 무감각에 빠졌다.

바로 그 다음에 신이치의 온몸을 덮쳐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공포였다. 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목구멍 속에서 무의미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자 거울 속의 소년도 턱을 떨면서 치열 안쪽으로 뻥 뚫린 목구멍을 보여주었다.

혼란에 빠진 신이치는 얼굴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돌릴 수가 없었다. 거울 속의 소년과 눈을 마주친 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의 맥이 세차게 뛰고 폐가 오그라진 것처럼 호흡이 얕아지자, 순식간에 목구멍 아래에서 부풀어 오른 비명소리가 당장에라도 목구멍을 찢고 튀어나오려고 했다.

  - p. 372~373                    

 

스스로가 빈 소원에 대한 자책감으로 두려움에 휩싸이는 신이치의 모습. 나는 여전히 아이인데 누군가 어른이 되라고 뒤에서 등을 떠밀 때의 두려움과 같은. 언젠가 나 또한 겪어본 듯한 소년의 마주침에 오래 눈을 두었다. 작가가 이토록 상징적이며 섬세하게 불안정한 경계 위에 놓인 한 아이의 감정을 표현해낸 것이 인상깊었다.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처음 접해 본 나로썬 어떤 설명이 따라붙기까지 그가 이전까지 추리소설을 쓰던 이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문장은 따뜻했고 유연했으며 5학년 화자인 아이들의 마음을 내밀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스스로를 빛낼 힘이 없어 자꾸만 꺼지려드는 작은 아이들, 그들을 책 속으로 끌어오면서 작가는 아마도 그 시절을 지나와 성인이 되어서는 현실에 떠밀려 그 시절의 꿈과 고민을 잊고 가난해져 가는 안타까움을 깨닫게 해주려 한 것 같다. 그 시절 너무나 어리기 때문에 어른들의 눈 밖으로 밀려나고, 너흰 어리기 때문에 몰라도 돼, 하며 등을 돌리던 그 때. 우리는 그 마음을 잊고 이제 그 때와 같은 자리에 선 자녀에게 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역자의 후기에는 미치오 슈스케가 나오키상을 수상한 후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소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설을 계속 써 나가겠다' 는 의사를 표명한 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나는 이 한 마디의 말에 한 권의 소설에서 얻는 감동을 받았다.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할 이야기들, 외면당하지 않아야 할 연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글을 쓰는 이로써 그것만큼 보람된 일도 없지 않을까 싶다.  

책을 보는 내내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듯 편안했다. 가슴이 고요해지고, 마음으로 들어차는 따뜻함이 있었다. 처음엔 반복되는 아이들의 소라게를 태우는 행위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땐 아마도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불안을 이겨내고 싶었을 것이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그 일에 진지함이 묻고 작은 돈을 바라던 소원에서 엄마의 새 남자친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소원을 빌게 되기까지 얼키고 설킨 아이들의 감정들에 공감하면서 나는 소설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들이 누구에게도 선뜻 꺼내지 못하고 혼자서 겪어야만 혼란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렇게 또 한 번의 파문이 지나면 호수는 잔잔해지고, 그들은 조금 더 자라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조금은 웃으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세상으로 한 발짝씩 나아갈수록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삶과 대면하면서 소라게를 태워 그들만의 의식을 행하며 시간와 싸워나가야 했던 아이들. 그러면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울음을 터뜨리는 연약하고 말랑말랑한 아이들. 어느새 나는, 그 아이들을 통해 먼 미래에 찾아올 내 아들의 삶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가슴에 귀를 기울이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마음 한 켠에 두었다.


차가운 달을 끌어안은 두 손에서 솟아오르는 빛. 그 아래의 소라게. 이 책의 표지가 처음과는 달리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을 거두는 저 손, 그 안에서 자라나는 누군가의 꿈들. 달 너머에 있는 잃어버린 시간의 문을 바라본다. 보이지 않지만 달의 뒷면이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통화해온 그 문이 여전히 닫히지 않고 열려있다는 것을, 그것이 내 이름을 제목으로한 책 속 어느 한 페이지를 빛내고 있나는 것을, 본다. 어둠 뒤에 떠오르는 저 찬란한 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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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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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웠다. 그러나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틀 째 밤, 나는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밤새 선잠을 자는 듯 머리가 아팠다. 꿈속의 나는 내가 써놓은 글들을 쓰고 지우며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맞았고, 폭력을 감당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단단히 몸살이 났고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창밖에는 바늘보다 가는 빗줄기들이 불길하게 쏟아져 내렸다. 마치 땅 위에 있는 말랑말랑한 것들을 모두 상처내기라도 할 것처럼, 잔뜩 날을 세우고 지상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창문에서 뭉개지는 날카로움들. 창문이 있어 내게로 달려들지 못하는 그 날카로움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더욱 세게 창을 두드리며 내가 왈칵 창문을 열어버리기를, 그래서 나의 온몸이 피로 젖기를 바라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사납던 빗물들이 창에 부딪혀 뭉개지고 볼품없이 창틀로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내 기억속의 그들이 부디, 제발, 그렇게 편안하게 내 곁을 떠나길 바랐다. 비록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 되어야 했던,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그 비극적인 과거가 부디 7년의 밤 동안 그의 곁을 서성였던 만큼, 이제는 그만 떠나주었으면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체포되고 친척들의 집을 전전긍긍하다 헌이불짝처럼 내버려진 작은 아이의 삶. 그리고 그 시간들의 일부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승환 아저씨 곁에 자리를 잡기까지 너무나 불행했던, 평범한 사내의 삶이 조금은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느 날, 아저씨가 사라지고, 서원에게 하나씩 배달되기 시작하는 물건들. 그것은 아저씨가 ‘그 날’ 에 대해 쓴 글들, ‘그 날’에 대한 자료, ‘그 날’에 사라진 서원의 운동화였다. 그리고 다시 꿈틀대기 시작하는 7년 전 그 밤의 불길함이 서서히 서원의 곁에 뚜렷한 형체를 가진 검은 그림자로 드리워지면서,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7년의 밤』 은 세령댐 근방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 그 허구의 공간 안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서로  부딪히고 상처입으면서 일어난 검은 멍자국 같은 이야기였다. 상처를 바라볼 때마다 일어나는 공포, 가족이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한 맹렬한 싸움 안에서 이야기는 피가 튀듯, 토해내어진다. 이토록 생생한 이야기를, 글자를 읽던 눈이 공포를 느끼며 감겨지고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는 이야기를 처음,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를 하며 꿈을 꾸던 그, 현수에게 꿈을 빼앗을 결정적인 어깨 부상 사고. 그러나 그는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가족과 꾸려 나갈 평범한 삶을 꿈꿨고, 마음데로 가꾸지 못한 스스로의 꿈이 한 쪽 어깨에 매달려 있었고, 그래서 너무나 나약했다. 그러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져야 할 짐을 내 던질 수 없었던 그에게 세령마을로의 초행길은 자꾸만 알 수 없는 일들로 이어지고, 그는, 알 수 없이 자꾸만 헛 패들을 집어든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벼랑까지, 그 패들은 그를어둡고 음습하여 공포스럽기까지 한  세령호의 얼굴 앞까지  그를 몰아간다. 

그리고, 삶의 수문이 열리던 그 순간!
 

그는 홈런을 쳤다, 고 이제와 생각해본다. 비록 자신의 삶을 지켜내진 못했지만, 아들의 삶은 끝까지 지켜낸 것에 대해.
마지막에 밝혀지지만, 현수는 동료 승환에게 세령호에서의 일을 소설로 써줄 것을 당부해 두었던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끝이 보이지 않는 오영제의 복수에서 지켜내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처음부터 너무나 처절하게 드러났던 오영제의 악마적 본성. 아내와 딸을 '교정'이란 이름으로 학대하고, 자신의 것을 지켜내기 위해 계산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인물. 자신을 자극하거나 무시한 사람은 끝까지 어떤 식으로든 치밀하게 되갚아주었던 그의 모습은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 내면의 끓어오르는 분노가 자신의 딸을 차로 친 뒤 세령호에 던져 죽음으로 몰고 간 현수에게로 모두 향하면서 비극은 금이 간 틈을 비집고 세어들기 시작했고, 이제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사람들을 휩쓸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7년 전, 그 사고와 함께 터진 삶의 수문은 7년의 밤을 지나 이제 스무살을 앞둔 서원에게 마저 생생하게 재현되기 시작했다.  현수의 사형집행과 동시에 아들 서원을 죽여 7년 전의 딸아이에 대한 복수를 마무리하려는 그. 그러나  이제는 작은 아이가 아닌, 서원은  단단한 모습으로 오영제와 맞선다.

불타는 것처럼 빨갛고 열에 뜬 표정은 유령처럼 몽롱해 보였다. 서원이 집에 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자,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내렸느냐고 물어도 고개만 끄덕였다. 저녁 드셨느냐는 물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서원이 “저 여기서 컵라면 먹고 가도 돼요?”라고 묻자 말없이 컵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을 채웠다. 서원에게 젓가락을 쥐여준 다음엔 의자에 앉아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잘 먹었습니다” 하는 서원의 인사에 빙그레 웃었다. 집에 가겠다고 일어나자 서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겼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서원과 정문경비실을 나와 열 발짝쯤 걷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팀장이 유리창에 얼굴을 댄 채 서원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리가 좀 있었지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팀장의 눈에 어린 회한을, 불안한 삶의 끝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위태로움을, 울음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고통을.

세령호에서 벌어진 사건을 코 앞에 둔 지점에  다다랐을 때, 그 불안을 온 몸으로 느끼는 현수는, 그러나 끝까지 아들에겐 좋은 아빠이고자 마음을 숨기고 다잡고 있었다. 사라진 손의 감각을 찾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자해하고, 스스로 집어 든 헛패에 자신의 한 쪽 발을 잃은 그는 모든 고통이 자신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끝까지 그 고통을 가족과 나누어 지려고 하지 않았다. 끝까지 혼자서 싸우고 짊어진 채 서원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되도록 서원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자신이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인 것처럼. 그러나 고통 안에서 아들에게 컵라면을 내주고 한 참을 바라보는 부정에 눈물이 났다. 코끝이 찡하고 그의 돌이킬 수 없는 삶이 내내 내 가슴을 무겁게 했다. 어쩌다, 어떻게, 이곳으로, 그는 오게 된 것일까.

우리는 쉽게 나의 삶이라 말한다. 내 것이라고 당차게 말하고 아무도 함부로 간섭하지 않도록 방어한다. 그러나 삶은 내 마음데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뼈져리게 하게 된다. 삶은 끝임없이 양손에 각자 다른 패를 들고 나를 찾아오고 내가 선택한 패의 길로 나를 이끄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떤 날엔 그 마음데로 패를 던져두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홀린 양, 자신을 뒤덮은 물쌀에 휩쓸려 가면서 숨을 쉬지 못하고 상처입거나 자신 안의 악마적 본성을 꺼내 닥치는 데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내던지며 자포자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내일로 떠밀린다. 혹은 고통을 딛고 거침없이 내일을 향해 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내일을 맞이할 것인가. 그 물음이 자꾸만 가슴을 치게 했던 소설,  몇마디의 말로 다 하지 못할 느낌들. 나는 그 느낌들을 내 연약한 문장들로 하나하나 옮겨보고 싶었지만 끝내는 잘 되지 못했다. 이 소설의 리뷰를 쓰기 위해 한 달 간을 이 작품 곁에서 헤매었지만 결국 내 마음에 담긴 것은 하나도 이곳에 내어놓지 못했다. 이 글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심정이지만, 약속된 일 때문에 이 글을 열어두고 마는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다.

영화를 보는 듯 문장 위로 생생하게 떠오르는 인물들의 모습과 그 사이에 떨리는 몸으로 웅크리고 앉은 인간의 본성이 나를 쉴 새 없이 소설의 벼랑으로 이끈다. 평범한 삶이 변질되고 벼랑으로 떨어지다 나무뿌리에 매달려 번 잠시의 시간 안으로 나를 몰아간다.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너는 과연 어떤 패를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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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 없는 아이, 난감한 어른 - 준비된 부모를 위한 성교육 Q & A
김백애라.정정희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엮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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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더욱 특별하게 사랑해주고 픈 부모라면 꼭 읽어야 할 책!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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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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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작품집! 젊은 작가의 낯선 문장으로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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