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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우연인지 요즘 만나는 소설들 대부분이 어린 화자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어린 그들이 책 속에서 겪는 일련의 일들은 나를 그와 같은 시절로 데려다놓기도 하고 때론 잊으려 애썼던 일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건너가는 경계선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해야했던 시절. 나는 요즘 그 시절들 속을 헤매고 있다.

그 때의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도 컸고 성숙했다. 그러나 운동을 잘하지 못하는 둔한 몸이나 이름들로 놀림을 받으며 상처를 입기도 했었다. 선생님 책상 위에 제출한 일기장을 몰래 읽은 아이들의 수군거림. 나를 괴롭히던 아이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어본 적도, 빨간펜을 들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 아이의 이름을 적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책 속 신이치와 같은 5학년이었을 때, 나는 매일 지각하는 친구를 그 애 집앞에서 기다렸다 함께 학교에 가야 했고, 아침자습의 과제를 대신 해주어야 할 때도 있었고, 시험답안이 적힌 쪽지를 선생님 몰래 그 아이에게 건내야 했던 적도 있었다. 너무나 연약하고 볼품없어서 지우고 싶은 그 시절. 나는 늘 그 친구에게 기가 죽어 있었다. 늘 그 아이가 하자는 데로, 싫다는 말도 못하고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던 1년은, 내게 너무나 비참하고 후회스러운 기억일 뿐이었다. 뭐가 부족해서 그토록 겁을 집어먹었던 것일까. 신이치를 보며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많이 불편했다. 그 아이의 내성적인 성격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엄마 때문에 마음조리는 모습도 안타까웠다. 언젠가의 나도 녀석과 비슷한 모습으로 일상을 대했었고, 같은 일은 아니지만 다른 일 때문에 마음조리면서도 누구에게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가슴앓이 했던 기억이 웅크린 모습으로 내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고요하게 시작된다. 한 가정의 식탁 위에서.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할아버지 쇼조와 엄마, 함께 있을 수 있는 신이치 가족의 전부다. 신이치의 아버지는 암투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집 안사정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그들. 전학온 신이치에겐 누구도 섣불리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고, 전학온 처지가 같은 하루야와 누구에게나 다정한 듯 보이는 나루미가 신이치에게 말을 걸어오는 친구의 전부였다. 신이치와 소라게를 지지는 장난을 치는 하루야, 아버지와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는 나루미는 여느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점점 그들이 가까워지고 서로의 속내를 나누가 되면서 드러나는 각자의 상처들은 어린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려 한다. 마음을 숨긴 채 상대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오히려 더 그 상대에게 마음을 나눠주려 애쓰기도 하면서. 


 

이건 누구냐.

꿈에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얼굴을 한 소년이 바로 맞은편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볼을 추하게 끌어올리고, 입술 틈새로 이를 내보이며. 그 이 사이에 타액으로 만들어진 실을 늘어뜨린 채 검은자위 태두리가 몽땅 드러날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그 얼굴 이외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하얗게 지워져 사라지자, 신이치는 무슨 실이라도 툭 끊어진 것처럼 무감각에 빠졌다.

바로 그 다음에 신이치의 온몸을 덮쳐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공포였다. 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목구멍 속에서 무의미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자 거울 속의 소년도 턱을 떨면서 치열 안쪽으로 뻥 뚫린 목구멍을 보여주었다.

혼란에 빠진 신이치는 얼굴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돌릴 수가 없었다. 거울 속의 소년과 눈을 마주친 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의 맥이 세차게 뛰고 폐가 오그라진 것처럼 호흡이 얕아지자, 순식간에 목구멍 아래에서 부풀어 오른 비명소리가 당장에라도 목구멍을 찢고 튀어나오려고 했다.

  - p. 372~373                    

 

스스로가 빈 소원에 대한 자책감으로 두려움에 휩싸이는 신이치의 모습. 나는 여전히 아이인데 누군가 어른이 되라고 뒤에서 등을 떠밀 때의 두려움과 같은. 언젠가 나 또한 겪어본 듯한 소년의 마주침에 오래 눈을 두었다. 작가가 이토록 상징적이며 섬세하게 불안정한 경계 위에 놓인 한 아이의 감정을 표현해낸 것이 인상깊었다.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처음 접해 본 나로썬 어떤 설명이 따라붙기까지 그가 이전까지 추리소설을 쓰던 이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문장은 따뜻했고 유연했으며 5학년 화자인 아이들의 마음을 내밀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스스로를 빛낼 힘이 없어 자꾸만 꺼지려드는 작은 아이들, 그들을 책 속으로 끌어오면서 작가는 아마도 그 시절을 지나와 성인이 되어서는 현실에 떠밀려 그 시절의 꿈과 고민을 잊고 가난해져 가는 안타까움을 깨닫게 해주려 한 것 같다. 그 시절 너무나 어리기 때문에 어른들의 눈 밖으로 밀려나고, 너흰 어리기 때문에 몰라도 돼, 하며 등을 돌리던 그 때. 우리는 그 마음을 잊고 이제 그 때와 같은 자리에 선 자녀에게 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역자의 후기에는 미치오 슈스케가 나오키상을 수상한 후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소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설을 계속 써 나가겠다' 는 의사를 표명한 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나는 이 한 마디의 말에 한 권의 소설에서 얻는 감동을 받았다.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할 이야기들, 외면당하지 않아야 할 연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글을 쓰는 이로써 그것만큼 보람된 일도 없지 않을까 싶다.  

책을 보는 내내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듯 편안했다. 가슴이 고요해지고, 마음으로 들어차는 따뜻함이 있었다. 처음엔 반복되는 아이들의 소라게를 태우는 행위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땐 아마도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불안을 이겨내고 싶었을 것이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그 일에 진지함이 묻고 작은 돈을 바라던 소원에서 엄마의 새 남자친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소원을 빌게 되기까지 얼키고 설킨 아이들의 감정들에 공감하면서 나는 소설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들이 누구에게도 선뜻 꺼내지 못하고 혼자서 겪어야만 혼란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렇게 또 한 번의 파문이 지나면 호수는 잔잔해지고, 그들은 조금 더 자라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조금은 웃으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세상으로 한 발짝씩 나아갈수록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삶과 대면하면서 소라게를 태워 그들만의 의식을 행하며 시간와 싸워나가야 했던 아이들. 그러면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울음을 터뜨리는 연약하고 말랑말랑한 아이들. 어느새 나는, 그 아이들을 통해 먼 미래에 찾아올 내 아들의 삶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가슴에 귀를 기울이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마음 한 켠에 두었다.


차가운 달을 끌어안은 두 손에서 솟아오르는 빛. 그 아래의 소라게. 이 책의 표지가 처음과는 달리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을 거두는 저 손, 그 안에서 자라나는 누군가의 꿈들. 달 너머에 있는 잃어버린 시간의 문을 바라본다. 보이지 않지만 달의 뒷면이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통화해온 그 문이 여전히 닫히지 않고 열려있다는 것을, 그것이 내 이름을 제목으로한 책 속 어느 한 페이지를 빛내고 있나는 것을, 본다. 어둠 뒤에 떠오르는 저 찬란한 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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