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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바람은 차갑다
잉그리트 놀 지음, 안진태 옮김 / 홍익출판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한 나이든 노부인이 자신의 사랑과 젊은 날을 회상하는 작품이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언니의 남편이 방문하게 되면서 그녀는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 안에 남은 것은 정열을 지키기 위한 차가운 바람이 있었고 나이 든 부인은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시리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탐정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인물에 의한 사건이 일어나는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은 시리즈다. 전 작인 <약사 헬라>도 그랬다고 하는데 이 가족이 한 명씩 등장하며 겪는, 혹은 겪었던 사건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지막에 등장해서 결정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코라는 할머니의 손녀로 작품 <Die Häupter meiner Lieben>의 주인공이고 또한 할머니의 첫사랑이자 언니의 딸인 조카 하이데마리는 <약사 헬라>에 등장한다. 이처럼 가족의 구성원이 작품 하나씩에 등장하는 교묘한 전개 방식을 띄기 때문에 시리즈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은 단순한 할머니의 첫사랑에 대한 회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독일의 퍼트리셔 하이스미스라고 불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이 워낙 이상하다보니 작품의 참 맛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잘 번역을 했다면 <오렌지 다섯 조각>과 같은 2차대전을 색다른 시각에서 조명한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고 뒤로 갈수록 밝혀지는 가족사와 숨겨 놓은 이야기가 조이는 맛이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님 작가에 대한 찬사가 잘못된 건지도... 번역으로 보기 힘들겠지만 <오렌지 다섯 조각>을 보셨다면 그 책처럼 봐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아무튼 저녁 바람은 차갑다. 나이가 들면 젊은날을 회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젊은 날이 아무도 겪지 못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것이라면 더더욱 안타깝고 서글퍼진다. 젊은 날 자살한 그녀의 남동생은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이상하게라도 살아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노부인은 전쟁을 탓하지 않는다. 전쟁때도 사람들은 살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위치에 있었기에 그것은 나름대로 살 수 있는 터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온 이루어지지 못한 애닯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사랑 때문에 언제나 사건은 일어났다. 사랑으로 사람들은 많은 일들을 저질렀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또 그러면서 다른 사랑으로 잊기도 하고 죽을때까지 못잊기도 한다. 노부인의 사랑은 끝까지 이렇게 못잊는 것으로 남아 설레게 한다. 설레는 노부인의 치장 속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 있을지 보고 싶은 분들은 보시길...
언젠가 이런 카피가 있었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우리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영원히 이 카피안에 있는 것은 아닌지... 차가운 저녁 바람에도 꿋꿋하게 살아온 노부인에게 그래도 박수를 보낸다. 끝까지 살아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받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