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합정동 주택가. 간판도 안내문도 없이 현관문 하나만 덩그렇다. 열고 들어가니 여직원 둘이 쓰는 작은 책상이 달랑 있고, 그 한편에 경리직원인 듯 보이는 아가씨가 앉아 있다. 그녀 뒤쪽에 방 하나가 더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사장실이라 여겼던 그 방은 2명의 편집자를 위한 편집실이었다.
“사장님 계십니까?” 아가씨에게 물었다. “제가 사장인데요.” 아가씨가 답한다. 헉! 학생 같아 보이는데 사장이란다. 1977년 설립된 이후 ‘아가사 크리스티 시리즈 80권’ ‘팬더 추리걸작 시리즈 50권’ ‘Q미스터리 시리즈 46권’ ‘모스 경감 시리즈’ ‘세계 추리 걸작선’ 등 고집스럽게 추리소설만 300여권을 내며 외길을 걸어온 전문출판사 해문. 28년 역사를 지닌 이곳의 사장은 29세의 젊은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 한 살 때부터 경영을 했을 리는 없고.’
“이화여대 영문과 94학번이에요.” 이경선(29) 사장이 자신을 소개했다. “맹종호 전 사장님이 추리소설광이셨어요. 해문은 그 분이 세운 출판사입니다. 저는 그 분의 며느리고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2000년부터 ‘해문’을 맡아 경영하고 있습니다.”
의문은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남았다. ‘그렇다면 남편은? 자신이 며느리라면 설립자에게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혹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깔깔 웃는 소리가 상큼하다. “남편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아직은 경영보다 회사생활이 더 좋은가 봅니다.”
해문출판사의 식구는 6명. 창고 담당자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여성이다. 그것도 3명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다. 추리소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사라기에 엽기적 분위기의 남자들이 우글거리리라 기대했던 초반의 예상은, 꽃다운 분위기에 녹아 눈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남자가 있으면 아무래도 제가 좀 다루기 불편해서요.” 젊은 사장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물론 남자가 없으면 불편한 점도 있어요. 작년 추석 땐 도둑이 들어서 금고를 홀랑 털어갔어요. 그럴 땐 좀 떨리기도 하고, 비오는 날 밤에 야근하면서 두개골을 깨고 목을 자르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으스스하기도 하고 그렇죠. 서점이 부도라도 나면 심각해요. 각 출판사에서 우르르 몰려와 기다리고 있다가, 잠깐이라도 문이 열리면 잽싸게 들어가서 자기네 책을 들고 나와야 하거든요.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가 나중에 반품을 요구하기라도 하면 출판사는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되니까요. 한 권이라도 더 들고 나와야 하는데, 여자들이 이걸 하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그럴 땐 남자 사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여자끼리만 있으니까 좋은 점도 있어요. 우선 복장에 신경 안써도 되니까 마음 편하고, 언니 동생 하면서 허물없이 지낼 수도 있고요. 우리끼리 점심 때 수다 떨면서 라면 끓여 먹기도 하고요.”
2004년 매출 2억5000만원
6명의 사원이 기록한 해문의 연매출은 2004년 기준 2억5000만원 규모. 결코 넉넉하다고 할 수 없는 살림살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추리소설의 인기가 괜찮은 편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별로예요. 2002년에 추리소설 붐이 다시 한번 일어나긴 했지만 그냥 반짝 하고 말았어요. 요즘엔 솔직히 현상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신간을 내도 초판 3000부가 다 나가지 않을 때가 많아요. 추리소설이란 장르가 참 특이해요. 우리나라에도 추리소설 동호인 사이트가 있거든요. 활동도 활발해요. 인터넷에 저희 추리물과 관련된 내용이 하나 뜨면, 리플이 수십 개씩 붙어요. 사람들이 추리소설에 관심을 보이기는 하는데 그게 매출로 곧장 이어지질 않아요. 광고를 해도 그래요. 광고를 하나 안하나 매출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왜 그럴까. 나름대로 분석해보고 결론을 내렸죠. ‘아, 이 분야에는 매니아층이 확실하게 형성돼 있구나. 그리고 시장은 그 사람들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구나’라고 말이에요.”
매니아층이 확실한 만큼 해문출판사는 신간 홍보 역시 매니아 중심으로 펼친다. “저희는 발간하는 책의 특성상, 언론 서평을 기대할 수는 없어요. 요즘 같아서는 광고를 할 수도 없지만 해봐야 아무런 반응도 없고. 그래서 추리소설 동호회에 신간을 보내요. 그러면 읽은 분들이 사이트에 서평을 올리고, 이것을 사람들이 읽고 그리고 나서 구매로 이어지는 거죠.”
매니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 사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직접 찾아오는 분들이 계세요. 그래서는 ‘다음 번에 나올 책은 뭐냐’ 묻기도 하고 ‘제목은 이러저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도 해주고 그러세요. 어떤 분은 외국의 추리소설 리스트를 한 200개 정도 들고 와서는 하나하나 동그라미를 치면서 ‘이 책은 꼭 내야 한다’ ‘이 책은 너무너무 재밌다’면서 꼼꼼히 설명해주기도 하세요. 갖고있는 원서를 직접 들고 와서는 그냥 빌려주겠다는 분도 계세요. 이런 분들이 계시니까, 어렵다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어요. 해문을 그렇게 사랑해 주시는데, 저희는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새로운 장르의 추리소설 선보일 것
“7살 아들과 토끼띠 띠동갑”이라는 이 사장은 의외로 “해문에 들어오기 전엔 추리소설을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재미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된 건지 추리소설은 읽을 기회가 없었어요. 문학을 전공했는데도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일단 읽기 시작하니 무척 재미있더라고요. ‘아, 이 맛이구나’ 싶어 요즘엔 추리소설 읽느라 밤을 새는 경우도 있어요.”
이 사장은 “새로운 장르의 추리소설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요리(料理)추리라고 해요. 서양에서는 ‘코지(cozy)추리’ 라고 해서 일반화한 장르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선 좀 생경한 부문이에요. 쉽게 말하면 살인사건이 요리와 결합되는 거죠. 주방에서 주로 사건이 벌어지고, 주방과 관련된 사람이 현장을 발견하게 되고, 사건은 전문 수사관이 아닌 아마추어 주방 아줌마가 해결하는 구조입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은 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요리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수다 떨듯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가 사건이 요리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는 거죠.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한 추리물입니다. 번역을 충실하게 해서 조만간 선보일 계획입니다.”
이 사장은 “국내 추리작가 기반이 취약한 만큼 아직까지는 외국 추리물 번역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며 “추리소설은 장르의 특성상 번역이 무척 중요하다”고 말했다.
“추리소설이란 게 그렇잖아요. 아주 작은 것 하나가 단서가 돼서 나중엔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 부분을 잘못 옮기거나 건너뛰거나 하면 정말 곤란하죠. 매니아를 봐서라도 그런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http://weekly.chosun.com/wdata/html/news/200510/20051005000010.html
추측이지만 다이앤 못 데이비슨의 Goldy Bear 시리즈가 출판되는 거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무튼 새로운 추리 소설이 나온다는 건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