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휴가는 날짜가 맞지 않아서 첫날 혼자 집에 있어야 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십견 때문에 아픈 어깨 물리치료나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신경외과에 갔다. 물리치료 잘 받고 나오다가 옆에 있는 피부과 간판이 눈에 띄었다. 느닷없이 하나 남은 발톱무좀을 마저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홀린 듯이 피부과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 년 전 처음 발톱치료를 받을 때는 한두 달 정도 약 먹고 아홉 개 발톱 모두 치료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하나이고 하니 레이저로 치료하는 게 좋겠다고 하길래 얼떨결에 그렇게 하게 됐다. 그런데 아뿔싸! 레이저 치료라는 게 발톱을 아예 뽑아버리고 레이저로 무좀균을 태우는 거였다. 병원 문을 나서기도 전에 발가락 마취는 풀리고 졸지에 발톱을 뽑힌 나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혼자 다리를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면 입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실 나는 여간해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 병원에 가는 걸 싫어하는 나를 보고 아내는 괜히 병 키운다며 늘 타박이다. 그런데 웃긴 건 병원 가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속으로는 며칠 입원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환자복 입고 링거 꽂고 병실에 누워있어 보는 게 소원 아닌 소원인 것이다.

입원한 것도 아니면서 꼼짝 못 하고 누워, 나답지 않게 내가 왜 그랬을까, 통증과 그것보다 더 아픈 자책 속에 휴가는 끝나버렸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내면아이의 상처 치유하기》(마거릿 폴, 소울메이트, 2013)와 《오은영의 화해》(오은영, 코리아닷컴, 2019), 《감정의 성장》(김녹두, 위고, 2015), 《내 무의식의 방》(김서영, 책세상, 2014),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로버트 존슨, 가나출판사, 2020)를 차례로 읽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어린 시절은 늘 어떤 통증과 함께 떠오른다. 머리부터 배, 무릎, 다리까지. 코피도 자주 흘렸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걸 다 꾀병으로 치부했다. 솔직히 나도 지금에 와서 기억을 떠올려보면 진짜 아팠던 것인지, 그냥 꾀병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분명히 아팠고,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치료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한 번도(사실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치료받지 못한 나는 병원을 거부하는 자아와 경험해보지 못한 병원을 욕망하는 무의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휴가 첫날이라는 느슨함이 무의식(혹은 내면아이)을 깨운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고, 뜻밖에 그 끝에서 혼자 아파 우는 아이를 만났다. 여기까지가 이 이야기의 전부인데 어쩐지 마음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그때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게 있었다는 것, 뭔지는 몰라도 그런 게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괜찮은 것 같다. 이제 병원 가는 거로 아내 타박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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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에리얼리 외(지음), 정지호(옮김), 《루틴의 힘》, 부키, 2020..


《루틴의 힘》 저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다. 그 루틴은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만들어서 실천하는 것이다. 《루틴의 힘》을 참고해서, 퇴근 후 두세 시간 정도 혼자서 공부하는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루틴을 만들어보자.


무엇보다 시작이 쉬워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짧은 시간, 단 15분 만이라도 매일 건너뛰지 않고 계속해나감으로써 시작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일단 시작할 수 있게 만든다. 시작할 때마다 연구실에서 가운을 입듯이 공부방에서 정해진 옷을 입고, 책상에 앉아서, 안경을 쓰고, 손에 연필을 쥔다. 이런 방식으로 루틴을 만들어 뇌에 시작 신호를 보낸다. 


꾸준히 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운다. 유리병에 물을 채울 때 큰 돌, 작은 돌, 모래, 물 순으로 채워가듯이 장기 목표로 큰 계획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춰 세부 계획을 수립한다. 계획에 따라 일과 시간표를 작성하여 실행하며, 이때 스스로 과제를 부여하고 마감 시간을 지정해 시간에 쫓기게 만든다. 이렇게 "특정한 조건을 정해 놓으면 붙잡고 해결해야 할 일이 주어진 우리 뇌는 문제 해결 모드에 돌입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완벽의 강요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좋은 계획은 반드시 점검과 수정 단계를 포함한다.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집중력 훈련을 한다. 집중에 필요한 핵심 기술은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감지해도 그 충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신경을 현재 하고 있는 일로" 다시 돌리는 것이다. 집중력을 높이는 데에는 명상이 도움이 된다. 명상 중에 잡다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의식은 하되 휘둘리지는 않도록 한다.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을 흘려보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에너지를 관리해서 지구력을 키운다. 규칙적이고 충분한 수면, 유산소 운동, 명상 등 회복하는 시간을 확보한다. 에너지 수준이 올라가고 떨어지는 시간을 파악해서 과제의 수준을 전환하고, 리듬에 맞춰, 예를 들어 90분 주기로 공부와 휴식을 반복한다. 진전 상황을 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지속적인 공부에 도움이 된다. 결과물을 노트에 펜으로 적기, 진도를 그래프로 표시하기, 공부 일지 쓰기 등이 있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계속하게 만드는 루틴의 힘'은 하고자 하는 일을 좀 더 즐겁게,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서 생겨난다. 루틴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은 루틴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쉽게, 꾸준하게, 한 걸음씩 목표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루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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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보르트(지음), 한석환(옮김), 《철학자 플라톤》, 이학사, 2003.

4. 왜 대화편인가?
5. 정의에서 이데아로
6. 좋음의 이데아의 여러 문제


플라톤은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독자를 철학의 본질인 진리 추구의 과정으로 이끈다. 진리 추구의 과정에서 대화는 특정한 덕에 대한 정의를 묻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덕의 판별 기준이 되는 이데아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논의는 아포리아 상태로 끝나지만, 플라톤은 이데아를 어떤 것이 지금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원인, 나아가 세계 전체의 원인으로 상정한다.

플라톤은 《변론》을 제외한 모든 저작을 대화 형식으로 썼다. 대화 형식으로 초기 저작 활동을 시작한 것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워 익힌 철학하는 형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중기 대화편에서는 시, 특히 고전 희극의 문학 요소를 원용하면서 대화 형식을 계속해 나간다. 대화 형식은 플라톤이 대화 참여자로 하여금 말하게 했던 내용과 플라톤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한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어떤 특정한 철학 사상으로 묶어두기가 어렵다. 플라톤이 생각한 철학은 가르침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철학의 본질은 끊임없이 진리와 앎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플라톤은 진리와 앎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묘사한다. 동시에 그 대화를 통해 독자를 진리 추구의 과정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초기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그리는 소크라테스는 특정한 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예컨대 《에우티프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버지를 고소하려는 자신의 행위가 경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에우티프론과 대화를 나눈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의 정의, 즉 경건이라는 술어의 내포에 대해 묻는다. 에우티프론은 경건한 것 중 하나, 즉 술어의 외연에 속하는 한 가지 예를 대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에우티프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내포와 외연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데아를 도입한다. 이데아는 어떤 행위가 경건한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때 비춰보아야 할 원형, 또는 본보기이다. 초기 대화편에서 이 이데아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에 아포리아, 즉 궁지에 빠진 논변 상태에서 느닷없이 대화가 중단된 채로 끝난다.

대화에서 정의를 내리려는 대상인 덕은 최선의 상태, 좋은 상태를 말한다. 좋은 상태가 무엇인지 알려면 좋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좋음은 욕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욕구한다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욕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견해가 올바른 것인지 판단하려면 척도와 기준이 필요하다. 그 척도와 기준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 속에 들어있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한다. 볼 수 있고 지각할 수 있는 영역에서 태양에 해당하는 것이 사고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의 이데아이다. 선분의 비유에서는 경험 세계를 이데아의 사본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데아는 경험 세계에 대하여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 이데아는 관조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관조는 능동적으로 강제할 수 없으나 학문과 철학에 몰두하여 연습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일어난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앎을 진리 추구의 목표로 삼았다. 이데아의 존재와 인식에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작 문제는 인간 인식의 유한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말하게 했듯이 철학이라는 '차선의 항해'에 몰두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최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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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자신이 쓰는 단어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항상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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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슬프도다! 판단해야 할 사람이 잘못 판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판단하는 사람', 곧 권력을 가진 자의 어리석은 판단은 개인과 가족, 공동체 전체에 재앙을 몰고 온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이를 경고한다.

"이제는 내가 고인들의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왕좌와 모든 권한을 갖게 되었소이다." 크레온은 테바이의 왕이 되었다. "이게 내 뜻이오. 내가 올바른 사람들보다 사악한 자를 더 존중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오." 권력을 손에 넣은 크레온은 누가 "올바른 사람"이고 누가 "사악한 자"인지 자신이 판단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크레온이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에 한 인간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크레온은 어떤 인간인가? 이제 크레온이 자신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을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아야 할 차례다.

크레온은 테바이의 왕위에 오르자마자 죽은 폴리네이케스를 땅에 묻지 못하도록 시신 매장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다. 얼마 후 파수꾼이 와서 누군가 몰래 시신을 매장했다고 보고한다. 코로스장은 크레온에게 암시를 준다. "왕이시여, 이번 일은 신께서 하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까부터 자꾸 마음에 떠오르는군요." 크레온은 무시한다. "입 좀 닥치시오, 그대의 말에 내가 분통을 터뜨리기 전에." 다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충고한다. "그대는 죽은 자에게 양보하시오. 죽은 자를 찌르지 마시오. 죽은 자를 죽이는 것이 무슨 용기가 되겠소?" 크레온은 예언자의 충고도 듣지 않는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했다가 붙잡힌 안티고네는 죽은 자의 시신을 방치하는 것은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이렇게 크레온은 자신의 포고령, 즉 입법으로 검증을 받는다.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어둠 속을 은밀히 떠돌고 있"는 소문을 아버지에게 전한다. "모든 여인들 중에서 가장 죄 없는 그녀가 가장 영광스런 행위 때문에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하다니!" 폴리스 시민들의 여론을 전해 들은 크레온은 오히려 아들을 조롱한다. "못난 녀석! 한낱 계집에게 굴복하다니!" 그러나 "한낱 계집"인 안티고네는 폴리스의 시민들이 보기에 "가장 죄 없는 그녀"이며, 그가 포고령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 행위는 "가장 영광스런 행위"이다. 코로스는 처벌받으러 끌려가는 안티고네에게 위로와 찬사를 보낸다. "그대는 영광스럽게 칭찬받으며 사자들의 깊숙한 처소로 내려가는 것이오. [....] 살아서, 그리고 나중에 죽어서 신과 같은 자들과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는 것은 죽은 여인에게는 큰 영광이 되겠지요." 크레온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우리는 법질서를 옹호해야 하고, 결코 한낱 계집에게 져서는 안 된다." 이번에 크레온은 통치로 검증을 받는다. 그리고 크레온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이 드러난다.

크레온은 입법과 통치에서 왜 그런 잘못된 판단을 했을까.

크레온  그녀가 범법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테바이 백성이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크레온  내가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백성들이 지시해야 하나?
하이몬  거 보세요. 이제는 아버지께서 애송이처럼 말씀하시네요.
크레온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하이몬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크레온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임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사막에서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크레온  (코로스장에게) 보아하니, 이 애는 여자들 편인 것 같소이다.

자신들 각자가 모두 폴리스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에게 크레온의 생각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재앙을 겪고 나서야 크레온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시인하고 후회한다. "아아! 분별없는 생각의 가혹하고도 치명적인 실수여! [....] 네 어리석음이 아니라 내 어리석음 때문에." 마지막으로 코로스가 노래한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그리고 신들에 대한 경의는 모독 되어서는 안 되는 법, 오만한 자들의 큰 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늘그막에 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네."

크레온은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신들에게 오만했고, 안티고네를 지지하는 여론을 무시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오만했다. 판단해야 할 사람이 잘못 판단한다는 것, 그것은 오만함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오만하다는 것은 모두에게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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