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와 그리스도교(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괄하여 정경의 형성 과정 및 성서 해석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교파 초월적 입장에서 기술한 책.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사,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교파 분열의 역사는 성서 해석 역사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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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짧아서 음식을 가리는 편인데, 특히 생선을 싫어한다. 어려서 어쩌다 어머니가 고등어라도 구우시면 한가운데 흰 살만 싹 발라 먹고 더는 손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남은 고등어를 다시 데워서 다음 끼니에 드시고는 했는데, 그렇게 다시 데운 고등어는 비린내가 심해서 타박을 해댔다. 그래서 언제나 남은 생선은 따로 혼자서 드셨다. 드물게 상에 오르는 생선 찌개는 아예 국물에 숟가락도 담그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 생선이 밥상에 오르는 일은 일 년에 몇 번 손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처음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외식을 한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갑자기 쓰러져 입원하신 아버지를 뵙고 돌아가려는데, 어머니가 저녁을 안 드셨다며 같이 먹자고 하셨다. 어머니를 따라 병원 구내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자마자 어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생태찌개를 주문하셨다. 생선이라면 질색을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데 생태찌개를 시키다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생전 처음 겪는 어머니 모습에 당황했다.

어머니는 생태찌개를 정말 맛있게 드셨다. 그때까지 그저 아까워서 비린내 나는 고등어를 두세 번씩 데워 드시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정말 생선을 좋아하신다는 걸 그 날 처음 알게 되었다. 다시 한번 당황했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마음껏 드시기는커녕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평생 참으셨다니. 왜 그러셨을까, 죄송하면서도 궁금했다. 궁금증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이미 곁에 계시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입맛도 바꾸는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을 예찬만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다. 희생과 헌신으로 포장된 '모성'이라는 개념을 이제라도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 자식을 낳아 길러보니 가끔 어머니를 향한 동료의식 같은 것이 생겨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를 덜어내어 자식의 존재를 채워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시대를 사셨던 어머니. 시대의 한계였을 것이고, 비난받을 일은 결코 아니지만, 바뀌어야 할 의식임은 분명할 것이다.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백소영, 대한기독교서회)는 바로 그 '모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오늘 여기에서 '모성'은 한 사람을, 한 가족을, 한 사회를 죽일 수도 있고 치유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인지도 모르겠다. 킬링이 아닌 힐링하는 '모성'을 지닌 엄마, 아빠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도움이 될 듯하다. 사서 읽고 싶다. 곁에 있는 엄마, 아빠들과 함께라면 더 좋겠다.


그러나 내가 전하려 하는 ‘엄마 되기‘는 생물학적으로 엄마인 사람만의 과제가 아니다. 여성이어야만 가능한 ‘엄마 되기‘도 아니다. 그래서 ‘엄마 되기‘는 차라리 은유이다. 나보다 약하고 어리고 늦은 생명을 돌보고 지키고 기다리는 마음을 기르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하는 이는 모두 ‘은유로서의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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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지음), 《철학 고전 강의―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라티오, 2016.

제31강 요약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는 형이상학의 핵심문제를 유한자(또는 대상 세계), 인간, 무한자라는 축을 중심으로 개관하고, 그 속에서 칸트의 시도가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알아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자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는데, 플라톤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통일을 이루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출발점은 '자기의식'으로 동일하면서도 데카르트의 자기의식이 신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칸트에서는 인간과 무한자가 단절되어 있다. 인간과 무한자의 단절에 직면한 칸트는 '최고선'을 요청함으로써 도덕 판단의 근거를 마련하고, '판단력'으로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의 연결을 시도한다.

플라톤에서 인간과 유한한 사물의 관계는 감각에 의한 것, 불확실한 것이기에 대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앎은 의견(doxa)일 뿐이다. 인간과 무한자의 관계에서 인간은 무한자를 알 수 있고, 무한자로 상승할 수 있다. 이 무한자는 '선善의 이데아'로, 이론적 앎의 영역과 실천적 행위의 근본원리가 결합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무한자, 곧 선의 이데아에 대한 앎이 가능한 플라톤에서는 선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으면 곧바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일어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인간의 앎은 지각에서 시작하여 기억, 경험 등을 거치고, 이 모든 것을 거친 다음 인간은 '부동의 원동자'라고 하는 무한자에 이를 수 있다. 이론적 앎의 영역이 부동의 원동자를 정점으로 하는 완결된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해도 실천의 궁극목적인 행복(eudaimonia)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이론학으로부터 확실한 답변을 가져올 수 없다. 실천의 궁극적인 목적, 실천이 지향해야 하는 도덕의 제일원리는 정치적 존재인 인간이 정치생활 공동체인 폴리스에서 살아가며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는 자기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자기의식은 근대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에서 시작하여 자기의식에 이르는데, 이 자기의식은 불안한 것이어서 대상 세계에 대한 앎은 신의 보장이라는 배경 속에서 작동한다. 데카르트에서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는 신에 대한 믿음이 어설픈 자기의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에서 자기의식은 진리 인식의 원천이다. 진리 인식의 원천은 자기에게 있지만 대상 세계로부터 인식 주관에 주어지는 데이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 앎의 영역에서 완전히 확실한 인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 무한자로부터는 경험 데이터가 아예 주어지지 않으므로 무한자에 대한 앎 자체가 불가능하고, 영원 불변한 보편적 도덕의 기초를 세울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요청해야만 하는 것인데, 요청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것이므로 이론과 실천의 통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칸트에서 인간과 신은 합치될 수 없고, 유한자와 무한자는 단절되어 있다. 고대적 사유에서는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에 이를 수 있었으나, 근대적 사유에서는 자기의식이 등장하면서 인간과 무한자는 멀어지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에서 시작하는 인간의 앎은 확실성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성의 사변적 요구가 들어서게 된다. 이성의 사변적 요구는 도덕 판단에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최고선을 향하고 있다. 최고선이라는 이념은 '직관이 없는, 사유의 순수한 형식'으로, 경험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앎 자체가 시작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것이기에 요청할 수밖에 없다. 최고선을 요청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앞서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성적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그때그때 통제하는 통제적 원리라는 것이다. 도덕의 원리가 통제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은 자유의지의 결단에 의해 움직인다. 자유의 영역은 인과율로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고, 최고선의 실현 원리인 행복은 인과관계에 따라 작동하는 자연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칸트는 자연 속에 목적이 있다고 하는 '자연 목적론'을 상정하여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연결하고, 자연을 인간의 궁극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정당화한다. 칸트는 이를 '외적합목적성'外的合目的性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목적에 연결시키는 힘을 '판단력'이라고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무한자와 합치될 수 있었던 인간은 데카르트와 칸트에서 무한자와 멀어져 단절되었고, 그 단절을 메우기 위해 칸트는 다시 무한자를 요청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에 대한 명석판명한 앎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 해도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는 한 인간은 무한자와의 관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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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진서의 《공부가 되는 글쓰기》 제9장 '수학 글쓰기'에 나오는 조앤 컨트리먼은 글쓰기로 수학을 가르치는 수학교사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조앤 컨트리먼은 학생들에게서 이런저런 정보를 이끌어 내며 그 정보들이 모여 올바른 답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 주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결코 정답의 유일한 관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문제의 답을 모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답은 교사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교실의 모든 아이가 합심해 밝혀내야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매우 탁월한 교사라는 사실이었다."(《공부가 되는 글쓰기》, 219.)

윌리엄 진서가 조앤 컨트리먼을 탁월하다고 한 이유는 "정답의 유일한 관리자"라서가 아니라 "올바른 답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는 목사의 역할도 "성도들에게서 이런저런 정보를 이끌어 내며 그 정보들이 모여 올바른 답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는 "정답의 유일한 관리자"처럼 행동하는 목사가 더러 눈에 띈다. 그들은 가르침과 배움이 위계질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르치는 자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배우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중세 교회도 부럽지 않을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을 테니 그들의 선생 노릇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 노릇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 여러분, 너도 나도 선생이 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다 아는 일이지만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3:1, 현대인의 성경)

그 심판은 '합리적 이성'으로 계산기만 두드려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도 다 아는 일"이라고 했지만, 계산기 숫자만 들여다보고 있는 자에게는 심판이 보일 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목사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도 아니다. 매사에 아는 척하고 가르치려 드는 습성이 내 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말을 듣지 말아라. 너희 선생은 한 분뿐이시며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복음 23:8)

앞서 인용한 수학교사 조앤 컨트리먼은 이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다 아는 일이지만, 교회에도 이렇게 탁월한 목사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성도들이 합심해서 답을 이루도록 기다려주는 목사가 조금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을 가진 한 사람의 형제로서 교회가 올바른 답을 이루는 일에 미미하게나마 마음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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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전 강의》는 "고대 자연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의식과 "데카르트와 헤겔"의 문제의식이 서로 대응하고, 고대 자연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헤겔 사이의 "칸트"가 서로 대응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철학자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전개되었던 철학적 사유가 근대의 '데카르트–칸트–헤겔'에서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나의 원리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 이것은 고대의 자연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두드러집니다. 인간이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서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알고자 하는 시도는 데카르트와 헤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자일 뿐이고, 무한자가 되려는 욕구는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플라톤은 괴로운 처지에 있는 듯합니다. 인간은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좋음을 찾아 방황하고 있으며 어느 한 쪽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중간자이기 때문입니다.

_《철학 고전 강의》 첫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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