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지음), 《철학 고전 강의―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라티오, 2016.
제31강 요약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는 형이상학의 핵심문제를 유한자(또는 대상 세계), 인간, 무한자라는
축을 중심으로 개관하고, 그 속에서 칸트의 시도가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알아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자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는데, 플라톤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통일을 이루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출발점은 '자기의식'으로 동일하면서도 데카르트의 자기의식이 신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칸트에서는
인간과 무한자가 단절되어 있다. 인간과 무한자의 단절에 직면한 칸트는 '최고선'을 요청함으로써 도덕 판단의 근거를 마련하고,
'판단력'으로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의 연결을 시도한다.
플라톤에서
인간과 유한한 사물의 관계는 감각에 의한 것, 불확실한 것이기에 대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앎은 의견(doxa)일 뿐이다. 인간과
무한자의 관계에서 인간은 무한자를 알 수 있고, 무한자로 상승할 수 있다. 이 무한자는 '선善의 이데아'로, 이론적 앎의 영역과
실천적 행위의 근본원리가 결합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무한자, 곧 선의 이데아에 대한 앎이 가능한 플라톤에서는 선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으면 곧바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일어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인간의 앎은 지각에서 시작하여 기억, 경험 등을 거치고, 이 모든 것을 거친 다음 인간은 '부동의 원동자'라고
하는 무한자에 이를 수 있다. 이론적 앎의 영역이 부동의 원동자를 정점으로 하는 완결된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해도 실천의 궁극목적인
행복(eudaimonia)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이론학으로부터 확실한 답변을 가져올 수 없다. 실천의 궁극적인 목적,
실천이 지향해야 하는 도덕의 제일원리는 정치적 존재인 인간이 정치생활 공동체인 폴리스에서 살아가며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는 자기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자기의식은 근대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에서 시작하여
자기의식에 이르는데, 이 자기의식은 불안한 것이어서 대상 세계에 대한 앎은 신의 보장이라는 배경 속에서 작동한다. 데카르트에서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는 신에 대한 믿음이 어설픈 자기의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에서 자기의식은 진리 인식의
원천이다. 진리 인식의 원천은 자기에게 있지만 대상 세계로부터 인식 주관에 주어지는 데이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 앎의
영역에서 완전히 확실한 인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 무한자로부터는 경험 데이터가 아예 주어지지 않으므로 무한자에 대한 앎 자체가
불가능하고, 영원 불변한 보편적 도덕의 기초를 세울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요청해야만 하는 것인데, 요청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것이므로 이론과 실천의 통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칸트에서 인간과 신은 합치될 수 없고, 유한자와 무한자는 단절되어 있다.
고대적 사유에서는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에 이를 수 있었으나, 근대적 사유에서는 자기의식이 등장하면서 인간과 무한자는 멀어지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에서 시작하는 인간의 앎은
확실성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성의 사변적 요구가 들어서게 된다. 이성의 사변적 요구는 도덕
판단에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최고선을 향하고 있다. 최고선이라는 이념은 '직관이 없는, 사유의 순수한 형식'으로, 경험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앎 자체가 시작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것이기에 요청할 수밖에 없다. 최고선을 요청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앞서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성적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그때그때 통제하는 통제적 원리라는
것이다. 도덕의 원리가 통제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은 자유의지의 결단에 의해 움직인다. 자유의 영역은 인과율로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고, 최고선의 실현 원리인 행복은 인과관계에 따라 작동하는 자연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칸트는 자연 속에 목적이 있다고 하는 '자연 목적론'을 상정하여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연결하고, 자연을 인간의 궁극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정당화한다. 칸트는 이를 '외적합목적성'外的合目的性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목적에 연결시키는
힘을 '판단력'이라고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무한자와 합치될 수 있었던 인간은 데카르트와 칸트에서 무한자와 멀어져 단절되었고, 그 단절을 메우기 위해 칸트는 다시 무한자를
요청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에 대한 명석판명한 앎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 해도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는 한 인간은 무한자와의 관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