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하이드 >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설
너 어디 있니?
마르크 레비 지음, 김운비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마르크 레비의 책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난 예쁘고 아기자기하고 희망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책들에 알레르기가 있다. 이 책은 어여쁘고 아름답고 몹시도 사랑스럽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것은 거칠고 대담한 중남미 문학이다.

여기 책 속의 주인공인 수잔은 온두라스에서 남미의 거역할 수 없는 태풍과 맞서 싸우는 평화단의 멤버이다. 마르케스는 '문학과 현실에 관하여'라는 산문에서 '우리 중남미의 거대한 현실이 문학도에게 제안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그런 현실에 적합한 단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막상 그 거대한 현실을 중남미 작가의 글에서는 미처 못 느꼈는데 여기 이 곱게 자란 프랑스 작가의 글에서 더 와닿는다.

여기 이 책에서 우리가 보게될  씩씩한 여주인공 수잔이 싸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태풍이라는 괴물이다.

이야기는 전혀 내가 원하는대로 진행되어가지 않는다. 다만 작가의 처녀작인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이라는 긴 제목의 고스트로맨스 휴먼드라마의 앤딩을 생각해볼때 해피앤딩이려니 편하게 짐작해볼뿐이다.

작가는 루이라는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 잠자리에서 읽어주기 위해 쓴 책이 바로 작가의 처녀작이고 가장 센세이셔널한 데뷔작 중 하나가 되었다.  ' 너 어디 있니?' 라는 두번째 작품에서도 어쩌면 작가는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배경에서 반복하고 있다. '신뢰'와 '사랑'

이 작품은 일단 로맨스 소설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어렸을적부터 모든 기억을 공유해온 필립과 수잔은 어린시절의 종지부인 고교졸업후, 서로 자기의 길을 걸어간다. 필립은 미술을 전공하러 대학으로 가고, 수잔은 온두라스를 강타한 태풍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평화단의 일원으로 온두라스라는 나라에 간다. 2년 예정으로 가지만, 자신을 필요로하는 그곳에서 필립과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사랑'보다 '희생'을 택한다.

온두라스에서의 처절함은 수잔을 점점 메마르고 황폐하게 하고 필립과 수잔은 서로를 끊임없이 보고파하며 1년에 한번씩 수잔이 워싱턴에 물품 보조를 받으러 오는 틈을 타서 공항 까페의 구석자리. 그들의 자리에서 잠깐씩 볼 뿐이다.

여기까지가 1부라면 1부이다. 소설은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이고 따뜻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는 2부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남겨둔다.

읽는 내내 슬프고 읽고나면 마음에 안드는 결론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뜨거워져 있는걸 느낄 수 있게 한다.

사랑으로 가득하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그들이 왜 헤어질 수 밖에 없었을까? 이 책이 그저그런 로맨스 소설이었다면 거기까지가 나의 고민이었겠지만,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의 탈을 쓴 몹시 아름다운, 가슴을 꽝꽝 울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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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길 떠나는 사람들
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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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요일 밤에 하는 텔레비전 모 시사 프로를 보다가 불끈불끈 치솟는 울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고급 민영 아파트와 바로 이웃한 임대 아파트 주민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다루었는데 임대 아파트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자기 아파트 앞을 지나지 못하도록 민영 아파트 주민들이 돈을 모아 담을 만들어 막아버린 것이다. 갑자기 가장 가까운 단거리 통학 코스를 잃어버린 임대 아파트 아이들은 바쁜 통학 시간 어찌어찌 뚫린 개구멍인가를 통하여 뛰어넘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그 아파트 앞을 통과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막 화가 치솟았다.

가난도 보면 상대적인 가난이 있고 절대적인 가난이 있다. 인간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조금 엉뚱한 예지만 마이 도러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 부부는 키작은 아이가 1,2,3,4번 말고 제발 5번 정도만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2번이라고 자랑을 했는데 알고봤더니 1번은 왜소증 아이였다. 그 사실을 알고나서 우리 부부는 아이의 키가 작아서 큰일이라느니 하는 말은 되도록이면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가난도 그런 것이 아닐까? 가끔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끔찍한 사고로 드러나는 어떤 참혹한 가난 앞에서 평소 쓸 돈이 없다고  징징대던 우리들은 할 말을 잃는다. 오늘 읽은 공선옥의 연작소설  <<유랑가족>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작가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 혹은 밑바닥 인생에 대한 일관된 관심과 천착으로, 여배우를 능가하는 세련된 화장과 차림으로 문화의 세례를 흠뻑 받으며 고독이니 허무니 사랑이니 입만 열면 나불대는 몇몇 여성작가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겨울의 정취'   '가리봉 연가'  '그들의 웃음소리'  '남쪽 바다 푸른 나라'  '먼 바다'의 다섯 편의 연작소설들은 모자이크식 구성으로 등장인물들을 스치게 하고 엇갈리게 하고 또 결정적으로 만나게 한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한'이 그 모자이크 속의 중심인물로 그가 어느 사보에 실을 사진을 찍으러 간 시골에서 만난 아이들과 주민들 그리고 꾀죄죄한 그 사돈의 팔촌들이 주인공이다. 한  시골 마을로 시집 온 조선족 여인의 꾐에 빠져 서울로 도망간 여인, 아내를 찾아 상경하여 공사판을 떠도는 남자, 그 조선족 여인의 기구한 사연, 쫓고 쫓기는 그들이 떠도는 가리봉동 노래방과 여인숙과 싸구려 식당 풍경......'가리베가스'라는 웃기는 이름의 초라한 환락가.

특별한 개성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의 인생은 하나같이 엉망으로 꼬여 있고 남자건 여자건 늙었건 젊었건 그들이 툭하면 내뱉는 말은 낮이고 밤이고 "에이, 술이나 한잔하자!"이다. 조금 더 예쁘고 조금 더 착하고 조금 더 성실하다고 해서 달라질 인생이 아니다. 그것만큼 사람을 절망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용을 써봤자 뛰어봤자 벼룩인 인생이라니! 이 세상에서 가족이나 친구가 가장 소중하다는 이데올로기도 이들 앞에서는 무색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내가 죽겠는걸.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느냐의 문제로......

왜 인생은 밑바닥을 힘겹게 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우려했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일까? 그런데 어쩌면 소설뿐만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 않나?

"어디서들 오셨습니까?"

"천지사방 헤매는 자들이올시다."

"지금은 어디로 가시는데요?"

"천지사방 헤매어봐도 우리가 살 땅 한 뼘을 찾지 못했소이다. 카아, 허면 바다는 우리를 받아줄까 하여 지금 그 바다가 있는 쪽으로 가고 있던 참인데 차가 멈춰버리네여,  껄껄."(250쪽)

<유랑가족>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도 이렇게  꽤나 서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하나같이 거칠고 신산스럽기 짝이 없는 주인공들의 삶의 풍경보다  '한 '의 예전 직장(잡지사)  동료로서 지금은 신문사 기자로 대학 강단에도 서고 한다는 '정'이라는 인간이 보여주는 꼬락서니가 제일 인상깊었다. 할머니마저 죽어 고아가 돼버린 소녀 영주의 친척을 찾아주기 위해 나선 길,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찾아갔더니 우국지사연하면서 온갖 똥폼 다 잡고 술을 마시는데......한의 눈에 들어온  고급가죽소파랑, 골프채 가방이랑, 조기유학 보낸 자식 사진......

모두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임대 아파트 아이들이 못 지나다니게 담으로 막아버린 민영 아파트 주민들 중에도 분명 그런 놈과, 또  백화점 문화센터에 나가 수필 강좌를 듣는 것이 자부심이라 '쓰레기 소각장' 문제로 한자리에 모인 이웃 주민들을 눈아래로 내려보며 떠들지만 사실 쓰레기도 분리하지 않고 몰래 내놓는  샘밭아파트 605호 여인 같은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하나도 흥분하지 않고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고 빠안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이 작가의 균형감각이 꽤 마음에 든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소개한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죄인처럼 살아간다. (...)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 가난하여 이 땅 어디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처럼 나 또한 가난한 유랑작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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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5-0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 글 퍼간 것 보면 반가워서 추천 꼭 누릅니다.^^

실비 2005-05-0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너무 잘쓰셨는걸요^^
 
 전출처 : 날개 > 나는 전생에 뭐였을까...
인연 -상
정지원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세 권이나 되는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처음.. 여덟 남녀의 전생과 현생에 얽힌 이야기라는 소릴 들으면서 걱정했던 '정신없겠다~'란 생각은 어느새 쑥 들어가 버렸다. 상권 중반까지만 누가누군지 조금 헷갈렸을 뿐, 거길 넘어서면서 부터는 어찌나 인물 하나하나에 몰입했던지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읽는 내내, 가슴아프고 떨리고 숨막혔다.  전생과 현세가 교차되는 속에,  현세의 인물이 전생의 누구인가를 짚어내기도 해야했고, 직접 나타나지 않은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일도 필요했다.

드라마 작가인 소진은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만든다.  드라마 방영과 함께 서서히 전생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주나라 왕세자였던 벽안군, 벽안군의 오른팔인 연청과 상검명, 벽안군과 정치적 대치관계였던 승상의 딸 난란과  승상의 은혜로 자란 영소..  여기에 아청, 아소 공주, 의관 제은형까지..  이들 여덟 남녀의 얽히고 설킨 인연의 끈은 현세에까지 이어진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전생의 연인이나 적을 만났을때 그 사람은 과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자칫 기억에 얽매여서 현재의 자신을 망각해 버리지는 않을까?

현세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약간씩의 거짓말을 한다. 그런 거짓말들은 쌓여서 오해를 낳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전생에서의 가슴아팠던 사랑, 비참했던 시절, 고통스러웠던 전쟁까지.. 그들에게 풀어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았다.

이 책의 중심인물인 소진은 전생에 영소였다. 다른 이들이 기억하기에 아름답지만 차갑고 냉철했던 인물..  그러나, 자존심과 이성적인 모습을 꼿꼿이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연청을 사랑했다. 입 밖으로 내어보지 못한 사랑, 전쟁으로 헤어져 죽을 때 까지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줄도 몰랐다.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남녀다.

한을 가진 사람이 어디 그들 뿐이랴..!  아청공주를 사랑했던 의관 제은형은 공주가 당에 공녀로 바쳐지고, 정략에 의해 사형당하자 복수를 꿈꾸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다.  아소공주를 사랑했던 상검명은 짝사랑에 괴로워하고, 벽안군과 연인이었던 난란은 전쟁으로 인해 아기와 함께 고통스럽게 죽는다.

끈질긴 인연들..   어쩌면 인간만의 끊어버릴 수 없는 미련들이 전생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전생으로 인해 모인 이들이 넘어서야 할 것은 바로 그 전생이란 기억이다.

여러가지 오해와 불신과 위험한 과정을 거쳐.. 그들은 과거의 기억을 마무리한다. 

- 과거는 지나갔어. 현재에 영향은 미칠 수 있겠지만, 과거 자체는 바뀌지 않아. 만약 과거로 인해 뭔가가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면, 지금부터 노력해서 고치면 돼.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으니까..

책을 읽으며 사키 히와타리의 <나의 지구를 지켜줘>를 생각했는데, 역시나.. 작가가 그 책을 모티브로 사용했다 한다.  물론 전생 때문에 모인다는 것만 같을 뿐, 이야기의 진행 자체는 전혀 다르다.  흥미진진했다. 작가의 전작들인 <여름의 끝>이나 <깊은밤을 날아서>, <푸른 바다의 노래>도 좋아했지만, 이번 작품은 더 깊어진 느낌이다.  로맨스 팬이라면 필수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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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icaru >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
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황순원의 ‘소나기’나, 이청준의 ‘눈길’과 같은 작품을,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가 아닌, 개인적인 내밀함을 추구하는 읽기의 연장선상에서 먼저 만났더라면, 그 감동은 조금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교 교과목에서 그리하듯, 복선이 뭐냐, 주제가 뭐냐, 요약을 어떻게 할거냐에 혈안이 되어, 깨어있는 독서, 창조적인 독서를 왕왕 부르짖다 보면, 읽어내야 할 모든 글조가리들이 마음속에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페냑의 말처럼 소설은 그냥 소설로 읽어야 맛이 난다. 우리는 이야기가 그립고 이야기에 굶주려 있으니, 그저 분석하는 고민에서 벗어나 이야기 자체에 흠뻑 빠지고만 싶은데.
책머리에는 이 책을 부디 강압적인 교육의 방편으로 삼지 말아달라는 작가의 간곡한 부탁이 있기는 하지만, 페냑은 읽기 교육에 있어서 여러모로 지침을 삼을 만한 말들을 많이 해 준다.

책과 담쌓은 아이들에게 읽기의 즐거움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처음에 글자를 배울 때 그러했던 것처럼, 다 큰 아이들에게도 소리를 내어 크게 읽어 주라고 한다. 그것이 읽는 즐거움의 시초였다고. 그런 다음 내용을 묻지 말고, 독후감을 쓰라고도 하지 말라 한다. 독서를 하면서 가장 먼저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라고.

우리는 학교에서 읽기를 배우지만, 책 읽는 법을 좋아하는 것은 학교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책 읽는 일을 좋아할 수 있지.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책읽기란 무엇보다도 바로 이야기에 대한 갈구, 허기를 채우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 준다.


어디 하나 버릴데가 없는 표현들로 20년 남짓 교사 생활을 했고, 여러 동화들을 써낸 작가가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 보는 재미가 그 어디 비할 데 없이 좋다. 게다가 안과 밖, 중심과 주변, 어른과 아이의 시각을 두루두루 아우르며 쓰여져 있기에,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는 방법적 측면에서 이 책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조금 읽다보면 성인이며, 책을 조금 읽었다는 우리 자신에게 그 목소리가 향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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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icaru > 거 참...까탈이네...(하지만 재밌어..)
책과 바람난 여자
아니 프랑수아 지음, 이상해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이제 막 독립을 한 후배 집에 놀러갔는데... 아주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책상겸 밥상겸 탁자겸 겸사겸사 여러노릇을 하던 큰 상에 상다리가 없었다. 그 아이는 상다리 대신... 과월호 잡지 핫뮤직을 탑처럼 쌓아서 마치 상다리처럼 상을 괴고 있었다. 책이 가구 노릇을 하는 모양...책에 대한 엄숙주의를 비웃는 재미난 풍경.... 잡지니까...그럴테니... 라고 생각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책을 다루고, 사랑하는 방식이 천차만별.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을 좇아가는 독서를 민망시럽게 만드는 경구는 참 많다. 대오각성을 위해 좀 읽어 줘야 할 책도 산처럼 쌓여 있는데.... 그런 따위나 읽으며 히히덕거릴래... 하고 정수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글들......


그러나 아니 프랑수아도.... 나와 같은 부류인가보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그덩...


“나는 왜 걸작 고전을 읽지 않을까. 통과의례에 대한 내 거부감 때문에 하지만 또한 이론적이거나 실제적인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위대한 작품에 푹 빠질 수 있게 해 주는 그 마음의 평온, 그 순수함 혹은 완전한 가벼움이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보는 사람에게 내가 또 한없이 약하지...않겠나.

이 책은 책과 바람난 어떤 여자의 이야기이긴 한데...  바람난 그 대상(책)의 됨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차치해 둔다. 이 여자가 들려 주는 주요한 이야기는 그 대상에게 애정공세를 퍼붓는 그녀의 마음씀씀이와 광기어린 애교의 향연이고, 아주 주변부적인 이야기들이다.


p.85


향수나 기저귀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그 경우에도 바코드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포장지에 있다. 그런데 책에는 직접 새겨져 있다. 생살에, 낙인처럼.



p.106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이제 더 이상 벌목을 하듯 책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병적인 허기증 환자가 먹은 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듯 책 마니아 역시 그 내용을 음미할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p.157~158


독서광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저장할 수 있을까? 그는 저장하지 않는다. 그는 기억상실증 환자다. 새것이 옛것을 대신한다. (...)


더 이상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다. 쥐스킨트가 이 모든 것을 아주 기가 막힌 솜씨로 묘사해 놓았으니까.


주13_ 국내에는 "깊이에의 강요"라는 단편 모음집에 '문학적 건망증'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p.160~162


나는 사람들이 내가 읽고 있는 책 제목을 흘낏거리는 것을 참아내질 못한다.(...)


나는 누가 어깨 너머로 내 책을 읽는 것 역시 참지 못한다. 마치 목욕을 즐기고 있는데 누가 불쑥 들어오는 느낌이다. 무례한 시선에 기분이 상한 나는 아예 독서를 포기하고 만다.(...)


누가 내 책에 손대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이 모든 게 사납고 새침한데다 히스테리만 늘어나는 노처녀나 하는 짓 같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이 허물없는 짓거리들을 역겨운 관음증과 연관시킨다. 그것은 섹스보다는 사생활 침해와 더 밀접하다.


그런데, 날 소름 돋게 하거나 모욕감을 주는 이 모든 행동들을 정작 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한다. 거리낌 없음에 완벽한 위선까지 더해서(말하자면 근시인 내 눈이 허락해주는 만큼). 나는 다른 곳을 쳐다보며 태연히 안경을 꺼내 쓰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통 책 상단에 적혀 있는 제목을 곁눈질한다. 그러고는 천박한 추측에, 즉흥적인 분석에, 말도 안 되는 성찰에 빠져든다.



그녀의 직함은 편집자다. 본래 저 류의 직업을 갖다보면, 심심풀이를 위해 집어든 책에서 마저 오류나 탈자를 잡아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가끔 주름도 얼룩도 뒤집힌 페이지도 없는, 오류가 전혀 없는 책이 나오기도 한다. 마치 실수라곤 모르는 변종이 편집을 한 것 같다. 그런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오류가 없었다기 보다는 자신이 못 잡아낸 것이다. 이럴 때는 되는 일도 하나 없다. 뜨거운 냄비에 데이고, 찔리고, 베이고, 부딪히고, 열쇠 약속 사람 이름을 까먹는다. 물건들도 -그들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 한몫을 하려고 끼어 든다. 식기 세척기, 컴퓨터, 자동차, 다리미, 배기 후드, 커피메이커 인터폰, 모든 것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장난다. 온 우주가 짜고 골탕에 빠뜨리는 것 같다. 

바로 이럴 때, 읽는 책이 있다면 좋겠지. 호어스트의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나 패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 성석제의 '재미나는 인생'. 이런 류의 책을 잡고 읽다보면, 경우에 따라 웃음도 울음도 터뜨린다. 그러면서 긴장도 풀린다.

 

 

보너스 팁...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을 권하면 아이들이 책을 읽으려 할 것이라네요. 부모의 서재에 아이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아니는 말하네요. “아직 고추에 털도 나지 않은 것들이 감히!” 라는 모욕적인 말로 그들을 쫓아내라고요. 그러나 이렇게 해도 책에 흠뻑 취하는 방식으로 반항하지 않는 아이는, 셋 중 하나랍니다. 진정한 반항아이거나 호기심도 없는 아둔한 녀석, 혹은 자극해봤자 씨도 안 먹히는 철학자이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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