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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ㅣ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의도한 게 아닌데 본의 아니게 연속으로 마음산책 책을 읽게 되었다. 또 다른 책들을 두루 살펴본 게 아니어서 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최근에 읽은 책들은 모두 표지가 이쁘다. 특히 이 책, 미식견문록은 그 중에서도 탁월하게 예쁘다.
워낙 많은 소개를 통해서 그녀가 러시아 어 동시 통역사라는 걸 알고 있었고,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많은 체험을 했을 테니 남다른 미식가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하나 빠진 걸 알게 되었다. 후천적 미식가 이전에 선천적 먹보 핏줄이라는 것 말이다. 이 정도면 만화가 요시나가 후미랑 거의 쌍벽을 이룬다 하겠다.
책의 구성도 예쁘다. 서곡으로 시작해서 총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이사이 휴식과 간주곡이 들어가는데, 실제 책을 읽어보아도 그 경쾌함이 리듬같은 울림을 자랑한다. 제목 아래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꼭 둥둥 떠 있는 음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그림은 어떤가?
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온 삽화다. 삽화는 전체 책 중에 몇 장 나오지 않는데, 저 줄기를 보고 있자니 역시 뭔가 노래가 솟구칠 것 같은 느낌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과 러시아, 그밖에 체코 등등을 오가면서 먹었던 음식, 혹은 체류 중에 먹고 싶었던 음식, 그때 먹었던 음식을 추억하면서 다시 찾으려고 애썼던 이야기 등등을 줄줄이 재밌게 엮어 놓았다. 한 반에 서로 다른 50개의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엌 소리가 나올 만큼 남다른 환경에서의 이야기. 그 아이들을 모두 홀렸다던 '할바'라니, 누구라도 먹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음식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나라, 어떤 문화권의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의 역사적 사실과 웃고 말/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같이 소개되기 마련이다. 겪어보지 못한, 상상하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주는 그 즐거움은 전혀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만났을 때의 설렘과 비슷하다. 물론, 그 음식은 얼굴을 찌풀릴 맛이 전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캐비어와 감자, 순무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철갑 상어가 3억 년 전에 나타난 고대어라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식물도 아닌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지구에서 살아온 동물과 같이 살고 있는 게 신기해서 말이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녀석이 100년을 넘게 산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어떤 물고기는 인간보다도 오래 사는구나! '상어'라고 해서 크기가 꽤 클 거라고 짐작했는데 철갑 상어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한다.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캐비어가 너무 탐나진 않는다. 모르는 맛이기도 하거니와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에서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라서 말이다.
감자 이야기는 더 재밌었다. 구황 작물로 유명하고, 지금은 식량보다도 다양한 음식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음식인데, 이게 유럽에 전파되기까지의 진통이 꽤 컸다는 게 놀라웠다. 감자가 잘 생긴 녀석은 아니지만 그렇게 못 생겼던가? 감자를 먹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는 황제의 엄포에도 감자를 먹으면 지옥에 갈 거라는 근거없는 미신에 더 벌벌 떨었다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인간의 무지함이 측은해지기도 한다. 신앙의 맹목적성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휘둘리며 살아온 것인지... 게다가 더 기막히게도, 목숨을 담보로 한 황명도 거부하던 사람들이 감자를 먹으면 금화를 주겠다는 조건에 바로 덤벼들었다는 이야기는 더 쉽게 이해가 되어서 더 참담하다. 이성보다도 신앙, 신앙보다도 돈이란 말인가.
요네하라 마리가 읽었던 어릴 적 동화나 책 속에서 나왔던 음식을 커서 궁금해하고 만나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도 몇 차례 소개되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헨젤과 그레텔은 나 역시도 읽은 책이건만, 어릴 때 그 책을 읽으면서 거기 나온 음식들을 궁금해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강렬한 욕망을 가졌더라면 지금도 생각이 났을 테지만, 그냥 그런 이야기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나 보다. 마리의 학교 친구들 중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아는 아이들이 없었다는 얘기가 충격적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이 책은 책보다 만화 영화로 더 유명했던 게 아닐까? 그 만화는 일본에서 수입해 온 만화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에겐 더 익숙해진 것일 테고. 아마도 방영 당시에는 우리 만화로 알고 지낸 사람이 더 많았을 것 같고. 좀 씁쓸한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씁쓸해지고 불편해지는 건 그런 대목이 아니다. 즐겁고 경쾌하게 읽어나가다가 마주치는 이런 문장은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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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일본의 근대화가 한발 앞선 것은 다른 나라들처럼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오히려 주변 국가를 식민지로 삼은 덕분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본군이 강했던 것은 군인들이 형편없는 음식을 참고 견뎠기 때문이 아닐까. 전쟁은 무기나 연료, 식량 등을 조달하는 병참 능력에 달려 있고, 병참에서 식량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으면 낮을수록 국가로서는 이롭다.
......
7대양에 걸친 식민지를 지배한 대영제국, 세계의 경찰로 불리는 미국. 현재 이 앵글로색슨족만큼 세계에서 공격적이요, 패권을 노리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그 저력은 혹시 맛없는 요리에 익숙한 덕분이 아닐까? (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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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하는 말이 일본의 근대화 성공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임을 모르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는 불편하다. 더군다나 식민 지배국이었던 일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면. 너희가 전범 국가이니 저런 얘기는 꺼내서도 안 되고, 입도 벙긋하지 마라...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신은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한, 그래도 소위 말하는 지성인이 아니냐... 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없다. 그래도, 역시 불편하다. 예쁘고 좋은 책을 실컷 음미하다가 맞닥뜨린 유일한 아쉬움이기도 하고.
잘 읽다가 막판에 다소 찡그리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남들보다 할 얘기가 더 많을 법한 환경에서 산 사람이 침묵을 하고 있다면 그것도 낭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네하라 마리의 다작은 독자에게 멋진 선물이 되었다. 그것이 과거형으로 끝난 것은 무척 안타까운 부분이다. 나로서는 첫 번째 책, 그러니까 '서곡'에 해당되었다. 더 다양한 악장의 그녀의 곡들을 음미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