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자본론
벤 파인.알프레도 새드-필호 지음, 박관석 옮김 / 책갈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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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재 편집하였다. 독후감이라기 보다는 내용을 쉽게 편집만해 놓았다. 이 책을 다 읽지 않아도 궁금한 부분을 알수 있도록........

마르크스의 자본론

 

시민사회(사농공사과 같은 신분적 구분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사회)·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의도한 것으로, ‘사회주의의 바이블(그리스도교의 경전)로 평가된다. 마르크스(라인주(州)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18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18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1847년 P.J.프루동(1809∼18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1850~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자신의 손으로 간행된 것은 제1권(1867)뿐이며, 그의 사후 F. 엥겔스(프로이센 라인주(州) 바르멘 출생. 부유한 공장주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에 전렴하기 위하여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바르멘과 브레멘에서 가업에 대한 수련을 쌓으면서, 틈틈이 평론 ·시 등을 써 F.오스발트라는 필명으로 신문 등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자유’라는 청년 헤겔주의자 모임에 가입할 수 있었고, 이 모임에서 철학 ·종교 논쟁에 대한 무서운 선전가로 인정받았다.

1841년 베를린의 근위포병연대에 복무하면서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1842년 제대 후 아버지가 관계하던 공장에 입사하기 위하여 맨체스터로 가던 도중 쾰른의 《라인 신문》 편집소에서 처음으로 K.마르크스와 만나게 되었다.

영국에 체재하는 동안 사업에 종사하면서 자본주의 분석연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1844년 마르크스와 A.루게가 발간하는 《독일-프랑스 연보》에 〈국민경제학비판대강(國民經濟學批判大綱)〉을 기고하였다. 같이 논문에서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초기 해석과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모순점을 제시하여 마르크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같은해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재회,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845년 가출하여 마르크스가 사는 브뤼셀로 가서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여 인간사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인식방법인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제시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공산주의의 연대와 결집을 목표로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창설하였다.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설, 제2차 공산주의자대회의 위촉을 받고 1848년 2월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직후인 2월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와 함께 파리로 갔다가 다시 쾰른으로 옮겨 독일혁명을 지도하고 같은 해 6월 《신(新)라인 신문》을 발행하였다.

1849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런던으로 망명하였다가, 맨체스터에서 다시 사업에 종사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1869년 사업을 청산하고 다음해 런던으로 이주, 제1인터내셔널의 총무위원이 되어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에 진력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1883년 마르크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고 정리에 몰두하여 《자본론》의 제2 ·3권을 편집하는 한편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에 의해 유고가 정리되어 1885년에 제2권, 1894년에 제3권이 출간되었다. 현재 《자본론》으로 불리는 것은 이상의 3권이다. 제4권에 해당하는 부분은 1905∼1910년 K.J.카우츠키(1854년 체코 프라하에서 출생하였다. 빈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875년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880년 취리히로 이주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1881년 런던에서 F.엥겔스와 알게 되었으며, 1883년 독일사회민주당의 기관지 《노이에 차이트 Neue Zeit》를 창간하여 그 편집을 담당하였다. 1891년 독일사회민주당이 채택한 에르푸르트강령을 기초하였다. E.베른슈타인수정주의(修正主義)에 반대하여 마르크스주의 옹호론을 전개하는 한편,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출판하고 해설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반전을 주장하는 소수파인 독립사회민주당에 가담하였다. 대전 중에 초제국주의론(超帝國主義論)을 제창하고 폭력혁명과 소수 사회주의자에 의한 독재에 반대하여 V.I.레닌의 비판을 받았다. 1920년 다시 사회민주당으로 복귀하였다가 1924년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빈에 머물며 문학활동에 전념하였으나, 나치스의 침공으로 프라하를 거쳐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농업문제 Die Agrarfrage》(1899), 《프롤레타리아트독재 Die Diktatur des Proletariats》(1918), 《유물사관 Die materialistische Geschichtsauffassung》(2권, 1927) 등이 있다.) 편집하여 《잉여가치학설사 Theorien über den Mehrwert》로 간행되었으며, 1956∼1962년 소련·동독의 마르크스레닌주의 (K.마르크스 사후 그의 사상은 독일의 K.카우츠키러시아의 레닌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전자는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인 사회민주주의이고, 후자는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공산주의이다. 이는 레닌이 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해 성립된 과학적 사회주의를 기본으로 19세기 이후의 독점자본제국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현실을 반영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하여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혁명 시대에 있어서의 마르크스주의’라고 규정하는 한편, ‘마르크스-레닌주의란 혁명의 과학이며 파괴의 기술’이라고 정의하여 이를 확립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통일체로서 파악되며, 이것을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론은 주로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고 혁명론과 전술은 레닌에 의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17년 이후 소련의 지도이념이 되었으나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에 의하여 수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 있은 후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등의 공산당, 즉 유러코뮤니즘(Eurocommunism)은 프롤레타리아독재 및 레닌주의의 포기, 모스크바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함으로써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결정적 시련에 봉착하였다.)

연구소에 의해 《자본론》 의 속편을 이루는 것이라 하여 새로이 편집·간행되었다.

 

《자본론》 은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생산과정은 노동과정과 가치의 형성·증식 과정이라는 두 과정을 가진다. 노동과정이란 인간이 노동수단을 매개로 하여 노동대상에 대하여 의식적·계획적으로 작용하여 재화를 획득하는 물질대사(物質代謝)의 과정이며, 모든 시대에 공통되는 것으로서 인간생활의 영구적인 자연조건이다. 한편 생산과정은 역사적·사회적 측면을 가지며,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다.

생산수단의 사적 독점과 노동력의 상품화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과정은 노동과정인 동시에, 자본을 위하여 가치를 형성하고 증식시키는 과정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생산적 노동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유용적 노동과, 가치를 생산하는 추상적·인간적 노동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지니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 노동과정과 가치의 형성·증식 과정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응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좁은 의미로는 유통과정과 구별된 생산과정(직접적 생산과정)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직접적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을 통일시킨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총과정을 가리킨다. )〉, 제2권 〈자본의 유통과정〉, 제3권 〈자본제적 생산의 총과정〉(17편 9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가 엄밀한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본론》 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명확히 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그것을 가장 간단하고 추상적인 경제학의 범주(範疇)인 상품분석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적 존재인 상품 속에 사회의 모순이 집약적으로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고 추상적인 범주에서부터 순차적으로 보다 복잡하며 구체적인 범주로 논리가 전개된다. 전권의 구성을 보면 제1권은 상품·화폐·자본·잉여가치의 생산과정, 자본주의적 축적, 제2권은 자본순환의 제형태, 자본의 회전, 사회총자본의 재생산과정, 제3권은 생산가격·이윤·이자·토지 등의 형태를 한 잉여가치의 제계급에의 분배법칙, 자본주의 사회의 제계급 등으로 되어 있다.

《자본론》 은 마르크스가 당초에 구상하였던 경제학비판의 전체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으며, 그 내용 또한 체계적·논리적으로 일관된 전개를 보이고 있지 않다. 제1권 서두에서 노동에 의한 가치의 실체를 규정하고, 그것을 이미 논증필(論證畢)의 것으로 하여 전전개(全展開)의 전제로 하는 방법이 취하여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본론》 체계의 근본적인 모순과 문제점이 있다. 또 이것이 집필된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 단계의 역사적 제약에 의해, 그후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 단계의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서 E.베른슈타인, 카우츠키, R.힐퍼딩, R.룩셈부르크, V.I.레닌 등에 의한 여러 해석과 상호간의 대립을 낳게 하였다. 한국에서는 1989~1990년 김수행(金秀行)의 번역으로 비봉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마르크스의 생애
마르크스는 처음에는 시인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포기하고 철학과 역사를 주로 공부하였다. 학창시절에 베를린에 있는 가장 진보적인 청년 헤겔파(Young Hegelians)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특히 헤겔의 종교관에 반대하여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2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부친의 가장 친한 벗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가족들은 마르크스가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혼을 반대하였다. 그런 예상은 적중하여 그의 가족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생활하였으며, 여섯명의 자녀 중에서 셋은 굶어 죽었다.
마르크스는 라인주의 급진적인 한 신문인 라인지(Rheinische Zeitung)의 편집자로 재직하였으나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신문은 폐간되었으며, 그 후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파리와 벨기에등지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업적
역사상 이론적인 문제와 실제적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구성한 사상가로서 인류에게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 및 사회적으로 마르크스만큼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드물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현대까지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그는 사회 발전과정의 법칙, 개인과 사회의 관계,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 완전하고, 통합된 지적체계를 구성하였다. 마르크스의 지적체계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부분만 떼어서 본다면 크게 오해를 할 수가 있다.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함께 작성한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 파리였으며, 그와 함께 작성한 이 소책자는 마르크스 생전에 성공을 거둔 유일한 저작이 되었다. 엥겔스와 함께 작성한 이 소책자는 1847년 런던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동맹의 이론과 강령으로 제시되었다.
마르크스는 1849년에 런던으로 도피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런던에서 혁명가의 결성을 돕는 한편 대부분의 시간을 대영박물관에서 경제사상사를 공부하며 자본론(Das Capital)을 집필하였다. 약 10년간 뉴욕 트리분지(The New York Tribune)의 특파원으로 소액을 버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친구인 엥겔스와 후원자의 도움으로 겨우 생활할 수 있었다.
1867년에 그는 자본론 1을 완성하였고, 자본론 2와 3은 나머지 생애인 15년 동안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자본론 2와 자본론 3은 각각 1885년과 1894년에 그의 친구인 엥겔스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분석하려고 한 주제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생산, 유통 및 분배를 지배하는 여러 법칙을 명확히 하며, 아울러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법칙을 밝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외에도 철학의 빈곤(La Misere des la philosophie, 1847)과 경제학 비판(Der Kritik der Politishen Okonomie, 1859)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이 있다.
 

마르크스의 평가
마르크스는 혁명가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렸으며 과거 1세기 이상의 기간에 걸쳐서 세계에서 일어난 혁명의 대부분은 그의 이름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독창적인 경제학자요, 사회과학자였다. 그리고 당시에 가장 박식한 정치철학자였다. 마르크스의 존재 자체가 역사상의 대사건이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이가 없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없었다 해도 세계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를 이해하기위한 핵심과제는 변증법이다
변증법이란 그리스어로 'Dialogue'로 두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의미하는데 대화에서 문답이 벌어지면 논쟁이 이루어지고 변증술로 되기도 했기 때문에 변증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헤겔은 모든 사회현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변화는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반,합 논리에 의거 , 보다 나은 상태로 조금씩 발전해 나가며 협조와 타협을 통해서가 아니라 갈등과 투쟁을 통해 발전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타도하고자 하는 혁명의 목적 달성에 교묘히 이용하고자 헤겔의 정신 대신에 물질개념을 적용하고 긍정적의미의 갈등과 투쟁을 대립과 적대관계로 설정 후 구멸(낡은것은 멸망하고)과 신생(새로운것이 탄생하여야 한다)의 혁명논리로 발전시켰으며, 이를 또다시 증명하기 위하여 역사발전 측면에 대입하여"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멸망하고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유물사관의 논리사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진보의 변증법적 성질"이 기도하고 있는 근본내용을 파악해야 하며 야만적이고 기묘하고 위험스러운 공산주의자들의 근본의도를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진보의 변증법적 성질"의 하위개념으로 적용하고 있는 "변증법적 접근"의 의미와 실태를 파악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일명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잉여가치론, 변증법적 유물론, 그리고 계급투쟁론이다. 잉여가치론은 자본주의가 노동의 잉여가치를 착취함으로써 자본을 확대재생산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서 자본가적 생산의 반도덕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사회질서가 생성, 발전, 소멸의 반복과정을 밟는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필연적인 역사단계를 단축시키는 것이 바로 계급투쟁이라고 보았다.

<1.소외>
20대 청년기 마르크스의 철학적 주제는 인간주의적 측면을 강조한 소외였다.

소외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의 창조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상으로 종속되는 것을 말하며,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인간이 완전한 존재로 발현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외의 기본적 형태는 소외된 노동에서 나온다. 노동자는 자신의 일부인 힘과 노력과 기술과 시간을 팔아 생명을 유지하므로, 소유에서 소외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외된다

<2.자본주의 비판: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조아의 지배도구이며, 경찰, 군대, 관료 등과 같이 노동자를 탄압하는 도구일 뿐이다. 종교도 지배적 계급이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현실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마르크스는 종교의 긍정적 측면도 무시하지는 않았다.
가족관계도 계급대립의 축소판이다. 남편은 부르주아를 아내는 프로레타리아를 상징한다.

자본주의체제에서 가족체계는 간통과 매춘으로 보완되는 일부일처제일 뿐으로, 남자의 재산이 아들에게 상속되어지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발전한 것 이다

<3.유물론>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헤겔과 포이에르바하로 이어지는 관념론에 대한 반발이며,마르크스의 이론적 입장은 항상 구체적 물질세계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 - 정, 반, 합의 변증법 3단계
양에서 질로의 변형 : 정도에서의 변화는 점차적으로 질 또는 종류에서의 변화를 산출한다.
반의 동일화 : 정에서의 모순은 반이 된다.
부정의 부정 : 모순은 또 다른 질의 변화가 발생하고 합이 도달되기 전까지 축적을 계속한다.
사적 유물론 생산양식=자연자원+생산기술+생산조직
자연자원은 인간이 이용하는 방법을 알게 될 때 가용한 것이 되며, 생산양식을 바꾸게 된다.
생산기술의 변화는 전단계의 결과로 나타나며 그 결과 사회조직과 그 사회의 신념체계를 변화시킨다.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hip)는 토지, 공장, 등의 생산수단을 소유에 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재산관계는 생산관계보다 더 완만하게 진화하므로 갈등이 생길 수 있다.

<4.계급 투쟁>
-계급투쟁은 사회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가설이다.
-계급투쟁은 생산양식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에 기초하고 있다.
-19세기의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통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는 부르조아와 노동을 담당하는 프로레타리아로 나뉘어 생산수단의 통제를 위해 서로 대립한다.


자본주의내의 계급적 분화
부르조아 : 생산자원이 소유자들, 이윤, 이자, 임대소득으로 생활, 경영관리와 위험을 수반하는 기업을 관리를 통해 수입을 얻기도 함
프로레타리아 : 자신의 일부인 노동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는 계급
농민 : 마르크스는 농민의 계급상의 위치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함
룸펜 프로레타리아 : 사회의 밑바닥에 위치하는 도둑들, 부랑자들 등으로 상품의 순환경로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

<5.혁명론>
마르크스가 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론에서 기대한 그러한 혁명은 나타나지 않았다.혁명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레닌은 제국주의로 설명하고 있다
제국주의론 : 자본가들은 저개발국가들을 식민지화하고 착취하므로 이윤률하락의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다. 즉, 저개발국에서 저렴하게 원자재와 노동을 획득하고 또한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레닌의 혁명론 : 혁명적 당이론을 개발, 프로레타리아 전위로서 당은 계급의식의 조직, 구체화 또는 제도화로 인식되었다. -> 민주적 집중주의
계급의 구성원인 프로레타리아가 자신의 혁명적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1.살아남기에 너무 바빠서 계급문제에 관심을 집중할 수 없었다.
2.예외적인 소수의 프로레타리아만이 계급구성원으로 혁명역량을 각성한다.
-따라서 프로레타리아의 전위로서 당은 다양한 조직기술과 선전, 선동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당의 역할은 혁명을 촉발시키는 불꽃의 역할을 해야 한다.
모택동의 혁명이론 - 게릴라전 이론 -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지지아래 혁명의 거점을 확대해나가는 전략

<6.프로레타리아 독재론>
혁명 후 공산사회에 이르는 과도기간의 체제로 상부구조가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에 맞게 조정되도록 변화하는 시기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특징
수행된 노동에 따른 수입의 배분
점진적인 계급의 소멸
프롤레타리아의 국가기구 장악
자발적 생산에 의한 생산성의 증대
사회주의적 의식의 제고
평등성의 증대
계획경제
국가가 관리하는 경제

<7.완전한 공산사회의 수립-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사회>
수행된 노동에 따른 소득분배는 더 이상 없고, 필요에 따라 소득이 분배된다.
계급이 없다.
국가가 소멸되어 버린다.
높은 생산성 때문에 모두가 풍요롭다.
고도의 사회주의 의식으로 사람들은 장려금이 없어도 노동한다.
더욱 평등해지지만, 절대적 평등은 아니다.
돈이 필요없어진다.
계획경제가 실시된다.
경제는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사에 의해 관리된다.
직업차별이 제거되어 도시와 농촌 사이의 사회적 구별이 없어진다.
각인은 지적인 노동만큼의 육체적 노동을 한다.
이런 체제는 세계적인 것이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

1.레닌(1870~1924)
교육자 집안에서 출생, 성장한 레닌은 나로드니키의 '인민의 의지'파에 속했던 친형의 사형선고로 마르크스주의의 길을 택하였다. 1893년부터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보급에 주력하였다.
특히 나로드니키 비판의 이론활동과 정치조직의 형성에 노력하였다. 1900년에 스위스로 망명하여 나중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혁명 이전 그는, 계급투쟁을 부인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수정주의와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마르크스 정통주의자들과의 이론적 대립을 거치면서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 힘을 썼다. 1917년 왕정타파를 위한 부르주아혁명이었던 2월혁명과 볼셰비키의 주도권 장악으로 이어지는 10월 혁명을 거치면서 그는 러시아의 공산주의혁명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적 토양위에서 레닌에 의해 레닌주의로 변모하였다. 이렇게 변모하게 된 동기는 먼저 마르크스의 예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고도의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후진국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정당성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이 봉기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하였고, 공산당전위조직의 중요성과 엘리트 혁명가의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이로써 마르크스 이론의 중대한 전환을 가져왔다. 또 후자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제국주의론을 주창하였다.

그에 따르면 선진국에서 공산혁명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선진국 자본주의의 모순이 제국주의를 통해서 후진국으로 전가되기 대문에 선진국 노동자들은 후진국 노동자들을 대리착취함으로써 모순을 극복할 동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그 뒤 스탈린주의,모택동주의로 계승, 변형되었다.

2.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
1837년 엘버펠트의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섬유공장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일을 1년쯤 도운 뒤 브레멘에서 2년 반 동안 업무를 견습하는 한편, 여가를 이용하여 평론과 시를 써서 오스발트라는 필명으로 신문 등에 발표하였다.
41년 베를린 근위포병여단에 지원 입대하여 병역 의무를 다하는 1년 동안 틈틈이 베를린대학에서 철학 등을 청강했으며, 헤겔 좌파에 가담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아버지가 공동 경영하는 영국 맨체스터의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의 방적공장에서 일했는데, 그 동안 여가를 이용해서 노동자들의 실정을 돌아보고, 노동운동·차티스트운동·사회주의운동과 접촉한 뒤 공산주의자의 입장을 굳히면서 몇 편의 논문을 썼다. 그 동안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노동자 번스를 알게 되어 43년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44년 마르크스와 루게가 발간한 <독불연보(獨佛年報)>에 발표한 <국민경제학비판대강>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연구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44년 8월 영국에서 독일로 돌아오던 중 파리에 들러 마르크스를 만나 의견의 일치를 발견하였으며, 이로써 평생에 걸친 두 사람의 우정과 협동이 시작되었다. 그 최초의 사업이 헤겔좌파를 비평한 <신성가족(1845)>의 공동집필이다. 그 뒤 바르멘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면서 맨체스터에서의 견문과 연구를 바탕으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썼다.

45년 4월 집을 나와 마르크스가 거처하고 있던 브뤼셀에 주거를 정하고, 그곳에서 공동으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여 인간사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파악 방식인 유물사관을 제시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자의 연대와 결집을 목표로 공산주의통신위원회를 창설하였고, 47년에는 의인동맹(義人同盟)에 가입한 뒤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동맹의 강령 작성을 목표로 해서 <공산주의의 원리>를 기초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에 의해 <공산당선언>이 집필되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로 되돌아가 마르크스와 함께 <신(新)라인 신문>을 발간했으며, 나아가 의용군의 부관으로서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으나, 혁명의 패배로 인하여 마르크스의 뒤를 따라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런던에서는 마르크스의 <신(新)라인신문·정치경제평론>발간에 협력하였고, <독일농민전쟁>등의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으나 생활이 궁핍하여 50년부터 다시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에서 근무하며 20년 동안 비즈니스맨 생활을 하게 되었다.
50-60년 사원, 60-64년 업무대리인, 64-69년 사무소지배인으로 일했으며, 계속적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하였다. 그 동안 교외에 있는 집에서는 친구들과 정치·학문적으로 교류하는 이중생활을 하였다.

63년 교외에 있는 집에서 함께 살던 번스가 죽었으며, 64년 번스의 여동생 리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었다. 69년 7월 회사 근무를 그만두고 70년 가을 런던으로 건너가 마르크스의 집 가까이에 거처를 정한 뒤 저술과 정치활동에 몰두하였다. <자연변증법> <공상에서 과학으로(1884)> 을 집필하였다.

3.레온 트로츠키(1879-1940)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불화, 학교에서는 선동가, 독재치하에서는 혁명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인민의 적인 반혁명분자, 자본주의로부터는 위험한 혁명수출업자로 낙인찍힌 채 지구상의 어느 정권으로부터도 안주지를 구할 수 없었던 유랑의 혁명가. 개방과 변혁을 추구했던 고르바초프 시대에도 부정적으로 언급되었던(그 전에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역사에서 영원히 미복권된 인물 트로츠키. 그의 이름은 언제나 숙청을 예고하는 장송곡처럼 피를 불러 왔다.
우리 역사에서도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을 비롯한 서울청년회 계열의 숱한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이보다 엄청나게 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트로츠키스트라는 죄명 아래 역사의 하치장으로 사라졌다. 그를 일컬어 “인간의 가죽을 쓴 악의의 권화”라고 처칠은 수필 <유럽의 식인귀>에서 썼지만, 사회주의권의 약화 이후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세우는 운동이 트로츠키스트들의 제4인터내셔널(스파르타시스트)로 부각되는 현상을 보면서 역사의 희롱이 지나치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1인자가 되기에는 덕이 모자랐고, 2인자로 남기에는 너무 열정적인 이론가였던 이 혁명가는 함께 고통을 나눌 줄 알았으나, 동지와 같이 투쟁으로 얻어진 열매를 나눠 먹을 줄은 몰랐던가(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명 콤비를 비교해 보라).

정통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영원한 반역자였던 트로츠키가 문학적으로 재조명되기는 독일의 페터 바이스의 희곡 <망명의 트로츠키> 공연(1970)부터였다. 바르샤바조약군의체코 침공(1968)을 “전술적 오류”라고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바이스는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생존권은 인정하나 중동전은 반대한 특이한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며 부르주아혁명을 거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가능성과 특히 제3세계의 영구혁명을 주창했던 트로츠키를 부각시켜 스탈리니즘 일변도의 사회주의를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트로츠키즘 이론의 선구자인 아이작 도이처의 관점(유명한 3부작 <무장한 예언자> <무장해제된 예언자> <추방당한 예언자>)에다 1970년대적인 국제사회주의운동 방향을 양념으로 쳐 넣은 이 걸작은 전2막 15장면을 교묘히 구성하여 비극적인 혁명가 트로츠키의 전생애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본명이 래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테인으로 “위대한 예술가”(도이처)인, 이 러시아에서는 보기 드문 유대인 부농집안의 말썽꾸러기가 독일어 트로츠(Trotz:반항, 완고, 고집, 과감, 기민)를 자신의 가명으로 쓴 것은 1902년 시베리아에서 탈출하여 가짜여권을 만들 때였다.

옥중결혼한 6년 연상의 아내(알렉산드라 소콜로프스카야)와 두 딸을 유형지에 둔 채 트로츠키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미국 핀란드 등 가는 곳마다 추방당하며 전전했는데, 파리에서는 일생의 동반자인 나탈리아 세도바와 만나게 되었다. 본처와의 공식적인 이별의 절차를 밟지도 않은 이 기묘한 관계는 일생 동안 지속되어 세도바와의 사이에서는 두 아들을 남겼다.

“내가 살아 숨쉬는 한, 나는 미래를 위해 싸울 것이다”라고 선언한 그는 국제사회주의운동 시절에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갈등 속에서,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트로츠하게’ 주장한 독불장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혁명의 방법, 당조직, 프롤레타리아 예술관 등에서 레닌과 견해를 분명히 달리했고, 일국사회주의와 영구혁명론으로 스탈린과 정면 대결했던 트로츠키를 바이스는 “이성에의 신앙, 인간의 연대에 대한 신앙을 도저히 방기할 수 없는” 영원한 혁명가로 보면서, 그가 저질렀던 끔찍한 실수인, 제1차대전 말기 때 독일과의 강화를 위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은 비켜간다(샤트로프의 희곡 <브레스트의 평화>는 레닌과 대립적인 트로츠키의 입장을 그려준다). 그뿐 아니라 만년에 멕시코에다 자신의 망명처를 제공해준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동거인) 프리다와의 짧지만 주책에 가까웠던 연애도 생략한다.

1920년대 초기까지는 레닌과 나란히 초상화가 걸릴 정도였던 그는 레닌이 죽은 뒤 조국에서도 쫓겨나 터키 프랑스 멕시코를 옮겨 다닌다.
계속되는 위협과 트로츠키스트 숙청으로 존 듀이를 대표로 하는 진상조사 국제위원회까지 조직되었지만 별 진전이 없는 가운데 스탈린의 첩자 라몬 메르카데르로부터 등산용 얼음도끼에 찍혀 최후를 맞았다.

혁명기간중의 트로츠키는 신화처럼 우상화되어 레닌조차도 “단 1년만에 거의 완벽한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 또다른 사람이 있다면 보여달라”(고리키 <레닌>)고 할 지경이었으며, 악쇼노프는 단편 <디코이>에서 탈주병들이 혁명을 야유하며 소란을 피우다가 그의 선동연설을 듣고는 만세를 부르며 적위대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도착하면 “그것은 곧 1개 사단이 새로 도착한 것과 마1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왔다”(로이 메드베제프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고 할 만큼 탁월한 선동가인 그는 참전 장교들의 가족 명단을 입수하여 인질조처를 취한 교활성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에서는 “자기자신 외에는 아무도 대표할 수 없는 개인적 단위”였던 트로츠키를 ‘방관자’, 견딜 수 없는 ‘지적 우월성’의 소유자, ‘당의 아웃사이더’로 평가하고 있다. 레닌의 유서에서 후계자로 부각되긴 했으나 그것은 집단지도체제였을 때를 상정한 것으로, 한때는 레닌조차도 그를 ‘뻥쟁이’ ‘허리가 반쯤 구부러진 신학교의 수학자나 다름없는 수다꾼’ ‘악덕 변호사’ 등으로 야유했었다(메드베제프).

“오만하기 짝이 없는”(메드베제프) 이 혁명가는 아마 스탈린의 암흑정치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대포장되어 레닌­스탈린의 대안으로서 레닌­트로츠키 노선에 대한 미련과 환상을 남겼는지 모른다. 실제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빵>에서 국내전 당시 트로츠키의 업적을 깎 아내리면서 스탈린의 공로를 과장했는데, 이런 역사의 왜곡에 대한 냉철한 비판작업이 <아르바트의 아이들>인지도 모른다. 스탈린을 비판적으로 본 이 소설은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더 냉소적인데, 이런 시각은 바로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와 어느 부분에서는 일치하는 대목이다. 즉 사회주의의 원형 찾기에서 스탈린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서구에서 내세우는 트로츠키는 오히려 스탈린보다 더 잘못된 노선임을 밝힌 것이 이 계열의 주장인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개인의 탁월한 능력도 당조직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무력하며, 어떤 당조직도 한 개인의 사조직으로 전락하면 부패한다는 교훈을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보여주며, 그 이상적인 원형으로는 아직도 레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이 분야의 문학작품들은 시사하고 있다.

***유물론(唯物論)***
유물론은 근대 과학의 성과에 의해서 정신을 고도로 조직된 특수한 물질, 즉 뇌수(腦髓)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밖에 비물질적인 영혼 자체나 의식 일반, 헤겔식의 절대 정신과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은 정신은 자발적 창조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두뇌에 의한 외부 세계의 반영 또는 모사라고 생각된다. 공산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질계의 변증법적 근본 법칙으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한다.

첫째, 점진적인 양적 변화가 누적되어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급작스런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둘째, 자연 현상은 언제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가지며, 과거와 미래를 가지고 있다. 생명이 소진(消盡)된 면과 새로운 생명으로 성장 발전하는 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리하여 대립자 상호 간의 투쟁과 이로 말미암아 고차의 형태에로의 전환을 거쳐 자연은 항상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자연의 발전 과정은 부정의 부정이라는 형식을 거쳐서 진행된다. 부정의 부정은 단순한 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통하여 고차의 긍정으로 높여지는 부정이다. 한 알의 씨앗이 부정됨으로써 열 개 백 개의 열매를 맺는 그러한 부정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법칙은 비단 자연계에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유물사관이 된다. (한전숙 역, 현대철학, 정음사, 1974, PP. 75)


물질을 제1차적 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 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정신을 바로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또는 물질(뇌)의 상태, 속성,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등 여러 입장이 있다.
[용어] 원래 철학용어로서는, 세계의 본성(本性)에 관한 존재론(存在論)상의 입장으로서 ‘유물론’과 ‘유심론(唯心論)’을 대립시키고, 인식의 성립에 관한 인식론(認識論)상의 학설로서 ‘실재론(實在論)’과 ‘관념론(觀念論)’을 대립시키는 것이 올바른 용어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물론’은 ‘관념론’의 대어(對語)로 사용된다. 그 까닭은 근본적으로 근세철학에서 유물론은 실재론적 입장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실체’에 근거를 두고 존재론이라는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해왔던 데 대하여, 관념론은 유심론적 입장이 ‘사고(思考)하는 우리’에게 근거를 두고 인식론적으로 전개하여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유물론’으로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F.엥겔스가 용어법으로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대어를 사용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계승한 N.레닌이 ‘오해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실재론’이라는 용어를 배척하였다는 사정도 있다.


[특징] ⑴ 과학주의:유물론의 근본적인 주장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물질’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 관해서는 여러 입장이 있다. ‘물질’의 특질은 흔히 질료(質料) 불가입성(不可入性) 타성(惰性) 등 대개 자연과학적으로 기술되고 규정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유물론자는 대체로 그 시대의 자연과학이 이룬 성과를 철학적 입장의 근본으로 하는 ‘과학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물질을 ‘우리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 보고(물질의 철학적 개념), 물질에 관한 과학적 인식내용에서 원리적(原理的)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그 경우도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거한다는 ‘과학주의(科學主義)’로 일관한다.
⑵ 결정론(決定論):유물론에는 이 ‘과학주의’와 관련하여 일종의 ‘결정론’이 있다. 즉 “모든 사물의 변화는 선행하는 물질적 조건과 그것을 포함하는 법칙성을 근거로 결정된다”라는,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과율(因果律)의 지배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한마디로 ‘무슨 일에나 원인이 있다’는 뜻이며 이것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그것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든가 혹은 어떤 법칙성(法則性)에 따른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다”라고 하여 법칙적 필연성 인식에 근거를 두는 법칙성의 기술적 이용을 인간의 자유로 보고 있으나 이 경우도 ‘법칙에 따르는’ 자유이며 근본적으로는 결정론으로 볼 수 있다.
⑶ 감각론(感覺論):유물론은 이러한 법칙성의 인식에 관하여 감각만을 인식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 까닭은 인식내용의 원천을 물질적인 외계에서만 찾고 내적 주관적인 것은 혼입(混入)을 배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의 역할은 부정된다. 유물론자 엥겔스가 영국의 경험론을 평하여 ‘부끄럼쟁이의 유물론’이라고 하였듯이 유물론은 경험론과 같이 감각론의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경험론과 가깝다. 그러나 경험론은 감각의 원인으로 그 자체로서는 비감각적인 실체(유물론이 인정할 수 있는 물질)를 인정하는 일이 없다.
⑷ 무신론(無神論):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질적일 때 신이라든지 정령(精靈)이라는 비물질적인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게다가 세계의 사상(事象)이 물질적 법칙성에 의하여 결정될 때 세계의 변화를 관장하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는 신적(神的)인 것은 설명의 편법으로서도 배제된다. 이렇게 유물론은 언제나 무신론을 위한 강력한 논리가 되어왔다. 유물론자는 모두 무신론자이며 사상사(思想史)의 측면에서 볼 때 양자는 거의 구별할 수가 없다.
[역사] 유물론이라는 명칭은 18세기에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고방식은 이미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볼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原子)와 공간(空間)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사물의 성질은 이러한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의 모양 크기 위치 및 그 결합의 밀도(密度)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원자의 기계론적인 작용으로 일어나며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영혼의 작용도 원자의 한 작용으로 생각하였다. 유물론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후, 더욱이 중세에 이르러 쇠퇴하였으나 근세에 이르자 F.베이컨, P.가생디를 선구자로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 독일에는 G.W.F.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 L.A.포이어바흐가 있으며 그 영향을 받아 K.마르크스, 엥겔스가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을 확립하여 현대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변증법적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

N.레닌이 볼셰비키당(黨)의 교조(敎條)로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교조 및 그것을 다시 공식화한 I.V.스탈린의 유물론 사상. K.마르크스와 F.엥겔스의 사상 영향을 받은 레닌은 당의 세계관적 교조를 만듦에 있어 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사상과 러시아의 G.V.프레하노프의 유물론을 도식화하고 통속화함으로써 이 교조의 모형을 형성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존재론의 형성을 조심스레 기피했고, 변증법의 논리를 사회와 역사 영역에만 적용하였다. 철학과 과학의 혼효물(混淆物)인 자연변증법을 구성한 엥겔스의 유물론적 진화론은 프레하노프와 K.J.카우츠키를 거쳐 레닌과 N.I.부하린에 의해 변증법과 유물론의 억지결합인 이 교조로서 발전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술어를 마르크스는 전혀 사용한 바 없고, 1891년 프레하노프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교조의 체계화 과정에서 볼셰비키당의 세계관적 도그마로 공식화되고 이 공식화된 국정철학(國定哲學)이 곧 1936년 스탈린의 저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었다. 이 공식화로 스탈린에 의한 철학의 1인 독점이 이루어지고, 그 이후 소련학계에서는 이 철학교조 이외의 모든 철학적 논의가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대용종교(代用宗敎)의 도그마로서 스탈린철학의 독점적 지배가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국 스탈린의 국정철학이요, 그 밖의 모든 철학사상의 연구와 토론을 불모화시킨 철학의 1인 독점체제가 된 것이다. 이 철학교조는 소련 공산당의 공식적 철학 이데올로기로서 반복적인 학습을 위한 사상 강제주입의 교정이었고, ‘DIAMAT’라는 약칭으로 통용되는 ‘공산경전(共産經典)’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56년 6월 6일 소련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에 내려진 ‘DIAMAT의 교정에 관한 당중앙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이 스탈린 교정은 폐지되고, 58년 콘스탄티노프 편(編)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와 60년 쿠시넨 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를 거쳐 그 후로도 수정이 거듭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선 이 교조는 마르크스와 특히 엥겔스의 유물론을 계승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마르크스의 철학을 부당하게도 자연계에까지 확대적용하여 진화론적인 유물론 형이상학으로 만든 것은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물질을 제1차 실재(實在)로 보고 물질의 물질적·화학적 변화마저도 변증법적 변화와 발전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모든 철학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유물론과 관념론의 2분법으로 이해했고 철학자들도 이에 대응되는 2대 진영으로 대립되어 있다고 전제하였다. 즉, “자연에 대해서 정신이 근원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따라서 결국에 가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세계는 정신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관념론 진영에 속한다. 자연을 근원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유물론의 갖가지 학파에 속한다”(엥겔스의 포이어바흐論)라고 하였다. 엥겔스의 유물론이 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물질을 상정한 진화론적 특성이 가미된 점이다. 레닌은 의식에서 독립된 물질의 선차성(先次性)을 제시하고 사유는 물질인 뇌수의 분비물인 듯이 표현하였다. 레닌의 유물론은 E.마하나 R.아베나리우스의 감각주의적 실증철학으로 인해 그 지위가 위태로워진 물질의 카테고리를 수호하기 위해 감각이나 경험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인식론으로는 반영론적(反映論的) 실재론을 마련하였다. 그의 반영론에 의하면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거나 불완전한 모사(模寫)에 불과한 것이 된다. 레닌은 “유물론은 대개 의식·감각·경험 등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를 인정한다.… 의식은 다만 존재의 반영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명제(의식은 물질의 불완전한 반영이다)는 그 명제 자체의 진리성(眞理性)조차도 인정할 수 없게 하는 패러독스에 빠져 있다. 즉, 수학적 지식이나 그 밖의 온갖 과학이론들이 물질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0의 개념은 물질의 어떤 반영이며 만유인력은 어떤 반영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적 전제가 아주 소박한 반영론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가장 심각한 약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스탈린도 유물론 면에서는 레닌의 통속적 유물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즉,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물질·자연·존재는 의식 밖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물질이 1차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감각·관념·의식의 근원이며 따라서 의식은 2차적·파생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고 존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론은 G.W.F.헤겔의 변증법과 결합됨으로써 L.A.포이어바흐의 기계적 유물론을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엥겔스의 변증법적 자연철학은 의식의 자각과정에 적용되어 온 변증법을 물리적 자연이나 무생물의 영역에까지 잘못 적용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K.뒤링은 마르크스사상 속의 헤겔 변증법 부분을 비판하면서, 모순은 논리적 관계이므로 자연계에는 모순이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엥겔스는 그의 저서 《반(反)뒤링론(論)》(1878)에서 정곡을 찌른 비판을 가한 뒤링의 논점을 반박하기 위해 자연 속에도 모순이 있다는 실례를 제시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물질의 운동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수학의 +와 -, 물리학에서의 작용과 반작용 등을 들어 자연 속에 모순이 내재함을 인정하려 했고, 특히 직선과 곡선이 동일한 것일 수 있는 고등수학에도 진정한 모순이 있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리알이 썩어서 다시 새싹이 나오는 예를 들어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의 법칙을 설명했고, 달걀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 껍데기와 그 속의 병아리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어 달걀이 병아리로 질적(質的) 비약을 한다는 예를 들어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이행(移行)하는 법칙’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런 모든 설명에서 생명 있는 물질을 전제하게 됨으로써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사상은 유물론에서 변질되어 보리·달걀 등 생명체를 기체로 한 진화론적 생명론이 되었다. 레닌도 ‘운동은 물질의 존재방식이다’라고 규정하면서 엥겔스의 자연철학을 계승하여 운동의 범주를 무생명적 물질에서 생명·의식·사유까지 포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범주로 사용하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변증법 부분을 전개한 것도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첫째, ‘양에서 질로의 전화(轉化)와 그 역(逆)’의 법칙에 대해서 양적 규정(量的規定)이 일정한 한계점에 도달하면 그 존재의 질은 새로운 질로 전화한다고 하였다. 물은 0 ℃에서 온도가 증가하여 100 ℃에 이르면 비등점에서 수증기로 전환된다는 것, 그리고 빙점과 비등점 사이에서만 물이 물로서 존재하는데 이것이 도량(度量)이다. 이처럼 양과 질의 변증법적인 통일로서 도량관계가 성립된다고 했고 새로운 질이 생기는 질적 비약을 일으키는 한계점을 결절점(結節點)이라 했다. 둘째, ‘제대립(諸對立)의 침투’의 법칙에 대해서도 생명은 스스로의 부정(否定)인 죽음을 본질적으로 내포하면서 삶과 죽음의 모순으로서 자기를 지양한다는 것이다. 셋째,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대해서도 유기적 생명체의 형태변환(形態變換)을 들어, 씨앗으로부터 그 부정으로서 성장체가 생기고 다시 그 성장체로부터 자기부정에 의해 씨앗이 생기는 과정을 그 예로 들었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변증법의 법칙을 4가지로 공식화하여 ① 제현상의 보편적 관련과 상호의존성, ② 자연과 사회에서의 운동·변화·발전, ③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移行)으로서의 발전, ④ 대립물의 투쟁으로서의 발전 등 네 가지를 들고 ‘부정의 부정’법칙을 삭제하였다. 공산당의 정치적 신조로서 주로 엥겔스, 레닌, 스탈린 등에 의해 교조화된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의 변증법과 유물론의 강제적인 결합, 자연과 사회의 구별 없이 적용된 실증주의적 방법과 존재론화(存在論化), 당적 실천을 위한 이념도구화 등으로 철학적인 반성과 비판 없는 통속화의 표본이 되었다. 비(非)스탈린화(化) 이후 이 ‘DIAMAT’의 교조는 소련과 그 밖의 공산권 내에서마저도 수많은 철학논쟁을 통해 그 이론적 허점과 허위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성이 드러났고, 이 교조의 당적 권위를 장악하고 있던 소련 관학계(官學界)에서도 수차에 걸친 자기 수정에 의해 많은 부분에 걸쳐 대폭 수정되어 변증법적 유물론의 중핵이 크게 변조되었다. 이 교조의 철학적 기초를 동요케 한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현대물리학의 발전으로 유물론의 실재개념이던 ‘물질개념의 소멸’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과 당의 정치적 실천과정에서 이 교조가 현실과 괴리되어 대내적으로 많은 이념분쟁을 야기시켰고, 특히 G.루카치는 스탈린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의 객관주의에 대해 반기를 들고 계급의식 등 의식의 적극적 의의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은 물질에 의해 규정된다는 물질결정론적인 유물론은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해 온 레닌주의 이래로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인 혁명적 실천과 갈등을 일으켰고, 먼저 볼셰비키당과 그 이데올로기가 정치권력의 장악을 통해 사회주의적 경제토대로 만든 볼셰비키혁명도 유물론적인 토대결정론으로는 이론적 합리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50년대의 토대·상부구조논쟁을 통해 소련철학은 토대결정론을 바꾸어 오히려 상부구조인 사회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토대에 ‘반작용’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립성’ 체제를 들고 나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유물론적 기초를 흔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소련의 철학교정에서는 물질에 대한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역설하는 새 경향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이 교조를 결정적으로 혼란에 몰아넣은 것은 55∼58년의 ‘사회주의하의 모순논쟁’이었다.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주된 모순인 계급적 모순이 해소되었다고 전제할 때 모순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유물변증법의 법칙에 따라 소련은 이제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잃고 침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역설적 상황이 야기되었다. 한편으로는 ‘소련과 공산권 내에도 모순대립이 상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왕의 변증법교조를 고수해 보려는 보수파와 ‘모순은 오히려 발전의 장애물이다’라고 해서 모순의 지향이나 통일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여 ‘통일·단결·일치’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관학파가 대립한 것이다. N.S.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도 공산권과 자본주의 제국과의 관계를 서로 용인할 수 없는 모순대립(따라서 전쟁불가피론)으로 파악하지 않고 경쟁적 공존관계로 인정한 점에서 ‘현대판 수정주의’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다. 스탈린시대에는 자연과학자도 그의 과학연구에 ‘DIAMAT’의 인용이 의무화되었으나 흐루시초프는 물리학 연구 등 자연과학 연구에 그 강제적용을 면제케 하였다. 맥심 미클루크는 소련 과학문헌의 조사연구를 통해서 소련 과학자들이 그들의 전문적 저작 속에서 변증법적 사고의 법칙을 이용한 단 1건의 예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해서 I.V.미추린, 리솅코 등의 경우와 같이 과학연구에 ‘DIAMAT’의 철학이 도움이 된 예가 없음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철학교조였던 ‘DIAMAT’는 공산권 내부에서도, 그리고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 속에서도 이제 퇴조·사멸되고 말았다고 하겠다.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

마르크스주의의 근거가 되는 역사관. 유물사관이라고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에의 적용이며, 그 근본 사상은 역사가 발전하는 원동력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라고 하는 데 있다. 즉, 사회사(社會史)로서의 역사의 실체가, 자연과 노동에 의해서 자연에 작용하는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생산 관계 등, 물질적인 것으로 성립되며 그것이 자기를 발전시킨다는 생각이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역사관에서는 역사의 추진력을 운명·섭리·세계정신 등 초자연적 관념에 두거나, 영웅이나 천재의 정렬이나 능력 등 개인적·우연적 요소로써 역사과정을 설명하는 관념적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아니면, 기후·풍토 등에 의해서 사회적 사상(事象)들이 결정되어 있는 지리적 결정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사적 유물론에서는 인간의 존재에 필요 불가결한 물질적 생활의 생산이 정치·경제·법률·종교·학문 등의 관념을 발달시킨 기초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제한다”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규정적, 제1차적인 것으로서의 토대,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照應)하는 생산 관계’와 이 실제적 토대 위에 성립되는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로써 이루어지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가 거기에 조응한다’. 그러나 상부구조는 토대로부터 직선적·일방적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대의 법제적·정치적인 여러 관계 및 과학·종교·예술 등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는 동시에 갖가지 모멘트(계기)에 의해서도 규정되어 있다. 나아가 상부구조,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는 하부구조에 대해서 능등적으로 작용한다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사회혁명의 시기는 다음과 같은 경로에 의해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물질생산력이 일정한 발전적 단계에 이르면 현존하는 생산 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것을 그 법제면에서의 현상에서 보면 그 때까지의 사회생활이 영위되어 온 소유관계와 모순되어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큰 장애가 된다. 그리고 경제적 기반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가 무너진다. 이것은 급속히 이루어지기도 하고 완만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리하여 역사상의 여러 시대가 형성되며, 새로운 생산양식이 이루어져 간다. 인류가 거쳐온 기본적 생산양식의 형태는 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민주주의인데, 여기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移行)되는 시기로서 현대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적 유물론이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상형성사 가운데서 명확한 형태에 달한 것은 1845∼46년에 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였다고 본다. 그의 소위 《소외론》에서는 G.W.F.헤겔과 헤겔좌파(左派)의 관념사관을 ‘자연적 인간의 노동’을 기초로 하는 사회파악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넘어서기는 했지만 사유재산제의 역사적 성립을 대상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역사사회의 형성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서의 사적 유물론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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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토크 - 마음을 훔치는 작은 카리스마
데브라 파인 지음, 김미옥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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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토크의 힘

스몰토크란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 뜨리는 일상의 소소한 대화를 가르킨다.

여기서 소소하다고 했지만 소소한 대화가 그 사람의 성공여부를 결정 지을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관과 해서는 안된다.

대화의 기술을 배우려면 일단 스몰토크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삶을 둘러 싼 모든 것들이 스몰토크에서 비롯된 연쇄반응과 관련이 있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상대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혼란한 세상에선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사람,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 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성공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명심하라.

 

편견을 버려라.

유아기때 훈육받았던 기억에서 벗어나라.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 말아라.

정식으로 소개받을 때 까지 기다려라

침묵은 금이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등 물론 어렸을 때는 이런 지침들이 안전을 보장해 주고

예절을 가르치는 데 일조 했겠지만 지금은 아이도 아니고 시대가 변하지 않았던가?

개인적 친분이나 업무관계에서 교제범위를 확대하려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대화에 끌어들일 줄 알아야 한다.

가벼운 스몰토크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좋다.

주위 할 점은 절대로 시시콜콜한 것까지는 묻지 않아야 하고 대화내용에 적절한 질문만 던지도록하고 던진 질문을 받을 준비를 하라. 되물을 수 있으니...

 

스몰토크의 기본원칙

누군가 당신에게 미소를 지으면 당신도 그 미소를 되돌려 주고 웃으며 몇마디 건네고 그와 눈을 마주치면 된다.

상대방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하라.

이름을 잘 기억 하려면 대화중에 그 사람의 이름을 반복 호명 하면 된다.

이름을 부를 때는 반드시 정확한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이름이 어렵다고 이름대신 별명을 부르지 마라.

 

먼저 다가가라.

접근하기 쉬운 사람을 찾아 과감히 말을 걸어라.

접근하기 쉬운 사람은 당신과 눈을 맞추는 사람,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 신문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는 등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등

 

대화의 컨셉을 입혀라.

스몰토크를 시작했는데 상대방이 사업얘기로 바꾼다면 당신과 스몰토크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므로 사업얘기로 바꿔야 한다.

대화에 능숙해 지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은 점점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할게 될 것이다.

 

온몸으로 경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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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프로페셔널 - 자신이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이 도전한 사람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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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에 여러분을 담다보니 내용이 약간 부실함을 느꼈다.표지모델의 강렬한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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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 삶을 재발견하는 최고의 법칙
척 마틴 지음, 김명신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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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즉필사, 사즉필생.....성공하려면 여유를 가지고 주위에 관심을 가져라. 그러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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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나카타니 아키히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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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비해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형식적인 말만 늘어 놓아 약간 지루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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