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상인의 지혜 인간사랑 중국사 5
리샤오 지음, 이기흥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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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과거 1840년 동안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 소련, 미국이 주도권을 잡은 것은 불과 200여 년에 불과하다. 아편전쟁 당시 중국은 전 세계 GDP 33%을 차지 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은 세계 최강이었다. 종이, 나침반, 화약, 활판 인쇄술은 세계 4대 발명품이었고, 이것이 서양에 전파 되면서 인류는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이외에도 차나 도자기 등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이랬던 중국이 비닐봉지로 미역을, 종이로 무와 만두를, 화공약품으로 계란을, 이쑤시개로 버섯을 만들고, 가짜 소고기, 가짜 호도, 가짜 쌀, 가짜 분유, 짝퉁 명품가방, 쓰레기 식용유가 유통되고 있으며, 약품을 먹여 만든 슈퍼돼지,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으로 키운 장어 등등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이것을 만들거나 키운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본인들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2015년 현재 미국의 GDP 18조 달러로 세계 1위이고, 중국은 11조로 바짝 쫓고 있는 추세다. 미국의 경제 성장률은 2% 대이고 중국은 계속 두 자리 성장률로 성장 하다고 요즘은 7%대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어 7년 정도 후면 현재 GDP의 두 배가 되니까 GDP 1위가 되는 시점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본다. 물론 국가 전체의 GDP이므로 1인당 GDP로 환산하면 중국은 절대 미국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중국을 주목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세계 10대 인터넷 기업 중 중국에 4개가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스티븐 잡스가 스마트 폰을 세상에 내 놓은 후 하드웨어 적으로 모양을 예쁘게 만드는 것 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하드웨어가 나와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구 촌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이 변화의 흐름을 타지 못하면 생존이 어렵다.

둘째 중국이 세계 최강 이었을 때 실크로드와 차마고도가 있었다. 이것은 물류의 원활한 흐름을 말하는 것인데, 중국은 현재 고속철도로 유럽과 연결하는 공사를 계획하고 진행 중이다. 기간은 걸리겠지만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화려한 과거로 재현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셋째 희귀금속 중 중국에서 독점하고 있는 광물들이 많다. 그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이 광물 없이는 더 이상의 신기술이 탄생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히토류는 98%가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로듐(30G $7,000), 오스늄, 켐리포늄, 니켈 등이다. 이 같은 자원으로 무기화 하여 세계를 긴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걸출한 지도자들이 팍스 시니카를 외치고 있고, 비상한 경영자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생산에서 소비국으로 전환, 서비스 산업의 발전, 높은 고용률 등이 중국을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가? 우리가 고전에서 답을 찾듯 저자는 사기의 화식열전과 평준서에서 답을 찾고자 하였다.

장황하게 300페이지가 넘는 내용을 실었지만 내가 찾은 답은 아래와 같이 압축된다.

첫째 신뢰이다.

중국이 위성을 쏘아 올리고, 항공모함, 고속철도의 수준이 세계 최고 이지만 중국의 기술력이 최고라고 말하진 않는다. 이유는 부도덕한 상인들의 속임수 때문이다.

'상업 자본은 개발이 덜 된 공동체의 상품 교환에 중개 작용을 하기만 하면 상업 이윤은 불법으로 타인의 재산을 차지하고 남을 속여 먹는 것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이윤의 대부분은 불법으로 타인의 재산을 차지하고 남을 속여먹는 가운데 발생한다.'는 칼 모르크의 평가처럼 모두가 이렇게 불법이진 않겠지만 속이는 만큼 이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신뢰가 마련되지 않으면 생존 할 수가 없다.

둘째 미래를 예측하라.

지금까지 잘 나갔던 것을 과감히 정리하고 다른 아이템을 찾아라. 코닥 필름이나 로키아같은 경우 망하기 직전 실적이 가장 좋았다. 하지만 현재 그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 안주하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도 반도체 시장을 놓고 다른 먹거리를 찾지 못하면 사라져 가는 회사의 전철을 밟을 수 밖에 없다.

저자는 '가물 때는 배를 준비하고, 큰 물이 날 때는 수레를 준비하라.'는 충고를 하였다.

셋째 인재를 활용하라.

유방이 통일을 이룬 것은 장량, 소하, 한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유비는 제갈량, 관우, 장비가 있었기 때문이고, 공자가 유명해진 이유는 훌륭한 그들의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항우가 범증을 쳐냈기 때문에 유방에게 패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등용한 인재는 믿어라.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 지라도 만가지 일을 다 손수 할 순 없다. 자신과 같은 분신을 만들어 배치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넷째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을 보면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 했기 때문이다.

사기를 쓴 사마천도 백성 구휼이나 국가를 위한 사람들만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하였다.

요즘 말로는 이것을 노블리스 오블리주라 한다.

대기업를 비롯한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기업에 대한 관심은 높아 졌지만 실천하는 기업은 소수인 것 같다. 사실 기업이란 이윤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부나 봉사하곤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종 교배가 강한 종을 만들 듯, 경쟁 속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생존할 수 있다. 아이러니 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고전에서 지혜를 얻어 오는 것을 좋아 한다. 이 책 또한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사기를 단순하게 나열해 놓은 느낌이다. 내용이 전체적으로 두루뭉술하고  인펙트가 없어, 내용에 힘이 별로 없어 보인다.

또한 범려의 경우 범려와 치이자피, 도주공이 동일 인물인지 여부도 불확실하다고 알고 있는데, 동일 인물로 서술 되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사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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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 전12권 황석영 대하소설 1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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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독서 테마를 고전으로 잡고 동서양 이름있는 책들을 읽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대하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라 조정래의 아리랑, 태맥산맥, 한강을 시작으로 박경리의 토지를 거쳐 황석영의 장길산에 이르렀다. 장길산 이후 러시아 문학으로 넘어갈 생각이다. 고전을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인간이 가진 특유의 습성이나 구성원들과의 관계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간 제로섬 같은 것은 거의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러한 간접 경험을 통해 우리는 현실 속에서 통용될 수 있는 tip을 찾아 적용 하면 되는 것이다.

 

장길산은 조선 숙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구월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하던 도둑의 우두머리로 실존 인물이다. 1권에 그의 친 부모와 양 부모 그리고 자라온 환경이 잘 설명되어 있다. 친 아버지는 사노이고 친 어머니는 외거노비였다.

사노비와 공노비만 있는 줄 알았더니 노비의 종류도 많았었던 모양이다.

공노비는 관청에 직접 노동을 제공하는 선상노비와 공물을 제공하는 납공노비로 나뉘고, 사노비는 주인집 밖에서 거주할 수 있는 외거노비와 가사 사용인의 솔거노비로 나눠었다. 공노비는 관청에 나가 근무하든 국유지에서 경작을 하든 본인의 집에서 출퇴근했기 때문에 솔거노비는 없었다.

외형상 독립적인 주택과 농토를 가질 수 있어서 솔거노비보다 낫지만 풍흉에 따라 파산의 위험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부모 가운데 한 명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었으며 소유권은 종모법에 따랐고, 사노비를 죽인 경우 법의 제재를 받지 않았고, 노비도 주인이 반역하지 않은 이상 배반할 수 없었다. 공노비의 경우 16~60세까지 노동력을 제공하고 면천 되었다. 노비도 사람인데 어떻게 상속, 증여, 매매가 가능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양 아버지는 재인 광대이고, 양 어머니는 무당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당패, 숫대쟁이패, 대광대패, 초라니패, 걸립패, 중마구패, 궂중패, 광대패, 각설이패, 얘기장패, 남사당패, 풍각쟁이 패 등 많은 유랑 놀이패들이 있었다.

사당패 - 여사당 중심으로 구성된 연행패로 사당벅구춤이나 산타령 같은 민요나 판소리 때로는 줄타기와 재담등이 있었고, 하류계층을 상대로 은밀한 매춘행위가 있었다.

초라니패 - 탈 놀음을 종목으로 삼는 떠돌이 집단이었다.

솟대쟁이 패 - 경남 진양을 본거지로, 동네 입구에 솟대에 줄을 매달아 행사를 했다.

걸립패 -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음악과 춤, 노래가 주 종목이었다.

중매구패 - 중들이 주로 하는 승 걸립패를 말한다.

광대패 - 신청이나 재인청 출신들이 떠돌아 다니면서 행사하는 것으로 장길산의 양 아버지와 장길산이 여기에 해당이 된다.

대광대패 - 장대타기와 탈 놀음이 주종목이고, 오 광대놀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무동패 - 두 어깨에서 무동이 춤과 재주를 주종목으로 삼은 패이다.

얘기장사 - 한 사람의 이야기 구연자와 1~3인의 악기잽이로 편성된 이야기 패이다.

풍각쟁이 - 지제 부자유자들이 해금이나 퉁소 등으로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남사당패 - 광대패와 함께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놀이패이다.

당초에는 이렇게 갈렸겠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중복된 종목이 많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조선의 최 하위계층이며 도둑이었던 장길산을 저자는 왜 재 조명한 것일까? 이 소설 12권을 읽는 것보다 이 이유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 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잠재력을 말할 때 빙산에 비유를 많이 한다. 수면 위로 떠오는 작은 빙산은 숨겨진 부분이 90%. 역사에 기록된 삶이 이 정도였으니 기록되지 않은 삶은 어땠을까?

태어남과 동시에 사람이 재산이 되는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들의 삶이란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길산이 활동했던 시기가 숙종 때니까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지난 후였으니 평상 시 보다 갑절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백성들이 잘못하여 일어난 일인가?

이런 시절일수록 가렴주구가 판쳐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다 보니 도둑이 관리들 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도덕적으론 큰 도둑, 작은 도둑 모두 나쁘지만 착취 당하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작은 도둑은 분배라도 조금씩 해주는데 큰 도둑은 분배는커녕 하나라도 더 빼앗아 가려고 하다 보니 민심이 돌아섰던 것 같다.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는 백성들이 천지를 개벽시켜 세상을 한번 뒤집었어야 하는데 리더의 리더십 부재 때문인지 백성들의 뒷심 부족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바꾸지 못한 걸 보면 안타깝다.

1980년대에 작가가 소설을 썼으니까 그 당시는 박정희의 유신시대였다. 작가가 봤을 땐 유신시대와 장길산이 활동했던 시대와 별단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가 그리웠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유신시대란 박정희가 61년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야당과의 당파 싸움이 소모적이라고 생각하고 북한의 김일성을 크게 부각시키고 이에 맞설 사람은 본인 뿐이라는 논리를 펴면서 경제, 통일의 제반 사항을 신속히 대응한다는 명분아래 본인 입맛에 맞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공포하고, 4공화국을 시작하며 새마을 운동, 긴급조치 발동, 74 남북 공동성명, 부마사태 등 여러 일들을 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79 10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유신시대는 종말을 맞는다.

 

1권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노비의 자식으로 길에서 태어난 길산은 비슷한 계층으로 입양되어 재인의 길을 걷다가 뛰어난 싸움 솜씨 덕에 송도 행수 박대근과 친분을 쌓아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된다. 박대근이 신복동에게 린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길산과 갑송은 신복동을 납치하여 징계하다가 들통나 관군에 잡히게 된다.

대하 소설은 1편에 백여 명 이상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묘옥, 그리고 장길산 주변인물들과 신복동이나 박대근과 같은 상인들 정도가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작가는 최대한 옛 것을 살리려고 하는 노력이 보이지만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더디게 읽혀지는 것이 왠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책 한 권을 읽어도 옛 선현들은 의심이 나면 또 읽고 읽어서 의심이 가지 않게 하라고 했는데 좀 귀찮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살다 보니 자연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천민이 양반을 능멸한 죄만도 큰데 사람까지 죽인 길산은 살아남지 못할 운명이다. 그러나 국문장에서 그는 '양반이 그 구실을 못하고 사람 같지 않을 때는 관에서 다스려야 하온데 관이 방임하니 무지한 백성이라도 어찌 참겠습니다. 신생원은 저자에서 완력으로 모리를 취하는 간상배올시다,'라고 말 하고 죽도록 태형을 맞고, 인두 지짐까지 당했다.

작가의 꼼꼼함이 길상의 옥 중에서 잘 나타난다.

제일칸은 전과자, 제이칸은 살인 도형수, 세번째 칸은 관리로서 중죄를 지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형벌 중 가장 강력한 형벌은 참형이고 다음은 중형인데 세인들이 가장 경계한 벌이 다음 5가지 형벌이라고 한다.

쪄서 죽이든, 사지를 토막내든, 목을 치는 것을 대벽이라고 하였고, 불알을 까는 궁형, 발꿈치를 베어내는 월형, 코와 귀를 베어내는 의괵형, 그리고 바늘 수십개를 묶어서 이마와 얼굴을 꾹꾹 찌른 뒤에 먹물을 넣어 면상에 벌표를 한 자자형이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형벌이다. 오리려 부관참시가 훨씬 낫은 형벌인 듯 싶다.

감옥 안에서도 죄수들끼리 정한 자리가 있었다. 남쪽이 일칸 북쪽이 이칸, 동쪽이 삼칸이었고 감옥 안에는 맨땅 바닥에 널빤지를 깔아 놓은 청이 있는데 연장자와 고참은 청 위에서 생활을 하고 신참자와 연소자는 청 아래를 쓰게 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색장, 간장 같은 것을 두어 감방 안에서 규율을 잡았던 모양이다. 얼마 전 지인이 도로 교통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30일정도 있다 나왔는데 5평 정도에서 10여명의 성인들이 생활을 하며 들어온 순서대로 고참대우를 받는다고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감옥 생활 조차도 변함이 없는 모습을 보니 씁쓸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용이와 길산이 만나는 대목에서 정진인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조선 예언서 정감록이 등장한다. 정감록이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정감록은 정몽주의 조상 정감과 이성계의 조상인 이심과 이연 세 사람이 금강산에서 한 이야기로 가상 대화록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저자도 없다. 국가에서는 불온한 서적이라 하여 금서로 정했다. 내용은 조선 이후 전쟁, 흉년, 전염병이 덮쳐 왕조는 망하게 되어 있고, 이 재앙에서 살아남으려면 십승지로 통칭되는 길지를 피하라고 하였고, 환란의 끝에는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이 계룡산에 도읍을 마련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와 6.25 동란 때 십승지에서는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 십승지는 안전한 곳 10곳의 지방을 말함. - 강원도 영월의 정동 상류지역, 경북 봉화군 춘양일대, 충북 보은군 난증항, 충난 공주군 유구면 마곡마을, 경북 풍기군 차암금계촌, 경북 예천의 금당동 북쪽, 경남 합천의 가야산에 있는 만수동, 전북 무주군 덕유산근처 방음, 전북 부안군 변산 동쪽, 전북 남원군 운봉 동점촌을 말한다.

 

혹세무민과 예언의 적중 여부를 떠나서 백성 30% 이상이 노비인 세상에서 정감록은 해방구로 보였을 것이다. 정감록의 예언 중 알만한 이야기 몇 개를 발췌했다.

1. 호랑이와 토끼해를 당하여 남북이 서로 솥의 발갈이 대치 하리라 => 6.25 동란이 1950년으로 호랑이 해였고, 1951년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한 연도가 1951년 토끼해였다.

2. 8월경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배 천척이 들어오고 경기도엔 시체가 산처럼 쌓을 것이다. 한강 이남 100리에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끊어지고 인적도 사라질 것이다. =>

1950.09.15(음력 8) 맥아더가 연합군을 이끌고 인천으로 기습 상륙하여 2만 명의 인민군을 사살했다.

3. 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면 평안도와 황해도 하늘에 원한 맺힌 피가 넘칠 것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모두 도둑의 소굴이 된다. => 30만명의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며, 흥남 철수로 평안도와 황해도가 불바다가 되었고, 휴전이 되면서 북한이 차지한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 땅을 의미하는 것 같다.

4. 정씨 진인이 올 때가 되면 계룡산 아래 초포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들락거린다.

=> 초포는 통행이 불가능한 곳이었는데 금강하구 제방공사로 작은 배의 통행은 가능 하다고 한다.

5. 곤륜산의 내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이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천년이 운수가 지나 그것이 개성으로 옮겨졌다. 송악이 쇠하고 천운이 막히면 다시 한양으로 넘어간다. 이후 도읍은 계룡산, 가야산으로 옮겨 간다. => 고조선 평양, 고려는 개성, 조선은 한양, 다음은 정씨의 계룡산, 다음은 조씨의 가야산, 다음은 범씨의 완산, 다음은 왕씨의 재차 송악으로 옮겨지고 순차적으로 재난과 화변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세종시에 신 행정수도를 옮기려 하고 있다. 그렇담 다음 대통령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올까?

금서로 묶어 놓고 좋다고 하는 것은 지배계층들이 다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의 혁명운동은 정감록의 예언에 의해 자행되었다. 때문에 민중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였다. 국가를 신뢰하지 못한 백성이 환상을 찾아 간 것이다.

 

2권이 대략적인 줄거리는 장길산은 감옥에서 우대용을 만나고, 박대근의 노력으로 편안한 옥생활은 하지만 우울한 생활을 하고 있던 차에 이학선의 금부도사 연기로 옥에서 나오게 된다. 조선시대의 경우 충분히 그런 연기가 가능 했을 것 같다. 1분이면 알 수 있는 지금도 청와대나 안기부 사칭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

2권에서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이학선, 김기, 옥여스님, 풍열스님, 강선흥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길산은 양부모님의 뜻에 따라 봉순이와 결혼을 하고 갑송이도 덩달아 여사당 도화와 결혼을 하게 되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이 있듯이 이들 결혼식 모임에 양 당사자를 포함하여 박대근, 김기, 강선홍, 우대용, 마감동, 오만석 등이 손가락에 피를 내어 형제의 의를 맺는다.

풍열스님이 길산에게 유마거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중생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금강산의 운부스님을 찾아 가라고 한다. 유마거사는 불법에 통달한 도인으로 혼탁한 세상 속에서 구제하기 힘든 중생을 과감히 껴안으라고 하였고, 가상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길산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암시 하는 듯 하다.

 

불교 이야기가 나와서 대승불교와 소승 불교에 대해 알아 보자

대승불교의 목적은 중생구제다.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으로 대중을 구제 하라는 의미에서 유래 되었다. 석가모니에게 한정되었던 보살의 개념을 넓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여 중생을 보살로 보고 자기만의 해탈보다는 남을 보살피는 보살의 역할을 이상이념으로 삼아 광범위한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인도에서 발달한 대승불교는 한나라 때 중국으로 갔다가 몽골, 티베트, 한국, 일본 등 북방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문자왕 때 용수의 삼론종을 비롯하여 법상종, 화엄종, 천태종, 진언종, 율종, 선종 등이 이에 속한다.

 

소승불교 - 작은 수레라는 뜻으로 수행자 자신의 모습을 살펴 각자의 정신세계에 몰입하고 사회와는 분리된 엄격한 수행을 강조하고 그를 통해 개인의 해탈을 강조한다. 이런 해탈을 통해 얻어진 이상적 존재를 아라한 또는 나한이라고 하였다. 소승불교는 주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보급되어 스리랑카, 타이, 베트남, 라오스 등지로 보급되어 이를 남방불교라 한다.

 

나온 김에 하나 더 교종과 선종에 대해 살펴 보자

 

교종은 불교교리와 경전을 중시하고, 이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이 현실적으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서로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를 깨닫고 실천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삼국시대에 불교가 도입되다 보니 귀족이 특권의식을 가지고 자신들만 배우고 익혀 귀족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선종은 선불교라 불리고, 인간은 원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품성을 지닌 존재여서 개인이 수행과 해탈을 통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달을 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종은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부처의 마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으로 수행 법은 참선을 중시한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교종의 기세에 눌려 있다가 고려 중기 지눌과 보우의 출현으로 중흥을 맡다가  선종내에 조계종파가 생겼지만 조선 왕조의 억불 정책에 따라 쇠퇴 하다가 조선 중기 서산대사는 교선 일치를 주장하였다.

 

길산은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서녀라는 아이에게 보따리를 잃어 버리고 찾는 과정에서 그의 오빠 오공랑과 친분을 갖고 이들 가족을 김기에게 보내 훗날을 기약하였고, 정학과의 싸움으로 의형제가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싸우고 이기면 형님이고 지면 동생 했던 모양이다. 힘 약한 사람은 뭥미?

 

3권에서는 길산 보다는 묘옥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묘옥은 고달근 사당패를 따라 다니다 이경순이라는 여주 도자기 분원을 하는 이도장을 만났는데, 이 사람의 행실이 범인과는 다르다. 사실 여자라면 장길산 보다 이경순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여자 사랑할 줄 알지, 재산 많지, 의리 있지, 성격 좋지, 터프하지, 자상하지....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참 양반이 아닌 게 흠이다.

조강지처가 있었지만 묘옥을 첩에 앉히고 아들을 보려고 하다가, 일이 꼬이는 바람에 묘옥은 떠나고, 조강지처는 죽고, 재물은 모두 빼앗기고, 본인은 도망자 신세가 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과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하늘이 가만 두지 않는 것 같다.

유치옥은 아들 때문에 큰 화를 당하고, 아들 유필준은 덜 떨어진 성격 때문에 죽도록 쳐 맞고, 이경순은 묘옥이를 탐하다 모든 걸 잃고, 이방은 이경순의 재산을 탐하다 목숨을 잃는다.  

 

이경순이 이방의 음모에 휘말려 구속 당하자 경순 아내는 묘옥에게 노자를 주며 떠나라고 하자 서울 송파 나루에 도착한다.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세상에 온 묘옥은 경순아내에게 받은 전 재산을 치기 당하고 남의 집 빨래를 해주던 중 장쇠의 도움을 받아 보퉁이 찾고, 장쇠 가족과 주막집을 열며 기반을 잡는다.

한편 고달근과 황회는 안성 유동지에서 장물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올라와 인신매매를 하다 색주가에서 묘옥의 소식을 듣고 묘옥을 찾아가 몸값을 요구한다.

여리고 착하고 항상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던 묘옥이 고달근을 향해 '나를 여염집 초년이나 종년으로 알았다간 큰 코 다친다. 나도 명색이 작부질 석삼년으로 궁둥이가 큰 년이여' 라고 하자 오히려 고달근이 앗 뜨거 한다.

 

3권에서의 교훈은 첫째 기업가와 공무원 사이에 친구가 될 수 없다. 둘째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으므로 죄 짓고 살지 말자. 셋째 나보다 좀 못한 사람에게 잘 대하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둑이 들 끓는다는 것은 가렴주구가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소설 자체가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하였기 때문이겠지만 등장인물 대부분이 도둑이고 관리는 탐관오리이고 상인들은 관리들과 결탁하여 제 배 불리기에만 급급하니 불쌍한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오직 했으면 산으로 들어 갔을까 하는 생각에 측은지심이 든다.

 

첫봉이는 중국 상인과의 밀무역으로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배는 골치 않았는데 불타산의 심백의 훼방으로 큰 손해는 물론이거니와 함께 어머니와 셋째 동생까지 잃고 넷째는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소금장수 강선흥은 장산곶에서 형 대신 재목 베는 부역을 하다가 내수사 노비들과 시비 끝에 그 들을 패대기 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친구 첫봉이 집에 들려 심백의 악행에 치를 떨며, 집에 다녀온 후 복수 하기로 했는데,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형이 곤경에 빠지자 자수하여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앓아 눕는 바람에 복수도 못하고, 자신의 나약한 힘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 하다 결국 산으로 들어 가기로 한다.

장길산 패거리와 의형제를 맺으면서도 도둑이 되고 싶지 않았던 선흥은 첫봉, 둘봉 형제와 함께 수놀이네 달마산 패거리를 장악하고 두령이 된 후, 고만이의 미인계를 이용하여 불타산의 심백이 까지 몰아내지만, 첫봉이는 고만이의 치마폭에 쌓여 불타산에 남에 두령이 되고, 선흥은 달마산의 두령이 된다.

길상은 운부도사를 만났으나 아무런 말도 없고, 없는 사람 취급하자, 안창골로 내려가 설유학이라는 의원을 만나 꽃재말의 염병을 다스리고 다시 운부에게 돌아가 제자가 된다.

설유학은 설유징이란 이름을 가진 양반이었으나, 스승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속세를 떠나자, 관직에 출사하지 않고 의원의 길을 걷는데, 길상에게 운부 이야기를 듣고 스승과 안면이 있던 운부를 만난다.

여기서 반계 유형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유형원이 누구이며 반계수록이란 책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조선시대의 학문은 성리학이었으나 유형원은 남인이며 정통 양반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부친의 참화 때문에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실학을 연구하였다. 경세학에서는 율곡과 반계가 쌍벽을 이뤘으나 율곡이 기호학파의 우두머리로 추앙 받는 반면 반계나 다산 등 실학자들에 대한 대접이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성리학은 기득권들의 학문이었고, 실학은 아웃사이더들의 학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계는 토지, 교육, 관료, 국가. 정치제도 등 각종제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이 학문을 토대로 이익과 정약용 등 중농주의 실학자를 탄생 시켰다.

 

반계수록은 첫째 현재 토지소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둘째 법제가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에 개혁되어야 하고, 셋째 학자와 관료들의 학문태도와 세태를 지적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결국 현실 법제의 모순을 제거하여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살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지역 불균형, 기득권의 신분적 특권 등에 대한 개혁을 요구 하였으니 실현 불가능한 이상안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학이라는 학풍을 일으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과거의 문제점이지만 여전히 현재도 똑 같은 문제점 때문에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이 고민을 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기득권들이 기득권을 내려 놓으면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니 문제점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진영논리 때문인 것 같지는 않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계급이 생기고 그 계급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가져가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 고민거리는 영원할 것으로 보인다.


우대용 일행은 강주인에게 당한 것을 되돌려 주기 위해 홍천수, 김포교 등과 짜고 강주인을 농락했으나, 강주인 또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지라 우대용에게는 선주 춘득에게 서신을 보내 세곡에 물 탄 사실을 알리자 춘득은 대용에게 장 오십 대를 치고 내 쫓아버렸고, 홍천수와 김포교, 석서방, 박성대에게는 화수 먹은 미곡 판매 책으로 몰아 발고하여 홍천수와 김포교는 얼굴 전체에 먹점이 찍히는 자자형을 받았고, 석서방과 박성대는 도망쳐 우대용과 합류하여 뱃사람들인지라 수적이 되기로 한다.
우대용 일행은 수적이 되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한데 이 자금조달 위해 강선흥 패의 힘을 빌려 첨사를 지낸 집강 동춘만의 집을 털고, 홍천수는 관노로 가는 것을 도중에 빼돌려 수적의 일원으로 받아 들인다. 홍천수의 도움으로 이경순을 소개받아 호포 2대와 총 열자루를 배에 탑재하며 수적하기 최적의 배 상태를 만든다.

3품 첨사까지 지냈던 동춘만이 각종 비리를 저지르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법 위에 군림하면서 엄청난 재물을 모았는데, 우리나라는 현재 방산 비리로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 정옥근 해군 참조총장 등을 비롯한 계급장의 별 숫자가 20개도 훨씬 넘는다고 한다. 도대체 이들은 뭐가 부족했던 것일까? 전역과 동시에 매월 오백만 원 정도의 연금이 나온다고 하던데 그 것이 부족했던 것일까? 별 정도 되면 국가에서 각종 혜택도 있고, 현역에 있으면서 수입도 수월찮이 생겼을텐데......
별을 달 때까지 학비는 물론이고, 국가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았으면 전역 후 본인이 받은 것에 대해 베풀었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 받았을 텐데 그깟 돈 몇 푼의 탐욕이 결국 그들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것이다.
비리로 옷을 벗는 경우 연금 삭감하는 제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견으론 범법으로 인한 구속일 경우 연금 지급도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리가 과거와 달라진 점은 수법과 돈의 액수 그리고 사람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우대용 일당의 첫 약탈 대상자는 강경의 원부자로 하고, 호조판서에게 올라갈 봉물을 징취한 후 점차 큰 수적으로 가고자 노력한다. 
이경순은 전 재산을 날린 후 이방을 살해하고 양주 천보산의 작은 암자에 숨어 있다가 기찰이 뜸한 틈을 타 파주 문산포에서 주막을 하며 정착했는데 여기서 은밀하게 총포를 만들어 파는 등 각종 수완을 발휘하여 과거의 재산과 같이 이루었다. 간절한 꿈은 이루어 진다고 했듯이 홍천수의 도움으로 꿈에도 그리던 묘옥을 만나 재회에 성공하고 부부의 연을 맺는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호감 가는 인물은 이경순이다. 요즘 남편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아친남 같은 캐릭터이다. 아친남이란 잘나가는 아내 친구 남편이란 뜻으로 엄친아 와 같은 신조어 이다.
사랑이면 사랑, 재물이면 재물, 인맥이면 인맥 뭐든 마음 먹은 대로 이룰 수 있는 인물이다. 억울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국가에서 금지한 총포를 만들어 판매하긴 했지만, 이야기 흐름상 정상참작을 감안 했을 땐 크게 순리에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 애착이 가는 인물이다.

갑송의 처 도화는 갑송이가 집을 비우기만 하면 탑고개를 내려와 불륜을 저지르곤 하였다. 도화와 통정하다가 길산에게 적발되어 혼이 난 배서방은 탑고개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안서방에게 도화를 소개하여 불륜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에 갑송 어머니는 도화를 질책하자 시어머니를 살해하고, 천연덕스럽게 갑송이 없이 장례를 치룬다.
이에 김기는 도화를 미행하여 불륜 장소를 알아낸다.
장례가 끝난 후 집에 도착한 갑송은 도화의 불륜을 목격하고, 화가 났지만 배서방은 보내주고, 어머니를 살해했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용서하려 했으나 무지한 도화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하고 어머니 묘지에 가서 문안을 드리게 한 후 비수로 도화를 살해하고 월정사로 올라가 풍열스님에게 계를 받아 김기는 물론이고 된목이골에서 조차 아무도 모르게 대성법주라는 스님이 되어, 금강산 운부를 찾아가게 되면서, 장길산 패거리와는 영영 이별을 한다.

길산은 금강산 운부에게 천자문과 소학을 배워 글을 알게 되었고, 태껸등 무술은 내외공을 통달 하는 경지에 이르러, 3년 약속한 배움이 끝나 운부의 곁을 떠나 산속에서 혼자 수련을 한다. 그러던 중 알고 지내던 심메꾼들에게 서산이목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으로 그곳으로 갔는데 어려움에 처한 김선일과 잠재꾼 모두를 구해 낸 후, 유복령과 현감이 결탁하여 금광을 개발하고 불법과 악행을 일삼았기에 유복령은 목을 베어 현감에게 갖다 주고 맹산현감을 겁주어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구월산으로 떠난다.


구월산으로 돌아온 길산은 아들 수복이와 아내 봉순이를 만나, 친구 갑송의 안부를 묻는데 이곳을 떠났다는 말에 김기에게 자초지정을 듣고 아쉬워 한다. 하지만 김기는 길산이 돌아 왔으니 3년 전에 결의 형제를 맺었던 것을 실행해 옮기기 위해 길산을 두령으로 하고 김기는 모사를 맞기로 하고, 우대용과 강선흥 등을 구월산으로 불러들인다.

 

김기는 양반가문을 몰락하게 만든 원수 여첨지와 사돈지간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딸을 밖으로 유인하여 가문을 더럽힌 죄로 죽이려 한다. 3자 입장에서 보면 가장의 실수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으므로 가장 큰 잘못은 김기에게 있었고, 여첨지가 빚보를 핑계로 딸을 데려갔을 때 나이가 14살 이었다. 부모를 그리워 하며 눈물로 지샜던 아이를 여첨지 댁이 달래어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시킨 것이다. 어찌 이것이 딸의 잘못 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시 시대상을 감안 했을 때 명분을 중시 했던 시대였기에 김기는 그의 딸을 죽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차마 혈육지정 때문에 죽이지는 못하고 용서 한 후 시댁에 악한 일이 생기면 규간하여 집안을 바로잡으라는 내훈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지만, 동무들을 배신하여 죽이고, 그 것으로 관명을 얻어 백성들을 착취한 그의 동무 서좌수는 용서하지 못하고 김기의 칼에 죽음을 맞는다.

 

여자의 치마폭에 놀아난 사내의 앞날은 기약할 수 없듯, 첫봉이 역시 고만의 탐욕으로 배신 당하여 산채는 점령당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관군들은 이 여세를 몰아 달마산으로 향하는데, 선흥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은 총에 맞고 산채까지 빼앗기지만 선흥을 데리러 온 마감동과 오만석의 도움으로 목숨은 부지하고 길산이 있는 구월산으로 들어간다.

수적의 우두머리가 된 우대용 또한 사신행차 선을 약탈한 후 몇 달간 숨어 있으라고 명한 뒤 의형제들을 만나러 구월산으로 간다.  

 

녹림당의 정신적 지주 격인 박대근은 배대인의 딸 귀례와 혼인을 하고 태행수가 되었다. 리더 중 가장 높은 단계의 리더는 뛰어난 리더십을 가지면서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다. 배대인 역시 박대근의 능력을 알아보고 상단의 모든 사업 권을 물려준 것이다. 박대근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이를 알아본 배대인의 능력이 더 크다는 결론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삼 재배에 성공한 세 모녀를 돌봐주고, 큰딸 언실이와 착실한 총각 최윤덕과 혼인을 주선하고 구월산으로 향한다.

 

우대용, 강선흥, 박대근이 구월산에 도착하자,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백성들의 위한 활빈당이 되기 위해 산신에 제사를 드리고 출정식을 거행한다. 이 당시 길산의 나이가 스물 아홉이었다. 요즘 같으면 아직 애들인데..ㅋㅋ

 

길산 일당은 구월산의 녹림처사들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최흥복이 두령으로 있는 자비령을 손에 넣고, 인간됨을 알아본 김기의 의뢰로 최흥복까지 일원으로 받아 들인다. 구월산에는 검술이 뛰어난 마감동, 힘이 장사인 강선흥과 우대용, 모사가 뛰어난 김기, 재물이 많은 박대근, 돌 팔매에 능한 김선일, 자고에 능한 강말득  등이 포진하여 여타의 녹림에 비해 인력구조가 탄탄한 편이다

최흥복은 춘천의 상민 이었는데, 관가에서 환곡으로 착취하려 하자, 동네 사람들을 선동하여 관에 대항하다, 쫓겨 심원사 부근 계곡에 들어가 재물을 탈취하던 중 마감동의 동무였던 엽사 문점손의 경고에 그의 수하로 들어가, 부두령 을량과 계책을 내어 문점손과 자비령의 여섯 두령을 제거하고 본인이 두령이 되었던 것이다.

길산은 흥복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의 면모를 보여주고, 작은 배에 큰 짐을 실을 수 없고, 너그럽지 못한 자는 머리가 될 수 없으니 분수를 모르고 날뛰면 일도 망치고 몸도 망치는 길이므로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동선령에 새로온 산채를 짓느라고, 닷새 동안 자비령에 머물면서 사냥을 명령한다. 지리도 익히고 운동도 시킬 명분이었다. 동선령으로 돌아온 흥복은 길상에게 가족을 데리고 오겠다는 청을  하자 강선흥과 함께 동행 하라고 한다.

고향에 도착하여 조카를 만나고, 형수를 만났으나 그녀는 이미 권관의 첩이 되어 과거의 사람이 아니었다. 세도를 알면 탐욕이 끝이 없듯 이미 그녀는 그 맛을 봤던 것이다.

 

6권에서의 교훈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계급을 발생하게 되어 있고, 계급이 발생되면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으로 나누어 지는데, 유산계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문점손 같은 리더 보다는 최흥복 같은 자가 리더가 되어야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돌아 간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곰 사냥 이야기가 나오는데 재미있어서 발췌하였다.

곰 사냥을 할 때 고이 다니는 길목에 팽팽하게 줄을 매어두고 창대를 곧추세워 놓으면 곰이 창을 잡아 당기다가 끌려오지 않으니까 화를 내며 힘을 쓰면 줄이 끊어 지면서 가슴에 꽂히고, 아프고 화가나 창을 더 끌어 당기면 맞창이 나 죽는다고 한다.

 

인도의 어느 마을에서는 원숭이 사냥 도구가 원숭이 손이 들어 갈만한 상자라고 한다. 상자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것을 넣어 주면 원숭이가 상자 안에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내려고 하는데 손을 펴면 손이 빠지는 데 그것을 집으면 손이 빠지지 않아 사람에게 잡힌다고 한다.

 

시베리아에서 늑대 사냥을 할 때 예리한 칼을 땅에 꽃아 놓고 칼에 피를 묻혀 두면 늑대가 지나가다 피 냄새를 맡고 칼을 핥는다고 한다. 그러면 칼에 혀가 베어 피가 나는 행위가 반복 되면서 늑대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고 한다.

이 세가지 동물 사냥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 첫째 목표는 가지지만 탐욕스러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소탐대실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절제가 필요하다. 정도가 되겠다.

 

흥복과 선흥이 박서방댁과 조카를 데리고 탈출하던 중 선비들의 답청놀이를 훼방하고 그 들의 패물과 돈을 빼앗아 노자에 보태는 장면은 고소하다.

한편 선흥은 박서방 댁과 허물 없이 사이가 되어 정이 들어 버렸고, 이들은 결국 혼례를 치르며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고, 말득이의 동생 끝춘이와 선일은 맞선을 보며 산채에 안정을 꾀하는 길상의 마음이 엿 보였다.

 

봄부터 시작된 기근이 전국을 휩쓸어 굶어 죽은 자와 역병으로 쓰러진 시체가 즐비 했고, 살아남은 자는 자식을 팔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살 길을 찾다 노비가 되었으며, 양민은 천민으로 전락하고, 돈 있는 자는 공명첩을 사서 양반으로 상승되었다.

이들 모다 못한 나머지 길상 패거리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도상방 조동지의 집을 습격하여 씨종손을 인질로 잡고 진휼미를 굶주린 자들에게 나눠주는 딜에 성공한다.

소메골 구씨 성을 가진 부호의 집에서 미곡을 빼앗아 일부는 산채로 운반하고 일부는 백성들에게 나눠 주는 과정에서 이 당시 정치 경제 상황을 잘 반영한 대화가 나온다.

포졸 '도적들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도적을 잡으러 왔다.'

백성 ' 도적들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 쌀은 아무도 못 가져간다.'

포졸 ' 소란을 피우면 적당과 동률로 징치한다.'

백성 ' 굶어 죽느니 차라리 맞아 죽는 게 낫다. 가까이 오면 그냥 두지 않을테다.'

포졸 ' 작당하여 관군에게 대적하면 효수형에 처하고....미곡은 개인재산이니 물러서라.'

백성 '국법이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지 언제 모두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 국법인가.?'

 

해서 지방 곳곳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자 관찰사 이세백은 무리의 두목이 장길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무술이 출장한 자 5명을 선발하여 구월산으로 보내나, 마감동등의 활약으로 3명은 죽고 2명은 김식에게 감명받은 나머지 돈까지 내주며 살려 보낸다. 하지만 웃날 포도 종사관 최형기가 도포군으로 나설 때 큰 우환이 된다는 복선을 주었다.

 

판관을 지냈지만 늙고 노망든 노인네가 산진이가 누님으로 모시고 있는 석과부를 탐내하며 결국 보쌈을 감행한다. 하지만 석과부의 재치로 산진이에게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이에 산진은 판관을 살해하고 석과부를 구해 낸다.

이 사건으로 산진은 황회, 전생, 달근 등과 함께 검계에 합류하게 된다.

검계란 백성을 괴롭히는 양반부호들을 징치하고 그 재물을 빼앗아 지금까지의 수모를 되돌려 주고 진인을 찾아 임금을 바꾸고 천민의 나라를 세우려는 자들의 모임이다.

검계 안에는 한양에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의 모임인 살략계가 있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난리 때 왕궁에 불을 지르고 부잣집을 습격하는 것이다.

왕이 바뀐다고 하여 모든 것이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되진 않는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계급이 존재하게 되어 있고 계급이 존재하는 한 누구나 똑 같을 순 없다.

 

산지니와 달근 일행은 좌대장 이인하 처가의 가산을 탈취하고, 소식을 듣고자 색주가에 잠입하였는데 하필 포도 종사관 최형기를 만나 미행을 당하나, 살주계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한다. 하지만 살주계는 대부분 노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살주계에서 일을 하였던 것이다. 산지나와 달근 일행을 도와 준 일이 최형기의 레이더 망에 걸리고, 남인계열로 참판을 지낸 목내선 대감의 수노 북성이는 죽음을 맞이 한다.

복성은 죽음을 앞두고 할말을 한다. ' 예부터 노비란 개 돼지나 우마와 다를 바 없이 살았고, 고통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언젠가는 양반들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 버리려고 했다.'

이에 목내선은 나라에게 가장 혜택을 받은 신하에 대대손손 기득권을 유지 하여야 하는 양반이었기에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대립이 아닌 양반과 노비라는 큰 틀을 대표하게 되어 서로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살주계가 종사관 최형기에게 발각되면서 북성은 죽고, 억기는 함정에 걸려 포청에 이실직고 하여 포상을 받고 풀려났으나, 그의 배신으로 살주계는 결국 사달이 나고, 중길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모신의 활약으로 검계와 합류하여, 배신자 억기를 산지니가 죽이고, 시동이가 총으로 최형기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최형기의 꼼수에 빠져 옹장이 아들이 잡히고, 살주계와 검계의 은신처와 거점들이 차례로 점령 당한다.

종사관 최형기란 인물은 조정에서 보면 유능한 경찰관임에 틀임이 없다. 하지만 기득권에 붙어 기생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때문에 약한 백성에게는 한치의 과오도 용서치 않지만 기득권들의 과오에 상당히 너그럽다. 이런 사람이 기득권으로 올라 섰을 때 기존 것들보다 더 백성들을 탄압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최형기는 기득권의 신임도 받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미움 받는 까마귀 같은 신세이다. 이런 자일수록 권력욕이 많다.

 

억기 살해 후 석씨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던 산진은 덕구네 주막에서 최형기에게 잡혀 옥살이를 하게 되자, 석씨는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옥 바라지를 한다. 하지만 검계 일당은 산진을 구해낼 방도 없자, 기왕 죽을 바에 검계에 이롭게 할 계책으로 以夷制夷(당파가 다른 양반들을 이용하여 서로를 치는 것)를 짜내 산진과 석씨를 기망하자, 산진은 망나니의 칼에 죽고 석씨는 목을 메달아 죽는다.

개인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산진과 석씨와의 관계다. 누이동생 사이인지 사랑하는 사이인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산진이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고 석씨는 동생으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석씨가 어린 자녀를 팽개치고 목숨을 버려야 했나? 결국 겉으로 들어나기는 동생이었지만 속으로 석씨도 산진이를 사모하였던 것 같다.

 

구월산의 장길산 일당은 조읍포창의 세곡으로 큰 재물을 모은 문수골의 유사과의 집을 털어 백성들을 구휼하고자 각본은 짜는데, 스토리가 아주 재미 있다.

김기는 한양에서 정2품 벼슬을 하고 있는 신승지 아우로 위장하여 산소자리를 보러 왔다고 둘러대 유사과와 친분을 맺었고, 말득은 김기의 하인 역할을 하였고, 변두령과 마감동은 포교 부장으로 위장하였고, 우대용은 전국에 수배가 내린 흉적의 역할을 하였고, 최흥복은 포도군의 토포사 역할, 김선일과 강선흥은 장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이 있듯, 재산이 많은 자는 지위와 명예를 욕심 내고, 지위나 명예가 있는 자는 재산을 욕심 낸다. 한양의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의 라인 이라고 하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김기에게 붙었다. 그 정도 재력이면 벼슬 이런 것 부럽지 않았을 텐데 욕심이 과해도 너무 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자들이 벼슬을 하게 되면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이루어 질리 만무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선 순환고리를 탄 것이고 국가나 백성의 입장에서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요즘 한달 째 진행되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가 이와 뭐가 다른가? 국무총리 이완구, 부산시장 서병수, 대통령 전 현직 비서실장 허태열, 김기춘, 이병기, 경남지사 홍준표, 인천시장 유정복, 국회의원이며 친박의 좌장 격인 홍문종이 리스트 인물이다.

새누리당에서는 이들을 옹호하고 있다. 도대체 정치하는 인간들이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연일 물타기 하려는 새누리당과 언론들, 그리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새정치민주연합 어느 한 곳 정상적인 곳이 없다.

어쩌면 수백 년이 지닌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 것이 없단 말인가?

개탄스럽다.

 

우리 국민들도 장길산 일당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도대체 언론 때문에 일치를 볼 수가 없다. 행동하는 것이 누굴 처단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거 때 표로 보여주면 되는데, 왜 나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 따지지 않고 투표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아무리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하지만 좀더 잘 한 사람이 있을 텐데 좀더 검증하여 그런 사람에게 투표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하고 생각한다.


장길산의 녹림처사들이 유사과 가산을 몰수하고 포창의 쌀을 꺼내 기민들에게 나눠주고, 무탈하게 산채로 복귀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정이품 품계로 왕의 신임을 받던 승지 신엽이 해서지방 관찰사로 나서면서 종사관 최형기를 끌어 들여 토포장을 맡긴다.

최형기는 살주계를 일망타진 한 후 검계 일당의 트랩에 걸려 종사관직을 사직하고 장사를 하게 된다. 전직 경찰이 많은 정보와 라인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많은 돈을 벌어 들이 듯 최형기 또한 영리하게 장사를 하며, 왈패와도 친분을 맺고 조정의 흐름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편, 신엽은 김익훈 라인이라고 알려졌던 최형기를 곁에 두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며, 자기 수하에 두지 않으려고 했으나, 일 처리가 꼼꼼하고 영리하여 신임을 하게 된다. 그를 토포장으로 인명하고 만호의 벼슬을 내린다. 이에 힘을 얻은 최형기는 겨울에 구월산을 토포하기로 하고 석달 기찰하고 준비한다. 예리한 수사관답게 토포 한다는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게  거짓 정보를 흘려, 장길산 일당의 정보 망을 먼저 와해시켜 버린다.

그 다음은 장길산 일당에게 당했던 감영 장교와 포창에서 재산을 읽었던 유사과 아들 유수룡, 유수호를 불러 구체적인 증언을 들은 후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다.

최형기는 마감동의 인간됨을 듣고 '검이 그 정도라면 사람이 이루어지는 법니다. 때가 난세라 아까운 자들이 들판을 헤매고 있구나. 하지만 그를수록 그런 자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도적처럼 나라에 무서운 적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은 한다. 이 세상의 무엇이든 한가지에 통달하면 아마 사람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모양이다. 극과 극은 하나로 이어지는 것처럼 모든 종말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

 

최형기는 토포를 위해 이백 명의 정예 군사 체계를 이십오 명은 포수로 이십오 명은 궁수로, 이십오 명은 유군(유격대), 나머지는 환도, 철퇴, 장창수로 구성하여 조련하고, 훈련이 끝난 후에는 술과 고기를 먹이며 병졸들을 독려 하였다. 최형기는 지도자로써 갖춰야 할 부분은 상당히 갖춘 인물이다. 백성들을 가엽지 않게 여기는 것 빼고......

 

최형기의 명령으로 유수룡은 박물장사로 가장하여 탑고개로 들어와 장충의 집과 변두령 집, 월정사까지 염탐하고, 유수호는 수렛고개의 큰돌네 주막과 고을 이방 등이 장길산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까지 알아냈고, 백섭포도부장은 사선골과 사당말을, 박완식은 된먹이골을 정탐하여 약도까지 그려 보고하고 토포 계획을 완료 하였다

백섭의 정탐 시 후례가 한말이 오래 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세상에 무서울 것은 없지만, 관차가 제일 무섭다. 벼슬아치들은 하늘이 놀랄 일을 저지르고도 수염 하나 까딱 않고 오히려 호통을 치고, 그럴듯하게 둘러댄다. 감쪽 같이 양민의 고혈을 빨아 먹고도 오히려 벼슬아치 해먹기가 어려운 노릇이라고 발뺌을 한다. 여우 같은 놈은 우리의 등을 토닥이며 골을 뺴 먹고, 호랑이 같은 놈은 무섭게 으르렁 거리면서 혼쭐을 내어 한꺼번에 깨물어 먹고, 뱀 같은 놈은 찰싹 달라붙어 갖은 아양을 다 떨어가며 혓바닥으로 핼끔 거리다가 천천히 삼켜먹고 하는 판이다.'

못 배우고 어리숙한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한 세태를 반영한 말이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비롯한 벼슬아치들은 제 뱃속 챙기기에 바쁘니, 어찌 녹림처사들을 나쁘다 하리요.

 

반면에, 송산 임방의 박대근은 현재 돌아가는 관의 상황을 보고, 토벌이라고 생각하고 이학선에게 구체적인 것을 알아보라고 지시하였는데, 보름 뒤에 토포군이 서흥에 집결하고 수는 이백명이고 궁수, 포수 등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으나, 이 또한 최형기의 계획 중 하나였던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토포일자에 장길산 일당은 토포군을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자 서흥관가를 급습하여 병고와 미창을 유린했다. 이에 신엽은 최형기를 질책하였지만 꼼꼼하게 정비하고 있으면 이 또한 계책이라고 말한 후 장길산의 정보 책이었던 큰돌네 주막을 장악하고, 송화관아의 호방과 조장교 등 내통자들을 모두 잡아 길산 일당의 눈과 귀를 막아 버리고, 사선골, 탑고개 등이 차례로 토포되면서 길산의 부모와 김기의 노모 그리고 아내, 무당 원향, 후례등이 살해되거나 다쳤고, 월정사까지 진입하려 하였으나 풍열스님의 재치로 관군은 피했지만, 된목이골을 지키고 있던 업복이와 오만석, 마감동이 최후를 맞는다.

 

최형기는 이미 마감동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재주를 아까워 하며 설득하려 하자 오히려 마감동이 최형기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며 오히려 설득하려 한다.

'이 나라는 근본부터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 사민이 있다 하나 글 읽고 벼슬하거나 전장이 많고 권력 있는 자들만이 나라의 주인이요, 나머지 백성들은 낫고 살고 죽기가 금수보다도 못하다.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 때에도 약한 백성들에게는 야차와 같이 굴던 것들이 바깥 도적들에게는 기도 못 펴고 꿈쩍도 못하면서 온 나라를 내 주고 말았다.

그러고도 조정의 귀하고 높은 자리는 저희끼리 다투어 들어 않고 내려오고 하면서, 입만으로 백성이요, 실상은 대롱을 꽂아 고혈을 빠는 먹이로 여길 뿐이다. 어찌 하늘이라 편안하게 머리를 쳐들어 살아갈 수 있으랴.'

금수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백성들이 보는 세상은 이러 했으니, 어찌 태평성대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구월산 토벌 때 동생과 엄마를 잃고, 몸 을 버린 원향은 김승운과 계화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정신을 잃고 박수 박계준의 집에서 기거하다, 호구조사 나온 이정과 서리에게 무당 삼지창을 들이대고 임금을 욕보이는 말을 하다 끌려가 신천군수에게 문초를 당하다 풀려나 월정사 풍열에게 위탁 한다.

 

보경 문하였던 묘정이 운부의 명을 받고 여환을 찾아가 대성법주(갑송)에게 한양을 도모하기 위해 금강산의 일여, 묘향산의 도안, 월정사의 풍열과 옥여, 수태사의 명도, 노적사의 정원태, 전생, 황회 등과 천불산에서 회합을 가진 후 월정사로 들어오다 광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친동생과 같이 각별했던 원향이었다. 이에 여환이 가슴 아파하자, 풍열은 중질을 그만 두고 원향이의 서방이 되어 정신을 회복시키라고 한다. 여환은 열성을 다해 회복시켜 결국 부부의 연을 맺고, 원향은 길산의 양 어미 안무당에게 만신의 몸주를 넘겨 받고 스스로 성장을 거듭한다.

 

풍열을 중심으로 월정사에 장길산, 김기, 우대용, 박대근, 대성법주, 설유징, 도안스님, 여환스님과 이경순 등이 모여 한양을 도모하여 임금을 죽이려는 계획과 궐기한 이유 그리고 타당성을 설파하고, 살주계와 검계의 실패 요인이 단순하게 양반을 해코지하고,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행동이 없었기에 지지 받지 못함에 각성하고, 무당과 스님들로 하여금 미륵사상을 설파하여 백성들과 함께 궁성을 도모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번 모임으로 이경순은 묘옥의 정인이었던 장길산을 만나게 되고, 여환을 통해 묘옥의 현재 상황을 알리지만, 길산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대의만을 생각한다.

묘옥과 이경순은 파주 문산포에서 좋고 큰 객점을 소유하고, 여문이라는 아들까지 보았으나, 여옥은 이경순을 장길산 같이 애틋하게 사랑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이나 정 으로 살고 있었지만 각자 내색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백성의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임금은 당연히 교체 되어야 하지만, 한 사람 죽는다고 백성을 하찮게 여겼던 기조가 바뀔까? 더구나 조선은 신권 중심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염려가 도안스님의 말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궁성은 잠시 점거할지 모르지만, 사대부의 뿌리를 뽑기는 어려울 걸세........'

우리나라의 권력 상층부를 보면, 그 밥에 그 나물일 수 밖에 없다. 조선 후기 일제에 충성했던 것들이 승승장구 했고, 해방 후 주춤하다 한국전쟁 때 다시 권력을 잡았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불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경유착 및 각종 비리가 고위층에서 일어나고 있다. 고위층 중 국민들이 안중에 있는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도성을 도모하려면 조선의 군사 조직이 어땠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서 발췌하였다. 조선시대의 국방조직은 5위의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이 있었는데, 수어청과 총융청은 한양의 외곽방어를, 도성은 어영청과 금위영, 훈련도감이 맡았고, 지방은 전국을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함경, 평안으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두어 정무를 보게 하였고, 도 밑의 행정구역은 부, 대도호부, , 도호부, , 현이 설치 되었고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었다.

 

중앙군의 명칭과 임무다.

총융청은 병장기를 합한 다는 뜻으로 이괄의 난 이후 설치 되어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의 북부를 방어 하였고, 당초 수는 약 2만 명 정도였는데 감축하여 영조 때는 8,300, 정조 때는 4,300명으로 줄었고, 고종 때 폐진 되었다.

수어청은 지키고 막는 다는 뜻으로 당초에는 남한산성 축성을 주관하였으나 정묘호란 이후 남한산성 및 경기 남부지방 수비하였고, 병력은 3 2천명 이었다.

어영청은 경영을 거느린다는 뜻으로 인조반정 이후 후 금과의 관계가 위급해져 설치되어 국왕을 호위하는 군대였으나 이괄의 난 과 정묘호란 후 5,000명으로 늘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7,000명이었다가 효종때는 2만천 명으로 늘었다가 고종 때 폐지 되었다.

금위영은 숙종 때 설치되었고, 국왕호위와 수도 방어가 주 업무였고, 병조판서가 대장직을 겸직했고, 인원은 1,688명이었고 고종 때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고 폐지 되었다.

훈련도감은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 설치되었고, 당초 포수, 살수, 사수 천명으로 구성되었다가, 삼수미를 거두게 되면서 두배로 늘었고, 병자호란 직전에는 5천명이 넘다가 고종 때 폐지 되었다.

훈련도감의 군졸들은 정예병이었으나 나무지 군졸들은 징집된 상번병이었기 때문에 김시동은 도성을 염탐하기 위해 자원 입대하여, 오경립, 정만일, 정대성, 이시흥, 김성남 등을 일원으로 섭외하였다.


 여환과 원향은 부부의 연을 맺고, 미륵도의 중심이 되어 새 세상에 대한 당위성을 설파하고, 설유징, 계화, 황회, 시동, 정원태, 김돌손, 시금, 이원명, 오계준, 방승남, 방의천, 전성달 등은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꿈꾸며 미륵도 지구장이 되어 향도들을 모으고, 장길산 일당과도 은밀하게 연결되어 뭔가가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미륵도가 설파 했던 '양주 대전리에서 벽력소리와 함께 성인이 내려와 만백성을 구한다.'라고 했는데 시기를 지정하지 않고 천지개벽(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할 때하고 하자 백성들은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오자 그 시기가 온 줄 알고 대전리로 모여 들었다. 이에 여환 일당은 당황하며 역성혁명을 앞 당기려 하지만, 당초 약속했던 시기도 아니었거니와 다른 조직들과 연계가 어렵다 보니, 타 조직들은 움직이지 않고, 미륵도만 조용히 제거되어 버린다.

 

역성혁명이란 왕조는 대부분 세습되는데, 혁명으로 성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장길산을 비롯한 조직들과 미륵도들은 이씨에서 정씨로 바꿔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있다. 왕이 바뀌면 모든 상황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 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왕권 보다 신권이 강하였고, 경제 여건이 그다지 좋지 않아 어느 누가 오더라도 굶주린 백성 전체를 보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장길산과 미륵도, 살주계, 스님들이 역성혁명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정치에 문외한이므로 만 백성을 인도하기는 역 부족일 것이다. 비리를 저지른 탐관오리들과 무분별하게 백성들을 착취한 부상들을 벌주는 것 이외 별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백성이 착하게 사는 네 가지 방법이 나오는 데 첫째 남을 베풀고 도와라. 둘째 스스로 계행을 닦아라. 셋째 하늘나라에 사는 것처럼 세상을 이루어라. 마지막 욕심은 더러우니 버려라.' 이러면 참다운 도가 현세에 이루어 질 것이라 하였다.

사실 이런 건 백성들 보다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갖고 있어야 할 생각 같은데.......

 

임방의 좌장을 맡은 박대근은 사행길에 함께할 상인들과 역할분담을 하는데 가장 이익이 적은 백사 수입과 책문저자(청나라와 밀무역하던 시장) 그리고 관은 대하만 스스로 배정하고 승낙을 받았다. 하지만 이 결정에는 박대근의 꼼수가 숨어 있었다. 첫째 재배한 인삼을 밀무역하여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려 한 것이고, 관은 십 오만 냥은 백사를 수입하여 왜인에게 3배의 차액을 남기려는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잠상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굳이 관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이번 사행길에 삼 재배에 성공했던 언실의 나무꾼 남편 윤덕을 행수로 삼고 동행한다. 하지만 묘향산에 은거하던 서용의 졸개들에게 봉물을 빼앗기지만, 길산의 칼을 보여 주며 물건을 되찾고, 채삼꾼 신거복을 만나 잠상의 계획을 현실화 한다.

뇌물로 연결되었던 강호방의 도움으로 청상 오대인을 만나 백사 오만냥어치와 인삼 잠상을 임토대마을에서 거래를 시작하기로 한다.

 

길산은 혁명에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김선일에게 금 잠채를, 봉산 만동이에게 난전을 휘어 잡게 하는 등 다각도로 자금을 모으고, 상고에도 쓰고 거병에도 쓸 수 있는 북방마와 총과 화약 그리고 믿을 만한 장정들을 모으고 있었다. 장길산 혈당들과 연계된 사람들을 살펴보면 송상의 좌장으로 않은 박대근, 강화에 홍천수, 경강엔 서강의 모신, 파주 문산에는 이경순, 포천 철원에는 복만이와 고달근, 혜음령에는 중길이와 살주계가, 황해도 황주에 오계준과 김승운의 미륵도 잔당이, 해주 재령에는 무계원, 봉산에는 천동이와 만동이네가, 수안은점에는 조무인이, 곡산 수철점은 만동이네 형제가, 평안도 낭림산맥 운봉산 일대는 산돌이와 수돌이가, 묘향산에는 서용이네가, 의주 용암포에는 박성대가, 벽동 불암골 채천동은 이학선이, 강계에는 최윤덕이, 순안과성천에는 거사패와 괴뢰배들이, 함경도 원산객점은 이시흥이, 고원 객점은 김선일 끝춘이 부부가, 회령에는 정대성이, 그리고 각도의 승병들, 설유징, 최현경, 정학, 정신과 같은 선비들이, 풍열스님은 가평 현등사에, 대성법주는 횡성 덕고산 봉복사에, 금굴이 수철점에는 오경립, 이정명, 방귀선이 번수 노릇을 하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는 숙종 십철년으로 남인들이 집정을 하고 있었고, 장희빈이 왕후가 되었으며, 흉년이 거듭되어 아사자가 길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상인들과 스님, 무당, 건달 등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머리 역할을 하는 수뇌부가 없어서 아쉽다. 좀더 기반을 확대하여 정치인들까지 끌어 들였어야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피가 당겼던지 길산은 보현사를 거쳐 풍열와 운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안심사의 명근 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이야기 하고 둘은 부자지간임을 확인한다.

 

가지 많은 고목나무 바람 잘 날 하루 없고, 자식 있는 우리 부보 속 편한 날 하루 없네. 이산 저산 산곩짝에 우는 부엉새야 네 아무리 섧게 운들 부모 없는 날만 하랴. 산아 산아 높ㄹ은 산아 눈비 잦은 묘향산아, 저기 저기 구월산에 우리 부모 누었거늘 계신 부모 생각 하면 뭣 하노.


안성 청룡사에서 사당패 모가비 였던 고달근은 철원 용담역말에 객점을 내고, 북어를 매점하여 부상대고의 꿈을 꾸며, 이시흥과도 연결되어 있어, 그를 만나러 왔다가 수달피 사냥하던 이학선을 만나고 이어 장길산과도 대면하고 은자 3천냥을 융통해 간다.

잇속에 능했던 고달근은 모신을 찾아가 양남의 양곡을 주문했고, 이경순에게는 길산의 지시라고 하면서 사주전 만량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옛말이 있듯 좌포청 포도부장 박완식의 기찰에 걸려 쇠와 유기를 담당했던 까마귀가 검거된다. 여환이나 석산진 같이 꼬리를 잘랐으면 되었을 텐데 본디 배운 게 없고 없던 살림이 살만 하니까 재물이 아까웠던 까마귀는 도적들을 잡게 해주면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말에 횡성 금굴이에 미륵도와 검계원들이 있으며, 고달근이 장길산과 연계되었다는 말까지 토설하자 나라는 발칵 뒤집히고, 장길산을 잡기 위해 최형기를 토포장으로 하여 토포군을 구성한다.

 

최형기는 고달근을 찾아가 장길산을 잡게 해주면 사주전에 대한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선달의 공명첩을 내리고, 포도논상도 주겠다는 말에 현혹되어, 이경순과 천동이 조무인을 위험에 빠뜨려, 이경순을 죽게 만들었으나, 이경순의 재치로 묘옥과 전생 그리고 여문이는 도망에 성공한다. 하지만 최형기는 천동이를 사로 잡아 우대용, 낭림산맥 일대의 녹림당, 함경도 산간 일대의 녹림당, 송도 박대근, 경강의 모신이 장길산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상부에는 보고 하지 않는다. 탁상 행정에 능한 상부는 장길산 보다 그들을 먼저 잡아들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달근을 앞세워 원산포 객점의 이시흥를 사로잡아 심문하여 고원 객점 김선일이 길산과 연계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김선일과 끝춘이와 아이들이 최형기에게 잡혔으나, 끝춘이의 재치로 선일과 아이들을 뒤로 한 채 탈출하여 조진포 어계방 주인에게 토포군이 왔다는 사실을 길산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하자 점주는 이를 승낙하고 조천의 길산에게 향했으나, 초천역에서 군졸들에게 검문을 받았으나, 말고삐를 당겨 도망가니 매복하였던 기패관의 오발로 방포가 되면서 현감 안신과 최형기, 길산 까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에 길산은 강말득과 김기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박달령에서 만나기로 약조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관군을 맞아 싸우며 도피에 성공한다. 하지만 쌍봉 쪽에는 최형기와 토포군이 숨어 있다가 김기와 강말득을 사살하고 가족들을 사로 잡았으나, 토포는 거기서 멈추고 만다. 이 사건으로 안신은 의금부로 압송 되었고, 최형기는 훈련원의 선전관으로 승진하였으며, 고달근은 공명첩 양반의 선달이 되어 파주 이경순에 객점과 원산포의 객점까지 차지 하여 원산포와 철원 한양을 잇는 상로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정승처럼 되었으며, 명화율에 따라 토포에서 잡힌 장정은 참형, 절도 유배되고, 아녀자는 삼남지방의 관노비로 끌려갔다. 고달근과 최형기는 정경유착의 정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상생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길산 일행은 흥복을 고달근에게 보내, 박거사를 사로 잡아 최형기가 썼던 방법 그대로 고달근 제거에 끌어들여, 고달근의 목을 벤 뒤 관가 삼문 앞에 효시한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재물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삼을 탐내다 결국 목이 베인 고달근이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까마귀나 박거사, 고달근 모두가 우리들 마음 깊숙이 들어 있는 본심이 아닐런지?

 

여섯 해 동안 계속된 흉황과 역질의 참변으로 백사십만에 달하는 백성이 죽었고, 팔도에 군도가 번성한다는 장계가 보고 되었으나, 백성들은 누구 하나 발고 하는 자가 없었으며, 조정에서는 그저 오가작통으로 도적을 막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훈련대장에서 병조판서가 된 신여철은 최형기를 은밀하게 불러 장길산 토포 계획을 세우고, 운산군수로 보낸다.

 

길산은 가평 현등사에 가서 풍열스님을 만나고 모신이 보낸 서기가 전하길 '봉순과 수복, 구월은 나주목 관비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슬퍼하다 묘옥을 만난다.

묘옥은 길산에게 여문이 양민의 길을 갔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그를 부탁하자 길산은 강계에 있는 윤덕이 부부에게 보내 기르도록 하였다.

강선홍, 최흥복이 이끄는 이백명의 활빈도들이 북방마를 타고 운산으로 향해 최형기를 사로 잡아 결투를 신청한 후 제압하고 '일찍이 관가의 통인으로 자라나 약한 백성의 온갖 수모를 모두 겪고 보았으면서 오히려 양반 사대부보다 더욱 우리 같은 천민을 미워한 자, 자신의 하찮은 출세를 위하여 이름없는 양민의 목숨을 벌레같이 알았고, 활빈도를 토포한다는 핑계로 병장기도 없는 아녀자들을 살해한 죄는 천추에 씻지 못할 것이다. 라고 꾸짖고 죽인다.

 

묘정과 옥여는 전국 각처에 다니며 산간 승려들을 체결하였고, 운부는 선비들을 통하여 세속의 인재들을 묶어 나갔다. 11권에서 선비나 관료들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는데, 부사, 첨사, 부자, 술사, 역사, 선비, 충의, 군수 등이 3월 계획에 동참하였으며, 강계에서는 박대근과 최윤덕을 통하여 자금과 군기를 묘향산과 금강산에 반입하는 등 반전을 기했으나, 거사계획은 미루어 지다 한양에서 일을 맡던 선비들 사이에 고변이 터져 흩어 졌으나 활빈도들은 더 극성을 부렸으며, 장길산을 자처 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이론적으론 왕이나 귀족, 관료들은 백성들을 잘 살게 하라고 만든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본인들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예나 지금이나 달라는 것은 사람 뿐인걸 느낄 수 있다.

정부에 대항하여 갖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노고가 있기에 현재가 있었지만 아직 까지도 만족할 수 없고, 위에서부터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제부터 붕당 정치가 시작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당이 나뉘어 국민을 위하는 것 보다는 자신들과 당을 위한 일만 하고, 상대 당에 대한 반대를 위한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혹자는 정치인의 옥석을 가지리 못한 책임이 무능한 국민에게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가장 큰 잘못은 국민이 뽑아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지 못한 정치인에 있고, 다음 잘못은 이들의 과오를 물타기 하여 자신의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언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보에 어두운 자는 성공할 수 없듯이 눈과 귀를 막고 옥석 가린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2달에 거쳐 읽은 장길산......화려함 보다는 민초들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특히 태백산맥이나 아리랑, 토지 등은 남한이 무대였다면, 장길산의 경우 북한이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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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2 황석영 대하소설 12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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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청룡사에서 사당패 모가비 였던 고달근은 철원 용담역말에 객점을 내고, 북어를 매점하여 부상대고의 꿈을 꾸며, 이시흥과도 연결되어 있어, 그를 만나러 왔다가 수달피 사냥하던 이학선을 만나고 이어 장길산과도 대면하고 은자 3천냥을 융통해 간다.

잇속에 능했던 고달근은 모신을 찾아가 양남의 양곡을 주문했고, 이경순에게는 길산의 지시라고 하면서 사주전 만량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옛말이 있듯 좌포청 포도부장 박완식의 기찰에 걸려 쇠와 유기를 담당했던 까마귀가 검거된다. 여환이나 석산진 같이 꼬리를 잘랐으면 되었을 텐데 본디 배운 게 없고 없던 살림이 살만 하니까 재물이 아까웠던 까마귀는 도적들을 잡게 해주면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말에 횡성 금굴이에 미륵도와 검계원들이 있으며, 고달근이 장길산과 연계되었다는 말까지 토설하자 나라는 발칵 뒤집히고, 장길산을 잡기 위해 최형기를 토포장으로 하여 토포군을 구성한다.

 

최형기는 고달근을 찾아가 장길산을 잡게 해주면 사주전에 대한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선달의 공명첩을 내리고, 포도논상도 주겠다는 말에 현혹되어, 이경순과 천동이 조무인을 위험에 빠뜨려, 이경순을 죽게 만들었으나, 이경순의 재치로 묘옥과 전생 그리고 여문이는 도망에 성공한다. 하지만 최형기는 천동이를 사로 잡아 우대용, 낭림산맥 일대의 녹림당, 함경도 산간 일대의 녹림당, 송도 박대근, 경강의 모신이 장길산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상부에는 보고 하지 않는다. 탁상 행정에 능한 상부는 장길산 보다 그들을 먼저 잡아들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달근을 앞세워 원산포 객점의 이시흥를 사로잡아 심문하여 고원 객점 김선일이 길산과 연계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김선일과 끝춘이와 아이들이 최형기에게 잡혔으나, 끝춘이의 재치로 선일과 아이들을 뒤로 한 채 탈출하여 조진포 어계방 주인에게 토포군이 왔다는 사실을 길산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하자 점주는 이를 승낙하고 조천의 길산에게 향했으나, 초천역에서 군졸들에게 검문을 받았으나, 말고삐를 당겨 도망가니 매복하였던 기패관의 오발로 방포가 되면서 현감 안신과 최형기, 길산 까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에 길산은 강말득과 김기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박달령에서 만나기로 약조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관군을 맞아 싸우며 도피에 성공한다. 하지만 쌍봉 쪽에는 최형기와 토포군이 숨어 있다가 김기와 강말득을 사살하고 가족들을 사로 잡았으나, 토포는 거기서 멈추고 만다. 이 사건으로 안신은 의금부로 압송 되었고, 최형기는 훈련원의 선전관으로 승진하였으며, 고달근은 공명첩 양반의 선달이 되어 파주 이경순에 객점과 원산포의 객점까지 차지 하여 원산포와 철원 한양을 잇는 상로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정승처럼 되었으며, 명화율에 따라 토포에서 잡힌 장정은 참형, 절도 유배되고, 아녀자는 삼남지방의 관노비로 끌려갔다. 고달근과 최형기는 정경유착의 정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상생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길산 일행은 흥복을 고달근에게 보내, 박거사를 사로 잡아 최형기가 썼던 방법 그대로 고달근 제거에 끌어들여, 고달근의 목을 벤 뒤 관가 삼문 앞에 효시한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재물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삼을 탐내다 결국 목이 베인 고달근이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까마귀나 박거사, 고달근 모두가 우리들 마음 깊숙이 들어 있는 본심이 아닐런지?

 

여섯 해 동안 계속된 흉황과 역질의 참변으로 백사십만에 달하는 백성이 죽었고, 팔도에 군도가 번성한다는 장계가 보고 되었으나, 백성들은 누구 하나 발고 하는 자가 없었으며, 조정에서는 그저 오가작통으로 도적을 막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훈련대장에서 병조판서가 된 신여철은 최형기를 은밀하게 불러 장길산 토포 계획을 세우고, 운산군수로 보낸다.

 

길산은 가평 현등사에 가서 풍열스님을 만나고 모신이 보낸 서기가 전하길 '봉순과 수복, 구월은 나주목 관비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슬퍼하다 묘옥을 만난다.

묘옥은 길산에게 여문이 양민의 길을 갔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그를 부탁하자 길산은 강계에 있는 윤덕이 부부에게 보내 기르도록 하였다.

강선홍, 최흥복이 이끄는 이백명의 활빈도들이 북방마를 타고 운산으로 향해 최형기를 사로 잡아 결투를 신청한 후 제압하고 '일찍이 관가의 통인으로 자라나 약한 백성의 온갖 수모를 모두 겪고 보았으면서 오히려 양반 사대부보다 더욱 우리 같은 천민을 미워한 자, 자신의 하찮은 출세를 위하여 이름없는 양민의 목숨을 벌레같이 알았고, 활빈도를 토포한다는 핑계로 병장기도 없는 아녀자들을 살해한 죄는 천추에 씻지 못할 것이다. 라고 꾸짖고 죽인다.

 

묘정과 옥여는 전국 각처에 다니며 산간 승려들을 체결하였고, 운부는 선비들을 통하여 세속의 인재들을 묶어 나갔다. 11권에서 선비나 관료들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는데, 부사, 첨사, 부자, 술사, 역사, 선비, 충의, 군수 등이 3월 계획에 동참하였으며, 강계에서는 박대근과 최윤덕을 통하여 자금과 군기를 묘향산과 금강산에 반입하는 등 반전을 기했으나, 거사계획은 미루어 지다 한양에서 일을 맡던 선비들 사이에 고변이 터져 흩어 졌으나 활빈도들은 더 극성을 부렸으며, 장길산을 자처 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이론적으론 왕이나 귀족, 관료들은 백성들을 잘 살게 하라고 만든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본인들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예나 지금이나 달라는 것은 사람 뿐인걸 느낄 수 있다.

정부에 대항하여 갖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노고가 있기에 현재가 있었지만 아직 까지도 만족할 수 없고, 위에서부터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제부터 붕당 정치가 시작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당이 나뉘어 국민을 위하는 것 보다는 자신들과 당을 위한 일만 하고, 상대 당에 대한 반대를 위한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혹자는 정치인의 옥석을 가지리 못한 책임이 무능한 국민에게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가장 큰 잘못은 국민이 뽑아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지 못한 정치인에 있고, 다음 잘못은 이들의 과오를 물타기 하여 자신의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언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보에 어두운 자는 성공할 수 없듯이 눈과 귀를 막고 옥석 가린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2달에 거쳐 읽은 장길산......화려함 보다는 민초들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특히 태백산맥이나 아리랑, 토지 등은 남한이 무대였다면, 장길산의 경우 북한이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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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1 황석영 대하소설 11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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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환과 원향은 부부의 연을 맺고, 미륵도의 중심이 되어 새 세상에 대한 당위성을 설파하고, 설유징, 계화, 황회, 시동, 정원태, 김돌손, 시금, 이원명, 오계준, 방승남, 방의천, 전성달 등은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꿈꾸며 미륵도 지구장이 되어 향도들을 모으고, 장길산 일당과도 은밀하게 연결되어 뭔가가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미륵도가 설파 했던 '양주 대전리에서 벽력소리와 함께 성인이 내려와 만백성을 구한다.'라고 했는데 시기를 지정하지 않고 천지개벽(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할 때하고 하자 백성들은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오자 그 시기가 온 줄 알고 대전리로 모여 들었다. 이에 여환 일당은 당황하며 역성혁명을 앞 당기려 하지만, 당초 약속했던 시기도 아니었거니와 다른 조직들과 연계가 어렵다 보니, 타 조직들은 움직이지 않고, 미륵도만 조용히 제거되어 버린다.

 

역성혁명이란 왕조는 대부분 세습되는데, 혁명으로 성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장길산을 비롯한 조직들과 미륵도들은 이씨에서 정씨로 바꿔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있다. 왕이 바뀌면 모든 상황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 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왕권 보다 신권이 강하였고, 경제 여건이 그다지 좋지 않아 어느 누가 오더라도 굶주린 백성 전체를 보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장길산과 미륵도, 살주계, 스님들이 역성혁명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정치에 문외한이므로 만 백성을 인도하기는 역 부족일 것이다. 비리를 저지른 탐관오리들과 무분별하게 백성들을 착취한 부상들을 벌주는 것 이외 별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백성이 착하게 사는 네 가지 방법이 나오는 데 첫째 남을 베풀고 도와라. 둘째 스스로 계행을 닦아라. 셋째 하늘나라에 사는 것처럼 세상을 이루어라. 마지막 욕심은 더러우니 버려라.' 이러면 참다운 도가 현세에 이루어 질 것이라 하였다.

사실 이런 건 백성들 보다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갖고 있어야 할 생각 같은데.......

 

임방의 좌장을 맡은 박대근은 사행길에 함께할 상인들과 역할분담을 하는데 가장 이익이 적은 백사 수입과 책문저자(청나라와 밀무역하던 시장) 그리고 관은 대하만 스스로 배정하고 승낙을 받았다. 하지만 이 결정에는 박대근의 꼼수가 숨어 있었다. 첫째 재배한 인삼을 밀무역하여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려 한 것이고, 관은 십 오만 냥은 백사를 수입하여 왜인에게 3배의 차액을 남기려는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잠상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굳이 관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이번 사행길에 삼 재배에 성공했던 언실의 나무꾼 남편 윤덕을 행수로 삼고 동행한다. 하지만 묘향산에 은거하던 서용의 졸개들에게 봉물을 빼앗기지만, 길산의 칼을 보여 주며 물건을 되찾고, 채삼꾼 신거복을 만나 잠상의 계획을 현실화 한다.

뇌물로 연결되었던 강호방의 도움으로 청상 오대인을 만나 백사 오만냥어치와 인삼 잠상을 임토대마을에서 거래를 시작하기로 한다.

 

길산은 혁명에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김선일에게 금 잠채를, 봉산 만동이에게 난전을 휘어 잡게 하는 등 다각도로 자금을 모으고, 상고에도 쓰고 거병에도 쓸 수 있는 북방마와 총과 화약 그리고 믿을 만한 장정들을 모으고 있었다. 장길산 혈당들과 연계된 사람들을 살펴보면 송상의 좌장으로 않은 박대근, 강화에 홍천수, 경강엔 서강의 모신, 파주 문산에는 이경순, 포천 철원에는 복만이와 고달근, 혜음령에는 중길이와 살주계가, 황해도 황주에 오계준과 김승운의 미륵도 잔당이, 해주 재령에는 무계원, 봉산에는 천동이와 만동이네가, 수안은점에는 조무인이, 곡산 수철점은 만동이네 형제가, 평안도 낭림산맥 운봉산 일대는 산돌이와 수돌이가, 묘향산에는 서용이네가, 의주 용암포에는 박성대가, 벽동 불암골 채천동은 이학선이, 강계에는 최윤덕이, 순안과성천에는 거사패와 괴뢰배들이, 함경도 원산객점은 이시흥이, 고원 객점은 김선일 끝춘이 부부가, 회령에는 정대성이, 그리고 각도의 승병들, 설유징, 최현경, 정학, 정신과 같은 선비들이, 풍열스님은 가평 현등사에, 대성법주는 횡성 덕고산 봉복사에, 금굴이 수철점에는 오경립, 이정명, 방귀선이 번수 노릇을 하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는 숙종 십철년으로 남인들이 집정을 하고 있었고, 장희빈이 왕후가 되었으며, 흉년이 거듭되어 아사자가 길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상인들과 스님, 무당, 건달 등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머리 역할을 하는 수뇌부가 없어서 아쉽다. 좀더 기반을 확대하여 정치인들까지 끌어 들였어야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피가 당겼던지 길산은 보현사를 거쳐 풍열와 운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안심사의 명근 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이야기 하고 둘은 부자지간임을 확인한다.

 

가지 많은 고목나무 바람 잘 날 하루 없고, 자식 있는 우리 부보 속 편한 날 하루 없네. 이산 저산 산곩짝에 우는 부엉새야 네 아무리 섧게 운들 부모 없는 날만 하랴. 산아 산아 높ㄹ은 산아 눈비 잦은 묘향산아, 저기 저기 구월산에 우리 부모 누었거늘 계신 부모 생각 하면 뭣 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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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0 황석영 대하소설 10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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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 토벌 때 동생과 엄마를 잃고, 몸 을 버린 원향은 김승운과 계화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정신을 잃고 박수 박계준의 집에서 기거하다, 호구조사 나온 이정과 서리에게 무당 삼지창을 들이대고 임금을 욕보이는 말을 하다 끌려가 신천군수에게 문초를 당하다 풀려나 월정사 풍열에게 위탁 한다.

 

보경 문하였던 묘정이 운부의 명을 받고 여환을 찾아가 대성법주(갑송)에게 한양을 도모하기 위해 금강산의 일여, 묘향산의 도안, 월정사의 풍열과 옥여, 수태사의 명도, 노적사의 정원태, 전생, 황회 등과 천불산에서 회합을 가진 후 월정사로 들어오다 광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친동생과 같이 각별했던 원향이었다. 이에 여환이 가슴 아파하자, 풍열은 중질을 그만 두고 원향이의 서방이 되어 정신을 회복시키라고 한다. 여환은 열성을 다해 회복시켜 결국 부부의 연을 맺고, 원향은 길산의 양 어미 안무당에게 만신의 몸주를 넘겨 받고 스스로 성장을 거듭한다.

 

풍열을 중심으로 월정사에 장길산, 김기, 우대용, 박대근, 대성법주, 설유징, 도안스님, 여환스님과 이경순 등이 모여 한양을 도모하여 임금을 죽이려는 계획과 궐기한 이유 그리고 타당성을 설파하고, 살주계와 검계의 실패 요인이 단순하게 양반을 해코지하고,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행동이 없었기에 지지 받지 못함에 각성하고, 무당과 스님들로 하여금 미륵사상을 설파하여 백성들과 함께 궁성을 도모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번 모임으로 이경순은 묘옥의 정인이었던 장길산을 만나게 되고, 여환을 통해 묘옥의 현재 상황을 알리지만, 길산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대의만을 생각한다.

묘옥과 이경순은 파주 문산포에서 좋고 큰 객점을 소유하고, 여문이라는 아들까지 보았으나, 여옥은 이경순을 장길산 같이 애틋하게 사랑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이나 정 으로 살고 있었지만 각자 내색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백성의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임금은 당연히 교체 되어야 하지만, 한 사람 죽는다고 백성을 하찮게 여겼던 기조가 바뀔까? 더구나 조선은 신권 중심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염려가 도안스님의 말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궁성은 잠시 점거할지 모르지만, 사대부의 뿌리를 뽑기는 어려울 걸세........'

우리나라의 권력 상층부를 보면, 그 밥에 그 나물일 수 밖에 없다. 조선 후기 일제에 충성했던 것들이 승승장구 했고, 해방 후 주춤하다 한국전쟁 때 다시 권력을 잡았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불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경유착 및 각종 비리가 고위층에서 일어나고 있다. 고위층 중 국민들이 안중에 있는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도성을 도모하려면 조선의 군사 조직이 어땠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서 발췌하였다. 조선시대의 국방조직은 5위의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이 있었는데, 수어청과 총융청은 한양의 외곽방어를, 도성은 어영청과 금위영, 훈련도감이 맡았고, 지방은 전국을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함경, 평안으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두어 정무를 보게 하였고, 도 밑의 행정구역은 부, 대도호부, , 도호부, , 현이 설치 되었고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었다.

 

중앙군의 명칭과 임무다.

총융청은 병장기를 합한 다는 뜻으로 이괄의 난 이후 설치 되어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의 북부를 방어 하였고, 당초 수는 약 2만 명 정도였는데 감축하여 영조 때는 8,300, 정조 때는 4,300명으로 줄었고, 고종 때 폐진 되었다.

수어청은 지키고 막는 다는 뜻으로 당초에는 남한산성 축성을 주관하였으나 정묘호란 이후 남한산성 및 경기 남부지방 수비하였고, 병력은 3 2천명 이었다.

어영청은 경영을 거느린다는 뜻으로 인조반정 이후 후 금과의 관계가 위급해져 설치되어 국왕을 호위하는 군대였으나 이괄의 난 과 정묘호란 후 5,000명으로 늘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7,000명이었다가 효종때는 2만천 명으로 늘었다가 고종 때 폐지 되었다.

금위영은 숙종 때 설치되었고, 국왕호위와 수도 방어가 주 업무였고, 병조판서가 대장직을 겸직했고, 인원은 1,688명이었고 고종 때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고 폐지 되었다.

훈련도감은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 설치되었고, 당초 포수, 살수, 사수 천명으로 구성되었다가, 삼수미를 거두게 되면서 두배로 늘었고, 병자호란 직전에는 5천명이 넘다가 고종 때 폐지 되었다.

훈련도감의 군졸들은 정예병이었으나 나무지 군졸들은 징집된 상번병이었기 때문에 김시동은 도성을 염탐하기 위해 자원 입대하여, 오경립, 정만일, 정대성, 이시흥, 김성남 등을 일원으로 섭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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