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10 황석영 대하소설 10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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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 토벌 때 동생과 엄마를 잃고, 몸 을 버린 원향은 김승운과 계화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정신을 잃고 박수 박계준의 집에서 기거하다, 호구조사 나온 이정과 서리에게 무당 삼지창을 들이대고 임금을 욕보이는 말을 하다 끌려가 신천군수에게 문초를 당하다 풀려나 월정사 풍열에게 위탁 한다.

 

보경 문하였던 묘정이 운부의 명을 받고 여환을 찾아가 대성법주(갑송)에게 한양을 도모하기 위해 금강산의 일여, 묘향산의 도안, 월정사의 풍열과 옥여, 수태사의 명도, 노적사의 정원태, 전생, 황회 등과 천불산에서 회합을 가진 후 월정사로 들어오다 광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친동생과 같이 각별했던 원향이었다. 이에 여환이 가슴 아파하자, 풍열은 중질을 그만 두고 원향이의 서방이 되어 정신을 회복시키라고 한다. 여환은 열성을 다해 회복시켜 결국 부부의 연을 맺고, 원향은 길산의 양 어미 안무당에게 만신의 몸주를 넘겨 받고 스스로 성장을 거듭한다.

 

풍열을 중심으로 월정사에 장길산, 김기, 우대용, 박대근, 대성법주, 설유징, 도안스님, 여환스님과 이경순 등이 모여 한양을 도모하여 임금을 죽이려는 계획과 궐기한 이유 그리고 타당성을 설파하고, 살주계와 검계의 실패 요인이 단순하게 양반을 해코지하고,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행동이 없었기에 지지 받지 못함에 각성하고, 무당과 스님들로 하여금 미륵사상을 설파하여 백성들과 함께 궁성을 도모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번 모임으로 이경순은 묘옥의 정인이었던 장길산을 만나게 되고, 여환을 통해 묘옥의 현재 상황을 알리지만, 길산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대의만을 생각한다.

묘옥과 이경순은 파주 문산포에서 좋고 큰 객점을 소유하고, 여문이라는 아들까지 보았으나, 여옥은 이경순을 장길산 같이 애틋하게 사랑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이나 정 으로 살고 있었지만 각자 내색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백성의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임금은 당연히 교체 되어야 하지만, 한 사람 죽는다고 백성을 하찮게 여겼던 기조가 바뀔까? 더구나 조선은 신권 중심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염려가 도안스님의 말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궁성은 잠시 점거할지 모르지만, 사대부의 뿌리를 뽑기는 어려울 걸세........'

우리나라의 권력 상층부를 보면, 그 밥에 그 나물일 수 밖에 없다. 조선 후기 일제에 충성했던 것들이 승승장구 했고, 해방 후 주춤하다 한국전쟁 때 다시 권력을 잡았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불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경유착 및 각종 비리가 고위층에서 일어나고 있다. 고위층 중 국민들이 안중에 있는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도성을 도모하려면 조선의 군사 조직이 어땠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서 발췌하였다. 조선시대의 국방조직은 5위의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이 있었는데, 수어청과 총융청은 한양의 외곽방어를, 도성은 어영청과 금위영, 훈련도감이 맡았고, 지방은 전국을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함경, 평안으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두어 정무를 보게 하였고, 도 밑의 행정구역은 부, 대도호부, , 도호부, , 현이 설치 되었고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었다.

 

중앙군의 명칭과 임무다.

총융청은 병장기를 합한 다는 뜻으로 이괄의 난 이후 설치 되어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의 북부를 방어 하였고, 당초 수는 약 2만 명 정도였는데 감축하여 영조 때는 8,300, 정조 때는 4,300명으로 줄었고, 고종 때 폐진 되었다.

수어청은 지키고 막는 다는 뜻으로 당초에는 남한산성 축성을 주관하였으나 정묘호란 이후 남한산성 및 경기 남부지방 수비하였고, 병력은 3 2천명 이었다.

어영청은 경영을 거느린다는 뜻으로 인조반정 이후 후 금과의 관계가 위급해져 설치되어 국왕을 호위하는 군대였으나 이괄의 난 과 정묘호란 후 5,000명으로 늘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7,000명이었다가 효종때는 2만천 명으로 늘었다가 고종 때 폐지 되었다.

금위영은 숙종 때 설치되었고, 국왕호위와 수도 방어가 주 업무였고, 병조판서가 대장직을 겸직했고, 인원은 1,688명이었고 고종 때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고 폐지 되었다.

훈련도감은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 설치되었고, 당초 포수, 살수, 사수 천명으로 구성되었다가, 삼수미를 거두게 되면서 두배로 늘었고, 병자호란 직전에는 5천명이 넘다가 고종 때 폐지 되었다.

훈련도감의 군졸들은 정예병이었으나 나무지 군졸들은 징집된 상번병이었기 때문에 김시동은 도성을 염탐하기 위해 자원 입대하여, 오경립, 정만일, 정대성, 이시흥, 김성남 등을 일원으로 섭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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