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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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를 소재로 한 작품도 꽤 자주 출간되는 듯하다. 역사를 함부로 각색해선 안된다는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 계속 눈길이 가는 선악과 같은 소재가 분명하다. 이 책도 그렇고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도 그렇고, 작가들은 은폐 사건들을 수면 위에 드러내려는 사명으로 펜을 든다지만 솔직히 그 사명만으로 책을 썼다곤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민감한 역사를 다룰수록 더 그러한데, 어쩌면 세상 때가 많이 묻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현대인들은 역사 자료와 정보로 나치 정권의 폐해를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쓰려거든 알려진 내용은 간소화하고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모호하면 주제 파악은커녕 나치의 독재나 전쟁의 아픔 같은 부수적인 것에만 주목하게 된다. 아쉽지만 이 책도 엄중히 말해서 후자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제작진이 일 잘하기로 소문난 것은 주도면밀하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서가 아니라 문제를 다각도에서 살펴보고 이해하려는 접근 방식에 답이 있다. 팩트만 전달하는 뉴스는 시청자의 생각을 가둬두기 때문에 개인의 의견을 확장시키지 못한다. 반면에 <그알>제작진은 육하원칙 중 ‘왜why‘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시청자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사건에 개입할 기회를 준다. 그러면 사태를 인지한 시청자는 자연스레 문제에 참여하게 되고 각자의 생각이 모이다 보면 썩 괜찮은 해결안도 나오곤 한다. 문학도 이래야 한다. 독자가 직접 개입하도록 유도하는 저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독자는 저자가 떠먹여주는 것만 먹게 되고 그래서는 뉴스하고 다를 게 없다. 르포 형식이라면 모를까.


작가가 실제 했던 히틀러의 시식가 이야기를 각색했다. 히틀러의 음식 시식가로 강제 발탁된 열 명의 여자는 총통이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몸소 증명해야 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음식 앞에서 육체의 배고픔은 너무나도 솔직하다. 이렇게 나치는 식욕이라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서 그녀들을 사형수로 만든 것이다. 나치의 추종자들은 총통의 은총이라 하겠지만 로자 일행은 생존이 더 중요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는 욕망과 싸우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기억해두지 않으면 옆길로 샐 수 있으므로 주의할 것.


나치는 가족을 빼앗고 삶을 짓밟고 희망을 지웠다. 그 모든 일의 원흉인 총통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로자. 어떻게 하면 목숨도 지키고 적들을 이길 수 있을까. 투쟁의 대상은 나치 일원이나 배고픔이 아니라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시스템이다. 절대 바뀌지 않을 그 상황 가운데 갑작스러운 로자의 반격이 시작된다. 남편의 실종 소식에 이성이 끊어져 버린 그녀는 죽음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든다. 친위 대원도 무섭지 않았고 총통의 음식도 거리낌 없이 삼켰다. 아이러니한 게 살고 싶다는 소망보다 죽고 싶다는 바램이 욕망과 맞서는 반작용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포에서 해방된 로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치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중반부터는 식욕의 이야기에서 성욕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간다. 전선에 투입된 남자들의 부재로 여자들은 남자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로자 역시 친위대 장교와 몸을 섞으며 정죄를 고독과 맞바꾼다. 죽음에도 저항했던 사람이 성욕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다. 그녀는 그토록 자신이 증오하는 나치의 일원과 밀회하면서 오염된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식욕은 죽음과 맞닿아있다지만 성욕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쾌락과 후회를 반복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그녀는 끝내 지옥을 택한다. 될 대로 돼라,가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한 것인데 앞전의 모습과 너무 상반되어서 이질감이 든다. 작가가 정녕 실존 인물을 생각하며 이런 설정을 했단 말인가. 이 책은 당사자의 일화를 빌려서 인간의 존엄성을 재조명하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작가는 목적과 주제를 방해할 만큼 선을 넘고 있다. 아무리 각색이라지만 돌아가신 분에게 큰 실례이다.


초중반의 식욕 파트에서 보여준 페이소스는 정말 대단했다. 아쉽게도 성욕 파트부터는 그 맛을 볼 수가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도 이와 똑같았다. 메인 소재에서 서브 소재로 넘어가면서 방향이 틀어지고 탄력도 약해지고 재미도 급감한다. 이런 건 용두사미도 아니고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깝다. 그럭저럭 끝이 났지만 김빠지도록 못 살린 스토리였다. 이러니 주제를 파악 못하는 독자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튼 이 작품은 다시 한 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한다. 우리는 여태껏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 ‘무언가‘에만 주목해왔다. 허나 삶은 그 무언가가 충족되어야만 제 역할을 하고 존엄성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몰아내려는 필사적인 본능이,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는 한 그것만으로도 삶의 가치는 주어진다. 즉 가치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이 책도 결국 사랑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인류를 일으키고 구원하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는 흔한 결말. 이런 서사물들은 어쩜 그렇게 똑같은 수순을 밟는걸까. 이젠 그만 바뀔 때도 된 거 같은데 말이다. 작가들이 유연한 사고를 갖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여튼 이래저래 쓴소리를 했지만 스토리텔링도 나쁘지 않았고 페이소스도 훌륭했다. 저자의 차기작이 나오길 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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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김훈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4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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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독서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내 작품을 많이 읽는 거고 하나는 유명한 작품에 도전하는 것이다. 나의 청개구리 기질로 인해 남들이 다 읽는 책은 일부러 안 읽었는데, 그래도 회자되었던 작품들은 읽고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읽은 책도 남녀노소 다 읽었던 김훈 작가의 대표작이다. 그의 명성은 질리도록 들었다. 일본에 하루키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훈이 있다면서. 그러면 더더욱 내 스타일은 아닐 터. 나는 필력보다 스토리텔링을 더 중시하거든. 의무적으로 읽긴 했지만 충무공의 칼이 부르는 노래를 이제라도 들어서 다행이었다. 이 책은 젊은 친구들이 넘기엔 버거운 허들이다. 산전수전을 겪지 않은 독자가 그의 생애를 과연 흡수할 수나 있을까. 이 작품의 리뷰를 이순신과의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옮겨본다.


* 해군으로써 먼 조상 수병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 수군의 몸은 내 몸이며 내 몸은 수군의 몸이니 나 역시 자네에게 영광이다.


* 이 책은 ‘칼의 노래‘라는 충무공 일대기 입니다. 충무공이 직접 기록한 것처럼 쓰였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신을 기리며 적은 것이니 이견은 없다. 다만 신을 얌전한 고양이처럼 적었던데 본디 나의 성정은 점잖지 않다. 말투도 저서와 전혀 다르다.


* 똑같은 말투십니다. 충무공을 성웅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먼저 신은 충무가 아니다. 책을 살피면 알 것이다. 후세대가 떠받들 만큼 내 공로는 크지 않다. 신을 신격화하지 말라.


* 책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셨는데 정녕 임금을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 장수를 따르지 않는 부하가 없듯 임금을 거스르는 무인이 없다. 사정이 무엇이든 명령 불복종은 임금을 기만한 죄이니 형벌은 마땅하다. 이 몸의 고통으로 병사들의 목숨을 보전했으니 그거면 되었다.


* 출옥 후의 상황을 들려주십시오.
- 히데요시가 온다는 풍문으로 임금의 죽음을 면사 받은 몸이었다. 무인에게는 치욕이었으나 사지를 고를 수 있었으니 부름에 답하였다. 임금의 관심은 오로지 죽인 적의 머릿수였다. 수군에게 육군과 합류하라는 알 수 없는 명을 내렸고, 혼란 중에도 권위를 더 찾았다. 조선의 존망은 전쟁보다 군 내의 부조리에 있었고, 신의 적은 바다 건너에만 있지 않았다. 나는 적에게도 적이요, 나라를 갉아먹는 자들에게도 적이었다.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나의 칼은 울부짖었다. 아무리 적을 베어도 칼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 작품의 제목이 심정을 잘 대변하는 듯합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 적들과 내통하는 백성, 부하를 팽개친 탈영 장수, 부녀자를 겁탈하는 군인. 전쟁은 질서를 파괴했고 조선의 성곽은 안팎으로 무너져내렸다. 해상에서 적을 베면 육상에서 피난민들이 죽었다. 적에게 죽느니 나의 칼로 죽여달라며 애곡하는 백성도 보았다. 적은 백성을 포로 삼아 조선의 정보를 훔쳤고, 포로들을 적선의 격군으로 세워 야습해왔다. 포로 된 백성은 제 손으로 본국을 쳐야 했고, 나는 적선에 있는 백성까지 멸해야 했다. 죽음은 끝이 없었다. 적을 베는 나의 칼이 죽음까지 벨 수 없음에 통탄했다. 


* 충무공의 진짜 고뇌는 무엇이었습니까.
- 출옥 후 신은 더 이상 충신이 아니었다. 임금은 여전한 욕망으로 신을 주시했다. 그러나 명을 따르면 적에게 죽고 명을 어기면 임금에게 죽을 것이었다. 무사가 되어 임금의 칼에 죽을 수 없었다. 전쟁과 조정의 부조리함에 칼은 여전히 울었고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민족을 구하려면 내가 죽어선 안되었다. 승리보다 백성의 안위를 위해 칼을 들었다. 군인에게 불필요한 연민이 버팀목이었다. 칼에 새긴 글자처럼 바다 위를 적의 시체와 피로 염했지만 다음날이면 바다는 흔적을 지워 태초로 돌아갔다. 적도 죽고 부하도 죽고 민족도 죽었다. 거듭된 승리가 허망함을 밀어내지 못했다. 위관들처럼 신도 헛것을 쫓았는지 모른다.


* 마지막 전투에 대해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 죽음을 예견했더라면 진즉 진린을 베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선의 침투도 없었을 것이고 무수한 죽음도 막았을 터. 바다에서 자연사를 맞았으니 사지로는 썩 나쁘지 않았다. 다만 신의 죽음으로 장졸들이 동요되어선 안되었다. 나의 말이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백성에게 된장을 나눠주고 온 게 다행이었다.


* 끝으로 이제라도 유언을 남기신다면.
- 이미 신의 일기로 적었으니 유언은 됐다. 다시 말하지만 신을 성웅이라 일컫지 말라. 왜군과 싸우다 죽은 수군의 하나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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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1-02-11 0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의 올해 독서 목표의 첫번째 과녁이었군요. 명성은 익히 들어보았으나 아직 안 읽어본 책입니다. 쓰신 리뷰를 보니 제 취향은 아닐 듯하네요.^^; 한 사람의 일대기 형식으로 캐릭터에 집중한 책일 듯은 하지만 총 만큼은 아니라도 피 질질 전쟁은 냄새부터 영~~ㅎㅎ 그나마 감질나는 독서 중에서 필이 꽂히지 않으면 유명한 작품이래도 손이 잘 안가더라구요.

평전 형식의 책은 저자의 관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 위험한 매력인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깊이가 있는 독자라면 자신의 생각과 저자의 것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느낄 텐데요,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오류가 있는 각인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으니까요. 물감님께서도 그런 점에서 젊은 친구들에게 버거울 수 있다고 우려하신 거겠죠? 네가 그냥 커피라면 산전수전러는 티오피?ㅋㅋㅋ

예나 지금이나 내부의 적이 더 무섭네요. 리뷰에 쓰신 내용만으로도 이순신의 강한 성정, 신념, 당시 상황이 그려집니다. 명령 불복종 어쩌구와 된장 얘기를 보니 테스형이 떠오르네요.ㅎㅎ 그런데 말입니다ㅋ ‘전사‘도 ‘자연사‘라 말할 수 있는 건지요?^^;;

물감 2021-02-11 08:41   좋아요 3 | URL
저도 제 스타일은 아닌 책이었는데요, 초중반까지는 이순신의 고백록처럼 진행되다가 갈수록 특파원의 생중계처럼 공기가 변합니다. 처음처럼 분위기를 유지했다면 별5개가 아깝지 않았을건데요ㅎㅎ

한국사에 문외한인 저에게도 눈에 거슬리는 설정이 보이더라고요. 작품을 위해서 그런것이려니 하다가도, 말씀하신대로 각인될 수 있겠더군요. 그리고 평탄하게 살아온 독자가 이순신의 고뇌를 알면 얼마나 알까 싶어요. 저도 마찬가지죠^^

자연사는 작중 이순신이 직접 한 말입니다. 책을 읽어야만 공감하는 대목이죠. 된장도 그렇고요ㅎㅎ 그나저나 김훈 작가도 필력이 대단하네요. 순수하게 글맛이 당겨서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져요. ^^
 
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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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개인 정보 피해를 입고 민원을 거는 고객 전화를 받곤 한다. 가장 많은 민원은 명의 도용으로 회원가입이 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아이디가 해킹되어 금전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런 고객들은 하나같이 본인은 잘못없다고 하는데 분명히 어딘가에서 개인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피해자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알다시피 나 혼자 운전을 잘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 여러 온라인의 피해사례 중 가장 큰 이슈라면 자살 사건이 아닐까. 몇 년 전, SNS 계정에 본인의 노출 사진을 올리던 아이돌 가수가 악플들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플러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거 보통 심각한 게 아님을 느꼈었다. 이 같은 온라인 문제들과 위험성에 대해 스릴러소설로 경고하는 제프리 디버의 작품을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디버 작품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스타일리시했다. 증말 팬심을 제외하고 리뷰를 쓰기가 불가한 그레이트 작가다.


도로변에 십자가가 생길 때마다 발생하는 살인 미수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게임 중독인 남학생의 행방불명. CBI 요원 캐트린 댄스는 한 파워블로그를 통해 소년이 용의자가 된 경위를 파악한다. 자신을 마녀사냥한 블로그 회원들을 노리는 소년의 계획을 알고 다급해진 댄스 요원. 한편 1편에서 환자의 안락사를 도운 게 간호사인 댄스의 모친으로 밝혀져 대중의 비난을 받는 댄스와 가족들. 소년을 찾기도 바쁜데 가족도 보호해야 하고 오해도 풀어야 하는 초난감한 상황. 여태껏 국가와 시민에 헌신해온 그녀는 이대로 모두의 숙적이 되고 마는가.


이번 편의 주 무대는 가상세계, 즉 인터넷이다. 카페, 블로그, SNS, 이메일, 메신저 등등. 모든 온라인 활동 기록이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위협하는 화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삶의 질이 엄청나게 향상되었지만, 반대로 입을 수 있는 피해의 크기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 책은 온라인의 여러 가지 위험성 중에서 마녀사냥 문제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악플러들이 그럴싸한 거짓 정보를 올려놓으면 음지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다. 그러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것이고, 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중요한 걸까.


보이지 않는 온라인 상대 앞에서 댄스의 동작학은 무용지물이었다. 거기에 모친의 일까지 겹쳐서 하는 일마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소년의 범죄를 멈추기 위해 댄스는 블로그의 중단을 요청했으나 블로거는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며 협조를 거절했다. 악플러들이 피해자를 양산하는데도 자유를 들먹인다면 소년의 이유 있는 살인도 타당한 범죄가 된다. 책임지지도 못할 행동에 무슨 자유가 있고 권리를 외친단 말인가. 블로그가 주는 권력에 취한 블로거는 위급 상황 중에도 자신의 목숨보다 블로그에 올릴 안내문 생각부터 한다. 정신 나간 사람 같겠지만 현실은 이것보다 더하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야 당연한 건데, 이 블로거처럼 뭐가 우선인지 분간도 못한다면 그야말로 인터넷의 폐해일 것이다.


작가는 가상세계의 범죄를 현실로 연결하여 개인의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행동이 대중의 폭력을 낳고,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을 지적했다. 그것이 현대에는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보니 다들 무감각해져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이 작품을 쓴 게 아닐까. 근데 사실 이런 건 디버의 스타일이 아니다. 지금껏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룬 적은 많았어도 그것을 사회적 이슈로 주제 삼지는 않던 디버였는데 이번에는 정치/사회의 색이 짙은 편이다. 기존의 디버 스타일을 원했던 팬들에게는 다소 어색하고 낯설고 시큰둥할 수도 있겠는데 내게는 작가의 새로운 매력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믿어야 할 사람을 의심하고 엉뚱한 사람을 믿어버린 결과 댄스의 모녀관계는 금이 가고 피해자는 속출했다. 그렇게 반복된 실수와 후회 속에서 자신을 넘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깨닫고 중심 잡는 법을 터득한 댄스. 전편에 비해서 활약이 대폭 줄었지만 수사관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급성장을 보여준 작품이다. 스릴러소설에서 사건과 상황이 바퀴 역할이라면, 인물의 갈등과 심경 변화는 엔진 역할을 하는데 제프리 디버는 이 균형을 기가 막히게 잘 잡는다. 난장판인 사건과 난도질된 심정 가운데 피어나는 감정의 교차...


인간의 악을 연구하는 정유정 작가는 인간의 심연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빛이 들지 않는 숲이 있는데, 그곳의 야수들이 어떤 계기로 봉인해제가 될 때 인간의 폭력성이 깨어난다고. 그 계기는 타인에 대한 시기나 질투일 수도 있고, 자기방어에서 나올 수도 있다. 아직도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범죄자가 되는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1차원적인 논리대로라면 프로게이머는 죄다 잠재적 범죄자란 말인가. 정유정 작가의 말대로 폭력적이게 된 계기를 살펴야 한다. 소년은 온/오프라인에서 마녀사냥을 하지 않았나. 그렇게 소년을 향한 대중의 화살은 고스란히 대중에게 돌아와 모두를 떨게 했다. 소년의 두려움이 대중의 몫으로 된 것은 결국 인과응보였음을 잊지 말자. 인간을 죽이는 괴물과 그것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중 누가 더 잘못했을까. 잘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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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1-02-03 0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다 보면 묘해질 때가 있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경계로 두 개의 세상에 접속해있는 기분이랄까요. 인터넷은 손끝으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세상인 거죠.
글을 올릴 때마다 종종 생각해요. 인터넷으로 만들어내는 세상이 실제와 얼마나 가까울까. 이게 진짜 나인가. 내가 바라는 모습의 나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걸까. 진실인 듯하지만 진실이 아니기도 한 공간. 그 이중성과 몇 번의 클릭만으로 삭제가 가능하는 점에서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기분이 들어요.

마녀사냥 역시 불안정한 정보로 둘러싸인 외곽에서 출발해서 몇 번의 재가공을 거치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아요. 최초로 재가공한 이의 잘못일까, 도미노로 조금씩 툭툭 던지는 의견들로 힘을 보탠 사람들의 잘못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불안정한 성곽 자체를 지은 이의 잘못일까요. 쓰러지기 직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닐테니까 사실 콕 집어내기가 애매하거든요.

정유정 작가는 성악설의 입장이군요. 숲속 야수의 봉인해제로 비유한 내용에 공감이 갑니다. 소설에서 말씀하신 소년의 본성보다 계기에 무게를 두어야한다는 입장이군요. 대중의 화살이나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행위도 마찬가지 맥락이구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거예요. 누구도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요.^^

물감 2021-02-03 21:52   좋아요 1 | URL
방금전까지 댓글 길게 썼는데 튕겨서 날라갔어요ㅜㅜ 어우 스트레스...

독서활동은 남한테 잘보이려는 의도땜시 온전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고픈말 다 하는 저역시도 그렇고요ㅋㅋ

나비종님도 악에 관심이 참 많으셔요^^ 계기에 대한 관점이 신선해서 적어봤어요. 남을 판단하지 말것,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남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는 말도요ㅋㅋ
 
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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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입문하는 경우 무협/판타지소설 아니면 미스터리/추리소설이 가장 많을 텐데, 후자 쪽이면 다들 일본 문학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누가 일본 소설부터 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리된다. 그렇게 일본 소설만 주구장창 읽다 보면 갑자기 확 물리는 때가 오는데 이유인즉슨 재미를 떠나 글이 너무 가볍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내 소설을 읽자니 끌리는 게 없고, 서양 소설은 좀 부담스러웠던 그런 때가 있었다. 일본의 다른 장르를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처럼 고요하고 잔잔했다. 그 때문에 괜찮은 작품도 점수 주기는 애매할 때가 많았다. 그나마 만족스러운 건 일본 작가들의 사회소설이다. 아무래도 민감한 사안을 다루다 보니 글이 가벼울 수가 없고, 주제의식과 메시지 전달을 위해 독자와의 소통도 자주 시도한다. 그래서 다른 건 안 봐도 사회소설은 즐겨본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별 다섯 개 플러스알파다. 


유키노는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그의 집을 찾아가 방화 사건을 일으킨다. 이 일로 남자의 아내와 두 딸이 죽었고, 유키노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변명도 저항도 없이 죄를 인정하는 그녀를 보며 복잡한 감정이 드는 교도관. 어째서 사형은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 걸까. 그리고 유키노는 어째서 사형 받고 싶어 하는 것일까.


화두가 뚜렷한 기존의 사회소설과는 다른 종류의 작품이었다. 하나하나 진실이 밝혀질수록 사형수를 옹호해야 할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저지른 범죄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당사자가 사형 받기를 원한다. 정녕 그녀는 이대로 죽어야만 할까. 재판장은 그녀의 인생사가 적힌 사형 판결문으로 사형수가 죽어마땅함을 공포한다. 하나같이 전부 왜곡된 사실뿐이었으나, 재판장이 그렇다 하면 거짓도 진실이 되었다. 이제 판결문의 내용이 작품의 목차가 되어 각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무죄의 죄를 짊어지게 되었는지도.


그녀의 죄목은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은 호스티스가 무책임하게 그녀를 낳은 것부터가 죄의 신호탄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죄송하다던 그녀였지만, 호스티스의 딸로 태어난 건 결코 그녀의 죄가 아니었다. 유키노를 낙태하려던 엄마를 갑자기 거절한 산부인과 의사의 변심이 없었더라면 어땠을지. 재판장은 양부의 학대도 언급했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어 미쳐버린 새아빠는 술 먹고 유키노를 손찌검한다. 그 단 한 번의 만행이 유키노가 줄곧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자라온 배경으로 둔갑해있었다. 또한 중학시절, 일진들과 어울리며 강도 사건을 벌인 것도 사형의 이유였다. 사실은 절친을 위해 일진들과 맞서다 강제로 엮였던 것이고, 절친의 강도죄를 대신 뒤집어썼던 거였다. 사건의 내막들이 온통 왜곡되고 부풀려져서 억울할 법도 한데도 해명하지 않는 유키노. 이렇게 진실을 알게 될수록 독자는 동정심보다 그 일관된 태도에 더 관심이 생긴다. 미끼가 제법 맛있네요, 작가님.


성인이 된 유키노는 한 남자와 동거를 시작한다. 늘 버림받고 살아온 그녀는, 그가 온갖 쓰레기 짓을 해도 자신을 받아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나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고, 유키노가 방화로 복수했다는 것이 메인 사건의 전말이다. 이로써 남자는 여자한테 잘못 걸린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유일하게 남자의 만행을 알고 있던 친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쨌거나 유키노는 무고한 사람을 해쳤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왜곡된 내막이 있다는 의심이 들지만 독자는 작가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건 목격자들도 있고, 본인도 제 잘못이라고 하니까. 이렇게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작가의 내공에 다 같이 물개박수를.


작가의 밀당은 계속된다. 유키노가 매스컴을 타고부터 소꿉친구 두 남자가 등장한다. A는 변호사가 되어 가진 능력으로 수감 중인 유키노를 꺼내고자 한다. 그러나 친구의 제안과 설득을 깡무시하는 그녀. 반면 유키노처럼 풍파 속에 루저로 살아온 B는 그녀의 일기장에서 힌트를 얻는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싶었던 유키노의 마음을 모르는 A의 설득이 실패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B는 유키노가 단순한 인과관계로 사형을 원한 게 아니라,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게 이유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 B도 그 입장이었다가 겨우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으므로. 그제서야 법정에서 그녀가 B에게 보인 미소의 의미를 알겠더군. 자신이 누명을 쓸 수 있게 해줘서, 타인에게 필요한 사람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다는 인사가 아니었을까.


등장인물이 온통 강자와 약자의 수직관계로 되어 있다. 약자는 매번 강자에게 짓눌리고 휘둘렸으며, 그 약자도 강자가 되면 똑같아지곤 했다. 그런 식으로 유키노를 아꼈던 사람들이 전부 그녀의 위기를 보고도 방관했었고, 이제 와서 자책하며 후회 중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녀의 삶을 망쳐버렸단 사실이 가장 아이러니하다. 정작 그녀를 괴롭혔던 인물들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여튼 결말은 이변 없는 새드 엔딩이다. 유키노의 죽음이 방관자들 때문만은 아니니까. 오히려 해피엔딩이었으면 몰입이 다 깨지고 여운도 안 남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가 웃어준 단 한 사람, B를 통해서 A의 할아버지인 산부인과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 사람에게라도 큰 사랑을 받는다면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이 말이 작품을 관통하는 문장이었다. 더럽게 꼬여버린 인생에도 후회한 점 없었던 건, 늦게라도 참된 사랑을 받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그래도 괜찮은 삶이었다고 여긴 게 아닐까 한다. 진짜 이 책은 독자 스스로 문제 만들고 답을 찾게 하는 뭔가가 있음. 이러다 체하겄습니다요.


지금도 나는 유키노가 죽어야 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유를 발견하신 분은 댓글을 부탁드린다. 요즘 화제인 정인이 양부모나 조두순을 사형하라는 네티즌의 청원이 뜨겁다. 그게 이뤄지든 아니든 반대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통해 사형 또한 살인이요, 부추기거나 방관하는 입장도 같은 행위란 걸 알게 되었다. 사회소설이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들을 알게 해줘서 좋기는 한데, 워낙 후유증이 커서 연달아 읽을만한 장르는 못된다. 그래서 다음은 개운하게 스릴러나 한편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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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1-02-03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으로 읽었던 소설이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50권 한 질로 된 동화책을 사주셨는데 몇 번씩이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무협이나 판타지는 읽어본 적이 없고 추리소설은 루팡이나 셜록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일본 문학은 제게는 여전히 생소한 장르입니다. 글의 적절한 무게라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무거워도 거부감이 들고 너무 가벼워도 허탈감이 들어버리니 말이죠.
사회소설은 부담감에 쉽게 손이 가지 않지만 <댓글부대>에 몰입해서 빠져들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사형 제도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지금은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건 막상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게 된다 해도 이런 입장을 견지할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떨어진 시각에서 판단한다면,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죽이는 데 100%의 정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곡된 사실로 이루어진 진실이라는 문구를 보니 <인간짐승>의 재판 장면이 떠오르네요. 결론을 정해놓고 짜맞추어가는 거짓의 퍼즐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잖아요. 오히려 진실이란 게 너무도 허술해보이구요. 인간이란 존재는 원래 모순투성이라 그런 걸까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싶었다는 말이 마음아프네요. 스스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없었던 주인공의 마음은 얼마나 황량했을까요.
한 사람에게라도 사랑을 받았다면 적어도 그녀가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생명존중교육을 받으면 많은 강사들이 경험담으로 하는 말이거든요. 생명의 전화를 받으면서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을 막았던 경험담을 얘기해주면서 한 사람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거든요. 세상에 사람들이 얼마나 넘쳐나는데 나와 진심으로 대화를 나눌 단 한 사람을 찾지 못한다는 게 이리도 어려운 걸까요.

저는 여주인공이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죽고 싶었던 이유만 있었던 거라고. 죽음에 이유를 붙일 수 있는 이는 당사자 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생각이 많아지는 밤입니다.

물감 2021-02-03 22:38   좋아요 1 | URL
어릴때 읽은 동화책은 제외입니다. 저도 많이 읽어서 ㅎㅎㅎ 일본소설의 가벼움은 글만이 아니라 작품의 분위기도 포함입니다. 잔잔한 바다로 표현한 것은 텐션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책이 많았어요. 순문학 같은 경우라면 모를까, 그런 성격이 아닌 장르들도 좀 그래요. 같이 읽었던 ‘모래 그릇‘의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떠셨나요? 저는 저음 구간에서만 노래부르는 가수를 보는 기분이었어요~ 반대로 일본에서는 한국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지네요^^

내가 피해자라고 가정해보면 사형제도를 절사반대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나를 죽도록 괴롭게 한 가해자가 와서 용서를 구한다면 난 용서 못할거 같거든요. 근데 사형을 생각하면 죄수보다도 집행자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사형제도를 반대하게 되었어요.

여주인공은 전장에 나가는 마음으로 죽음을 원했던 게 아닐까요.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니 독자가 생각해볼 수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여튼 너무 무거운 작품이었지만 지극히 제 취향이었습니다^^

나비종 2021-02-03 23:26   좋아요 1 | URL
동화책, 가볍게 까인 건가요?ㅋㅋ 생각해보니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 일본소설을 몇 권 읽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제목도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가볍긴 가벼웠나 봅니다.ㅎㅎ
헉! 여기서 <모래그릇>이! 꾸역꾸역 읽느라 체할 것 같았는데 스르르 빠져나간 모래 글처럼 막상 모래알갱이 몇 개의 꿉꿉한 존재감만 남았던 그 소설이요?ㅋㅋ
그러게요. 일본에서 바라본 한국 문학의 빛깔이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그러네요. 제가 피해 당사자라면 더더욱 그렇겠습니다.
집행자의 입장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물감님의 이유에 공감이 가네요.

여주인공이 죽음을 원했던 이유는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의견을 말하기가 어렵네요.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하시니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상황인가 봅니다. 무거운 작품일 것 같아서 나중에라도 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읽어보지도 않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말한다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워 물감님의 공간에서 주로 함께 읽은 책에 관해서만 댓글을 적으려고 했는데요, 어쩌다 이 리뷰를 몰입해서 끝까지 읽어버리는 바람에^^;
무슨 글이든 일단 읽었으면 저의 생각을 적기로 했거든요. 정성껏 리뷰를 써서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신 분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현으로 한 줄이라도 소감을 남겨야 한다는 게 소신이라 ㅋㅋ

대대댓글은 네버엔딩스토리로 이어질까 자제하는 편인데요, 적어주신 대댓글의 첫 단락에서 물음표를 보는 바람에 그게 또 직업병이라 질문이 들어오면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해줘야 마음이 편안해져서요, 쩝. ‘답변: 그지 같았습니다.‘ 이 한 마디가 저토록 길어졌네요^^;;

*가래떡 댓글의 튕김으로 인한 빡침을 방지하는 법
: 일단 댓글저장을 하기 전에 블록설정을 하여 복사를 해놓습니다. 나물 모임의 댓글에서는 항상 이런 방법을 쓰지요.ㅎㅎㅎ
 
슈나벨 최후의 자손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최욱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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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읽은 책의 장단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건강한 독서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무엇이 왜 별로였는지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대다수 독자들의 아웃풋에는 장점만 있고 단점은 빠져있다. 물론 장점만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어떤 디테일도 없이 그저 좋아요, 별 5개밖에 모르는 앵무새들은, 자신을 속이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나 되돌아보자. 나한테 별로라고 해서 남들도 그럴 거라는 법은 없으나, 습관처럼 쓴 호평은 글에서 다 티가 난단다. 가령 인터넷으로 옷을 샀다고 하자. 분명히 좋다는 구매평 뿐이었는데 막상 보니까 싸구려 재질에다 색상도 화면과 다르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건 판매자보다도 구매자들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걸? 단점을 왜 아무도 말 안 하나 싶을 거고.. 나는 이런 배신감을 타인의 서평 속에서 자주 느낀다. 특히 이렇게 평범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을, 문학상 받았다는 이유로 마구마구 빨아대는 앵무새들에게 느끼는 배신감이란...


먼저 이 책은 3단 액자식 구성이다. 첨단 기술이 날로 발전해가는 어느 미래 시점, 한 소설가가 기자에게 비밀을 들려준다. 그는 오래전 외조부에게 물려받은 회중시계를 고치러 찾아간 시계 장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국내외에 좀비가 창궐했던 몇십 년 전, 노인은 생계문제로 시계공을 때려치우고 군에 자원입대하여 좀비들을 제거한다. 그러나 역병은 수도까지 집어삼켰고 더는 가망이 없다고 느낄 때쯤, 도심 한복판에 세워지는 피라미드 건물. 그곳에서 좀비의 진실을 듣게 된 노인은 토악질 장인이 된다. 우에ㅔㅔㅔㅔ엑.


이 책이 요즘에 나왔대도 수상작이 될 수 있었을까? 좀비 사태를 국가의 음모론으로 확장시킨 작가의 상상력은 좋았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 성공했던 건, 조선과 좀비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재의 만남을 소화해냈기 때문이다. 그니까 뻔한 장르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만한 각색이 필요한데 이 책은 어떠한가. 전형적인 좀비물의 절차를 따라밟는다. 좀비 창궐, 계엄령, 시민 폭동, 군대 진압. 여기까지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전개라 치자. 이후에도 위험지역에 가서 백신 들고 컴백한다는 흔한 내용이다. 이것저것 시도는 많이 했는데 내공이 부족하다 보니 표현이나 연출 면에서 완성도가 크게 떨어진다. 단편으로 시작했다가 살을 붙여서 장편으로 만든 거라 미흡할 수밖에 없었겠다.


장르소설의 차별화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독특한 소재나 배경을 활용하는 것. 둘째는 사건 중심을 인물 중심으로 옮기는 것. 전자는 드라마 ‘킹덤‘을, 후자는 정유정 소설 ‘28‘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작품은 후자를 시도했는데 애석하게도 효과는 미미했다. 먼저 노인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평범했다. 떳떳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전제로 한 내용이므로 근사한 액션이나 강철 마인드 따위는 빠지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짊어진 책임감에 비해 멘탈과 비위가 약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지 못한다. 시계공 시절엔 표현 한번 못하고 짝사랑녀를 친구에게 뺏겼고, 군 생활 동안 친구가 만든 시계를 붙들고 자책하며 살아왔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한다. 피라미드의 등장으로 주변 공기가 싹 바뀌었으나 우리의 유리멘탈 주인공은 여전히 우웨ㅔㅔㅔ엑... 진짜 적당히 좀 해라.


피라미드는 백신 연구소였고, 이곳의 주인은 노인의 옛 친구였다. 그는 좀비들의 지능과 번식을 알아내어 그들 위에 군림할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피라미드를 공격하는 좀비들에게 먹혀버린다. 노인은 완성된 백신과, 좀비화된 친구의 아내를 데리고 군에 복귀를 마치며 시점은 현재로 넘어온다. 도시를 점령한 대기업에 시위하는 자들과 그들을 내려다보는 회장이 나오는데, 흡사 좀비들과 노인의 친구를 보는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나마 결말부의 연출이 죽어가던 작품을 살렸다. 좀비물이 언제부턴가 현실을 반영하고 점검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되었는데, 주제의식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내용 또한 중복일 때가 많다. 이건 장르 소설가들의 평생 숙제일 듯. 아직도 차기작이 없는 듯한데, 열심히 내공 쌓아서 멋진 작품으로 돌아와 주시길 바라바라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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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1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 2021-01-21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퍼갑니다!!

물감 2021-01-21 08:45   좋아요 1 | URL
네? 음... 무엇을요..?

미미 2021-01-21 08:50   좋아요 3 | URL
이 글이요ㅋㅋㅋㅋ
첫번째 문단이 좋아서요! 그냥 더 읽어보겠단 의미예요^^

물감 2021-01-21 09:05   좋아요 2 | URL
아 네네ㅎㅎ고맙습니다.
건강한 독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