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ldi The Four Seasons
Vivaldi 작곡, 이무지치 (I Musici) 연주 / 유니버설(Universal)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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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지치는 1951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한 12명으로 조직된 합주단이다. 1952년 베네치아 음악제에서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 지휘자는 두고 있지 않지만, 이 무지치의 앙상블은 세계 정상급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나다. 주로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주로 연주하고 있지만 낭만파에서 현대에 이르는 작품들도 연주할 만큼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가진 것도 이들의 장점이라 하겠다.
이 음반은 바이올리니스트 펠릭스 아요와 이무지치가 함께한 녹음인데 밝고 윤택있는 음색이 이탈리아 합주단 특유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반영하고 있다. 게다가 다이나믹한 끝맺음과 각 계절의 대칭적인 미는 비길 데가 없으며, 또한 현대적인 감각으로 경쾌하게 진행하면서도 유연한 맛을 잃지 않는 연주는 특히 매혹적이다.
제1번 '봄'은 봄의 정경을 묘사하는 소네트(14행으로 이루어진 정형시의 일종)를 바탕으로 한 곡으로 새들이 노래부르고 산들바람이 살랑이며, 시냇물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봄날의 화창한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제3악장에는 목동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한 경쾌한 선율이 흐른다.
제2번 '여름'은 타는 듯한 태양에 사람이나 짐승할 것 없이 모두 활기를 잃고 나른해져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간혹 산들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부드럽게 부는 듯 하지만 갑자기 쌀쌀한 바람이 불어닥치고 소나기가 내리며 천둥이 치는 빠르고 강렬한 가락이 들려온다.
제3번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 가을을 묘사했다. 마을 사람들은 수확을 맞아 흥겨운 춤과 노래로 가을의 풍요로움을 즐기고 있다. 게다가 잔잔한 산들바람은 더욱 기분을 좋게 한다. 숲속에는 사냥개를 앞세운 사냥꾼들이 뿔피리와 총을 들고 짐승들을 쫓고 있다. 놀라 도망가는 짐승을 쫓아 사냥꾼과 개가 쫓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한 것 같다. 사냥터의 흥겨운 분위기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제4번 '겨울'의 1악장은 차가운 눈속에서 추위에 떨며, 몰아치는 무서운 바람과 추위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2악장은 마치 훈훈한 온기가 방안 가득 퍼질것 같은 불이 지펴지고 있는 난롯가 앞에 있는 광경으로 바뀐다. 그동안 창가에서는 차기운 비가 내리고 있다. 솔로 바이올린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선율과 떨어지는 빗방울을 묘사한 바이올린의 피치카토가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곧이어 3악장에서 이제 봄이 가까워왔음을 알리듯 밝고 화사한 가락이 흘러 마음을 다시 싱숭생숭하게 한다.
비발디의 [사계]는 마치 귀를 통해 사계절의 분위기를 모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각 계절의 풍경과 자연의 소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곡을 이 무지치는 뛰어난 앙상블과 자연스럽고 유연한 연주로 [사계]의 각 계절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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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교양 과목인 '서양 문화사'의 과제로 쓴 글입니다. 주제가 자유라서 전쟁사에 관한 것을 한번 써봤습니다.

제목은 '17세기 유럽의 군사 혁명과 근대 유럽의 형성'입니다. 며칠 만에 후다닥 해

치운 것이라서 인용문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제 시각이 드러나도록

재구성했고, 읽다 보시면 제 주장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짜깁기만 하진 않았어요!) 





17세기 유럽의 군사 혁명과 근대 유럽의 형성


목차

서 론
본 론
1. 군사 혁명 이전의 유럽의 군대
① 30년 전쟁과 용병
② 군사 혁명의 가능성 - 구스타프 아돌프와 스웨덴 군
2. 프랑스의 군사혁명
① 관료제의 확립과 군대 개혁
② 루이 14세 치세기의 프랑스 군의 발전
3. 군사혁명의 성과와 유럽에 끼친 영향
결 론




서 론
1611년,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은 "현세(現世)의 해부"를 발표하여 전통적인 질서가 붕괴되어가는 당대의 세태를 읊었다.

새 학문은 모든 것을 회의의 심연으로 던지고
화기(火氣)의 요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태양이 상실되고 지구가 상실되어 인간의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알지 못하는구나.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세계에는 싫증을 느꼈다고
염치없이 말하며
행성에로, 허공에로
실로 많은 것을 찾으러 간다.

이 시의 내용을 보면 한편으로는 낡은 질서의 파괴로 인한 당황스러움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무한한 창조력을 갖춘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동시에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과학과 철학의 새로운 사상에 의해 전통적인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신조가 사라졌고, 종교개혁으로 인한 소용돌이는 여전히 유럽 내의 종교 갈등을 야기시켰다. 사태를 한층 혼란케 한 것은 새 제도, 새 신조, 새 이론이 생겨나 그것이 낡은 것과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봉건제 자체는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봉건귀족은 집요하게 전통적인 특권을 고집하고 있었다. 시민 계층이 점점 세력이 커져 도처에서 옛 귀족의 특권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또 지구 중심의 낡은 우주관 -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천동설 - 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대로 천체가 운행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종교, 국가, 과학, 그리고 사상에서 기존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생긴 균열은 마치 유럽이 여러 세계로 나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투쟁의 이면에는 창조가 있었다. 긴장과 투쟁, 폭력과 소요가 유럽의 뒤흔들었지만 이런 거대한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17세기 중엽, 영국인 제임스 해링턴(James Harring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병상에서 뒹굴고 몸부림치고 있다면 그 결말이 죽음 아니면 회복이라는 것을 인식하라……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니아 중 어느 나라가 앓고 있지 않고 부패하지 않았다면 이윽고 이 나라들은 한결같이 건전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병자는 건전한 자를 당해낼 수 없고 건전한 자는 병을 고치지 않는 한 건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들 중 맨처음으로 옛날의 그 건전한 분별력을 되찾는 나라는(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프랑스이지만), 반드시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나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예언은 상당히 정확했다. 실제로 프랑스는 17세기 동안에 최초로 정치적 질환 - 1561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종교전쟁 - 에서 회복되어 유럽을 지배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 시기 루이 14세에 의해 창조된 프랑스는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질서 위에 구축되어 강대국이 된 것이다.
절대주의 체제는 정치·사회의 중앙집권을 추구하여 부국강병의 강대국을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시기 유럽 각국은 제각기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국가 내부의 역량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국력을 극대화시키려는 국가 간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국가 간의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항상 있어온 것이지만 17세기 절대주의 시대 유럽 주요 열강의 대국화 경향은 이전과 달리 국가 간의 전쟁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추세는 절대주의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기구로 변모하게 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스웨덴으로부터 사보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이 매년 지출한 돈은 다른 무엇보다도 전쟁 준비나 전쟁 수행에 바쳐졌다. 예를 들어 루이 14세는 국가 수입의 75%를 군사부문에 지출했고, 내전기(청교도 혁명)의 영국의 지도자인 크롬웰은 무려 90%를 군대에 할당했다. 17세기 후반기에 신흥 강대국으로 떠오른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수입의 85%를 지출했다. 심지어 한 세기 후인 평화스러웠던 1789년 직전에도 프랑스 재무총감 네케르에 의하면 프랑스의 수입 중 3분의 2가 여전히 군대에 할당되었다고 한다. 평화는 절대주의가 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동안에는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17세기에 국가간의 대규모 전쟁이 없이 지나간 해는 단지 몇 년 정도에 불과했다. 잦은 전쟁은 군사 분야의 혁신을 자극하는 법이다. 17세기의 유럽은 시종 전쟁이 그칠 날이 별로 없었던 상황에서 군사분야의 커다란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것은 단지 무기나 전술의 발전뿐만이 아니라 군사와 관련된 분야 전체에 걸친 것이었다. 이 때의 군사분야의 발전은 유럽 내부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 장차 유럽이 무력을 앞세워 전세계로 식민지를 확장시킨 제국주의 추구의 기반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위 '군사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17세기 유럽의 군사분야의 발전을 당대의 절대주의 체제와 함께 군사 혁명이 처음 시작된 프랑스를 대상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또, 군사혁명으로 인한 성과가 프랑스와 그리고 유럽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알아볼 것이다.

1. 군사 혁명 이전의 유럽의 군대

① 30년 전쟁과 용병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동안 독일을 무대로 벌어진 30년 전쟁은 독일 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둘러싼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 속에서 시작된 전쟁은 결국 유럽의 강대국 간의 대규모 전쟁으로 커졌다. 즉,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The Elector Pfalz, Friedrich Ⅴ)와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와의 싸움이 결국 한편에 프랑스와 스웨덴, 다른편에 에스파니아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서서 독일을 무대로 한 국제전이 된 것이다. 어느 한 편도 분명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1644년부터 48년까지 베스트팔렌에 있는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 두 도시에서 4년에 걸친 평화 협상 끝에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은 마침내 끝났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의 무대가 된 독일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독일의 무수한 영방국가들이 독립국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독일의 통일은 불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외국의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쟁 기간 동안에 독일인들은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든 말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공포와 기아에 시달리고, 국토가 폐허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독일 인구는 3분의 1정도인 8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지방에 따라서는 주민의 절반 가까이나 잃은 곳도 있었다. 전쟁의 발단이 된 보헤미아는 1618년 전쟁이 시작될 때는 20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1648년에는 70만 명으로 줄었다. 전쟁 동안 독일을 여지없이 피폐하게 만든 것은 기아와 질병의 타격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떼를 지어 약탈하고 다닌 용병들이었다. 30년 전쟁동안 용병대는 마치 메뚜기떼처럼 중부 유럽의 도시와 농촌을 덮쳤다. 약탈, 고문, 살인이 마구 자행되었고, 농촌은 불모지가 되었으며,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30년 전쟁도 끝나갈 무렵엔 농민들은 토지를 끊임없이 군대에게 짓밟혔기 때문에 수확물을 거두어 들인다든가 씨를 뿌릴 기력도 잃고 있었다. 적과 아군의 어느쪽 군복을 입고 있는 군대가 출현한다는 것은 재난을 뜻했다. 알자스의 어느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투덜대었다. "지금까지 파란 군복과 빨간 군복의 군대에게 혼이 났다. 이번에는 노란 군복의 군대가 나타난다. 오오! 신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시대의 전쟁은 사실상 전쟁 장사꾼인 용병대장의 일로 되어있었다. 당시의 유럽 각국은 상비군을 편성하고 유지해 갈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병대장들은 최고의 보수를 지불하는 자에게 고용되어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군대에 가담한 사람들은 유럽 전역에서 모인 억센 직업적 병사, 무법자, 모험가여서 그들이 급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고용되어 갔다. 그들의 일은 살인이었고, 따라서 상대가 프랑스인이건 영국이이건 독일인이건, 또 카톨릭이건 루터파건 칼뱅파건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포로가 되면 그대로 상대방의 군대에 들어가는 일도 흔했다. 급료를 받지 못하면 탈영하고 식량 보급이 안되면 약탈을 일삼았다. 충성심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고 언어와 국적은 가지각색이고 대의(大義)를 위해 몸을 바칠 생각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 이러한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에서는 군율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각 군대는 그들 뒤를 따라다니는 종자(從者), 가족, 군인 상대의 상인, 매춘부 등 직접 군대에 가담하지 않는 비전투원까지 잔뜩 안게 되었기 때문에 군의 통할(統轄)은 한층 더 어려웠다.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가에 고용된 어떤 군대에서는 매주 6~7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한다. 2만 5,000명의 병사로 구성된 군대는 적어도 5만 명의 비전투원을 데리고 다녔다고 추정된다. 군대 내의 남녀나 어린이들은 말하자면 유랑민이었고 그 생활은 전적으로 군대에, 즉 그 사령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군대에 지불할 자금이 조달되지 않을 때는 고용주인 왕후는 말할 것도 없고 대장조차도 병사들의 잔학한 행위를 억제할 수 없었다. 30년 전쟁 당시 프리드리히 5세의 용병대장인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가 주군을 져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용병)도 말도 안개를 먹고 살아갈 수는 없다. 무기든 옷이든 그들의 소지품은 모두 바닥이 났고 또 낡고 망가졌다. 지금 그것들을 사려면 앞서는 것은 돈이다.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면 그들은 누구의 것이든 가리지를 않고 닥치는 대로 탈취하는 수 밖에 없다. 문이 일단 그들 앞에 열리면 그들은 자유의 대지로 떨쳐 나선다.…… 상대가 어떤 신분이든 사양하지 않는다. 교회당이든 제단(祭壇)이든, 무덤이든 성묘(聖墓)든, 존귀한 장소이든 또 거기에 잠자는 유해든, 그들은 일체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렇듯 용병들은 거칠고 잔인한데다 충성심도 전혀 없는 질적으로 수준이 낮은 군대였다. 이런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는 제대로 통제하는 것도 어려웠다. 16세기 피렌체의 정치 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인 <군주론>에서 용병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용병을 이용하여 국가를 유지하려는 군주는 결코 견실하지도 안전하지도 못하다. 왜냐하면 용병은 서로 반목하고 야심적이며 반항적이고 배신적이기 때문이다. 자기편들 사이에서는 용감하나 적 앞에서는 비겁하고 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사람에 대한 신의가 없다. 따라서 군주들은 공격을 당하면 패배하게 된다. 그러므로 평화시에는 그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전시에는 적에 의해 약탈당한다."

또 그는 용병대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용병대장 중에는 유능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만일 유능한 자라면 신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주를 억압하거나 군주의 뜻에 반하여 다른 나라를 억압하면서 항상 그들 자신의 세력 강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용병대장이 무능한 자라면 당신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한 세기 전의 말이지만 용병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옳았다. 30년 전쟁 초반에 만스펠트 군의 이탈로 프리드리히의 세력은 기울었고, 결국 1620년 11월 8일 프라하 교외의 바이서베르크의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의 카톨릭 동맹군에게 패배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왕비와 함께 네덜란드로 도망가 재기를 노렸지만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도 역시 용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제군의 용병대장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은 유능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야심적인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구실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군대를 배경으로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용병들은 실제로 전쟁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② 군사 혁명의 가능성 - 구스타프 아돌프와 스웨덴 군
30년 전쟁 초기 페르디난트 2세가 프리드리히 5세를 누르고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전쟁은 일찍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마후 신교 국가인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가 프로테스탄트 옹호의 기치를 들고 군대를 일으킴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게다가 프로테스탄트인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만스펠트를 기용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으므로 전쟁은 점차 국제전의 양상을 뛰게 되었다. 하지만 1626년 4월 25일, 만스펠트군은 엘베 강변의 데사우에서 발렌슈타인군과 싸워 패전함으로써 영국은 전쟁에서 탈락했고, 덴마크왕 크리스티안의 군대도 독일 중부의 루테르에서 막시밀리안의 카톨릭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완패했다. 1629년 페르디난트 2세는 덴마크와 뤼벡 조약을 체결하여, 덴마크가 전쟁에서 발을 뺐다. 하지만 1630년 또 하나의 외국 군대가 다시 독일로 진격했는데, 바로 구스타프 아돌프 2세(Gustav Adolf)가 이끄는 스웨덴 군이었다. 이 스웨덴군은 30년 전쟁 초기 거의 유일했던 군대다운 군대였다.
1630년 구스타프 아돌프는 36세였다. 그는 17세에 왕이 되었고, 즉위한 이후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와 수차례 전쟁을 치르며 적국들이 발트 해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그는 당대에 보기드문 군인으로 조직과 훈련, 전술에 밝았으며, 창의력이 풍부했다. 구스타프의 업적은 행정과 조직에 대한 통찰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스웨덴은 적들의 연합 군대와 충분히 맞설 만큼 대규모 용병부대를 끌어모을 만한 자금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구스타프는 강제징집제도를 도입했고, 결국 국가가 양성하고 급여를 주는 최초의 국민군(National army)을 창설했다. 그는 성직자와 지방판사를 모집책으로 활용하여 4만 명 이상의 신병을 모집했다. 그 신병들은 '사지가 튼튼한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어느 모로 보나 용감한' 스웨덴인이었다. 수송이나 군수픔 제조 따위에 종사하는 '예비역 직업'의 노동자들은 군복무가 면제되었다. 일부 병사들은 토지를 받거나 세금감면 혜택을 받았다. 경제적인 측면과는 별도로 그 군대는 기본적으로 국민군 성격을 유지했고, 그 결과 주로 용병으로 구성된 적보다 사기가 훨씬 드높았다.
구성과 장비에 있어서 스웨덴 군은 다른 유럽 군대와 달랐는데, 그 차이는 구스타프의 전술개념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주된 차이점은 바로 화력과 기동성을 대단히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머스킷(musket)을 주무기로 삼아 창병보다 머스킷 병을 대폭 늘렸다. 동시에 그는 보다 작은 단위의 부대와 하부 부대를 창설했다. 그래서 한 중대(company)는 머스킷 병 72명과 창병 54명으로 구성되었다. 4개 중대가 한 대대(battalion)를 8개 대대가 한 연대(reiment)를 2∼4개 연대가 한 여단(brigade)를 이루었다. 머스킷이 짧고 가벼워졌으므로 부대장비(사격시 총을 올려놓는 받침대 - 옛날의 총은 무거웠으므로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발사해야 했다)가 불필요해졌으며, 장전훈련이 간편해졌고, 바퀴식 발사장치와 도화지(paper cartridge)를 표준장비로 삼았다. 창(pike)은 약 4.9미터에서 3.4미터로 짧아졌고 무장은 간편해졌다. 기병은 피스톨과 칼로 무장한 흉갑기병(cuirassier)과 머스킷으로 무장한 드라군(dragoon)으로 구성되었다.
구스타프는 야포(야전시 사용하는 대포)의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지휘관으로 야포부대를 3번째로 중요한 주력 부대로 육성했다. 1630년 약관 27세였던 뛰어난 포병장군 토르스텐손(Torstensson)이 구스타프를 보좌했다. 야포는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더 짧아졌고, 더 가벼워졌다. 한편 포위공격용 대포도 구경이 좁아지고 표준화되었다. 구스타프는 민간인 전문가로 구성된 공병부대도 갖추었고 필요할 때마다 소집했다. 이리하여 구스타프의 군대는 과학기술을 전쟁과 면밀하게 연계시켰고, 표준방비에 지도와 쌍안경 등 새로운 보조품을 포함시켰다.
신병의 기강을 잡고 전투력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계속적인 군사훈련을 위해 교련이 실시되었다. 여러 작은 단위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에는 당연히 장교들의 수가 많아졌고, 과거보다 장교의 중요성도 높아졌으며, 계급과 계급조직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군대는 공격적인 개인들의 집단이나 야만스러운 무리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반응하는 복잡한 유기체로 보였다. 고참 장교들은 과학과 지리, 심지어 외교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7세기 유럽에는 여러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다. 구스타프는 효율성을 중요하게 보았으며, 장교들을 능력에 따라 승진시켰다. 한편 하사관들의 책임과 지휘권은 유례 없이 강화되었는데, 이는 로마 시대 이후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이제 전술에 있어서 유연한 작전행동과 일사분란한 사격과 기율이 요구되었으며, 이를 위해 필수적으로 훈련이 요구되었다. 또 군복과 견장이 도입됨으로써 군대 내의 동질성이 높아졌으며, 이런 조치는 사기와 단결력을 북돋웠다. 구스타프는 자신이 직접 쓴 <군율 The Articles of War>에서 음주와 매춘 그리고 신성모독을 금지시키고 있다. 병사의 작은 과실에 대한 처벌은 인간적이었고, 체형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탈과 강간, '신성한 군복무를 멸시하는 행위'에는 사형을 언도했다. 예배 집회가 정기적으로 있었는데, 그것은 교화 효과를 노리기 위한 것이었다.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전략 범위가 넓어지자 보다 기업적인 차원의 병참부를 조직해야 했다. 무기가 표준화됨으로써 과거처럼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무기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일과적으로 무기조달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구스타프는 합리적인 징병제도를 마련했으며 여러 지역에 군수품 창고를 마련했다. 또 원칙적으로 군대를 요새화된 진지에 숙영시켰다. 이러한 개혁은 불필요한 낭비와 잔혹행위를 근절시켰다. 사실 전쟁터에서 스웨덴 군인들 역시 적을 응징하기 위해 약탈, 강간, 살인 등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나 용병들과는 달리 그것은 병사의 의사라기 보다는 왕의 명령에 의해 하는 것이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들이 약탈을 하러 병영을 떠나기도 하고, 알아서 숙소를 찾아야 할 때도 있었으나 스웨덴의 군 제도는 군사행정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구스타프는 의료체계에도 값진 혁신을 단행했다. 그는 각 연대에 한 명씩 군의(軍醫)를 배치했고, 군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전리품의 10분의 1을 할당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구스타프의 개혁은 혁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을 응용하는 개념과 효율적인 군제도와 병사의 기강과 숙련도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1630년 카톨릭과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이 한창일 때 구스타프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 독일에 상륙함으로써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프로테스탄트를 보호한다는 명분과 함께 발트해로부터 적 위협을 제거하고 발트해를 스웨덴의 호수로 만들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는 넓은 독일땅에서 전쟁을 하면 비록 적은 군대를 거느리고도 적의 허점을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비록 적의 숫자가 많기는 하지만 지켜야 할 땅이 넓은 데다가 적 전투력은 두려워 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작 독일 내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겁이 많고 비관적이어서 구스타프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1631년 9월 구스타프의 스웨덴 군은 라이프치히 북쪽 8킬로미터 떨어진 브라이텐펠트에서 틸리(Tilly)가 지휘하는 황제군을 격파했다. 총병과 창병을 절묘하게 결합한 구스타프 군대는 마치 과거의 로마 군단과 같은 유연한 대형을 유지함으로써 밀집 대형의 황제군을 무찌른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 전투는 30년 전쟁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고 북부와 서부 독일에 대한 예수회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막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632년 봄 구스타프는 레흐 강 근처에서 다시 한번 틸리의 군대를 격퇴시켰고, 이 전투에서 틸리도 전사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해임했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들여 구스타프에 대항하게 했다. 유능한 용병대장인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군과의 일전을 피하면서 스웨덴의 보급로를 차단시키려고 했다. 구스타프로서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다가 마침내 발렌슈타인을 전투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632년 뤼첸에서 스웨덴군은 발렌슈타인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구스타프가 전사했기 때문에 스웨덴으로써는 오히려 더욱 큰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뤼첸 전투 이후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의 군사적 주도권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개혁의 성과도 구스타프가 살아있을 때에 비해 미미해졌다. 그것은 구스타프의 개혁이 전적으로 그 자신의 역량에 의지한 것이라는 한계를 갖고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구스타프의 개혁은 이제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날 거대한 군사혁명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 프랑스의 군사혁명

① 관료제의 확립과 군대 개혁
30년 전쟁은 유럽의 여러 군주와 정치가들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었다. 신성로마제국과 같이 다분히 관념적이고, 경계도 불분명한 나라가 어떤 상황을 맞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신성로마제국을 분열시킨 몇몇 요인은 많은 적든 다른 나라들에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기들 특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킬 결의를 굳히고 기회만 있으면 그 신앙을 남에게 강요하려는 종교 세력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모든 나라의 크고 작은 귀족은 전통적 특권을 위협하는 왕권과 싸우고 있었다. 또 어느 나라에서나 자치 도시와 자치령은 중앙 집권화의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자기들의 유서 깊은 권리를 지켜 나가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분열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이런 강력한 세력들이 득실거리는 나라들에 질서와 국민적 통합을 기대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질서와 국민적 통합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17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상권위(至上權威)에 권력을 집중시켜야 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토머스 홉스가 말한 지상의 힘, 즉 '거대한 리바이어던(the great Leviathon)'이라고 부른 새로운 합리적 정치 질서를 군림시키는 일이었다. 물론 17세기에는 영국의 입헌 군주제처럼 다른 형태의 국가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론상으로도 또 실제적으로도 절대주의는 이 시대에 나타난 질서의 문제를 가장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정치체제였다. 전거가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한 말 중 가장 유명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절대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7세기의 절대군주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으며 그의 치세에서 프랑스는 유럽 최강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군사혁명'은 절대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면 프랑스의 절대주의가 어떻게 군사혁명에 영향을 미쳤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때는 놀라울 정도로 드물다. 특히 17세기 유럽의 주요 열강들이 대국화되는 추세에서 영토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의 성격은 달라지게 되었다. 또한 30년 전쟁을 끝으로 종교를 대상으로 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이제 전쟁은 국가의 이익에 보다 철저하게 된 것도 전쟁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절대주의 체제는 당시 루이 14세에 의해 확립된 관료제도를 통해 변화하고 있던 전쟁의 추세에 대응하였다. 절대주의 체제에서 관료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어떤 조직보다도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업무의 구분이 분명한 조직인 관료제는 역시 상하관계와 지휘계통이 분명한 군대의 개혁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면 자금, 장비, 병사의 원활한 충원과 화약과 총포류의 구경을 표준화하기 위한 무기독점은 정부의 주축인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게다가 관료들 중에는 군사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본래 군대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조직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있어서는 정규 지휘계통같은 실로 단순한 제도조차도 혁신적인 것으로 보였다. 군의 지휘권은 개인의 소유물이며 귀족의 특권이든가 군대에 더불어 매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군 지휘관들은 마음이 내킬 때라든가 그것이 자기의 이익이 될 때 외에는 일부러 싸움터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왕에 대해 특별히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은 왕에 대해 빈번히 도전했다. 게다가 그들은 참된 의미에서의 군의 지휘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에게 봉사하는 장교가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그 직권을 상속 또는 매매에 의해 손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 밑에서 강력한 상하관계나 직업적 기능이 생길 까닭이 없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관료들은 이러한 프랑스의 기존 군체제에 대한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프랑스의 '군사혁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② 루이 14세 치세기의 프랑스 군의 발전
'군사 혁명'은 단지 군대의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군 내부의 질서를 확립시키고, 군 제도와 규칙을 보완하며, 군대와 관련된 행정을 능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전반적인 군사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개혁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군사개혁은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육군의 개혁에 착수한 인물은 육군대신 미셸 르 텔리에(Michel le Tellier)와 그 직을 계승한 텔리에의 아들인 루브와 후작(Marquis de Louvois)에 의해 이루어졌다. 르 텔리에가 육군대신이 된 1643년부터 루브와가 죽은 1691년 사이에 이 두 사람은 프랑스군을 유럽 최강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전혀 선례가 없는 군사제도를 창조해 내었다.
군사 개혁 이전의 프랑스 군의 지휘체계는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르 텔리에와 루브와는 책임과 위신을 존중하는 규율화된 피라미드 형 체제를 확립하여 이러한 결함을 개선시키려 했다. 체제의 정점은 군인이라기보다 문관에 가까운 육군대신이 차지하고 그 아래는 프랑스 육군 원수가 앉으며 이들이 많은 장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장군 밑에는 대장이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 직권을 차지하고 있던 이 대장들에게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들은 직권의 매매를 통해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그것을 금지시키려고 하다면 그들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었다. 그래서 르 텔리에와 루브와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억눌러 그 권한을 국가에 흡수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가 바로 각 대장에게 국가 직속의 부관(副官)을 붙이는 것이었다. 부관은 군의 정규 지휘계통 속에 포함된 전문 장교이며 실질적으로 부대의 지휘권을 장악, 대장의 직능은 유명무실해 갔다. 또 언제나 돈을 주고 그 인가서를 살 수 있었던 대위(중대장)와 대령(연대장)이라는 계급 이외에 가난한 장교들의 봉사를 보상해줄 수 있는 소령, 중령(대대장), 여단장과같은 새로운 계급이 출현했다. 계급제와 진급은 이후 승진 순서의 명부에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젊은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가 문을 열었고, 성 루이 십자무공 훈장이 충성과 헌신을 보상했다. 그러나 루이14세도 대신들도 군의 형태를 정비하는 것만 갖고는 질서와 규율이 확립된다고 믿지 않았다. 장교와 병사들의 행동에는 항상 감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서 군 감독관(Inpecteur en mission)의 직책을 창설, 이윽고 국가 직속의 감독관이 전군에 배치되어 군의 충성여부를 감시하게 되었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 중에서도 제일 골치가 아팠던 문제의 하나는 파스볼랑이라고 불린 '가짜 병사' 문제였다. 이것은 부대의 회계관도 겸하고 있던 대장이 실제의 숫자 이상으로 병사의 급료를 청구하고 감독이 나타나기 직전에 가짜 병사를 긁어모아 사열을 받게 하는 사기행위였다. 이에 대한 형벌은 가짜 병사에 대해서는 태형과 낙인, 장교에 대해서는 벌금과 투옥이며, 감독관들은 이것을 엄격하게 실행했다. 초대 감독장관 마르티네(Martinet)의 이름은 오늘날 엄격한 '규율가',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이기도 하다.
르 텔리에와 루브와는 또한 사병에도 관심을 기울여 중대장에게 일당 5수(sous)의 봉급을 정기적으로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탈영병을 추적하게 했다. 탈영병은 코와 귀를 베인다는 협박을 받았다. 늙고 다친 병사들을 위해서 파리에 폐병원(Hotel des Invalides)이 세워졌다.(1670-74년). 또 4년 복무의 지원병으로 충원된 군대의 병사수가 1667년에 6만 5000명에서 1678년에 28만 명으로, 치세의 말기에는 30만-4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수치에 이르기 위해 새로운 충원방식인 민병대(milice)가 고안되었다(1688). 루브와는 각 교구가 자체의 경비로 무장시켜 왕군에 복무할 독신자 1인을 추첨으로 선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병역의 의무를 예고하는 이 제도는 잘 기능하지는 못했지만 치세의 말에 침입을 막아내는 데에 기여했다. 아울러 르 텔리에와 루브와는 구경지역에 식량 창고를 짓고 파리, 릴, 스트라스부르, 메스에 최초로 병영을 세우게 했다. 이 시기에 용기병(龍騎兵)이 생기고, 기병대에서 검을 사용하고, 포의 구경이 작아졌다. 1670년부터 병사들은 군복의 착용이 일반화되었다. 또 1687년부터 병사는 보방이 창과 총을 결합시켜서 만든 화약통이 달린 총검(bayonet)을 장비하게 되어 창병은 폐지되었고, 1693부터 총검이 실전에 사용되었다. 1700년경, 화승총 대신에 소총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기병은 기병용 총을 갖게 되고, 척탄병 1개 연대와 포병 12개 중대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30-40만 명에 달한 상비군 중에는 프랑스 근위병, 왕실 연대, 대소 총기부대, 스위스 용병 등 유명한 연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군사 개혁 중 보방의 축성 및 공성술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17세기 유럽 내 군사개혁가들은 이성과 과학을 존중하는 시대적 사조의 영향으로 과학 기술적 지식을 군사분야에 적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크게 활약한 사람이 프랑스의 보방(Sebastien Le prestre de Vauban)이었다. 청년장교 시절 보방은 루이 14세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다가 포로로 붙잡힌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후 전향하여 루이 1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사망하기 몇 개월 전까지 프랑스 군 내에서 최고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보방은 반세기의 군대생활에서 약 50회의 공성전을 실시하고, 1000여 개의 요새와 항만시설을 설계·감독했다. 오늘날 공병감에 해당하는 직책을 오랫동안 역임한 그는 축성과 공성으로 프랑스 곳곳을 동분서주하면서 생애를 보냈다. 보방은 군사부문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응용수학 및 응용과학 분야에 크게 기여하여 1696년 영국 과학원으로부터 저명한 과학자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통계학의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대포의 포위공격으로 함락된 이후 대포의 포격에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요새들이 고안되기 시작했다. 공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 무렵 요새의 축성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또 이 시대는 20세기 기관총이 등장했던 때처럼 요새의 방어력이 당대의 공격 기술을 능가하여 좀처럼 유능한 지휘관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유럽 각국은 전략적 가치를 지니는 지역을 요새화하고 방어하는 데 주력했던 만큼 보방과 같은 요새 전문가들의 역할이 컸다. 루이 14세 치세의 프랑스가 방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역은 플랑드르였다. 플랑드르는 비옥한 평원 지대로, 프랑스의 적들이 아무런 자연적인 장애물도 돌파할 필요없이 작전을 펼치거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지역이었다. 1702년 무렵에는 플랑드르에도 30곳 이상의 대규모 일급 요새가 세워졌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요새화된 도시나 성이 약 50군데가 있어서, 그 요새들은 프랑스의 가공할 방어벽을 형성했다. 보방은 요새 축성에 있어서 여러 가지 최신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그중 하나는 돌 대신 흙으로 보루를 짓는 것이었다. 돌 보루는 포격을 당할 때 파편이 튀어서 위험했다. 흙벽은 아전했고, 건축 비용이 저렴했으며, 커다란 흙벽도 보다 쉽게 쌓아올릴 수 있었다. 또 다른 발전으로는, 과거에 원형이었던 요새의 능보가 각이 지게 건설된 것을 들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격해오는 적에게 여러 각도에서 사격을 가해 요새 벽의 모든 부분을 엄호할 수 있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어느 정도 그런 아이디어가 전쟁에 적용되었지만, 보방 이전에는 아무도 그 아이디어를 전면 적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보방의 방법은 포위공격전을 기하학적인 전쟁으로 변형시키게 되었고, 그 방어가 어찌나 위력적이었던지 결코 적의 정면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 그는 수비에 도움이 되는 지형지세를 최대한 활용했다.
보방은 요새 축성에 있어서 단순한 기본원칙을 고수했지만, 결코 똑같은 디자인을 반복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벽으로 감싼 내부, 보루, 바깥 보루, 해자 등 요새의 기초 설계에 있어서는 전통을 유지했다. 요새는 본체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계속 저항할 수 있었다. 포위공격의 성패는 요새의 어느 부분이 가장 잘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에 달려있었다. 보방은 장소와 시간과 돈만 있으면 가능한 한 바깥 보루를 많이 지었다. 그래서 적으로 하여금 포위공격을 원거리에서부터 시작하게 했고, 그의 특유한 방식대로 장애물을 더욱 늘려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 가중되도록 했다. 바깥 보루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 해도, 중앙의 주 보루에서 사격을 가함으로써 수비군은 함락된 보루를 계속 지배할 수 있었다.
보방은 기하학적 재능과 지형을 파악할 주 아는 안목을 이용해, 요새의 모든 앞면이 뒤나 옆의 보루에 의해 방어되고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규모가 커지고 다양화된 그 설계의 기본구조는, 성 안쪽 변 없이 밖으로 뾰족한 삼각형 구조였다. 밖으로 뾰족한 벽은 적이 제대로 겨냥하는 것을 어렵게 했고, 효과적인 집중공격을 가할 수 없게 했다. 즉, 적군이 볼 때 요새벽은 모서리와 안쪽으로 패인 골로 이루어진 형태였다. 대형 능보 주위에는 보다 작은 능보가 분산되어 있었고, 작은 능보는 소총으로 서로를 엄호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자리잡았다. 크기에 있어서 아주 다양한 그 삼각형 구조물은 '레블린(ravelin)'이라고 불렸고, 사실상 초생달 모양을 이룬 것은 '데밀룬(demilune)'이라고 불렸으며, 각 보루는 서로를 엄호했고, 요새 뒤쪽에 엄호를 받았으며, 물을 채우지 않는 해자가 앞쪽 멀리 패여 있었다. 이런유형의 다중 복합 요새는 흔히 중앙 보루에서 280미터 거리까지 펼쳐져, 포위공격에 저항하는 강력한 장애물 구실을 했다. 보방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본보기는 뇌프브리자슈(Neuf Brisach)와 릴(Lille)요새이다.
보방은 축성 못지않게 공성 분야에서도 큰 공헌을 남겼다. 보방 이전의 포위공격 방법은 대포의 사정거리를 확보할 때까지 지그재그로 참호를 파서 성벽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접근호(sap)의 선두는 적의 방어사격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인명손실이 컸고 비효율적이었다. 불필요한 출혈을 극도로 싫어한 그는 포위군의 피해를 줄이며 요새를 점령하는 방법으로 평행진지에 의한 공성법을 도입했다. 이는 방어사격에 노출되는 무모한 돌진을 피하고 조직적으로 서서히 진행하는 것이다. 먼저 공격군은 방어측의 사정거리에 이르면 엄폐물을 이용하여 적절히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 선으로부터 공병이 요새를향해 지그재그를 그리며 접근호를 판다. 여기까지는 기존방식과 같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면 접근호와 수직이며 요새벽과는 평행한 평행호(parallel trench)를 판다. 평행호에는 보병과 장비를 투입시킨다. 이제 공격군은 수비군의 사격에 대해 엄호 사격을 할 수 있었고,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같은 방법으로 제2, 제3 평행호를 구축, 전진하여 성곽 가까이 제방에 이르게 되면 높은 토루를 쌓고 공격한다. 이 공성법의 특징은 전진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임시 축성·참호·토루를 이용하는 것으로써, 18세기에도 유행했다. 러일 전쟁(1904-05)때 일본군도 이 방법으로 러시아의 여순 요새를 함락시켰다. 보방은 축성 및 공성분야에서 큰 공헌을 세웠으며, 무엇보다도 당시의 과학기술을 응용했다는 점에서 군사혁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에게 가장 신임받고 그를 위해 전력을 다한 대신인 장 밥티스트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는 보통 중상주의 경제정책을 통해 프랑스의 경제력 향상에 이바지한 수완 좋은 재정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의 군사개혁에도 직간접적으로 공헌을 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국가간의 대규모 전쟁이 빈발하던 17세기 절대주의 시대에는 전쟁을 치르는 것은 물론, 군대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많은 경비가 소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즉, 각국의 경제·재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급증하는 군대 유지비와 전쟁비용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절대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통제 경제정책인 중상주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사력 증강과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콜베르는 그러한 면에서 매우 유능한 관료였다. 루이 14세 통치 하에서 프랑스는 유럽의 여러국가들과 거의 단독으로 전쟁을 치렀으며, 또 그 전쟁의 대다수가 루이 14세가 일으킨 것들이었다. 많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군은 루이 14세 초기의 6-7만 명에서 후반기에 30-4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전쟁 비용 또한 끝을 모를 정도로 증가하였다. 또 루이 14세의 호화찬란한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같은 건축물의 건설비까지 겹쳐 재위 말기에 이르면 프랑스의 재정은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경제를 숱한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이끌어 온 것만 해도 콜베르는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프랑스는 합쳐서 거의 3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프랑스가 방대한 규모의 군사개혁을 추진하고, 잦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콜베르가 충실히 일구어낸 재정이 있었다.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이 프랑스 군사개혁에 간접적으로 공헌한 것이라면, 프랑스의 해군재건은 그가 주도한 것이다. 육상 전투를 위해 군대가 강화됨에 따라 해군도 면목을 일신하여 제해권 획득을 위한 노력을 거듭했다. 17세기 후반, 유럽의 2대 해상 세력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의 지배권을 놓고 전후 3차례 해전을 벌였다. 영국은 찰스 2세 밑에서 조선계획에 착수, 전문 사관을 양성하기 위해 해군학교를 창설하고 전술 서적을 출판했다. 이리하여 영국 해군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동력을 지니게 되어 후에 여러번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의 우수한 해군을 부러워한 프랑스는 독자적인 해군 조성 계획에 착수했다. 콜베르는 그대로 방치되어 황폐해진 상태였던 항구를 복구하여 브레스트, 로슈포르, 툴롱을 군항으로 만들고, 조선소를 건설했다. 그리고 프랑스 조선계의 지침서가 된 조선 기술서 '콜베르 도감'을 출판했다. 대규모 건조 계획의 결과, 1661년 20척의 배밖에 없던 프랑스 해군은 1677년 116척의 전함과 83척의 소함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콜베르는 필요한 승무원을 얻기 위해 판사들에게 죄인들을 갤리선을 젓는 형벌에 처할 것을 부탁했다. 1702년, 40척의 갤리선에 노를 젓는 죄수는 1만 2000명에 달했다. 전함의 경우에는 선원 등록제가 구상되었다. 해안의 주민들은 봉급과 기타 물질적인 혜택을 받고 3년에 1년 꼴로 국왕의 배에서 복무해야 했다. 또한 수리학과 항해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어서 장교를 양성하려는 노력이 행해졌다. 콜베르의 활약은 주효하여 종종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해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투르빌과 뒤켄과 같은 뛰어난 제독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루이 14세 말기에는 적국의 상선을 나포하는 권한을 가진 -이 점에서 해적과는 다른- 사략선들이 활약하였다. 바르, 뒤게 트루앵은 사략선의 선장으로 유명했다.

3. 군사혁명의 성과와 유럽에 끼친 영향
프랑스의 군사개혁은 군대와 관련된 모든 것, 즉 군대 자체는 물론이고 군사제도, 무기, 방어체계, 보급체계의 개선에서부터 수학, 공학, 지리학의 발전에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루이 14세의 시대에 이루어진 군사개혁의 결과 프랑스의 군사력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리고 프랑스의 경제력도 언제든지 전쟁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건실한 상태였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은 또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격동적인 변화 속에서 루이 14세는 유럽을 지배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게 되었다. 확고한 권위와 유럽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잘 조직된 군대를 가진 국왕은 처음에는 외국에 대해 우월권을 행사하고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1667년부터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프랑스군은 1667년부터 1684년 사이에 에스파니아령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독일로 진군했다. 프랑스의 명장 튀렌과 보방은 에스파니아에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고 플랑드르의 12개 도시를 점령했다(1668년 5월 2일, 아헨화약). 1672년의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콩데 공과 튀렌은 라인강을 넘어 네덜란드를 급습하여 네덜란드 군을 격멸시켰다. 이때 다급해진 네덜란드는 에이뮈덴의 수문을 열어 프랑스군을 막으려 했다. 그 때문에 조이데르 해의 물이 암스테르담과 헤이그를 포함한 나라 일부를 침수시켰다. 유럽 각국은 프랑스의 가공할 만한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더 이상 루이 14세의 침략을 허용치 않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영국, 에스파니아, 독일의 제후들과 황제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네덜란드와 결합했다. 1674년 봄 전쟁터가 바뀌어 프랑스군은 프랑슈 콩테를 점령했다. 8월에 샤를루아 근처의 스네프에서 콩데 공은 오란예 공을 격파하고, 보방의 군대와 함께 에스파니아령 플랑드르의 도시들을 점령해나갔다. 또 프랑스 동부의 알자스가 적군의 침입을 받았지만, 튀렌은 한겨울에 독일군을 급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지중해에서 뒤켄은 네덜란드의 명장 로이테르 제독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684년에 이르러 프랑스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1661년 루이 14세가 통치권을 장악한 이래 1684년까지의 시기는 프랑스의 군사적, 외교적 영광이 빛나는 시기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승리들은 프랑스의 군사개혁이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프랑스 절대주의가 이룬 것이었다. 군사개혁은 절대주의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였다. 단지 유럽 각국의 사정에 의한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절대주의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관료제와 체계화된 세금 징수, 그리고 상비군이다. 절대주의 체제에서 군주는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며, 국가의 모든 힘은 중앙 정부로 향한다. 즉, 권력이 일관된 방향으로 흐르며 결국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이 절대주의 체제의 성격인 것이다. 또 앞서 제시한 절대주의의 세 가지 기반요소 또한 일관성과 체계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절대주의 체제는 분산된 국가의 힘을 집중시켜 국력을 강화시키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고도의 효율성을 가진 체제이다. 하지만 절대주의가 성숙하면서 절대주의 체제는 전쟁을 위한 기구로 변모하게 된다. 그 원인 17세기의 유럽 주요 국가들의 대국화 경향과 그에 따른 국가의식의 변화 때문이었다. 17세기에도 봉건제의 잔재는 남아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국가는 내부적으로 통합되고 대국화되고 있었으며, 그런 경향이 당대의 주요 정치사상인 절대주의와 결합하면서 더욱 촉진되었던 것이다. 또 30년 전쟁의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는 이제 종교보다는 국가 자체의 이익에 충실해지고 있었다. 이 모든 변화는 국가 간의 경쟁을 격화시켰으며, 빈번한 전쟁을 불러왔다. 따라서 본래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보조하는 데 머물렀던 상비군이 이제는 대규모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규모가 확장되고, 강력해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관료제도 세금도 군사 개혁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혁신적인 군사개혁인 '군사혁명'은 바로 절대주의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군사혁명이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루이 14세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있고,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한 프랑스 절대주의가 유럽에서 가장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혁명은 곧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났다. 경쟁 국가에 뒤지고 싶지 않은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군대의 규모를 팽창시켰다. 더불어 국가의 지원 하에 군수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대규모 군대의 식량 조달을 위해 농업이 장려되었다. 정치와 군사행정 차원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군과 관련된 부서들이 증가했고, 관료제도의 촉수는 더 길고 강인해졌다.
프랑스 이외의 국가들 중에서 군사혁명을 이룩한 대표적인 나라로는 프로이센을 예로 들 수 있다. 프로이센은 1618년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의 영지를 승계함으로써 나타났다. 탄생은 30년 전쟁의 발발과 때를 같이 하고 있으나 그 전쟁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지리적으로 분단된 소국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장차 중요한 나라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의 탁월한 지도로 프로이센은 크게 달라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40년부터 1688년까지의 통치기간을 통해 17세기에 있어 또 하나의 군사혁명을 이루어냈다. 그는 처음부터 군을 국가의 중심으로 삼았다. 곳곳에 흩어진 그의 영토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통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무성(Intendantur der armee)을 모든 행정부서의 핵심으로 삼았다. 군대와 정부를 사실상 하나로 묶은 것이다. 과거 불과 900명에 불과했던 군대는 1678년에는 약 4만 50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 군대를 배경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유럽의 정치에서 점점 중요한 역할을 해 나갔다. 그는 세기 내내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을 이용하여 우선 한쪽에 대해서는 지지를 팔고, 다시 다른 쪽에 대해서는 편드는 방법을 써서 세력을 강화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도 아버지의 방법을 따랐다. 1701년 프리드리히 3세는 대(對)루이 14세 동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Ⅰ)의 칭호를 얻었다. 마침내 프리드리히 2세 때에 이르러 프로이센은 유럽 열강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17세기의 군사혁명은 절대주의 체제 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군사혁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강력한 군대는 한동안 절대왕정의 위엄을 드높였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여러 차례의 군사적·외교적 승리로 더욱 더 거만해졌다. 스웨덴은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의 후계자 카를 10세(Karl Ⅹ), 카를 11세(Karl XI)가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30년 전쟁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스웨덴은 이 무렵에는 발트해를 장악한 제국이 되어 있었다. 또 17세기 말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PyotrⅠAlekseevich Romanov)는 러시아를 근대국가로 개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발전을 위해 몸소 외국에 가서 기술을 배우기까지 했던 황제는 국내에서 강력한 권위 아래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군사혁명을 이룩한 나라들은 유럽 내의 세력구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스웨덴은 북유럽에서,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프로이센은 동유럽의 세력구도를 바꾸어 놓으려 하였다. 군사혁명의 성과는 프랑스의 경우처럼 한동안 절대왕정의 우월함을 부각시켜 주었다.
그러면 군사혁명은 결국 절대주의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군사혁명을 낳았고,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군사혁명은 결국 절대주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1684년까지 프랑스의 세력은 곧 유럽을 뒤덮을 것처럼 강력했다. 강력한 군대와 유능한 장군들이 프랑스에 잇따른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위협정책은 유럽의 열강을 점차 결합시켜서 그에게 장애물로 작용했다. 1686년 7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스웨덴, 에스파니아, 황제와 독일의 제후들, 사부아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결성했다. 1688년 네덜란드의 오란예 공 빌렘이 명예 혁명으로 영국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이 공동 전선을 펴게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튀렌, 콩데, 콜베르와 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사망한 이후 루이 14세는 역시 유능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호전적인 루브와의 영향을 받았다. 루브와는 국왕에게 계속 전쟁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국왕은 신중함을 버리고 가능성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적대세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1688년부터 97년까지 일어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에서 프랑스는 적들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초기에 프랑스군은 계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바다에서 투르빌의 함대가 라 우그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1693년과 그 이듬해에는 식량과 초과 사망률의 위기로 군사작전이 중단되었다. 곧 재개되었으나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라이스바이크 평화조약으로 -에스파니아의 왕위 계승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루이14세는 처음으로 온건하게 처신했다.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를 제외하고 나이메헨 조약(1679) 이후에 합병한 영토를 모두 포기했다. 에스파니아 왕위계승 전쟁(1702-13)은 절대주의 시대의 경쟁과 대립이 극에 달하여 마침내 절대주의 체제 자체에 치명타가 된 전쟁이었다. 에스파니아 왕 카를로스 2세는 후계자가 없었으며 그 자신도 병에 시달려 오래 살기 어려웠다. 사실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가의 잦은 근친 결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고, 게다가 불임이었다. 이 때문에 에스파니아 왕이 사망한 후 누가 왕위를 계승하느냐 하는 문제로 유럽 주요 열강의 경쟁이 치열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사라졌지만 에스파니아의 영토는 아직도 광활했다. 본국 이외에도 밀라노, 나폴리, 플랑드르 일부 그리고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부 아메리카가 에스파니아의 소유였다. 카를로스 2세의 가장 가까운 상속자는 프랑스의 왕세자나 그의 아들 중의 하나이거나 오스트리아 황제인 레오폴트 1세의 둘째 아들이 카를 대공이었다. 루이 14세는 영국을 상대로 에스파니아 영토의 조정과 분할을 교섭했고, 그것은 상호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레오폴트 1세는 이것을 거부했고, 특히 카를로스 자신이 자기의 영토가 분할되는 것을 싫어했다. 마침내 카를로스 2세는 에스파니아와 가까운 프랑스가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 1700년 10월 2일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공 필립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1개월 후 사망했다. 1701년 2월, 앙주공 필립은 펠리페 5세로서 에스파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에스파니아의 새 국왕을 인정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조금만 신중해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솔한 행동을 했다. 마치 에스파니아령 플랑드르가 프랑스의 것이라는 듯 루이 14세는 프랑스군을 국경요새에 주둔시켜 네덜란드를 자극하였다. 더욱 큰 문제는 루이 14세가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에스파니아 및 에스파니아의 식민지에서 얻고 있던 무역특권을 빼앗아 프랑스 상인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 두나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1701년 9월 7일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의했다. 이윽고 바이에른과 쾰른을 제외한 독일의 모든 연방이 동맹에 가입했다.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에게 유리했다. 빌라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프리들링겐과 호흐슈테트에서 동맹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는 큰 곤경에 빠졌다. 1704년 8월 13일, 블렌하임에서 프랑스군은 영국의 말버러공- 전(前)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조상이다 -과 사부아공 오이겐의 연합군에게 대패했다. 이어서 1706년에는 라미, 1708년에는 우데나르데(모두 에스파니아령 플랑드르)에서 프랑스군의 패전이 계속되었다. 1709년 9월, 양군은 말플라케에서 다시 전투를 벌여 쌍방이 모두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전사자 4만명). 여러 차례의 강화회의가 열렸으나 동맹국측의 과도한 요구로 모두 결렬되었다. 그러나 1710년 영국의 휘그당 정부가 쓰러지고, 1년 후에 레오폴트 1세가 사망하여 카를 대공이 황제가 됨으로써 동맹세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카를 대공이 에스파니아 왕위까지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새롭게 정권을 장악한 토리당 정부는 전쟁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정세 변화에 힘입어 1712년 드낭에서 빌라르의 프랑스군은 오이겐의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했다. 1713년 마침내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유트레히트 조약이 체결되었고, 형의 사망으로 황제가 된 카를 대공과의 라슈타트 조약으로 전쟁이 종식되었다.
펠리페 5세는 에스파니아의 왕위와 그 식민지를 유지했으나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 오스트리아의 새 황제 카를 6세는 에스파니아 령 플랑드르, 밀라노, 나폴리, 사르디니아를 차지했다. 영국은 남미에서의 노예무역 독점권(asiento), 메노르카, 지브롤터, 뉴펀들랜드, 아카디아, 허드슨 만, 성 크리스토퍼 섬을 획득했다. 프랑스는 영토의 기본은 지켜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프랑스의 재정은 파멸적인 상황에 빠졌다. 1705년 30-40만 명의 병사들을 부양하고 무장시키는 데 무려 1억에서 1억 3000만 리브르를 썼다. 1700년부터 재정수입은 징수하기도 전에 먼저 지출되었다. 1715년에 이미 1715년, 1716년, 1717년의 조세수입이 탕진되었다. 1695년 전주민을 22개 등급으로 나누어 인두세(capitation)가 부과된 데 이어 1710년에는 '10분의 1세(dixieme)'라는 새로운 세금이 신설되었다.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가 죽었을 당시 국고는 파산지경에 이르렀고 부채는 무려 28억 리브르에 달했다.
루이 14세의 사망은 프랑스 절대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후계자인 루이 15세는 무능력한 데다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왕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루이 14세하에서 침묵하던 고등법원 판사들이 대담해져서 국왕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왕실은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에게 자주 돈을 빌렸다. 다시 세력을 되찾은 특권층이 여론을 등에 업고 왕실을 압박했다. 1743년부터 57년까지 이어진 고등법원 및 종교의 소요사태는 군주제를 더욱 약화시켰다.
에스파니아 왕위계승전쟁과 루이 14세의 죽음으로 프랑스 절대주의는 막을 내렸다. 유럽은 다시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는 안정된 시대를 맞게 되었다. 프랑스의 절대주의와 군사혁명은 상호 영향을 미쳤던 관계였다. 군사혁명은 절대주의 체제와 시대적 상황에서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절대주의가 성숙하면서 본래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군대는 이제 국가와 거의 동일시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국력의 대부분이 군사력에 투입되는 것으로 과도할 경우 체제 자체가 파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유능한 관료들의 노력과 부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수십년에 걸친 전쟁으로 프랑스의 절대주의 체제는 붕괴하고 말았다. 국가의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한 절대주의는 국력의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 기구의 상호견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군주의 행동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군사 부문처럼 어느 한 분야에 지나치게 권력과 자원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았다. 국가는 나라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군사혁명이 활발했던 17세기의 유럽은 대다수의 절대주의 국가가 빠른 발전을 위해 군사력에 지나치게 집착한 불안정한 발전을 추구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절대주의가 무너진 후 여러 나라가 프랑스와 비슷한 종말을 맞았다. 1715년 루이 14세가 죽은 지 몇 년 후에 스웨덴이 북방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프랑스의 뒤를 따랐다. 스웨덴은 발트해 주변 영토를 상실하는 바람에 더 이상 발트해를 자기 호수로 둘 수 없게되었다. 프로이센은 18세기 중엽에서야 군사혁명의 성과를 맛보았다.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 시절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면서 유럽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 한동안 정체되다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철저히 패배하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 다시 군사력의 발전에 지나치게 추구한 프로이센은 최초로 독일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국주의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는 제 1차세계대전의 패배와 왕조의 몰락이었다.
이런 부정적인 결과가 있었다고 해서 군사혁명의 성과를 축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0년 전쟁의 용병과 비효율적인 군사제도를 바꾼 것은 군사 혁명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였다. 또 군사혁명 이후에는 30년 전쟁의 독일과 같이 민간인의 엄청난 희생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군사혁명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국민군이 탄생하게 된 것은 군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국민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유지해야 국가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고, 국민의 애국심도 드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자기 가족과 나라를 지킨다는 마음을 갖고 싸우는 병사들은 용병들보다 훨씬 사기가 높았고, 신용할 수 있었다. 국민군을 통해 국민과 국가의 통합을 실현한 점에서 군사혁명은 근대 유럽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17세기 절대주의 체제는 군사혁명을 창조해냈어도 그것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걸은 것이다.

결 론
전쟁 속에서 시작된 17세기는 전쟁 속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17세기에 종지부를 찍은 전쟁은 세기 초의 전쟁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양편의 군대가 맞부딪친다는 면에서 그 본질은 같았으나 전투의 기술이나 규모, 교전국의 성격, 목적 등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30년 전쟁은 왕조 내지는 종교 동맹 사이의 싸움이었으나, 17세기 후반의 전쟁은 영토국가라고도 할 새로운 정치단위를 대표하는 것끼리의 싸움이었다. 이러한 전쟁은 서쪽은 아일랜드에서 동쪽은 러시아, 북은 스웨덴에서 남은 이탈리아에 이르는 유럽 각지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 시기 유럽의 모든 나라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대규모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 영토국가가 서로 타국을 위압하려고 경쟁을 벌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국경을 넓히고 그것을 지키며,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해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싸웠다. 이미 이 시대에 제국주의의 질서가 어렴풋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대규모적인 현상은 군사혁명의 결과 나타난 것이었다. '군사혁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이클 로버츠이다. 그는 1955년 벨파스트의 퀸즈 유니버시티에서 행한 강의에서 군사혁명의 4가지 핵심적 변화를 지적했다. 첫째, 창 대신 총이 사용된 무기의 혁명이 일어났다. 둘째, 군대 규모가 커졌다. 셋째, 대규모적이고 복합적인 전술이 사용되었다. 넷째, 이와 같은 군대의 변화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러나 군사혁명은 그 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국민군이 탄생한 것이다. 군사 혁명 이전에는 직업적 병사인 용병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나라에 고용되어 전쟁을 치렀다. 이들 용병은 충성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봉급을 위해서라면 배신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제대로 보급이 안되거나 봉급이 제때 지불되지 않으면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게다가 이들 용병은 적국과 아국을 가리지 않고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그러나 군사혁명의 결과 자국민으로 이루어진 정규군이 조직되면서 국가는 신뢰할 수 있는 군대를 갖게 되었다. 국민군은 자기의 가족과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을 갖고 싸웠기 때문에 용병군보다 훨씬 사기가 높았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는 군사혁명의 결과 유럽이 흥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은 아시아보다 약소했다. 특히 가장 인접한 아시아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군사혁명 이후 유럽은 군사력에서 점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물론 군사혁명은 초기에는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탄생시킨 국가체제 즉, 절대주의 체제를 붕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는 유럽의 역사에서 하나의 큰 전환기를 이룬다. 왜냐하면 17세기에는 긴장과 투쟁, 미신과 무질서를 상당히 극복하고, 근대국가의 권력과 과학을 바탕으로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군사혁명은 바로 이 새로운 질서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왕정시대」, 찰스 블리처,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편집부 옮김,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91
「전쟁의 역사Ⅰ,Ⅱ」, 버나드 로 몽고메리, 승영조 옮김, 책세상, 2000
「프랑스의 역사」, 다니엘 리비에르, 최갑수 옮김, 까치글방, 2000
「전쟁사 101장면」, 정토웅, 가람 기획, 1997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상두 옮김, 까치글방, 2001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주경철, 산처럼,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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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후반생
모리야 히로시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들어 정년이 낮아지고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은퇴 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과거에는 은퇴를 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사회에 기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여겨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고 삶의 의욕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즉 인생의 후반부는 삶의 내리막길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후반생이라는 것이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발전없이 그저 죽음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이를 많이 먹어도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에 도전할 수는 없을까?

이 책은 중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 스물 두명의 후반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후반기에도 노력을 하면 새로운 인생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치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크게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놓았다.

1. 인생을 늦게 꽃피운 사람들
2. 산뜻하게 삶을 바꾼 사람들
3. 좌절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
4. 승부수를 던져 성공한 사람들
5. 늘 도전하며 살아간 사람들
6. 공명을 멀리한 사람들

책에 나온 22명의 주인공들은 이처럼 제각기 다른 환경에 다른 삶을 살았지만 인생을 적당히 보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자의 말처럼 각자 사는 방식을 달랐지만, 모든 기력을 쥐어짜내 인생에 도전함으로써 활기찬 생을 살다간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하고 말았을 만한 처지와 나이에 인생의 꽃을 피웠다. 물론 그들의 인생에도 가혹하다고 할 만한 불행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은 결코 자신의 뜻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사랑했다. 바로 그것이 인생의 후반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들에게는 운도 따랐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평소에 꾸준히 실력을 쌓아야 됨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일생은 제각기 다르다. 좌절과 굴욕을 딛고 일어서서 후반생을 개척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평생 도전 정신을 불태우며 자신의 뜻을 실현한 사람도 있다. 또한 인생의 절반을 산 다음 새롭게 변신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삶이 바람직한지는 사람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바로 성공하는 삶은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역자의 말처럼 어치피 죽을 목숨인데, 마지막까지 힘껏 뛰어놀게 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이 책은 앞날이 불투명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이들의 삶 가운데서, 자신의 후반생의 모델이 될 만한 삶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자신의 후반생을 한번 설계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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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세트 - 전8권
고우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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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른바 고전으로 불리는 책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비록 오랜 옛날에 쓰여져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속에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초한지는 진나라 말기부터 전한의 건국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하지만 금의야행,사면초가,권토중래,토사구팽 등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고사성어를 남긴 고전이기도 하다. 또한 고우영 초한지의 머리말에도 나와있다시피 중국 역사서 중에서 초한지만큼 상큼한 드라마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삼국지와는 달리 초한지에는 이야기가 유방과 항우라는 두 인물의 대결로 압축되는데다 짧은 기간동안 극적인 사건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면서 장중한 결말로 치닫기 때문이다.

'삼국지'와 '수레바퀴'에서 보여주었듯이 고우영은 역사와 인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위트를 초한지에서도 그대로 펼쳐보이고 있다. 고우영 만화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간결하면서도 인물의 성격과 감정이 잘 드러나는 캐릭터이다. 특히 초한지에는 주요 인물의 개성이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순박함과 어리숙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비굴한 행동과 잔인한 행동도 태연하게 하는 유방,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세는 천하를 뒤덮는다는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이지만 우직하고 과격한 항우, 겉보기에는 연약한 귀공자 같지만 냉정하고 치밀한 한신 등 참신한 인물해석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래도 캐릭터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유방은 삼국지의 유비와 한신은 일지매와 닮은 것처럼 전혀 다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에는 고우영 특유의 캐릭터가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인물 소개에서 작가는 한신을 '일지매'와 '제갈량'으로 분했던 배우라며 익살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고우영의 초한지는 원작과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즉, 유방과 항우의 대결이라는 기본적인 줄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때로는 한신의 눈으로 때로는 장량의 눈으로 독자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식이다. 본래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에 멸망당한 한나라의 왕족 출신으로 난세에 어떻게든 살아남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도 하고, 동네 불량배 가랑이 사이를 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한신. 그 때문에 동족에게도 멸시를 받고, 항우 밑에서 일개 창잡이로 종군하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은 뒤에 마침내 한의 대원수를 거쳐 제나라 왕이 된 그의 이야기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묘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물론 동네 건달에서 황제가 된 유방, 한 때 천하를 호령했으나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항우같은 초한지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전달된다.

고우영은 고전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썼지만 그의 만화는 성인 만화의 시초로 여겨진다. 그것은 그의 만화에는 자신만의 에로티시즘이 유쾌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 정권시절에는 그런 장면들이 많이 삭제되었지만 이번 복원판에는 곳곳에 삽입되어 읽는 맛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하필 이름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방이 점령하려는 성을 여자로 비유하여 마치 애무하듯 서서히 성문을 여는 장면은 사서에서 유방이 인의를 앞세워 항복을 권유한 고사를 절묘하게 빗댄 점을 상기해 볼 때 정말 참신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보통 역사서는 승자의 입장만을 밝히기 쉽다는 점 때문에 유방의 장점과 항우의 단점은 실제보다 더 부각될 염려가 있다. 하지만 고우영의 초한지는 이 두 주인공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즉, 두 사람의 이미지 - 유방의 관대함과 항우의 포악함 -는 사실로써 그대로 두되, 비록 잔인하긴 했지만 아울러 솔직함과 인간미도 갖고 있었던 항우의 모습을 전달하려 노력했고, 통일 후 숙청 과정에서 볼 수 있다시피 큰 공을 세운 부하들을 '토사구팽'시키는 유방의 몰인정함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우영의 초한지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종의 '권선징악'의 과정처럼 알려진 유방과 항우의 대결이라는 평면적인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초한지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초한전으로부터 유래된 장기이야기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사람 세상살이 바로 장기판과 같나니... 누구는 지는 편 마(馬)가 되어 고단하다네. 이기는 편 차(車)라고 해서 좋을까 보냐? 이기기 위해서는 졸(卒)하고도 바꾼다네'

즉, 고우영의 초한지는 초와 한의 대결이라는 짧은 역사 속에 인생사의 다양한 모습이 압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각기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유방과 항우, 한신과 같은 인물들의 삶은 바로 그러한 인생의 표본처럼 보인다.

초한지가 고전으로써 여지껏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인간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우영의 초한지는 이러한 원전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도 상쾌한 유머와 세상살이의 지혜 그리고 인생의 비장함까지 느끼게 하는 만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고전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듯이. 고우영의 초한지가 주는 재미와 감동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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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1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느무느무느무 좋아했었는데요!

반가워서 한줄 남기고 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탐정학원 Q 1
아마기 세이마루.사토 후미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소년 탐정 김전일』을 꽤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연재가 끝난 뒤의 아쉬움도 컸다. 그런데 우연히 아마기 세이마루와 사토 후미야의 새 추리만화가 나온 것을 알게 되어서 이번에는 어떤 작품인가 궁금해서 읽어 보았다. 우선 그림은 김전일 때와 큰 차이는 없어 보였으나 내용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내가 김전일을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는 사실성이 높은 추리만화였기 때문인데 이 만화는 좀 특이한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Q는 그래도 김전일과 약간은 비슷한 수준의 캐릭터였는데, 다른 캐릭터들은 무슨 '순간기억능력'이라든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비상한 컴퓨터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가 하는 좀체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 웃긴건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류는 범죄단체 집안의 출신이라는 점이다. 뭐, 아이큐 180의 동경대 출신 천재도 바보처럼 나오는 것을 보면 캐릭터들이 보통 희한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 쯤은 간단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명탐정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은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셜록 홈즈이다. 그러나 셜록 홈즈도 너무 뛰어나고 특이한 인물이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추리 소설이든 만화이든 추리물은 사실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탐정의 추리력과 논리력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개성이나 기타 특수한 능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추리물에서 진정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합리적인 추리와 논리로 범인을 옭아맬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탐정학원 Q가 나름대로 추구하는 목표도 있겠지만 좀더 사실성이 있는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나로서는 김전일 때보다 약간 떨어지는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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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린이씨 2005-08-2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탐정학원 Q 정말재밌다는 ㅎㅁ ㅎ +
리뷰잘보고갑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