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세트 - 전8권
고우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이른바 고전으로 불리는 책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비록 오랜 옛날에 쓰여져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속에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초한지는 진나라 말기부터 전한의 건국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하지만 금의야행,사면초가,권토중래,토사구팽 등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고사성어를 남긴 고전이기도 하다. 또한 고우영 초한지의 머리말에도 나와있다시피 중국 역사서 중에서 초한지만큼 상큼한 드라마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삼국지와는 달리 초한지에는 이야기가 유방과 항우라는 두 인물의 대결로 압축되는데다 짧은 기간동안 극적인 사건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면서 장중한 결말로 치닫기 때문이다.

'삼국지'와 '수레바퀴'에서 보여주었듯이 고우영은 역사와 인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위트를 초한지에서도 그대로 펼쳐보이고 있다. 고우영 만화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간결하면서도 인물의 성격과 감정이 잘 드러나는 캐릭터이다. 특히 초한지에는 주요 인물의 개성이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순박함과 어리숙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비굴한 행동과 잔인한 행동도 태연하게 하는 유방,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세는 천하를 뒤덮는다는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이지만 우직하고 과격한 항우, 겉보기에는 연약한 귀공자 같지만 냉정하고 치밀한 한신 등 참신한 인물해석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래도 캐릭터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유방은 삼국지의 유비와 한신은 일지매와 닮은 것처럼 전혀 다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에는 고우영 특유의 캐릭터가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인물 소개에서 작가는 한신을 '일지매'와 '제갈량'으로 분했던 배우라며 익살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고우영의 초한지는 원작과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즉, 유방과 항우의 대결이라는 기본적인 줄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때로는 한신의 눈으로 때로는 장량의 눈으로 독자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식이다. 본래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에 멸망당한 한나라의 왕족 출신으로 난세에 어떻게든 살아남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도 하고, 동네 불량배 가랑이 사이를 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한신. 그 때문에 동족에게도 멸시를 받고, 항우 밑에서 일개 창잡이로 종군하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은 뒤에 마침내 한의 대원수를 거쳐 제나라 왕이 된 그의 이야기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묘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물론 동네 건달에서 황제가 된 유방, 한 때 천하를 호령했으나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항우같은 초한지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전달된다.

고우영은 고전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썼지만 그의 만화는 성인 만화의 시초로 여겨진다. 그것은 그의 만화에는 자신만의 에로티시즘이 유쾌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 정권시절에는 그런 장면들이 많이 삭제되었지만 이번 복원판에는 곳곳에 삽입되어 읽는 맛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하필 이름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방이 점령하려는 성을 여자로 비유하여 마치 애무하듯 서서히 성문을 여는 장면은 사서에서 유방이 인의를 앞세워 항복을 권유한 고사를 절묘하게 빗댄 점을 상기해 볼 때 정말 참신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보통 역사서는 승자의 입장만을 밝히기 쉽다는 점 때문에 유방의 장점과 항우의 단점은 실제보다 더 부각될 염려가 있다. 하지만 고우영의 초한지는 이 두 주인공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즉, 두 사람의 이미지 - 유방의 관대함과 항우의 포악함 -는 사실로써 그대로 두되, 비록 잔인하긴 했지만 아울러 솔직함과 인간미도 갖고 있었던 항우의 모습을 전달하려 노력했고, 통일 후 숙청 과정에서 볼 수 있다시피 큰 공을 세운 부하들을 '토사구팽'시키는 유방의 몰인정함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우영의 초한지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종의 '권선징악'의 과정처럼 알려진 유방과 항우의 대결이라는 평면적인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초한지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초한전으로부터 유래된 장기이야기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사람 세상살이 바로 장기판과 같나니... 누구는 지는 편 마(馬)가 되어 고단하다네. 이기는 편 차(車)라고 해서 좋을까 보냐? 이기기 위해서는 졸(卒)하고도 바꾼다네'

즉, 고우영의 초한지는 초와 한의 대결이라는 짧은 역사 속에 인생사의 다양한 모습이 압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각기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유방과 항우, 한신과 같은 인물들의 삶은 바로 그러한 인생의 표본처럼 보인다.

초한지가 고전으로써 여지껏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인간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우영의 초한지는 이러한 원전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도 상쾌한 유머와 세상살이의 지혜 그리고 인생의 비장함까지 느끼게 하는 만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고전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듯이. 고우영의 초한지가 주는 재미와 감동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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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1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느무느무느무 좋아했었는데요!

반가워서 한줄 남기고 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