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마블 위픽
이종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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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위픽 시리즈의 판형은 물론 분량과 좌측 정렬의 본문 디자인 같은 모든 요소들이 이미 흥미로웠다. 예측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해야 할까.

 

 책의 외형요소들부터 전형적이지 않았고, 내용도 그러했다. 여성들 간의 사랑 이야기라는 아주 기본적인 얼개만 파악했고, 이 작가가 능히 다룰 주제라고 생각하며 들였던 기억이 난다. 장소는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의 책방토닥토닥이었다.


얼마나 깊게 빠지든 모든 사랑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푸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9쪽

“그래, 그럼 평생 이렇게 갇혀 있든가. 나도 시계에 갇혀 있나 이 방에 갇혀 있나 그게 그거야.시계보단 여기가 낫지. 너랑 나랑 평생 여기서 둘이 살자.어차피 금방 굶어 죽을 거라 같이 오순도순할 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27쪽

 

 씨네21의 누군가는 별 넷 이상을 줄 법한 단편영화처럼, 어차피 길지 않아서 여백이나 비약을 굳이 아끼지 않는 밋밋한 전개일까 싶었다. 대화보다 독백이나 관찰이 더 많은 전개라거나. 처음 몇 페이지 정도는. 지레짐작이 틀려먹었다는 생각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역시 표리일체라고 안도했다. 은유와 여백으로 시처럼 전개되는 거의 모든 영상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다행히 그렇지 않았던 덕에, 이 설정으로 이 분량에서 이 서사라면 대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져 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를 도는 거예요. 말도 자전거 모양으로 하고, 도시마다 있는 자전거 타기 좋은 길도 소개하고요. 방금 떠오른 거라 아직 구체적인 건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푸른의 이야기를 듣고 구슬도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데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별장이나 호텔을 짓는 대신 공공건축물을 지어도 좋겠어요. 미술관이나 도서관 같은 거요. 복지 센터도 좋고요. 도시에 건축물을 지으면 거기에 게임 참여자의 이름이 붙는 거죠.” -55쪽

 

 잡지 ‘캐치’의 기자와 디자이너인 두 사람, 푸른과 구슬의 사랑 이야기는 그 자체로 블루마블이자 부루마불이다. 두 사람만 잡지의 창간 기념 이벤트로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과정, 그렇게 엮인 상황에서 구슬에게 전부터 호감이 있던 푸른의 사랑을 떠미는 뜻밖의 보드게임, 이 두 보드게임의 결과로 전개되는 푸른과 구슬의 관계까지, 이 세 개의 축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보드게임을 이룬다. 완결성 있는 소품, 소품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않고 소품으로서 완성되는, 그래서 가장 소품다운 소품이란 이런 작품일 것이다.


“어쩌면 신들이 장난을 친 걸지도 모르겠네요.

신들의 장난. 푸른은 구슬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푸른이 구슬에게 고백한 직후에 일부러 ‘고백하기가 나오도록 장난을 친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지 같은 보드게임을 만든 자들이라면. -123~124쪽

 

 세 개의 축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마치 하나의 보드게임 속 각자의 플레이어처럼 각자 움직이는 까닭에 결국 이 플레이어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부루마불은 부루마불다워진다. 하나의 칸에 둘이 놓일 때 비로소 불화가 발생하고 갈등이 형성되며 긴장이 고조된다. 구슬이 푸른의 뜻밖의 보드게임을 알아챘을 때부터 마냥 감미롭던 이야기가 곤두박질쳤다. 말이 잡거나 잡히거나, 돈을 받거나 잃거나. 인간의 보드게임이다.


 하지만 신들은 각자 푸른과 구슬을 말로 자신들의 보드게임을 했을지 모른다. 이 이야기를 읽듯이 신들도 그들의 게임을 단지 즐겼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철저히 승패와 무관한 보드게임이기 때문이다. 신이라면 주사위조차 의미가 없어서 그렇다. 어떤 우연도, 의외도 없다. 단지 필연과 의도만 있다. 신이라면 바로 이렇게, 가장 즐겁게 주사위 놀이를 할 것이다. 언제든 무엇이든 원하는 숫자가 나올 테니까. 누구도 패배하지 않은 블루마블의 보드게임이야말로 신들의 장난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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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이상 우리 종과 "짐승"들 사이에 이전과 같은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지능, 감정, 쾌고감수능력快苦感受能力, sentience을 "이성이 없는 짐승들과 구분 짓는 경계로 여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원숭이, 코끼리, 고래, 개 등 이미 우리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는 종류의 동물과 지능이 없다고들 하는 다른 동물 사이에도 경계선을 그을 수가 없다. 지능은 현실 세계에서 대단히 다양한 흥미로운 형태를 띠며, 인간과는 매우 다른 경로로 진화한 새들도 여러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 - P18

우리는 지적이고 복잡한 지각력을 가진 동물의 삶의 형태를 변형시키고 있다. 이들 동물 각각은 번영하는 삶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각각의 동물들에게 어려운 도전을 안기는 세상에서 괜찮은 삶을 얻어낼 수 있는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이런 노력을 좌절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이는 부당한 행동이다. (1장에서 나는 이런 윤리적 직관을 정의에 대한 기초적인 아이디어로 발전시킬 것이다.) - P19

대부분의 국가의 경우 동물들은 법률가들이 "원고적격原告適格, standing"이라고 부르는 지위, 즉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소를 제기할 수 있는 지위를 갖지 못한다. 물론 동물은 직접 소를 제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어린이나 인지 장애가 있는 사람을 비롯해 대부분의 인간, 아니 솔직히 말해 거의 모든 사람이 소를 제기할 수 없다. 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를 필요로 한다. 평생 인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능력 있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소를 제기할 수 있다. - P19

위대한 플루티스트 장피에르 랑팔Jean-Pierre Rampal(1922~2000)은 새의 지저귐을 플루트 악보로 옮긴 많은 작품을 녹음했기 때문에 나는 코넬조류학연구소Cornell Lab of Ornithology 웹사이트에서 능란한 노래를 들려주는 핀치finch에게 그의 이름을 붙였다. 장피에르는 수컷 멕시코지니House Finch다! 부리 바로 위에는 밝은 적색 깃털이 있고 머리 뒤쪽으로 넘어가면서 색상은 붉은 회색으로 변한다. 부리 아래에서는 붉은색이 분홍색과 흰색으로 변화하고 배 아래쪽에는 회색 줄무늬가 이어진다. 날개에는 회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있다. 그는 높거나 낮게 흐려지며 끝나는 짧은 곡조의 빠른 노래를 부른다. - P25

이론은 행동을 이끌고, 나쁜 이론은 나쁜 행동을 이끈다. 나는 이 영역에서의 지배적인 이론들에 결함이 있으며, 내 이론이 더 나은 행동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 P28

경이는 우리를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대상으로 향하도록 한다. 경이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 추구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경이는 삶 자체에 대한 본원적인 기쁨에 연결되어 있다. 경이는 자기애나 자부심과는 동떨어져 있고 놀이와 가깝다. 경이는 아이 같다. 놀라운 존재들의 세계에서 뛰놀고 있는 우리 인간성이다. - P48

심리학자 C. 다니엘 뱃슨C. Daniel Batson의 실험에서처럼 연민 그 자체가 이미 도움이 되는 행동을 유발한다. 하지만 연민은 약한, 혹은 최소한 불완전한 동기 유발 요인으로 입증되는 경우가 많다. 연민이 주는 메시지는 "이런 것들은 나쁘다. 따라서 더 낫게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 좋다"는 것이다. 연민은 피해자를 돕는 행동을 하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피해자의 고통에 집중하기 때문에 고통을 유발하는 가해자 행동의 부당성에는 온전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이 과제를 개념적으로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 뱃슨의 실험 대부분은 부당한 일이 없는 고통, 예를 들어 다리가 부러져서 수업에 가는 데 도움이 필요한 학생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연민 자체는 가해자가 가하는 추가적인 피해를 막는 데 이르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른 감정, 지금까지 내가 "격분"이라고 불렀던 감정이 필요하다. - P54

프레임워크의 선택은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진실과 이해를 위해서는 이론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출발하게 하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 P75

인격이란 아무리 폭을 넓혀도 인간 중심적이다. - P83

그러나 좋든 싫든 언어는 철학적, 과학적 연구의 매개체다. 따라서 "더듬더듬하는 번역stammering translation"(작곡가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가 자신의 음악을 말로 묘사하려는 시도에 사용한 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신중하고, 겸손한 태도를 갖고, 자원을 충분히 이용한다면 이런 일을 동물 세계 전체에 걸쳐서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 P86

그(제러미 벤담)의 시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다른 동물에 대한 폄하에 큰 영감을 준 것은 자기혐오와 두려움이라는 것을 말이다. 동물적 본성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혐오감을 느끼고, 겁을 내기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낮잡아 보고, 나머지 동물계와 우리보다 동물적이라고 생각하는 하위 그룹에도 비슷한 경멸과 혐오를 투사하는 것이다. 청교도주의와 다른 동물에 대한 경멸은 서로를 강화시킨다. 종차별과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와 같은 다른 악은 공통적인 근원을 갖고 있을 수 있다. - P95

(크리스틴) 코스가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각종 특유의 기능 유형에 맞게 살아가는지를 이해한다. 이런 통찰은 칸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코스가드는 동물(인간을 비롯한)이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를 이용해서 칸트의 가차 없는 인간 중심적 윤리에 동물 애호가들이 동물과 그들의 노력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칸트를 고수하는 것일까? 개별 생물이 지닌 불가침의 존엄에 대한 그의 통찰,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표현하지 않은 그런 통찰 때문이다. - P113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거짓 약속을 할 수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약속이라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사람은 그 제도에 의존해 자신을 승격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대가로 삼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게으르게 쾌락만 좇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게으르게 쾌락만 좇는 세상을 바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세상을 안정적으로,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데 필요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P117

인간은 동물의 삶에 대한 경이와 경외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동물에 대한 우리 행동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동물을 물건이나 수단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따라서 정언명령은 동물에 대한 현재 우리의 대우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애초에 동물을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킨다면 말이다. - P118

가치는 세상에 존재하다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율 의지의 작용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 자체로 선이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자신의 이익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할 뿐이다. - P122

"우리보다 불운한 사람들은 보다 단순한 존재여서 불운이 그리 중요치 않다거나 우리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만큼 생생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생각을 품는 것은 안전하게 특권을 누리는 존재들에게 끊임없이 계속되는 유혹이다." (크리스틴 코스가드) - P127

각자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권리가 다른 인간의 권리에 의해 제한되듯이, 우리의 목적을 추구하는 우리의 권리는 다른 동물의 선에 대한 공감적 이해에 의해 제한된다(혹은 제한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다른 동물의 목적 자체에 대한 주장은 우리 자신의 주장과 동일한 궁극적 기반, 모든 도덕성과 동일한 궁극의 기반(생명 자체의 자기 긍정적 본성)을 가진다. - P128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두 사람(너스바움과 코스가드) 모두가 정치적 원칙을 찾고 있는 것이라면 많은 다른 형이상학적, 세속적 개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정치적, 법적 견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궁극적 형이상학의 모든 질문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면서 완벽하게 포괄적인 윤리적 견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29

근시안적인 개발 정책은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기보다 당장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온전한 인간이 아닌 그릇으로서만 취급하는 부적절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이 보통이다. - P147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여가 시간이 가치가 있다는 인식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목록을 역량의 목록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삶의 선택의 이질성, 다른 길을 선택할 자유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 (어린이들 대상의 의무 교육에서와 같이 때로는 미성숙을 근거로 그리고 성숙한 선택의 관점에서 기능을 명할 자격을 갖는다.) - P155

엘리트들은 공적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도 적절한 의료,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 P157

경이의 감각은 존엄을 지향하는 인식론적 능력이다. - P162

그렇지만 둔감함이나 자기 특권적 안식은 항상 경계해야만 한다. - P171

역량 접근법은 동물을 쾌락과 고통의 그릇이 아닌 주체로 대하며 그런 방식으로 동물을 존중한다. - P178

우선, 앞서 이야기했듯이, 종species이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자연의 경계는 과거 많은 생물학자들이 생각했었던 것만큼 엄격하지도 빠르지도 않다. 지금의 과학자들은 대개 "개체군populations"이라는 보다 느슨한 개념을 사용한다. 교배 가능성도 종의 경계를 정하는 명확한 기준은 아니다. 하지만 종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은 이를테면 대략적인 것으로, 그 한계를 기억해둔다면 유용하기는 할 것이다. - P180

생물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그 방식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상황에서, 구조의 유사성은 비슷한 기능(주관적인 특성을 비롯한)의 좋은 증거지만, 구조의 차이는 기능 차이의 좋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 - P197

어느 것 하나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데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수 있겠는가? - P214

(안토니오) 다마시오의 연구는 감정이 동물(이 경우는 인간)에게 세상이 자신의 일련의 목표와 사업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리처드) 라자루스를 비롯한 다른 인지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확인해준다. 이런 감각이 없으면 의사 결정과 행동은 방향을 잃는다. - P215

이 이론은 모든 형태의 삶에 대한 것이지 고통만을 중요한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벤담처럼). 장애가 있더라도 목적 추구와 주관적인 인식이 어떤 형태로든 발견된다면 그 생물은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것이다. 비전형적인 경우는 사례별로 다루어져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의 이론의 기준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설정할 때 예상되는 정상적인 종의 특성을 따라야 한다. 이 이론의 목표는 개체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인식론적으로 출발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은 종이다. - P219

중대한 목적 추구에는 도움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에, 고통과 쾌락과 같은 다양한 주관적 태도, 거기에 더해 욕망과 감정 등 행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수많은 다른 주관적 상태가 포함된다. 우리가 설명하는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동물은 이 모든 능력을 가진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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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 수업 -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잘 팔리는 비즈니스로 이끄는
호소다 다카히로 지음, 지소연.권희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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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방식, 규모 등을 막론하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컨셉의 목표다. 그런 까닭에 컨셉 자체는 물론이고 그 컨셉을 기획, 실행하는 경로를 제시하는 이 책과 저자도 이율배반의 상황에 놓인다. 컨셉은 어떤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야 하지만 모든 소비자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고, 그 어떤 소비자들의 명확한 문제이자 해답이어야 하며, 그들이 여태 도출하지 못했지만 바로 납득되어야 한다. 따라서 컨셉은 치밀하면서도 결국은 참신해야 한다.

 

이 책의 순서에 따라 비즈니스 과제를 마주하고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생각하면 세상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컨셉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사회에 큰 의미를 가져다줄 컨셉을 작성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역설적이지만 프레임워크라는 논리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려면 논리를 뛰어넘는 비정상적인 값이 필요하니까요. -375

다시 말해, 더 퍼스트 테이크는 부담 없이 음악을 즐기고 싶지만, 아티스트의 진심을 느끼고 싶다는 팬들의 욕심 가득한 인사이트에 아주 분명한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147

 

 이 책은 치밀하게 컨셉을 수립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결정적인 컨셉은 이 치밀한 논리와 구조 이후에 도출되어야 한다는 지적으로 마무리된다. 일종의 자기 부정인 동시에,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다. 치밀한 컨셉이 논리적인 정량의 영역이라면, 참신한 컨셉은 결정적인 정성의 영역이다. 치밀함이 누적시키는 성취와 참신함이 확산시키는 전환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한 컨셉이다억지로 우열을 가린다면 결정적인 전환을 일으키는 참신한 컨셉이 우위에 놓이겠지만, 치밀한 기반 없이 참신한 첨단만으로 돌파하는 컨셉은 그야말로 논외의 사례다. 극히 드문 까닭이다. 참신한 컨셉을 결국 이룬 그 사람이 치밀함의 자질 역시 함께 갖추었거나 그가 속한 조직이나 구성원이 치밀한 컨셉으로 참신함을 지탱하는 것이 상례다. 이 책이 결국 사회에 큰 의미를 가져다줄 참신한컨셉을 작성하기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자인하기까지 치밀한컨셉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풀어준 이유다.

 

부분에서 전체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현실에서 이상으로, 이러한 질문 바꾸기는 모두 평소의 시야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점을 부러 의식하지 않는 한 보지 못하는 각도로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질문의 재구성이 반드시 일방통행일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으니까요. ‘전체에 관한 질문을 생각하다가 너무 막연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부분에 관한 질문으로 방향을 전환해 봅시다. ‘주관적인 질문을 설정했더니 너무 치우친 아이디어만 떠오른다면, 이번에는 객관적인 질문을 생각해 보세요. ‘이타적인 질문이 위선적인 아이디어만 이끌어낼 때는 이기적인 질문을 떠올리면 됩니다. 렌즈를 교환하여 사진을 찍듯이 양방향으로 관점을 유연하게 바꾸어봅시다. -114

 

 자신이 제시하는 통찰과 기법의 효용성을 구체적, 논리적으로 구축한 후에, 그 한계로 매듭을 짓는 점에서 이 책의 저자가 그 흔해진 호칭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제대로 된 약을 팔고, 제대로 약을 판다는 점 모두에서 그렇다. 이 책은 각 파트들부터 그 파트들이 모인 전체 구성까지,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기법, 요령들을 깊이 있게 제시한 다음, 그것으로는 끝내 채울 수 없는 참신함의 지점으로 결말을 맺는 컨셉이 일관되다.

 

여기서 가치와 컨셉의 차이를 다시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당신의 회사·조직·브랜드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가치입니다. 행동 원칙이나 행동 지침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지요. 반면 "앞으로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컨셉입니다. -350

 

 컨셉의 논리를 실컷 가르치고서 이것으로 결정적인 컨셉은 도출할 수 없다는 마무리가 잘 보아도 선문답, 나쁘게 보면 기만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참신한 결정적 컨셉을 위해 결국 그 한 사람, 그가 속한 조직의 치밀한 컨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확신한 결과로 보였다. 컨셉이 과제를 돌파할 수 있는 정형적인 논리, 계획, 방향이 항상 중요하지만, 그 과제 이후의 과제를 위한 컨셉은 결국 비정형성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는 이율배반이 이 책의 컨셉이다. 납득하기 쉬운 컨셉보다 납득해야 하는 컨셉을 제시하는 수업이다.

 

 비슷한 범주의 무수한 책 사이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경제경영, 자기발 범주의 책을 아예 안 읽는다면 모르거니와 읽는다면, 읽어야 한다면 앞으로 이 이상의 책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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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네요! 푸른 님 이름이랑 구슬 님 이름을 영어로 하면 블루와 마블이니까 부루마블이랑 마찬가지네요. 진짜 신기한 우연이다."
루미가 재밌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푸른은 루미의 말을 흘려들으며 구슬을 봤다.
‘구슬 님도 나랑 부루마블을 만들게 될줄은 몰랐겠지? 귀찮은 일을 떠맡아서 기분이 안 좋으려나?‘
그때 푸른과 눈이 마주친 구슬이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가슴이 설렜다. 푸른은 부푸는 기대를 애써 억눌렀다.
‘김칫국 마시지 말자. 저건 업무용 미소야. 동료를 향한 사심 없는 미소. 예의상 짓는 미소라고. 나랑 일하게 돼서 짜증 난다는 티를 낼 수는 없으니까 억지로 웃는 걸 거야.‘
하지만 억지로 웃는다기에는 너무나 밝은 미소였다. 푸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미소를 외면했다. 사실은 기뻤다. 따로 보상도 없고 기한도 촉박한 일을 떠맡게 된 건 귀찮았지만, 그 일을 구슬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대됐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 P8.9

얼마나 깊게 빠지든 모든 사랑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푸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 P9

구슬은 익숙한 동작으로 보관대에서 자전거를 빼내어 타더니 금세 멀어졌다. 푸른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구슬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사실은 집이 어디인데 걸어가느냐고 물어봐주길 바랐다. 합정역 근처에 있는 회사에서 당산역과 영등포 사이에 있는 집까지 걸어가면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푸른은 사람으로 꽉 찬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걸어서 가는 것이 좋았다. - P13

"그래, 그럼 평생 이렇게 갇혀 있든가. 나도 시계에 갇혀 있나 이 방에 갇혀 있나 그게 그거야. 시계보단 여기가 낫지. 너랑 나랑 평생 여기서 둘이 살자. 어차피 금방 굶어 죽을 거라 같이 오순도순할 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 P27

"아니,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달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달린 게 아니야.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말고 얼른 전화해! 다시 말하지만 대단한 걸 하라는 게 아니고 전화만 하라니까?" - P28

"모노폴리라는 게 기본적으로 부동산 독점을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잖아요. 부루마블은 모노폴리의 일종이고요. 저는 솔직히 좀 거부감이 들어요. 다들 부동산 가격이 미친 도시에 살면서 집값 때문에 허덕이는데, 부동산 독점 게임을 만들고 즐긴다는 게 별로예요."
구슬은 그동안 이런 비판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조금 편해지신 걸까?‘ 생각하면서 푸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 P47.48

"아니에요. 모노폴리는 원래 부동산 독점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허무함이 모노폴리 게임의 진짜 정서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잠깐 꾸고 마는 꿈이 정말 의미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저한텐 그런 게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꿈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도요?"
"글쎄요, 그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저는 꿈이 현실을 바꾸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눈앞에 놓인 상황만 생각하면서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체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것보다는 내가 원하는것을 꿈꾸고,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쪽이 훨씬 더 좋아요."
푸른은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해놓고는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 P49.50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를 도는 거예요. 말도 자전거 모양으로 하고, 도시마다 있는 자전거 타기 좋은 길도 소개하고요. 방금 떠오른 거라 아직 구체적인 건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푸른의 이야기를 듣고 구슬도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데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별장이나 호텔을 짓는 대신 공공건축물을 지어도 좋겠어요. 미술관이나 도서관 같은 거요. 복지 센터도 좋고요. 도시에 건축물을 지으면 거기에 게임 참여자의 이름이 붙는 거죠." - P55

"당신이 정말 좋아."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마음이 그 말로 가득 차서 울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좋아. 정말, 정말로. 당신이 너무 좋아.‘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푸른은 가만히 누워 구슬을 떠올렸다. 사랑이 편안한 적은 처음이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랑은 처음이었다. 그저 더 다가가고 싶기만 했다. 더 가까이. 구슬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 이 순간 푸른은 구슬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 P70.71

"저녁 드셔야죠."
구슬이 상자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푸른은 감사하다는 말이 툭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고프네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 P109

"아니요. 그건 하나도 안 부담스러웠어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푸른 님 고백."
구슬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 그날 왜 그렇게 가신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푸른 님 방 문이 열려 있어서 무심코 안을 봤는데 뻐꾸기는 말하고 있고, 푸른 님은 주사위를 던지고, 침대 위에서 폭죽이 팡팡 터지고. 내가 모르는 이상한 게임이 펼쳐지고 있는데 푸른 님 같으면 거기 계시겠어요?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가서 이게 다 뭐냐고 물어볼 수 있으시냐고요."
"못 물어봤겠죠.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일단은 밖으로 나갔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랬군요."
두 사람은 어색하게 골목에 서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 P119.120

"제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중반부터는 제 의지였어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겁이 많은 성격이에요. 특히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거부당할까 봐 겁부터 나서 다가가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열심히 도망가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데 게임을 시작하고 나니까 도망가는 게 불가능해졌어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했죠. 먼저 전화도 하고, 뭘 하자고 이것저것 제안도 하고요. 실은 연락드릴 때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는데 구슬 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전 구슬 님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계속했던 거예요. 항상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고 싶어서요." - P121.122

"어쩌면 신들이 장난을 친 걸지도 모르겠네요."
신들의 장난. 푸른은 구슬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푸른이 구슬에게 고백한 직후에 일부러 ‘고백하기‘가 나오도록 장난을 친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지 같은 보드게임을 만든 자들이라면. - P123.124

"혹시 보드게임 담당 뽑는 주사위 던지기 했을 때도 구슬 님이 원하는 숫자가 나오게 하셨던 거예요?"
몇 번의 입맞춤 후에 푸른이 구슬에게 물었다.
"네, 푸른 님이 절 좋아하신 것보다 제가 먼저 푸른 님을 좋아했거든요."
"말도 안 돼. 언제부터요?"
"푸른 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요."
"그럼 저보다 더 먼저 좋아하신 건 아니네요. 저도 구슬 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거든요."
"영광이네요."
"저도 영광이에요."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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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마름을 보고 있다. 대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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