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랑이는 마음은 그냥 거기에 두기로 했다
권진희 지음 / 하모니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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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는 책이었다.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하여,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제는 지나간 계절처럼 잊혀졌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읽으면서 나 역시 오랜만에 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낯선 여행지에서 당황한 순간에 히어로처럼 나타나 다정을 베풀던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의 절반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저 웃으며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던 순간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 거리를 무시하고 자주 파고 들어와 나를 무너뜨리는 사람들, 그리하여 잊혀진 사람들.

그러고보면 삶에 사람이 없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혼자라고 느끼던 그 순간마저도 혼자인 경우는 드물었고 언제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관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던 20대가 지나고 어느정도 나를 지키는 범위 내에서 나만의 관계의 철학(?) 같은 것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고 여전히 관계가 발에 걸려 넘어지는 날이 잦았다. 다정이라는 말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아 다정해지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나는 결국 다정에 이끌려 유야무야 흘러가는 날도 많았다. 인생은 내 선택의 연속이라는데 관계에서만큼은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관계가 늘 힘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이유없이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그렇게 되려고 애썼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 나에게 말로 상처를 줬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저렇게 말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되고 오래됨을 무기로 나를 난도질하는 지인을 보면 사람에게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것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관계가 늘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관계를 통해 내가 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관계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흑백으로 담긴 사진들이 오히려 좋았다. 떠오른 사람들이 현재 진행형인 경우보다는 스쳐지난 경우가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지나간 계절들에게 안부와 다정을 담아 편지를 적고 싶어졌다. 짙은 초록으로 내달리다 네가 생각났어,로 시작하는 편지에 나와 너의 안녕보다는 지나간 시간들의 그리움과 그때의 풋풋했던 우리의 추억을 나열하고 그립다고 모든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단호함을 넣어 부디 평안하라는 끝 인사로 마무리하는 이기적인 편지. 물론 전해지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사람을 상처 입히는 건 재능이나 소질이 아니라 친밀도에 비례한다. 많은 관계에서 친밀한 무례에 쉽게 상처받아왔다. 그 상처는 쉽게 낫는 것이 아니어서 흉터가 되지 못하고 착실하게 적립되어 안에서부터 나를 좀먹어 들어가기도 했다.

번번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외로우니 사람이 그리워서 혹은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질질 끌려 다니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서로 주고받는 감정의 색과 질량이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내 애정을 무기삼아 무례를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보다 내가 지치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 그때부터 아직까지 모든 우리는 천천히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지 않은 거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 P83

여행 동안 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인연이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 덕분으로 어제보다 오늘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기 위한 시도를 한다. 또 만날 당신들에게 나 역시 근사한 선물이 되려고. - P101

인간이 겪는 많은 일들이 희석되고 잊힌다. 그렇게 결국 잊힐지 모르는 일들을 가지고 당신의 아픈 구석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섭다. 그 말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서. - P142

고여 있다고 여겨지는 나의 시간들. 어떤 결과물을 남기지 않기에 그 득실을 계산하기 어려운 그런 시간들을 사람들은 쉽게 무시하고 평가한다. 남 일에 오지랖 부리며 함부로 말하는 그 사람들이 덜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런가 나 지금 괜찮은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괜찮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도 오늘은 선물이라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같은 고민을 겪는 또 다른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 P144

상실을 상상하면 공허하고 두려운 것들은 원한 적도 없이 가진 것들이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어떻게 가졌는지 몰라서 잃는다면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마음을 쏟게 되어버린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의 상실을 떠올리고는 너무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이제껏 내가 사랑한 많은 것들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이미 아는데,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안팎으로 한결 간소하고 청빈한 생을 살았을 텐데.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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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 까미노 - 스물아홉, 인생의 느낌표를 찾아 떠난 산티아고순례길
김강은 지음 / 푸른향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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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나 진짜 산티아고 걸으러 가야 할까 봐'였고 두 번째는 나의 스물아홉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첫 번째 생각은 작년 말부터 올해를 가득 채워 산티아고를 부추기는 수많은 콘텐츠가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스물아홉에 순례길에 오른 작가의 나이 때문이었다. 아직 아홉수라곤 9살, 19살, 29살 세 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유독 29살이 힘들었던 것은 10대부터 20대를 모두 지나오면서 겪은 다양한 시행착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끝없이 이어져 오던 시행착오를 울며 견디다 보니 어느새 20대의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 편으로 아무것도 이루어둔 것이 없는데 벌써 30대라니,라는 생각이 29살의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의 29살도 참 많이 힘들었더랬다. 남들처럼 내가 벌써 서른이라니!라는 생각에 힘들었다기보다는 20대부터 쭉 이어오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많이 방황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주변의 "왜?"로 시작하는 말들을 견디는 일이 유독 힘들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때의 나에게 산티아고 여행길에 오를 것을 추천하고 싶어졌다.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묵묵히 걸으며 새로운 시작을 고민하고 때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걷다 보면 함께 걷는 사람들이 생기고 의지하고 그렇게 또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지 않을까 하면서.


오랜 벗과 각자의 고민을 안고 14kg의 배낭을 메고 걷는 일.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굳이 실천에 옮긴 적은 없어서 그녀들을 많이 부러워했다. 여러 방면에서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오랜 벗과 겨우 1박 2일을 떠나는 여행길마저도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잦은데 800km를 함께 걷는 일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때론 짠하고 때론 뭉클해서 마지막에 겨우 전한 고마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 오랜 벗들에게 자네 나와 산티아고를 가지 않겠나? 물음을 던지면 과연 몇 명이 긍정하며 바로 가방을 짊어질까 생각해봤다. 긍정은커녕 바로 곡소리부터 나오지 않을까. 휴가를 못 내서... 야근에 치여서... 돈이 없어서... (눈물)


사실 같은 여행지를 다녀오고도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들은 한없이 애틋하고 왜인지 동지애가 샘솟아 금방 친해지고 더 의지하게 되는데 일반 여행보다 훨씬 더 몸이 힘들고 고단한 산티아고를 향한 길 위의 인연은 얼마나 반갑고 애틋할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뭉클하다. 서로에 의지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면 어느새 또 만나게 되는 순례자들의 만남을 보며 자주 웃었다.

<스페인 하숙>이라는 예능을 보며 체크인하는 순례자들이 이런 말을 참 많이 했다. "곧 일행이 올 거예요", "여기서 또 만나네요" 사람마다 걷는 속도가 다르고 체력이 다르다. 누군가는 새벽의 길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오후의 빛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곳에 오래 머물다 천천히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길을 걷지만 함께 걷는 것을 강요하지 않을 것. 혼자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 것. 그게 참 좋았다.


넓게 펼쳐진 자연이 너무 아름다워 힘들어도 계속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홉수, 까미노>를 읽으며 실린 풍경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마치 내가 800km를 걷는 순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속도를 내어 걷는 날엔 나도 속도를 내어 책장을 넘기고 조금 천천히 걸을 때는 나도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그때마다 반기는 풍경이 좋아서 시선이 오래 머물렀는데 들었던 이야기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만화 <원피스>의 완결에 대해 왈가왈부 말이 많은 와중에 알고 보니 원피스는 없었다는 말이 가장 충격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의 결말 역시 비슷한 느낌인데 충격보다는 이제는 그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원피스를 찾아 떠난 여정이었지만 그 여정에서 만난 멋진 동료와 추억들이 오래 기억에 남아 앞으로를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 그리고 답을 찾아 떠난 까미노에서 진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길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과 추억과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아 앞으로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것이 어쩌면 같은 의미였다는 걸.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해야 할 일들을 만들고 그것들에 쫓겨 왔던, 그러나 정작 행복과는 멀어져 가던 나는 오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기보다 행복이란 감정을 쫓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이 순간의 우리는 어떤 속박과 굴레도 없는 자유로운 순례자였다. - P34

산티아고라는 한 지점을 향하는 까미노는 보통의 여행이랑 다르다. 많은 것들이 다르겠지만, 그중 가장 매력적인 차별점은 여행이라는 카테고리보다는 더 협소해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특수한 유대감을 주지만, 군대나 동아리 같은 집단보다는 개별적인 목적과 경험을 갖는다는 것이다. 똑같은 길을 걷기에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개개인의 경험이나 느낌이 조금씩 달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참 좋다. 이 길이 종교적인 길이라고 해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속 재료가 모이니 더 맛있는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어느덧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다국적 순례자들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의 맛깔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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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아이가 산다 - 5년차 부부의 난임 극복툰
우야지 지음 / 랄라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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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스타로 이미 오래 전부터 팔로우하고 보고 있는 우야지 작가님의 만화를 책으로 다시 한 번 읽게 됐다.

워낙 쏟아지는 컨텐츠 중에서 내가 꼭 원하는 컨텐츠를 찾아내 꾸준히 보는 것이 어려운 날에 우연히 보게 된 작가님의 만화는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임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진행 중이었는데 왜인지 응원하고 싶어져 팔로우를 시작한 것이 지금에까지 이어졌다. 요즘엔 소망이와 비슷한 개월수의 조카가 있어서 소망이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막 알게 되었던 즈음의 이야기는 하루하루가 굉장히 어려운 날들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릴 땐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여자에겐 평범하고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결혼하는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지만 아이를 낳는 일, 아니 아이를 갖는 일마저 그냥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다.

다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리적인 일들을 척척 행하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주변에 은근히 난임으로 걱정하는 지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혼란스러움을 기억한다. 그저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 임신을 미루는 줄 알았던 친구가 사실은 난임이었고 임신을 위해 꽤 오래 노력하다 최근에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을 때, 임신 소식을 전하던 다른 친구 역시 이제사 말하지만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눈물을 쏟았던 때 내가 참 무지했구나 반성하게 됐다. 몇 살에 결혼할거야,가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결혼하고 얼마 뒤에 아이를 가질거야,라는 계획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기도 했고 임신같은 일천지대사(!)를 계획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과한 욕심이었나 싶기도 했다.

남들 다 쉽게 하는 것 같은 임신이 나에게만 쉽지 않았을 때, 과연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이야기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감히 상상하다 그만두기로 한다. 만화책에 그려진 그림만 봐도, 기대가 좌절로 바뀌는 순간만 봐도 마음이 무겁고 어려워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으니까.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1부의 이야기가 끝나면 드디어 독자 역시 오랜 시간 기다리고 고대했던 순간이 2부부터 진행된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드라마에서 자주 듣던 그 말을 실제로 듣게 되었을 때, 아이가 드디어 내게 찾아왔다는 감격과 나도 해냈구나 밀려드는 안도감과 어쩐지 뭉클한 순간을 만나며 나도 조금 울었다. '임신'이라는 것이 이렇게 감동적이었나? 초음파 사진을 보는 순간이 이렇게 슬플 일인가! 하면서.

그렇지만 임신이 되었다고 일사천리 출산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임신입니다." 하는 순간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한 사투가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되는 일은 참 멀고도 험하구나....

그렇게 아이를 마주하던 날. 나는 아직 경험이 없지만, 조카를 만나던 날을 떠올려보았다. 올케의 뱃속에 있던 아가가 눈앞에서 낑낑-거리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내 아이도 아니면서 고생했을 올케, 내 동생이 아빠라니! 하는 복잡한 마음, 애쓰고 바깥으로 나왔을 조카 생각에 눈물을 쏟았었다. 고모가 되는 순간도 그렇게 감동적인데 엄마가, 아빠가 되는 순간은 얼마나 더 짠하고 찡하고 감동에 감격에 막 복잡할까.

그리고 아이와 함께 하는 생활이 그려진 3부. 조카의 크는 모습이 상상되어 아가아가했던 조카의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 여행을 했다. 이런 날도 있었지, 저런 날도 있었지. 육아는 해본 적이 없으면서 해본 마냥 공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또 웃었다.

3부까지 끝나면 마지막에는 난임부부를 위한 tip도 준비되어 있다. 결혼과 임신을 준비 중이시라면, 난임으로 고민 중이시라면 이 책을 추천한다. 나처럼 곁에서 조카를 지켜보는 고모, 삼촌, 이모들 역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누군가에겐 공감을, 누군가에겐 위로를, 또 누군가에겐 감동을 주는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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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구원
임경선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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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작가님의 교토 책을 닳도록 읽으며 껴안고 교토로 떠났던 것을 계기로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고 아껴서 다른 책들도 하나씩 읽어가던 중에 신작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운이 좋아서 '임경선 팔로워'가 되었고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가제본의 <다정한 구원>을 읽을 수 있었다.

다정한 구원, 발음할 수록 뭉클하여 다정하다는 말이 이토록 따뜻하고 애틋하였나 새삼 놀랐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떠났던 리스본을, 이제는 부모가 되어 아이와 함께 떠나는 여행.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여전히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모르는 부모님을 만나고 기억의 장소를 만나는 시간은 괜히 울컥하면서도 지금 바다를 향해 달리는 아이를 향한 따스한 시선만으로 안심이 되는 리스본의 시간이 참 좋았다. 다정한 것들이 주는 애틋함이나 위로나 안심이 나를 구원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리스본의 풍경을 떠올리며 산책하는 시간이 그저 좋았다. 가제본에 없는 이야기들을 기다리며 여러번 반복해서 읽는 동안 이미, 너무 행복했다.



리스본에는 이렇게 세월의 더께를 그대로 짊어진, 한때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조심스럽게 방치된 장소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방치되었다고 결코 소멸한 것은 아니다. - P74

이렇게 더디게 시간을 따라잡는 것 혹은 얼마간 그냥 놓아두는 자세는, 주말에 스스로 눈이 떠질 때까지 마음껏 느긋하게 자도록 허락하는 것처럼,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한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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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이 되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여권을 만들어 놓고도 일부터 구하라던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기듯 넣은 이력서가 단번에 붙어 취업에 성공! 10년짜리 여권을 만들어서 다행이야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내 그게 마음 한 켠에 한처럼 남았다. 취업을 조금 미루고 떠났더라면 지금 내 인생은 좀 달라졌을까.

그랬던 나와는 다르게 곧장 여행에 오른 그녀의 선택이 통쾌했다. 페이지마다 밝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덩달아 웃었다. 그녀의 여행이, 걸음이, 만남이, 이별이 나의 스물을 떠오르게 했다. 스물의 무모하지만 당당하고 좌절해도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긍정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더운 건 딱 질색이라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동남아'라는 곳을 이토록 매력적이게 보이도록 만든 것은 그곳의 푸르른 풍경이라던가 친절하고 순수한 사람들이라던가 단짠단짠의 동남아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스스럼없이 적어내린 그녀의 이야기와 계획보단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여행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내가 동남아에 가게 되면 이런 여행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의 여행을 쫓는 일이 즐거웠다. 동남아의 열기가 느껴져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그녀를 놓칠까봐 눈으로는 쉬지 않고 그녀를 쫓고 혹시나 나와 공통되는 부분을 만나게 되면 과하게 놀라면서 소녀처럼 웃었다. 그녀의 여행을 쫓다보니 마치 나도 스물이 된 것 같아서 그래서 재밌었다.





만약 20대에 그녀를 만났더라면 나도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까. 나도 스물에 지금처럼 조금 확실한 취향과 좋아하는 것이 있었더라면 강요가 아닌 당당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책을 읽을 수록 이미 흘러간 내 인생에 만약이 차곡차곡 쌓여 후회스러운 장면들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그게 딱히 싫지는 않았다. 상상 속 후회스러운 장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어도 그때의 나라면 분명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전혀 괴롭지 않았다. 20대에 읽었으면 조금 괴로웠을지도 모르겠지만 30대에 만나는 그녀의 이야기는 좋은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스무 살처럼 살고는 싶지만 다시 스무 살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금의 내가 좋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러 소리내어 대답해 봤다. 네, 지금의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성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여전히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을 요구한다거나 겨우 스무 살인 아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는 참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어린 날의 나 역시도 그런 강요와 압박 속에서 떠밀리듯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번복하는데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른이 도대체 뭐길래, 이럴 바엔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매일같이 일기에 그런 말을 적어내리며 울었다. 그저 친구들과 같이 뛰어놀고 밥먹고 수업받다보니,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생활하다보니 스물이 된 것인데 마치 내가 스물이 되기 위해 지금껏 살아온 마냥 치부되는 것이 매일 곤욕스러웠다. 그런 스무 살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스물에는 뭔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거나 스물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착각했다거나 스물이면 뭐든 스스로 해야한다고 믿는 그런 스무 살이 처음인 친구들이 읽으면 좋겠다. 단순히 나이의 앞자리 숫자만 바뀌는 것 외에는 스물이고 서른이고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찾아헤매고 찾았다면 꾸준히 이어갈 방법을 갈구하고 내가 잘 하는 것을 더 노력해서 발전시켜야 하고 나를 사랑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적어도 내 삶에서만큼은 내가 북쪽이라 믿는 곳이 진짜 북쪽이 되어줬음 좋겠으니까. - P26

하지만 고집으로 시작한 여행은 대개 용기로 바뀌어간다. 두려움은 내가 만든 마음이란 걸 알아차리는 순간 그 마음은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 P34

마음이 시켜서였을까.

마음이 불러서였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내 행동이 배신이라면

나는 완벽하게 나쁜 배신자일 거야. - P151

내 삶 곳곳에도 작은 초코바 하나쯤 숨겨놓는 게 좋겠다. 나의 허기짐을 달랠 수 있도록, 도저히 참지 못할 것만 같을 때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낼 수 있는 여행의 조각, 나의 사람들, 고양이나 노래쯤은 달콤한 초코바로 만들어 숨겨놓는 게 좋겠다. - P155

얼렁뚱땅 막무가내 휘청휘청, 하지만 끝내 반짝일 거라고 굳게 믿어요.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우리 모두 스무 살은 처음이잖아요! - P162

따지고 보면 여행도 똑같다. 깊게 생각하면 인생도 마찬가지다. 무섭다고 느낄 때마다, 해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때마다 그래도 일단은 해보겠다며 한 걸음 내디뎠기에 마음에 드는 풍경을 볼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른다.

걷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고, 머물러 있으면 아무 것도 만날 수 없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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