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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이는 마음은 그냥 거기에 두기로 했다
권진희 지음 / 하모니북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는 책이었다.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하여,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제는 지나간 계절처럼 잊혀졌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읽으면서 나 역시 오랜만에 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낯선 여행지에서 당황한 순간에 히어로처럼 나타나 다정을 베풀던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의 절반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저 웃으며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던 순간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 거리를 무시하고 자주 파고 들어와 나를 무너뜨리는 사람들, 그리하여 잊혀진 사람들.
그러고보면 삶에 사람이 없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혼자라고 느끼던 그 순간마저도 혼자인 경우는 드물었고 언제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관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던 20대가 지나고 어느정도 나를 지키는 범위 내에서 나만의 관계의 철학(?) 같은 것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고 여전히 관계가 발에 걸려 넘어지는 날이 잦았다. 다정이라는 말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아 다정해지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나는 결국 다정에 이끌려 유야무야 흘러가는 날도 많았다. 인생은 내 선택의 연속이라는데 관계에서만큼은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관계가 늘 힘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이유없이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그렇게 되려고 애썼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 나에게 말로 상처를 줬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저렇게 말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되고 오래됨을 무기로 나를 난도질하는 지인을 보면 사람에게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것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관계가 늘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관계를 통해 내가 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관계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흑백으로 담긴 사진들이 오히려 좋았다. 떠오른 사람들이 현재 진행형인 경우보다는 스쳐지난 경우가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지나간 계절들에게 안부와 다정을 담아 편지를 적고 싶어졌다. 짙은 초록으로 내달리다 네가 생각났어,로 시작하는 편지에 나와 너의 안녕보다는 지나간 시간들의 그리움과 그때의 풋풋했던 우리의 추억을 나열하고 그립다고 모든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단호함을 넣어 부디 평안하라는 끝 인사로 마무리하는 이기적인 편지. 물론 전해지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사람을 상처 입히는 건 재능이나 소질이 아니라 친밀도에 비례한다. 많은 관계에서 친밀한 무례에 쉽게 상처받아왔다. 그 상처는 쉽게 낫는 것이 아니어서 흉터가 되지 못하고 착실하게 적립되어 안에서부터 나를 좀먹어 들어가기도 했다.
번번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외로우니 사람이 그리워서 혹은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질질 끌려 다니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서로 주고받는 감정의 색과 질량이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내 애정을 무기삼아 무례를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보다 내가 지치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 그때부터 아직까지 모든 우리는 천천히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지 않은 거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 P83
여행 동안 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인연이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 덕분으로 어제보다 오늘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기 위한 시도를 한다. 또 만날 당신들에게 나 역시 근사한 선물이 되려고. - P101
인간이 겪는 많은 일들이 희석되고 잊힌다. 그렇게 결국 잊힐지 모르는 일들을 가지고 당신의 아픈 구석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섭다. 그 말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서. - P142
고여 있다고 여겨지는 나의 시간들. 어떤 결과물을 남기지 않기에 그 득실을 계산하기 어려운 그런 시간들을 사람들은 쉽게 무시하고 평가한다. 남 일에 오지랖 부리며 함부로 말하는 그 사람들이 덜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런가 나 지금 괜찮은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괜찮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도 오늘은 선물이라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같은 고민을 겪는 또 다른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 P144
상실을 상상하면 공허하고 두려운 것들은 원한 적도 없이 가진 것들이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어떻게 가졌는지 몰라서 잃는다면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마음을 쏟게 되어버린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의 상실을 떠올리고는 너무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이제껏 내가 사랑한 많은 것들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이미 아는데,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안팎으로 한결 간소하고 청빈한 생을 살았을 텐데.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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