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이 되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여권을 만들어 놓고도 일부터 구하라던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기듯 넣은 이력서가 단번에 붙어 취업에 성공! 10년짜리 여권을 만들어서 다행이야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내 그게 마음 한 켠에 한처럼 남았다. 취업을 조금 미루고 떠났더라면 지금 내 인생은 좀 달라졌을까.
그랬던 나와는 다르게 곧장 여행에 오른 그녀의 선택이 통쾌했다. 페이지마다 밝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덩달아 웃었다. 그녀의 여행이, 걸음이, 만남이, 이별이 나의 스물을 떠오르게 했다. 스물의 무모하지만 당당하고 좌절해도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긍정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더운 건 딱 질색이라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동남아'라는 곳을 이토록 매력적이게 보이도록 만든 것은 그곳의 푸르른 풍경이라던가 친절하고 순수한 사람들이라던가 단짠단짠의 동남아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스스럼없이 적어내린 그녀의 이야기와 계획보단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여행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내가 동남아에 가게 되면 이런 여행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의 여행을 쫓는 일이 즐거웠다. 동남아의 열기가 느껴져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그녀를 놓칠까봐 눈으로는 쉬지 않고 그녀를 쫓고 혹시나 나와 공통되는 부분을 만나게 되면 과하게 놀라면서 소녀처럼 웃었다. 그녀의 여행을 쫓다보니 마치 나도 스물이 된 것 같아서 그래서 재밌었다.

만약 20대에 그녀를 만났더라면 나도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까. 나도 스물에 지금처럼 조금 확실한 취향과 좋아하는 것이 있었더라면 강요가 아닌 당당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책을 읽을 수록 이미 흘러간 내 인생에 만약이 차곡차곡 쌓여 후회스러운 장면들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그게 딱히 싫지는 않았다. 상상 속 후회스러운 장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어도 그때의 나라면 분명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전혀 괴롭지 않았다. 20대에 읽었으면 조금 괴로웠을지도 모르겠지만 30대에 만나는 그녀의 이야기는 좋은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스무 살처럼 살고는 싶지만 다시 스무 살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금의 내가 좋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러 소리내어 대답해 봤다. 네, 지금의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성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여전히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을 요구한다거나 겨우 스무 살인 아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는 참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어린 날의 나 역시도 그런 강요와 압박 속에서 떠밀리듯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번복하는데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른이 도대체 뭐길래, 이럴 바엔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매일같이 일기에 그런 말을 적어내리며 울었다. 그저 친구들과 같이 뛰어놀고 밥먹고 수업받다보니,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생활하다보니 스물이 된 것인데 마치 내가 스물이 되기 위해 지금껏 살아온 마냥 치부되는 것이 매일 곤욕스러웠다. 그런 스무 살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스물에는 뭔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거나 스물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착각했다거나 스물이면 뭐든 스스로 해야한다고 믿는 그런 스무 살이 처음인 친구들이 읽으면 좋겠다. 단순히 나이의 앞자리 숫자만 바뀌는 것 외에는 스물이고 서른이고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찾아헤매고 찾았다면 꾸준히 이어갈 방법을 갈구하고 내가 잘 하는 것을 더 노력해서 발전시켜야 하고 나를 사랑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적어도 내 삶에서만큼은 내가 북쪽이라 믿는 곳이 진짜 북쪽이 되어줬음 좋겠으니까. - P26
하지만 고집으로 시작한 여행은 대개 용기로 바뀌어간다. 두려움은 내가 만든 마음이란 걸 알아차리는 순간 그 마음은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 P34
마음이 시켜서였을까.
마음이 불러서였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내 행동이 배신이라면
나는 완벽하게 나쁜 배신자일 거야. - P151
내 삶 곳곳에도 작은 초코바 하나쯤 숨겨놓는 게 좋겠다. 나의 허기짐을 달랠 수 있도록, 도저히 참지 못할 것만 같을 때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낼 수 있는 여행의 조각, 나의 사람들, 고양이나 노래쯤은 달콤한 초코바로 만들어 숨겨놓는 게 좋겠다. - P155
얼렁뚱땅 막무가내 휘청휘청, 하지만 끝내 반짝일 거라고 굳게 믿어요.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우리 모두 스무 살은 처음이잖아요! - P162
따지고 보면 여행도 똑같다. 깊게 생각하면 인생도 마찬가지다. 무섭다고 느낄 때마다, 해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때마다 그래도 일단은 해보겠다며 한 걸음 내디뎠기에 마음에 드는 풍경을 볼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른다.
걷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고, 머물러 있으면 아무 것도 만날 수 없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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