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바다가 나의 하늘입니다
박성호 지음 / 하모니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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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르 중에 유독 시집이 어려워 읽는 일을 꺼려하던 때가 있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멀어지는 존재가 시집이었던 터라 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나 집중하기 좋은 소설을 주로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누군가 시집을 편지 봉투 대신 사용하면 참 좋다는 이야기를 해준 후로 시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편지 쓰는 일을 좋아하는 내게 '편지 봉투 대신 시집'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시집을 찾아보게 됐다. 아무리 편지 봉투 대신이라지만 어쨌든 누군가에게 선물하게 되는 책인 만큼 편지를 받는 사람이 선물받은 시집을 좋아했으면 하고 바랐다. 시집을 열심히 읽었고 어렵다고 생각했던 시들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어느새 편지만큼이나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좋아하게 된 시집을 누군가에게 추천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함께 선물할 때 시집을 고르는 방법이 있다면 1순위는 제목이고 2순위는 아무 페이지나 펼쳤을 때 나를 붙잡는 문장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1순위와 2순위가 모두 충족되는 책이었다.









​나의 애달픈 사랑을 어쩔 줄 몰라 결국 밤마다 글로 적어 내린 날이 있었다. 표현하기 어려웠던 사랑이 단어로, 문장으로 겨우 적어지면 그런데로 숨이 쉬어지던 날들 말이다. 어느 날의 당신은 나에게 계절이었다가, 또 어떤 날의 당신은 나의 꽃이었다가, 문득 어느 밤에는 그저 그대인 날을 지나 이제 나는 없고 겨우 글로써 그대만 남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스치는 분홍빛 겉표지가 작은 바람에도 흩날리는 벚꽃인 양 조심히 어루만지며 시마다 떠오른 그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부디, 모두 행복하시기를.








바다의 푸른빛,
그 위로 비추는 하늘,
파도치는 음률이
그대에게 큰 위로가 되었나 봅니다.

그런 그대의 바다가
나의 하늘입니다. - P7

보듬어주는 애틋함과
웃어주는 선량함의 경계가
뚜렷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존재란
유달리 각별하기 때문이다

삶에 경이는
별 대수로울 것이 없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정의했으니 - P10

꽃 꺾어다 주는 것만
사랑인 줄 알았다

쪼그려 앉아
그 꽃 같이 보는 것은
사랑인 줄 모르고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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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
권호영 지음 / 푸른향기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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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자마자 즉답한 것은 '커피'였다.

조지아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고 조지아는 회사 다닐 때 잠 깨는데 도움을 주던 커피로 인상이 깊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묻는 조지아에 대체 뭐가 있는지에 대한 답이 커피일리 없지, 피식 웃으며 지도에 조지아를 검색했다. 흑해와 카스피 해를 사이에 둔, 터키와 이라크,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나라들로 둘러쌓인 처음 만나는 낯선 나라가 바로 조지아였다. 그동안 살아오며 한 번도 관심가지지 않은 나라, 책으로도, 어떤 매체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나라라서 그런지 나도 묻고 싶었다. 도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길래 책으로 나와 이런 무지한 내게까지 닿게 된 것인지에 대하여. 그렇게 지도 위 미지의 나라에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조지아라는 나라는 어떤 곳일지,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트빌리시, 카즈베기, 시그나기, 메스티아. 생소한 도시 이름들을 되새기며 여행을 쫓는다.

여행지를 선택하게 된 계기, 조지아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해야하는 일,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방법, 각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 숙소의 장단점,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나 가보면 좋은 카페 등을 여행 일정에 따라 소개하고 있다. 왜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제목 때문일까) 당연히 여행에세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지만 이 책은 조지아로 떠난다면 꼭 필요한 정보들을 꼭꼭 눌러 담은 가이드북에 더 가깝다. 아마 내가 만난 가이드북 중에 가장 딱딱하지 않고 말랑거리는 책이 아니었나.

그녀의 여행기를 쫓으며 조지아에 대하여 느낀점을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선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녀가 만난 조지아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웃고 있어서 책장을 넘기며 나도 따라 웃은 덕분이기도 하고 착한 아이입니다 표식을 한 강아지들이 사는 곳이기도 한 덕분이다. 으악스러운 일도 그곳에서는 일상처럼 흘러가는 것도 좋았고, 모든 집에서 마시는 술의 이름이 '차차'인 것이 단연 반갑고 좋았다. 어쩐지 책에서 따뜻한 햇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종종 껴안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좋았던 점.

사람마다 여행의 포인트는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맛있었던 여행이 유난히 더 좋은 기억으로 남는 편이라 이 책에 소개되는 다양한 음식들의 자세한 소개가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면, '양송이버섯에 치즈를 가득 넣고 구운 조지아 전통요리는 짭쪼름하고 고소한 맛이 쫄깃하게 스며들었다.', '손에 들고 쭈욱 찢었을 때 보이는 빵의 결이 일품이다.', '마치 맛있는 고기의 육즙이 터지듯, 토마토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상큼한 과즙이 톡 터졌다. 꽃향기가 났다.' 요리왕 비룡이라도 보는 듯한 음식 표현력에 감탄하며 입맛을 다시는 여행기가 좋았다. 여러 음식을 상상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먹는 동안 음식점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떠올리는 것이 좋았다. 아, 물론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거대한 풍경에 한동안 넋을 놓고 빠지던 일도 좋았다.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나리칼라 요새로 걸어 올라간다면, 도중에 만나는 골목 샛길로 잠시 빠져보면 좋겠다. 예상치 못하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들을 자꾸자꾸 마주치게 되니까. 푸르른 잎사귀 우거진 비탈길에서 과일 열매를 발견하기도 하고,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무렵이면 꿈뻑 잠에 빠져든 개나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며, 범퍼가 없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스릴 넘치는 골목 운전에 능한 운전사들을 만나 박수 칠 일도 있을 테니.
- P92

사랑을 하는 그 순간이 행복할 때에도 우리는 이 행복이 무너질까 두려워한다. 이런저런 이분법적인 마음은 왜 사랑을 하는 순결한 시간에도 찾아오는 걸까.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랑에 빠져 있는 마음을 작은 자물쇠라는 물건에라도 가두고 싶은 걸까. 사랑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 P104

산책은 여행의 일부였다. 자주 걸었지만 조금은 느렸고, 멀리 걸었지만 가끔은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산책하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여행의 질감을 느끼는 일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한다. 오감이 파르르 진동한다. ‘여행은 몸으로 읽는 텍스트‘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에 공감하며 걸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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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고 있습니다 - 수짱의 인생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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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기대됩니다 수짱 ㅜㅜ♥ 20대 끝자락에 유일하게 위로와 공감이 되어주던 수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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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은유하는 순간들
김윤성 지음 / 푸른향기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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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는 늘 칭찬을 위해 살았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봤고 사랑에 목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날들이 많았고 그게 잘 안되는 날에는 밤마다 이불 속에 들어가 꺽꺽 울었다. 그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줄곧 그렇게 살아온 나는 20살이 되어서도 부모님의 반대에 크게 맞서지 못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날은 많아져도 다음날이면 다시 아무 일도 없는 착한 딸이 되어 부모님 심기를 거스르는 말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 되었다. 언제나 내게 '나'는 우선 순위 밖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떠났던 여러 여행을 떠올렸지만, 유독 첫 여행을 많이 생각했다. 학교나 교회에서 단체로 가는 수학 여행이나 수련회 따위가 아닌 부모님이 없는 곳에서, 내 방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잔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여행'이라는 것은 나에게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착한 아이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알아가는 시간. 나에게는 여행이 은유였다.


여행을 떠나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도 없거니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멋진 경험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고 돌아갈 곳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리고 나는 자주 여행을 떠나고 여행을 그리워 한다. 현실에서는 실패하는 일이 두려워 도무지 용기를 내지 않으면서 여행에서는 언제나 용기 백 배의 사람이 되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뭐가 나를 그렇게 바꾸는 것일까 궁금하던 때도 있었다. 근데 이제는 그게 진짜 '나'라는 것을 안다. 낯선 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진짜로 되고 싶었던 내가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요즘처럼 온세계가 각각의 커다란 감옥이 된 듯, 집 밖으로 나가는 일도 쉽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여행 에세이를 만나 반가워 단숨에 읽었는데도 책을 덮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든다. '여행'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여운이, '은유'라는 두 글자의 울림이 오래 남는다. 책 안에 내가 가고 싶은 여행지가 가득 들어있어서 도시의 길을 상상하며 걷는 일이 좋았다. 나라 한 곳에 집중하여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좋았고 여행의 정보만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도 좋았다. 간간히 여행과 어울리는 좋은 글귀 역시.




하찮은 고양이로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삶이라면,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 맞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 사는지 질문할 때 아주 숭고하고 고매한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 P89

나는 뮌스터를 걸으며 도시의 아름다운 미래는 실용적인 질문에 반박하는 데서 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실용적인 질문은 현재를 살아가는 데 꼭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질문들이 도시의 아름다운 미래까지 보장해주지 않는다.

실용적인 질문에만 응답했던 대부분의 도시들이 추하게 변해갈 때, 비실용적인 질문에 응답했던 도시들이 시간과 함께 더욱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여행을 다니면서 셀 수 없이 목격했다.
그리고 그런 도시에는 어김없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할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P114

여행에서는 많은 언어를 알 필요가 없었다. 다만, 마음이라는 언어만 잘 습득하고 있으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따뜻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 P189

여행에서 만나는 예기치 못한 색깔은 작은 팔레트에 머물고 있는 내가 가진 색깔의 한계를 자주 넘어서곤 했다. 그때마다 왜 여행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행을 통해 색깔의 한계뿐만 아니라, 스스로 알지 못했던 한계들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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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산티아고
한효정 지음 / 푸른향기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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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나에게 마지막 책이 될 산티아고 책이라고 적어두고는 새해가 되었다고 없던 일로 시침을 떼고 산티아고 책을 또 만나게 됐다. 어쩌면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용기를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나와 비슷한 20-30대가 쓴 산티아고 책을 읽으며 내가 만약 산티아고로 떠난다면, 하는 가정하에 책을 읽었다면 이 책은 현재 푸른향기 출판사의 대표님이자 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작가님이 쓰셔서인지 우리 엄마가 지금 산티아고로 떠난다면, 하고 상상하며 읽게 되어 또 다른 느낌의 산티아고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작년에 방영했던(산티아고 이야기만 나오면 하게 되는 그 TV프로그램) <스페인하숙>에서 65세의 중년 여성이 한식을 해주는 알베르게라고 하여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분을 보며 함께 묵는 투숙객들, 출연 중인 배우들은 물론이고 TV를 보고 있는 나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문득 우리 엄마 생각이 났었다. 그때는 엄마가 산티아고로 떠났다면,이라는 가정보다는 엄마와 함께 떠났던 날들을 떠올렸고 그런 날들 사이 삐죽삐죽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던 내가 생각나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에게도 어른이 된 후에 새로운 꿈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사는 게 힘들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사라지고 싶은 날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었더니 괜히 더 애틋해져 기분이 이상했다.


힘들 때마다 쉽게 손 내밀어 도움을 청하고, 지치면 중간에 포기하고 푹신한 내 침대로 돌아올 수 있는 낯익은 거리가 아닌, 물도 설고 말도 선 땅에, 아무도 나를 위로할 수 없는 지구 반대편 세상에 나를 방목해 보고 싶었다. -프롤로그 중


그동안 만났던 산티아고 책과 조금 다른 점이라고 하면 역시 속도감이려나. 왠지 숨 가쁘게 흘러가는 순례길 속에서 쫓아가기 급급했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 책은 호흡이 조금 느린 편이라서 좋았다. 덕분에 나도 조금 천천히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게 유난히 더 공감이 되어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길 위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만남과 이별의 연속인 점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바라보는 시점이라던가 함께 걷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다르다 보니 공감하는 정도와 느끼는 바가 다른 점 등이 좋았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삶을 살아가듯이 순례길을 걷는 방법이 다양하고 그것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라던가, 마음의 문을 꾹 닫고 혼자서 묵묵히 걷겠다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속마음을 나누고 있었던 일들은 괜히 내 마음의 짐도 덜어내는 순간이 되어 홀가분해졌다.

여행을 떠나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장소를 거듭하며 종일 걷는 날은 수없이 많았지만 어딘가 한곳을 목표하여 광활한 풍경을 곁에 두고 묵묵히 걷기만 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다. 산티아고에 관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사진을 보고 전해 듣는 것으로 그 위를 걷는 상상은 하지만, 감히 그 무게를, 통증을, 외로움을 오로지 감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그렇게 걷는 걸까, 궁금했던 날도 있었고 몸이 망가질 때까지 걷는 일을 반복하는 무모함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의 여행은 '너무 애쓰지 말기'가 모토였기 때문에 더 감당할 수 없는 힘듦이기도 했다. 근데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좀 알 것도 같다. 오로지 혼자가 되어 걷기 시작한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언젠가 다시 만날 것처럼 쉽게 헤어지는 일이,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 결국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내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그렇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이 순례길을 걷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애초에 모두가 순례길을 통해 찾고 싶었던 답이 결국 '사람'이었을지도.



가까이 있으면 뿌리끼리 엉켜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나무처럼, 우리는 너무 가까운 탓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뿌리로 옭아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상대의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고, 알고 싶지 않은 속내를 알게 되어 관계를 치명적으로 몰아가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더 깊고 아픈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P47

우리 모두는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할 일이 있다. 나로 인해 알게 모르게 상처받았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 P50

모든 것은 변한다. 날씨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헤수스가 오늘 내 마음을 움직였듯이, 언젠가는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다. 먼 길 떠나온 나도 지금은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지만, 구름 걷히고 바람도 멈춘 어느 햇살 밝은 날 오늘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 P70

주역에 ‘무평불피 무왕불복(无平不陂 无往不復)‘이라는 말이 있다. ‘언덕 없이 마냥 평평한 땅은 없고,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늘 평평하기만 하다면, 늘 맑은 날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지루할까. 거친 언덕과 비바람 속을 지나며 나는 더 단단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느리게 걷다 보니 몸을 낮춘 작은 꽃들도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행복은 시선을 낮춘 그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 P110

어쩌면 우리는 가진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기 위해 여행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속까지 텅텅 비우고 돌아오는 일, 그것이 여행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 P242

"좋고 나쁜 것은 없어요.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우린 다를 뿐이에요. 꽃들도 제각각 다르지만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저마다의 색깔로 꽃을 피워내잖아요. 꽃 색깔이 다르다 해서 그 누구도 꽃이 틀렸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의 색깔대로 우리 앞의 생을 살아낼 뿐, 그 누구도 내 삶의 방식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일이에요." - P258

다시 돌아가 걸어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안개 같은 날들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나는 살아낼 것이다.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도 없지만 사람만큼 위로가 되는 존재도 없다는 것을 길 위에서 배웠으므로. 나의 부족함이 오히려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될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길을 잃으면 마음의 화살표를 따라가라고, 노란색 화살표가 말해주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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