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산티아고
한효정 지음 / 푸른향기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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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나에게 마지막 책이 될 산티아고 책이라고 적어두고는 새해가 되었다고 없던 일로 시침을 떼고 산티아고 책을 또 만나게 됐다. 어쩌면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용기를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나와 비슷한 20-30대가 쓴 산티아고 책을 읽으며 내가 만약 산티아고로 떠난다면, 하는 가정하에 책을 읽었다면 이 책은 현재 푸른향기 출판사의 대표님이자 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작가님이 쓰셔서인지 우리 엄마가 지금 산티아고로 떠난다면, 하고 상상하며 읽게 되어 또 다른 느낌의 산티아고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작년에 방영했던(산티아고 이야기만 나오면 하게 되는 그 TV프로그램) <스페인하숙>에서 65세의 중년 여성이 한식을 해주는 알베르게라고 하여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분을 보며 함께 묵는 투숙객들, 출연 중인 배우들은 물론이고 TV를 보고 있는 나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문득 우리 엄마 생각이 났었다. 그때는 엄마가 산티아고로 떠났다면,이라는 가정보다는 엄마와 함께 떠났던 날들을 떠올렸고 그런 날들 사이 삐죽삐죽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던 내가 생각나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에게도 어른이 된 후에 새로운 꿈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사는 게 힘들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사라지고 싶은 날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었더니 괜히 더 애틋해져 기분이 이상했다.


힘들 때마다 쉽게 손 내밀어 도움을 청하고, 지치면 중간에 포기하고 푹신한 내 침대로 돌아올 수 있는 낯익은 거리가 아닌, 물도 설고 말도 선 땅에, 아무도 나를 위로할 수 없는 지구 반대편 세상에 나를 방목해 보고 싶었다. -프롤로그 중


그동안 만났던 산티아고 책과 조금 다른 점이라고 하면 역시 속도감이려나. 왠지 숨 가쁘게 흘러가는 순례길 속에서 쫓아가기 급급했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 책은 호흡이 조금 느린 편이라서 좋았다. 덕분에 나도 조금 천천히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게 유난히 더 공감이 되어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길 위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만남과 이별의 연속인 점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바라보는 시점이라던가 함께 걷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다르다 보니 공감하는 정도와 느끼는 바가 다른 점 등이 좋았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삶을 살아가듯이 순례길을 걷는 방법이 다양하고 그것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라던가, 마음의 문을 꾹 닫고 혼자서 묵묵히 걷겠다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속마음을 나누고 있었던 일들은 괜히 내 마음의 짐도 덜어내는 순간이 되어 홀가분해졌다.

여행을 떠나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장소를 거듭하며 종일 걷는 날은 수없이 많았지만 어딘가 한곳을 목표하여 광활한 풍경을 곁에 두고 묵묵히 걷기만 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다. 산티아고에 관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사진을 보고 전해 듣는 것으로 그 위를 걷는 상상은 하지만, 감히 그 무게를, 통증을, 외로움을 오로지 감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그렇게 걷는 걸까, 궁금했던 날도 있었고 몸이 망가질 때까지 걷는 일을 반복하는 무모함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의 여행은 '너무 애쓰지 말기'가 모토였기 때문에 더 감당할 수 없는 힘듦이기도 했다. 근데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좀 알 것도 같다. 오로지 혼자가 되어 걷기 시작한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언젠가 다시 만날 것처럼 쉽게 헤어지는 일이,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 결국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내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그렇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이 순례길을 걷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애초에 모두가 순례길을 통해 찾고 싶었던 답이 결국 '사람'이었을지도.



가까이 있으면 뿌리끼리 엉켜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나무처럼, 우리는 너무 가까운 탓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뿌리로 옭아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상대의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고, 알고 싶지 않은 속내를 알게 되어 관계를 치명적으로 몰아가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더 깊고 아픈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P47

우리 모두는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할 일이 있다. 나로 인해 알게 모르게 상처받았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 P50

모든 것은 변한다. 날씨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헤수스가 오늘 내 마음을 움직였듯이, 언젠가는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다. 먼 길 떠나온 나도 지금은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지만, 구름 걷히고 바람도 멈춘 어느 햇살 밝은 날 오늘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 P70

주역에 ‘무평불피 무왕불복(无平不陂 无往不復)‘이라는 말이 있다. ‘언덕 없이 마냥 평평한 땅은 없고,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늘 평평하기만 하다면, 늘 맑은 날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지루할까. 거친 언덕과 비바람 속을 지나며 나는 더 단단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느리게 걷다 보니 몸을 낮춘 작은 꽃들도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행복은 시선을 낮춘 그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 P110

어쩌면 우리는 가진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기 위해 여행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속까지 텅텅 비우고 돌아오는 일, 그것이 여행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 P242

"좋고 나쁜 것은 없어요.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우린 다를 뿐이에요. 꽃들도 제각각 다르지만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저마다의 색깔로 꽃을 피워내잖아요. 꽃 색깔이 다르다 해서 그 누구도 꽃이 틀렸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의 색깔대로 우리 앞의 생을 살아낼 뿐, 그 누구도 내 삶의 방식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일이에요." - P258

다시 돌아가 걸어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안개 같은 날들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나는 살아낼 것이다.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도 없지만 사람만큼 위로가 되는 존재도 없다는 것을 길 위에서 배웠으므로. 나의 부족함이 오히려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될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길을 잃으면 마음의 화살표를 따라가라고, 노란색 화살표가 말해주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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