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은유하는 순간들
김윤성 지음 / 푸른향기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학창 시절에는 늘 칭찬을 위해 살았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봤고 사랑에 목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날들이 많았고 그게 잘 안되는 날에는 밤마다 이불 속에 들어가 꺽꺽 울었다. 그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줄곧 그렇게 살아온 나는 20살이 되어서도 부모님의 반대에 크게 맞서지 못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날은 많아져도 다음날이면 다시 아무 일도 없는 착한 딸이 되어 부모님 심기를 거스르는 말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 되었다. 언제나 내게 '나'는 우선 순위 밖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떠났던 여러 여행을 떠올렸지만, 유독 첫 여행을 많이 생각했다. 학교나 교회에서 단체로 가는 수학 여행이나 수련회 따위가 아닌 부모님이 없는 곳에서, 내 방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잔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여행'이라는 것은 나에게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착한 아이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알아가는 시간. 나에게는 여행이 은유였다.


여행을 떠나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도 없거니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멋진 경험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고 돌아갈 곳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리고 나는 자주 여행을 떠나고 여행을 그리워 한다. 현실에서는 실패하는 일이 두려워 도무지 용기를 내지 않으면서 여행에서는 언제나 용기 백 배의 사람이 되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뭐가 나를 그렇게 바꾸는 것일까 궁금하던 때도 있었다. 근데 이제는 그게 진짜 '나'라는 것을 안다. 낯선 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진짜로 되고 싶었던 내가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요즘처럼 온세계가 각각의 커다란 감옥이 된 듯, 집 밖으로 나가는 일도 쉽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여행 에세이를 만나 반가워 단숨에 읽었는데도 책을 덮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든다. '여행'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여운이, '은유'라는 두 글자의 울림이 오래 남는다. 책 안에 내가 가고 싶은 여행지가 가득 들어있어서 도시의 길을 상상하며 걷는 일이 좋았다. 나라 한 곳에 집중하여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좋았고 여행의 정보만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도 좋았다. 간간히 여행과 어울리는 좋은 글귀 역시.




하찮은 고양이로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삶이라면,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 맞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 사는지 질문할 때 아주 숭고하고 고매한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 P89

나는 뮌스터를 걸으며 도시의 아름다운 미래는 실용적인 질문에 반박하는 데서 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실용적인 질문은 현재를 살아가는 데 꼭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질문들이 도시의 아름다운 미래까지 보장해주지 않는다.

실용적인 질문에만 응답했던 대부분의 도시들이 추하게 변해갈 때, 비실용적인 질문에 응답했던 도시들이 시간과 함께 더욱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여행을 다니면서 셀 수 없이 목격했다.
그리고 그런 도시에는 어김없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할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P114

여행에서는 많은 언어를 알 필요가 없었다. 다만, 마음이라는 언어만 잘 습득하고 있으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따뜻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 P189

여행에서 만나는 예기치 못한 색깔은 작은 팔레트에 머물고 있는 내가 가진 색깔의 한계를 자주 넘어서곤 했다. 그때마다 왜 여행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행을 통해 색깔의 한계뿐만 아니라, 스스로 알지 못했던 한계들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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