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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을 찾아가는 까닭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공항대합실에 서서 출발하는 항공편들의 목적지를 볼 때마다 그토록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망각, 망실, 혹은 망명을 향한 무의식적인 매혹.                                                        -김연수, 《여행할 권리》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떠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곳, 공항. 소설가 김연수가 말했듯, 여기만 아니라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항은 그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여느 일상과 다른 나의 존재. 그것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꼭 정치적 망명이 아니더라도 문화 망명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재미까지.

그래, 왜 아니겠는가. 공항은 생에 스핀을 먹이는 행위가 이뤄지는 곳이다. 김연수의 표현을 빌자면, "생을 바꾸는 공간"이다. 스핀이 제대로 먹었느냐, 아니냐는 일단 떠나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 떠나보면 알게 될 거야, 라는 책 제목만큼 공항에서 맞아떨어지는 건 없다. 떠나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여행, 또한 그것이 생이다.

나도 생을 바꾸기 위해서였을까, 공항에 서 있다.  

역시나 언제나처럼 두근세근. 떠남은 곧 박동임을 확인한다. 이번에는 동티모르다. 살짝 낯 익은 세계다. 동티모르 사람들이 생산한 (공정무역)커피를 다루고 있는 커피쟁이니까. 나는 그 커피를 통해 동티모르의 자연과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러나 낯선 땅이다. 내 발과 몸은 동티모르를 모른다. 그래서 궁금했다. 처음 밟아보는 그 땅은 내게 어떤 지령을 안겨줄까.

혹시 그것 아는가? 비행기가 땅에서 이별(이륙)하는 원리. 그것은 엔진의 추진력과 날개의 양력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로 향하겠다는, 승객들의 마음. 그 마음들도 비행기를 뜨게 한다. 동티모르를 향한 각자의 마음가짐과 설렘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비행기를 뜨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직항은 없지만, 경유지를 거친 동티모르행 비행기를 뜨게 한 동력에는, 내 마음도 있었다. 간다, 동티모르. 기다려라, 동티모르.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동티모르인 여러분. 

 

커피를 만드는 사람인 나는, 지난 7월 커피 산지를 찾았다. 동티모르 공정무역커피를 다루면서,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세계의 잇닿아있음. 동티모르 커피노동자와 한국 커피노동자는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글과 사진, 관념으로 알고 있던 그것. 나는 그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염원을 품고, 비행기가 이륙한다. 나는 이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 누군가는 이륙할 때의 이물감이 싫어서 비행기 타기를 주저한다지만, 나는 변태스럽게도 오르가슴을 느낀다. 마음이 몸을 뜨게 만드는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 있다는 설렘이 주는 쾌감이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짧은 밤, 머물렀다. 동티모르 직항이 없는 까닭이었다. 발리 덴파사공항에서 2시간여 남짓한 거리지만, 그 2시간을 더 날 수 있는 정치적 힘은 없다. 발리를 상징한다는 꽃, 캄보자의 강렬한 향이 내가 낯선 땅에 와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후텁지근하고 눅눅한 날씨. 동티모르의 날씨는 어떨까, 그것이 더 궁금했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스쳐지나듯 발리를 떠난다. 비행기편으로 발리로부터 1시간50분, 호주 다윈으로부터 1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동티모르.  

공식명칭은 티모르 공화국이다. 동티모르 언어인 테툼어로 티모르 로로사에(Timor Lorosa'e)라 부른다. 남지나해와 인도양 사이 티모르 섬의 동부와 티모르 섬의 서부 일부만을 동티모르로 일컫는다. 티모르 섬은 호주와 인도네시아가 통치하는 여러 섬에 둘러싸여 있다. 지리적으로는 오세아니아에 속하지만, 정치·경제·문화적으로는 아시아의 일부로 본다.

이런 지형 여건은 식민의 역사와도 깊은 연관을 맺는다. 1520년부터 시작된 400년 이상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1975년 11월,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나, 다음달 인도네시아의 무력침공으로 이듬해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강제편입됐다. 이후 독립을 향한 여정은 멀고 험했다. 2002년5월20일, 인도네시아로부터 완전히 독립, 공식 인정을 받았다.  

21세기 첫 독립국이 됐다는 명예를 받았지만, 여전히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한국도 독립 직전, 상록수 부대 등을 PKO(평화유지군) 파병의 명분으로 보낸 바 있다. 박희순, 고창석씨가 주연한 <맨발의 꿈>의 배경이 동티모르다.   

어쨌든, 발리에서 동티모르로 가는 여정은, 쉬이 길을 내주진 않았다. 만만디 습성이라고나 할까. 발리와 동티모르를 오가는 하루 한 편의 비행기는 연착은 대수요, 기다림은 필수였다.  

 

'메르파티(Merpati, 비둘기)'라는 이름의 비행기는 우리의 사라진 기차, '비둘기호'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기체는 낡았다. 비행기 안에서 난생 처음 바퀴벌레를 만나는 일을 겪었지만, 상관 없었다. 나는 비둘기의 꼬리를 잡고 동티모르로 향한다. 무언가 좋은 소식을 들고 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다. 비둘기는 자고로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 아니었던가.   

마침내, 동티모르 사람들이 사는 나라, 동티모르 커피가 자라고 있는 땅에 첫발을 디뎠다. 그 첫 순간, 이곳을 사랑하게 되리라, 직감했다. 허울만 좋은 10위권 경제대국 이방인의 눈에, 오랜 식민지배와 내전을 거친 동티모르는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눈빛과 자연은 그것이 다가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동티모르였다. 나는 동티모르를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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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커피를 하고자 마음 먹었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다. 고향은 언제나처럼 좋았고, 영화도 좋았다. 바다는 날 반겼고, 친구들은 여전했다. 부산은 그런 곳이다, 내겐.  

그리고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향하는 날, 친구 집에서 새벽같이 움직여 지하철을 탔다.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표정을 지켜봤다. 지하철이든 버스든, 새벽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블루칼라' 계층이다. 이른 새벽에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면 알 수 있다. 블루칼라가 여는 아침을. 영화를 실컷 즐기다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가는 당시 내 처지와 달리, 그들은 하나 같이 굳은 얼굴이었다. 생의 고단함이 온 몸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커피가 떠올랐다. 그들의 고단한 아침에 커피 한 잔의 위로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과 함께, 그들에게 작은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커피를 건네고 싶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여균동, 김조광수, 김꽃비 등 1543명의 영화인들은 "김진숙, 그녀와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라는 연대감을 표했다. 지상에서 35m 타워크레인 85호에 놓여 있는 김진숙 위원에게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 한 편 보여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예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가 생각나면서, 나는 김진숙 위원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고 싶었다. 내 마음과 그녀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내린 커피를 말이다. 그렇게, 한 사람을 위한 커피. (* 김진숙 위원이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에 오른 지 288일째다. 그를 지키는 정흥영, 박영제, 박성호 씨가 오른 지 116일째 되는 날이다.)

커피는 여전히 내게 새로움과 배움을 안겨준다. 홍대부근 '마지'에서 열린 《커피 마스터클래스》 신기욱 저자의 커피 강연에서도 그랬다. 그를 두 번째 만났다. 과거, 커피마루 MT에서 만났었다. 물론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강연도 좋았고, 책도 참 좋았다. 커피를 만들면서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잘못에서 탈피하게 해주거나 이론적으로 강화해주는 계기도 됐다. 내 커피가 좀 더 깊어지고 세심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고맙다.  

아래는, 그 유익한 배움과 새로움이 있었던 시간에 대한 나의 기록이다. 잡스의 생물학적 정자제공자(아버지), 압둘파타 잔달리의 회한을 끄집어낸 것은, 커피 한 잔의 슬픔 때문이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이말, “때때로 인생은 단지 커피 한 잔의 문제, 혹은 커피 한 잔이 가능케 해주는 친밀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과 조응하는 그의 회한. 아들과 커피 한 잔 나누고 싶다는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슬픔. 

밤9시,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은 그러니까, 온전히 한 사람, 당신만을 위한 것이다. 아침을 깨우는 당신을 위한 커피 한 잔, 김진숙 위원을 위한 커피 한 잔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생의 고단함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당신을 위한 커피 한 잔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날을 꿈꾸고 있다.  

물론, 그 모든 것 물리치고라도, 나는 사랑하는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커피를 내려서 함께 느끼고 사랑하고 싶다. 그녀가 내게 건네는 이 말, "커피, 참 맛있다." 내 생은 그 커피 한 잔으로도 충분하다.   

커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마지'의 몇 가지 조언

가을이다. 커피, 생각난다. 울긋불긋 휘황한 단풍의 향연도 좋지만, 커피만큼 가을을 느끼게 하는 게 있을까. 특히나 비오는 가을아침의 커피는, 하루를 송두리째 바쳐도 좋을 만큼 맛있다. 온몸을 휘감는 커피에 나는 포로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마음까지 담은 커피 한 잔이라면, 그보다 좋을 순 없다.

비오는 가을아침의 커피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온과 기압 때문이란다. 쌀쌀한 가을날의 아침, 커피를 통해 몸의 신진대사를 끌어올릴 뿐 아니라, 낮은 기압 때문에 처진 몸을 일으켜 세운다. 커피향이 더욱 풍부하게 느껴지는 이유에 기압도 한 몫 한다.

그렇게 가을은, 커피의 계절이다. 가을 한 잔이 절실해지는 즈음이다. 낙엽이 지고, 한 해가 저물고 있다는 이유로,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더구나 10월은 공정무역의 달. 커피라는 창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사랑한다면, 커피 한 잔. 끝내 커피 한 잔 못 나눈 채, 작별했던 사연이 슬프다. 지난 5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의 생물학적 정자제공자, 압둘파타 잔달리의 경우다. 잡스가 암 투병할 때 잔달리는 “더 늦기 전에 함께 커피 한 잔이라도 한다면 행복하겠다”고 바랐지만, 잡스와 끝내 만나지 못했다. 끝내 내리지 못한 커피의 눈물.

아울러 커피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정을 착취하는 ‘콩다방’을 비롯한 프랜차이즈업체들에겐 혁명적 커피의 본때를. (청년유니온과 커피빈코리아 아르바이트생 8명은 최근 커피빈코리아 대표를 주휴수당 및 연차수당 등 미지급 임금체불 건으로 고발했다.) 공정해야 할 대상은 생산자뿐 아니다. 공정함은 바로 옆 개별의 인간에게 새겨진 존엄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돼야 한다. 커피는 그저 거들뿐.

지난 7일, 금요일의 가을밤, 더 깊은 커피를 만나기 위해 서울 홍대 부근의 ‘마지’로 향했다. 『커피 마스터클래스』 출간기념, 신기욱 저자의 핸드드립 커피체험 및 강의에 동참한 시간. 커피가 흐르고, 마음이 반응했다.  

수많은 커피지망생 중의 한 명으로서, 커피를 만들고 있는 남자인 나는, 여전히 웅숭깊고 드레진 커피의 자태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커피의 세계가 넓고 깊은 한편, 지난여름 동티모르 공정무역 커피산지를 다녀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연의 배려로 인간이 일구어낸 내 커피의 실존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함.

커피, 어떻게 보관할까  

 

마지의 커피 철학은, ‘커피는 음식이다’에서 출발한다. 음식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많이 먹어봐야 한다. 그래서 커피 역시 많이 먹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편견 없이 많이 먹을 것을 권한다. 그러면 답이 나온다. 편안하게 즐기면서 마실 것. 맛없는 커피도 마셔봐야~ 아, 이래서 커피는 맛있고 봐야 하는구나, 하고 절감하게 된다는 말씀.

이날 커피 강의의 시작은 보관에서부터다. 볶은 커피(원두)는 밀폐용기에 넣고 어둡고 시원하고 습기가 없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커피는 수분율이 낮아서 습기 먹는 하마가 되기 때문이다. 또 밀폐용기는 불투명해야 한다. 빛을 막기 위해서다. 깡통에 보관하거나 불투명한 용기가 없으면 어두운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다만 플라스틱 용기는 피하는 것이 좋다. 커피 맛이 빨리 변질되기 때문이다.

커피를 보관할 때는 밀폐된 용기를 사용하고, 빛과 외부의 공기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p.152)

그렇다면 냉장냉동 보관은 어떨까?

마지는 그것을 권하지 않는다. 냉장고에는 온갖 냄새들이 창궐하고 제대로 밀폐된 용기가 아니면 냄새가 배일 우려가 크고, 냉동 보관은 꺼낼 때 온도차 때문에 결로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커피 맛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냉동고에서 꺼낸 뒤에는 실내온도만큼 올라간 뒤에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마지의 당부다. 큰 용량이 싸다고 넘어가지 마라. 커피 맛은 저렴해진다.

“무조건 조금씩 사라. 커피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택배비 무료의 함정에 빠지지 마라. 그리고 멀리 있는 유명한 집보다 집 주변에서 사라!”

커피는 음료이자 음식이기 때문에 항상 보관에 유의해야 하고 수시로 변질이 없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원두의 유효기간은 법적으로는 1년으로 정해져 있지만, 실제로는 원두 내부의 가스가 빠져나가는 시기와 연관이 있다.(p.152)

커피 추출의 이해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커피 입자를 물과 만나게 해야 한다. 즉, 커피 안의 성분을 제대로 뽑아내야 한다. 커피의 추출방식은 크게 침출과 여과가 있다. 침출은 커피 입자가 물속에 잠겨 우려지면서 추출되는 것이며, 여과는 커피 입자에 물을 부어서 입자는 걸러내고 커피의 유효성분만 뽑아내고는 과정이다.

마지는 드립 커피(정확한 용어: manuel pour over brewing coffee)를 뽑을 때의 용해와 확산이라는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했다. 용해는 녹는 것이다. 두 물질이 균일하게 섞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로스팅 과정에서 형성된 커피 맛을 내는 성분이 물을 만나면 녹아나온다.

확산은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용질이 옮겨가는 현상이다. 즉, 커피 세포 안의 용액과 새로 부은 물 사이의 농도 차 때문에 커피 용액은 새로 부은 물 쪽으로 커피의 성분을 내보낸다.

“로스팅된 커피는 수많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방안에 커피 성분들이 들어 있다. 분쇄를 통해 방이 노출돼 물에 직접 닿아서 용해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확산의 원리로 추출이 된다.”

마지는 커피 추출의 세 요소로 양, 굵기, 온도를 꼽았다. 세 요소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커피 맛은 달라진다. 자신의 입맛과 취향에 맞춰 이를 결정하면 된다. 진하게 마시고 싶을 때는 양을 많이 가져가거나, 커피 입자의 굵기를 가늘게 해도 되며, 물의 온도를 더 뜨겁게 한다. 반대의 경우는, 세 요소를 감안해 커피를 뽑으면 된다.

물의 온도와 관련된 마지의 팁도 따라온다. 커피 맛을 좋게 할 수 있는 물의 온도는 90~92도가 좋단다. 다만, 92도는 한계 온도다. 커피의 성분인 카페인은 92도 이상에선 모양이 틀어지면서, 커피는 타이어(고무) 타는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것. 커피에서 고무 탄 내가 난다면 물 온도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온도가 절대적이진 않으나 온도가 너무 높으면 커피의 좋지 않은 성분이 나온다. 맛있는 커피를 뽑기 위한 이상적인 조건이 있으나, 커피에 따라, 재료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이상적인 것만 추구하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이상적인 것만 나온다.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다. (웃음)”

아울러, 커피 추출할 때 맛은 추출 시간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추출 온도는 추출시간 역시 고려해야 한다. 추출 시간이 짧을 때는 높은 온도가 좋고, 길 때는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가 좋다.

물의 온도는 각 개인이 선호하는 맛과 추출 시간 등을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는 추출 시간에 따라서 대략 80~90도까지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p.192)

드립 커피를 뽑을 때는 이렇게 


마지는 드립 커피를 기준으로 추출 실습과 체험을 했다.

핸드 드립은 커피메이커나 에스프레소 머신 등 특별한 가전제품이나 복잡한 기구 없이도 드리퍼와 여과지만으로 간단히 커피를 추출해 마실 수 있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다양한 도구들을 구비해 맛의 변화도 즐길 수 있다.(p.157)

물줄기에 대한 마지의 팁이다.

“커피가 물과 고르게 만나 섞일 수만 있으면 꼭 동그라미로 붓지 않아도 된다. 다만 가능한 같은 곳에 붓지 않도록 한다. 달팽이 모양의 원심으로 붓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물줄기 굵기는 크게 상관없다. 고르게 섞일 수 있다면.  

다만 물줄기가 가늘면 고르게 섞을 수 있어서 훨씬 유리하다. 가늘게 하는 거? 하다 보면 무조건 는다. (웃음) 가늘게 붓는 게 유리하나 때론 굵게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커피가 맑고 가볍냐, 진하고 무겁냐, 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식으로 물을 부어주는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지그재그로 물을 부어주든 하트 모양을 그리든 별을 그리든 커피와 물이 고르게 만나게 해주어 커피를 안정적으로 추출할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물을 같은 자리에 계속 부어주어서는 안 된다.(p.179)

커피 한 잔은 120ml(4온스)로, 한 잔당 약 10g의 커피를 사용한다.

처음 물이 커피와 만나는 과정, 사전 추출이다.

커피가 뜨거운 물을 처음 만나, 봉긋 부풀어 오른다. 이는 원두의 세포구조 때문이다. 커피를 볶으면 커피 세포 안에 부피의 2.2배 이상의 가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 뜨거운 물을 부었는데,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면, 일단 의심하라. 오래된 원두일 수 있다. 다만, 굵기가 너무 굵어도 잘 부풀어 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가스는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최적의 보관 조건에서 커피 가스가 다 빠져나가는 건, 두 달 반가량 걸린다.”

사전 추출은 대개 ‘뜸들이기’라고 불리나, 마지는 적절하지 않은 명칭이라고 지적한다. 뜸들이기는 음식을 끓이거나 굽고 난 후 남은 열을 이용해 맛을 풍부하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전 추출은 용해와 확산이 일어날 준비를 하는 단계인데, 통상 커피의 중량과 같은 중량의 물을 부어준다. 30~40초가 적당하다.

용해와 확산이 잘 일어나도록 본격적인 추출 전에 커피 세포 안으로 물을 부어주고 30~40초 정도 기다리는 것을 사전 추출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충분히 추출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p.176)

추출이 이어진다. 3~4번에 걸쳐 물을 나누어 부어주면서 원하는 양을 뽑는다. 역시 고루고루 물을 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가운데는 커피 양이 많아서 물을 천천히 혹은 많이 부어주는 것이 좋다. 주변부로 갈수록 커피의 양이 줄므로 좀 더 빠르게 혹은 가늘게 물을 만나게 해준다. 총 추출시간은 얼마면 될까? 총 2분을 넘지 않는 게 좋다는 쪽으로 잡히고 있다는 게 마지의 설명이다.

마지의 드립 추출 방식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마지는 물을 확 대충 부어서 커피를 뽑는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다. 이유가 뭘까?

“마지는 맛있는 커피가 목표가 아니다. 똑같은 커피를 주는 게 목표다. 커피 맛을 포기한 거다. 왜냐하면 오늘 뽑는 커피와 내일 뽑는 커피가 달라지면 손님이 화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맛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일정하냐의 문제를 우리는 더 중시한다. 그래서 내가 뽑으나 다른 어떤 직원이 뽑으나 일정한 커피를 주기 위해 그렇게 한다. 모든 손님에게 동일한 커피를 준다는 것이 우리의 장점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의 맛을 결정하고 이를 일관되게 지켜나간다는 것. 이것이 마지를 홍대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커피 맛의 변화에 대하여

커피 맛은 어떻게 형성될까?

드립을 할 때, 사전 추출과 이어진 2번째 추출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처음 추출물의 20~30%에 커피 맛의 80%가 들어 있어서다.

커피는 로스팅 과정에서 형성된 성분을 물에 녹여서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커피의 농도에 따라서 맛이 변한다. 농도가 진한 초기 추출물은 향과 맛이 강하지만 후기 추출물은 맛과 향이 연하다. 초기에 추출된 약 20%의 용액 안에 전체 커피 성분의 약 80%가 녹아 있다고 한다.(p.180)

용해도가 50이라고 가정할 때 100의 성분을 녹여낼 때, 처음에는 50이 녹아 나온다. 남은 50에서 다시 25가 녹아 나온다. 25에서 다시 12.5가 녹아 나오는 식이다. 그러니, 오래 추출한다고 더 진해지지 않으며, 커피를 두 번 추출하지 않는 이유다. 더 이상 뽑아 나올 커피 성분이 없는데, 아깝다고 두 번 뽑는 건, 커피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 아니다.

“커피 추출이 뒤로 갈수록 커피를 이루는 나무 부분에서부터 추출이 진행되는데, 이것이 커피의 잡맛이나 나무 맛 등을 느끼게 한다. 쓴맛과 바디감을 이루기도 하는데, 너무 오래하면 좋지 않다. 초기의 추출에선 향미가 결정되고, 후기 추출에서 맛이 어우러져야 향과 맛, 바디가 좋은 커피를 얻을 수 있다.”

초기 추출에서 커피 성분이 거의 녹아 나온다. 잡맛이 없는 대신 입안에 남는 게 없다. 그야말로 순수한 순정의 맛인데, 그것이 커피의 좋은 맛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혼합이듯, 커피 맛도 좋은 성분만으로 자기 완결성을 갖출 순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맛에 반응하는지, 어떻게 기준을 잡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무엇을 바꾸면 커피 맛이 바뀔 것인가를 고민하자. 그것은 곧, 자신의 감각을 여는 일이고, 세상을 대하는 애티튜드다. 초기 추출과 후기 추출에서 추출의 요소 등을 조절하면서 좀 더 자신에게 좋은 맛의 커피를 잡는 과정, 그것이 커피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다.

“원한다면 커피 맛은 언제든 바꿀 수 있다. 물 붓는 타이밍, 양이 일정하다면 커피를 안정적으로 뽑을 수도 있다. 물줄기 스킬과 속도에 스트레스 받지 마라. 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맛을 찾는 것이다.”

커피의 맛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 또 자신의 취향이나 개성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 이상적인 기준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커피 맛은 로스팅 정도, 커피 입자의 굵기, 물의 온도, 추출 시간 등 여러 가지를 조절함으로써 달라진다.(p.21)

커피하면, ‘쓴맛’만 떠올리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진하게’라고 하면 ‘쓰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스타벅스 등의 커피가 매우 진하다며 쓴맛에 대해 용서를 받았다. 쓴맛을 늘리는 건 쉽다. 정해진 양 이상의 추출을 하면 쓴맛과 잡미가 강해진다. 그러나 진하다는 건, 농도를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조절함으로써 커피 맛이 달라지는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물론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맛’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긴다면, 무척 흥미롭고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p.21)

커피 한 잔, 가을 한 모금

커피는 가능성이다. 세상의 모든 입맛만큼 다양한 커피를 뽑을 수 있다. 생의 감각을 여는 만큼 커피는 다양한 자태로 나타난다. 조금 안다고 내세울 것도 없고, 커피를 잘 모른다고 발을 뺄 필요도 없다. 마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남이 내려주는 커피라는 우스개도 했다. 맞다. 그런 한편으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을 담아 내린 커피가 가장 맛있다고 덧붙인다. 커피는 그렇게 다르지만, 같다.

다만 이날 아쉬운 점이 있었다. 마지는 이날 커피에 대한 알찬 정보와 지혜를 건넸는데, 그는 ‘다르다’는 의미를 ‘틀리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오류를 범했다. 잘못된 언어습관 때문에 커피의 다양하고 ‘다른’ 맛이 ‘틀린’ 맛으로 오인될까봐, 안타까웠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강의를 하고 이야기를 건네는데, 이런 점은 고쳐졌으면 좋겠다.     


 

10월. 갑자기 어디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계절, 커피 한 잔이 당신의 가을을 잘 감싸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늦지 않으면 좋겠다. 잡스와 커피 한 잔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잔달리의 회한처럼. 『미국의 송어낚시』의 저자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말하지 않았던가. “때때로 인생은 단지 커피 한 잔의 문제, 혹은 커피 한 잔이 가능케 해주는 친밀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지상에서 35m, 85호 타워크레인에서 지상보다 더 서늘한 바람을 맞이하고 있는, 지상의 슬픔을 위해 280여 일째 싸우고 있는 김진숙 위원에게 커피 한 잔 건네고 싶다. 2011년의 가을, 대한민국은 커피로 지상의 슬픔을 달래려나보다. 커피 관련 축제의 연속이다.

우선, 14일부터 16일까지 대구에선 대구커피문화박람회가 열렸다. 이어, 21일부터 31일까지는 강릉에서 제3회 강릉커피축제가 강릉을 채우고, 27일부터는 서울 정동거리에서 대한민국커피축제가 30일까지 커피 향 가득한 거리를 만든다.  가을이 겨울 앞에서 흔들리는 11월의 24일부터는 올해 10회째를 맞는 ‘서울 카페쇼’가 나흘 동안 마지막 주자로 나선다.  

커피가 익는 계절, 당신의 삶도 익어가길. 참, 어느 밤 외롭거든, 문을 두드리시라. 당신을 위해, 밤9시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 건네겠다. 밤9시의 커피다. 커피 한 잔, 가을 한 모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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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계 식량의 날'이다.

누군가는 요즘 누가 못 먹는 사람 있어?, 하고 쉽게 말한다. 먹을 것, 정확하게는 못 먹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라지만, 그건 수사이거나 거짓말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 차고 넘친다. 

  

 

세계 식량의 날 올해의 주제는 '식량가격- 위기에서 안정으로'인데, 식량'가격'의 위기만 있는 게 아니다. 식품 값이 오른다고 아우성 치는 것, 기아의 골이 깊어진 것을 놓고 표면적으로는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를 이유로 든다. 이밖에 중국, 인도 등의 경제개발·성장에 따른 농지 소멸과 육류소비 증가, 허울  좋은 바이오연료 생산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더 크고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식량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다국적 농식품기업들과 자본의 패악질이다. 농식품복합업체들은 농수산물 생산부터 유통까지 지배함으로써 식량독점을 꾀하고, 투기자본은 국제곡물시장에 적극 개입해 가격을 폭등시켰다. 거기엔 북반구 정부와 세계기구의 정치적 무능함 혹은 협잡도 함께 한다.

한마디로 먹는 것 갖고 각자의 이권을 챙기고자 장난 치는 '신성동맹'의 탐욕이 위기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고 있다. 허구헌 날, 기아를 줄이자고 외치면서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꼴이 그것을 방증한다. 1996년 세계식량정상회의는 '전 세계 기아인구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기'로 결의한 바 있으나, 지난 2007년~2008년, 2010년의 식량위기로 기아인구는 8억5000만 명에서 10억25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식량의 위기는 결국 체제의 위기에 다름 아니다. '점령하라(Occupy)'는 구호의 확대와 우리네 99%를 위한 행동은 식량 위기와도 관련을 맺는다. 한 사회의 유지와 개별적인 인간의 실존은, 배를 곪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과거, 나의 인디커피하우스에서 한 예술팀이 알려준 이 말.
"MOST IMPORTANT THING IN THE UNIVERSE IS -> FULL STOMACH" 


지금의 식량 위기가 인간이 자행한 짓이라면, 이것을 극복하는 일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의무다. 결자해지! 그리하여, 먹을거리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고, 푸드정의(Food Justice)에도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일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나는 커피라는 창을 통해 혹은 먹을거리로 이것에 대한 사유를 푸는 한편으로, 커피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풀겠다. 《미국의 송어낚시》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이 말처럼.  “때때로 인생은 단지 커피 한 잔의 문제, 혹은 커피 한 잔이 가능케 해주는 친밀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갑자기 어디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이 계절, 당신에게 커피 한 잔 권한다. 프롤로그부터 그에 이어지는 몇 편의 이야기는 동티모르 공정무역 커피산지를 탐방한 [동티모르 커피로드] 되겠다. (참고로, 프롤로그는 '윤리적 소비'공모전에 응모했으나 떨어진 글이다.) 

어느 밤 문득 외롭거든, 삶의 미각에 쓸쓸함이 묻어나거든, 문을 두드리시라. 당신을 위해, 밤9시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 건네겠다. 그래서, 밤9시의 커피다. 커피 한 잔 나눌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다. 고맙다. :) 
  

[프롤로그] 나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움직인다! 
동티모르 공정무역 커피산지를 가다  


 

 

하얀 커피꽃이 피었다. 빨간색 커피체리가 익었다. 체리의 외피·과육을 벗기고 건조를 위한 사람들의 몸짓도 분주하다. 커피 한 잔을 위해 자연이 내려앉고 인간의 노고가 투입되는 현장이다. 내가 만들고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잉태되는 터전이다. 나는 동티모르 로뚜뚜 마을에 와있다. 공정무역 커피산지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동티모르 딜리공항에서도 꼬박 십여 시간 이상 험한 산을 타고서야 도달할 수 있는 산촌의 커피마을.

동티모르의 7월, 커피가 익어가는 계절에 ‘만남’을 가졌다.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우연에 우연이 빚은 산물. 그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27)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로 가득하다.”

그래, 사실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제도교육권에서 가장 보통의 신자유주의적 인간으로 사육됐던 나는, 신자유주의적 사이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직장 생활을 꾸역꾸역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서 불어온 바람이었을까.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됐다. 아니, 커피라는 창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커피를 만들고, 공정무역 커피하우스를 꾸리며, 사회적기업을 공부하면서, 공정무역 커피산지에 발을 디뎠다. 그 모두가 우연이었다.  

많이 궁금했다. 내가 지지고 볶고 추출하는 커피의 근원이.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보고, 상상했을 뿐이었으니까. 태고의 산악이 품은 동티모르에서 내 커피의 근원과 세계의 잇닿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운이 좋았다. 그곳에 왔다. 숨을 깊이 들이쉰 순간, 느꼈다. 아, 우리는 연결된 존재구나. 동티모르 로뚜뚜에 도달한 순간, 실감했다.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커피 한 잔에 담긴 자연이었다. 땅, 햇빛, 바람, 비, 안개, 별 등 대자연을 머금고 자란 커피열매와 그것을 따고 다듬는 사람들. 자연과 땀의 결정이었다.

커피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있는가? 나는 이제 확실하게 안다. 하얀 마음과 빨간 열정이 어우러져 갈색의 음료가 나온다. 이방인을 위해 내려준 커피에서 온유한 맛을 느낀 건 그런 이유였나 보다. 커피를 내리는 내 마음이 그 자연을 제대로 담을 수 있을까,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다만 안타까운 일이라면, 기상이변의 비극은 한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동티모르에도 기상이변이 덮쳤다. 하늘이 뚫린 마냥 10년 만에 최악의 폭우가 닥쳤단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긴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 등에는 눈을 돌려도 누가 동티모르의 비극에 관심이 있을까.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관심이 없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알게 된, 운 좋은 한국 사람인 셈이다.

문제는 커피 농사가 흉년이었다. 매년 25~30톤가량 이뤄지던 커피 생산은 1톤으로 팍 줄었다. 자연의 분노는 수시로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 커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에게 커피열매가 맺지 못하는 현실은 삶 또한 영글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후 벌어졌다. 굳이 말을 붙이자면, 공정무역이 지닌 회복탄력성이라고 할까. 공정무역이 단순히 생산자에게 시장가보다 돈 몇 푼 더 쥐어줌으로써 끝나는 체제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커뮤니티의 유지와 생산자조합(혹은 그룹)의 결성 등 그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나누는 것. 전국YMCA연맹에서 파견된 양동화 간사는 5년 여 동안 커피로 동고동락한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을 이해했다. 

 

 

궁즉통이라고 했다. 공감한다면, 방법이 보인다. 마침, 도서관과 학교 등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었고, 이들을 그곳의 자원으로 돌렸다. 공정무역의 진짜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자연의 분노 앞에서도 인간은 겸허해야 한다. 로뚜뚜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을 쉬이 원망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한 해 동안, 로뚜뚜 마을 커피향은 약해지겠지만, 몇 년 뒤 책향기가 덧붙여져 로뚜뚜 커피는 더 좋은 품질과 향미로 다가설 것임을, 나는 확신했다. 

 
뭣보다, 커피생산자와 함께 밥을 나눠먹고 커피를 마신 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들과 마주한, 해발 1004m에 자리한 마을사무실(겸 숙소)은 고도 덕분에 ‘천사의 집’이라고 불렸다. 천사가 있다면, 지상에 내려와 커피 한 잔 마시는 휴식처로 쓸 법한 곳에서, 지상의 천사들과 마주 한 시간이었다. 나는 손에 힘주어 그들과 악수를 했으며, 또박또박 이름을 부르며 눈을 보았다. 개별의 인간에게 새겨진 구체적인 존엄이 거기 있었다. 내 커피의 실존과 마주대했다. 감격스러웠다. 

 
 
 

물론 그 삶의 실체는 내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심연이겠지만, 나는 그 구체적 존엄 앞에 겸손해야 했다. 그들은 자연의 일부였고, 나는 그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 커피 덕에 저 멀리 한국의 누군가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고.

그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 말이다. 나는 그들 몇몇에게 커피란 당신에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누군가는 커피는 행복이라면서 웃었고, 다른 누군가는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답했다. 어떤 이는 여자 친구 같다고 했다. 다들 하나 같이 다른 답변, 그래, 그것이 커피다.

나는 당신들이 채집한 커피가 ‘디아’(좋다)하고 ‘가빠쓰’(맛있다)라고 말해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곳은 커피나무를 경작하지 않는다. 플랜테이션 농장 등에서 가꾸는 농사가 아닌 채집이다. 자연이 키워준 것을 때가 되면 채취할 뿐이다. 유기농 그 이상이다. 생두는 튼실하며 빛깔도 좋다. 맛도 뛰어나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경이로움을 품은 야생 커피가 지닌 장점이다.

하얀 커피꽃과 빨간 커피체리, 녹색 생두를 잉태하는 자연과 생산자를 만나면서 커피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다짐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커피를 더 정성스레 만들어야겠다. 커피는 곧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그들은 그것을 확인해줬다. 대자연과 생산자의 마음에 커피를 내리고 마시는 사람의 마음이 합쳐진다면, 커피가 그보다 맛있을 수 있을라고! 공정무역 커피는 그런 ‘만남’과 ‘관계’속에서 빛을 발한다. 



 

윤리적소비는 별다른 게 아니다. 내가 먹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온 것인지 아는 것. 그래서 세계가 연결돼 있음을 깨닫고, 고마움을 가지는 것. 협동조합운동이 양이나 이물질 포함여부를 속이지 않음에서 시작한 것은, 마음을 담았다는 말이다. 좋은 커피에 가급적 화학첨가물을 섞지 않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우리 커피하우스의 노력은 당연한 의무다.

그들의 노동과 실존을 마주하면서 지금 내 생존의 윤리를 생각했다. 아, 나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움직이는구나. 조금 덜 먹고, 더 움직이자. (물론 커피는 많이 마셔도 된다!) 요즘 내가 만든 커피 한 잔에 담긴 윤리다. 로뚜뚜를 통한 깨달음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된, 세계의 점들이다. 세계는 지금을 살아가는 무수한 점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로뚜뚜의 속삭임이다. (공정무역)커피를 마신다는 것, 세계와 관계를 맺고 연결됨을 확인하는 행위다.   

우리, 커피 한 잔, 할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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