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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 Brokeback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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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1/22) 방송될 울산 MBC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
비록 나는 그것을 들을 수 없지만, 노래를 신청했다. 틀어준다더라.
아무렴, 나는 예언자는 아니지만, 2011년 1월22일 늦은 오후의 어느 한 때,
대한민국 울산의 공기 중에는 이 노래가 공명할 것이다,
He Was A Friend Of Mine」.

울산의 내가 모르는 누군가는, 이 노래를 듣고, 이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히스 레저.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그와 나는 모르는 사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통하는 사이일 것이다.

오늘, 귀 기울여 들었던 유이한 노래,
He Was A Friend Of Mine」와 거위의 꿈」.
이 글을 접한 당신도 아마 울산(과 그 인근)에 있지 않다면, 라디오를 통해선 듣지 못할 터,
플레이 버튼을 살짝 눌러 이 노랠 들어도 좋겠다. 그저, 그 사람을 짧게라도 떠올려보는 시간.


그런데 왜 연고도, 관련도 없는 울산이냐고? 그건 개인적으로 물어라. 아프지 않게.ㅋ :P




히스 레저, 그 아름다운 사랑의 초상
3년 전, 서른 즈음에 세상을 떠난 ‘히스 레저’를 추모하며

1월22일. 커피 한 잔을 준비한다. 커피야 매일같이 마신다지만, 이날은 약간은 다른 커피야. 특별한 레시피로 준비하는 건 아니다. 다만, 마음 한 스푼이 더 들어가지.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ristretto)’1)를 뽑고, 스티밍한 우유, 한 점을 찍는다. 메뉴의 이름은, ‘브로크백 마운틴’. 시간과 양에서 제한된 채 추출됐으나, 맛이 진하고 짙은 풍미를 지닌 리스트레토. 거기에 덧붙여진 한 점은,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한 동경이야.  


 

맞아. 그 커피 위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지? 광활한 산맥과 함께 떠오르는, 히스 레저(본명. 히스클리프 앤드루 레저). 서른 즈음, 요절한 배우예술가. 마음 한 스푼은 다름 아닌, 히스 레저에 대한 추모심이야. 아마 ‘콩’도 함께여야 할 것 같은 커피 한 잔의 시간. 3년 전, 2008년 1월22일 히스 레저가 영영 떠났어. 남겨진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그가 없는 삶을,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다. 당신과 함께 커피 한 잔, 나눈다.

아름다운 청년, 히스 레저

커피 한 잔에 콩, 끝이 아니야. 사실 하나 더 있어.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거기엔 아름다운 얼굴이 있으니까. 아마, 그건 마음이 아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마다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런 말을 남겼어. 히스가 떠난 직후인 제14회 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 시상식,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영화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는 소감을 통해 히스를 거론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는 완벽했다. 나는 그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는 이미 인생에서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했다.” 아름다운 청년, 히스 레저. 죽어서도 호명된 그의 이름에는 그렇게 아름다움이 묻어있구나.



 

아름다운 누군가는 그를 향해, “I Swear...”를 읊조릴지도 모르겠다. 잊지 않겠다는 그 맹세는, 사실 히스의 것이었어.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히스가 분한 에니스는 잭(제이크 질렌할)의 옷을 보면서 그렇게 나지막하게 뱉었지. 아마, 이 영화를 가슴으로 본 사람이라면, 히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선, 이 장면에서 카메라를 다시 돌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그 슬픔을 가슴으로 삼킨 그 얼굴이 떠올랐다.

도리가 없잖나. 당신이라면 어떤 얼굴을 떠올렸겠나. 유작 직전의 작품이 됐지만, <다크 나이트>의 조커? 글쎄, 그가 조커역을 맡아 지나치게 몰입, 정신적인 혼란을 겪었다는 말도 있었다만, 그건 배우가 가진 일종의 숙명이었을 터. 온전하게 배우였던 그가, 조커를 즐겼을망정, 그것을 마지막 얼굴로 삼고자 했을 리는 없지 않았을까.

차라리,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가 제격이지 않아? 완벽에 가까운 배우, 다니엘도 완벽하다고 격찬했던 그 얼굴 말이야. 어쨌거나 <브로크백 마운틴>의 잔상이 그를 온통 지배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음 그래,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계속 얘기하자.


아픔, 사랑의 다른 판본

아마도 그건, 사랑, 그것도 세상에서 파멸당한 사랑 때문이었을 거야. 사랑했지만,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채, 안으로만 삭혀야만 했던 사랑. 해서는 안 될 사랑, 그런 게 있어선 안 되잖아. 물론, 세상의 윤리는 때론 사랑을 속박해. 울타리를 쳐놓지. 브로크백에 풀어놓은 양들처럼 말이야. 방목하는 것 같지만, 결국 누군가의 소유고, 정해진 틀을 벗어나선 안 되지. 그저, 울타리가 넓을 뿐.

하지만, 사랑에 필요한 건 세상의 윤리가 아니잖아. 사랑에 오로지 사랑의 윤리만 있으면 되잖아. 사랑을 정의할 수 없는 마냥, 사랑의 이치는 단순하다. 당사자의 선택이 돼야 한다는 것.

사랑은, 기실 세상의 윤리가 갖다 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누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가’의 문제야.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함께하면 그건 옳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하면 그른 것이다.(이건 명로진의 말에서 빌어왔다.) 사랑은 세상의 윤리가 가늠하거나 잣대를 들이댈 것이 아니다. 옆에서, 혹은 당사자도 아닌 이가, 너의 사랑이 이러쿵저러쿵, 말짱 헛것이고, 헛말이다. 닥치고 꺼져라, 외쳐도 좋을 터.


당신도 알다시피, 히스는 사랑하는 모습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안 감독의 연출이었다고는 하나, 히스가 아닌 다른 에니스는 상상할 수가 없다. 물론, 그는 닥치고 꺼져라, 고 외치지 못했어. 이른바 ‘도둑 사랑’ 혹은 ‘몰래한 사랑’.


 

돈 많은 잭이 그 따위 시선에 ‘F word’를 날리자고 했으나, 에니스를 칭칭 감은 세상의 윤리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지. 겁이 난 거야. 돈 없는 노동자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이란 건, 그닥 우호적이질 않거든. 그것이 사랑이라도 말이다. 사랑에도 혐오가 있는 건, 참 꼴불견이야, 그렇지 않아?

결국 그 사랑, 파멸 당했다. 브로크백은 그저, ‘시크릿 가든’이었던 거지. 둘만의 사랑을 간직했지만, 실상은 마법도 없고, 체인지도 없는. 현실에선 인어공주는 거품이 될 뿐이야.

하늘은 가끔, 지상의 위대한 연인을 질투해,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이곤 한다. 히스도 아름다운 사람을 먼저 하늘로 데려가곤 하는 하늘의 습관에 불려간 건 아닐까. 하늘은 그렇게 제 욕심을 채우곤, 지상에 슬픔과 아픔만 똑 남기더라. 그건 꼭 남은 사람들의 몫인 양. 사랑이 한편으론 곧 아픔이요, 슬픔이라는 것을 알라는 하늘의 뜻인가. 커피가 탄다. 쓰지만 강한 풍미를 느끼고 싶다. 커피 한 잔에 농축된 아픈 사랑의 흔적.


Heath is not here, but…

에니스는 터뜨리지 않고 꾹꾹 누르고 삼키던 사람이었어. 가슴에 돋는 칼로 사랑과 슬픔을 자르던. 히스는 그런 에니스로 각인된 것이 어떨 진 몰라도,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고전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를 본 뜬 이름부터, 그는 깊은 강이 되고 싶었다. 호주 출신으로 할리우드의 공세에 잡아먹히지 않은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예술적 영혼 덕분이 아녔을까. 


당신은 봤는지 모르겠네. 그는 <아임 낫 데어>에서 ‘밥 딜런’의 어떤 한 모습을 그렸어. 그는 세상에 없는 모습을 구현하지 않았음에도, 영화 제목처럼, ‘I'm Not There’를 실현하고야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그를 스크린에서 불러낼 재간은 없어. 디지털 매직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해도 그건, 히스가 아니다. 그는 이제 박제된 히스로만 재현될 것이다. 성장도 노화도 멈춘 그때 그 모습으로만. 



 

히스는 거기도 여기도 없다. 허나, 나와 당신뿐 아니라, 그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개인의 물결이 넘실댈 거야. 그러니, 그는 비록 없어도 없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명복을 빌거나 어쩌다 히스가 그리워지는 날에 영화를 돌려보고, 추모를 공유하는 일밖에 없을지라도. 브로크백이 안겨준 에니스와 잭의 사랑에, 당신과 내가 ‘사랑 확신범’으로서 응원할 수밖에 없어도.

아울러 마틸다 레저, 히스가 세상에 남긴 딸. 그 아이는 올해,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지, 아마. 히스라는 아빠 없는 생이지만, 잘 버티고 견뎌나가길. 세상의 악행에 쉬이 굴하지 않고, 거칠고 더러운 공공연한 비밀을 품은 세계를 어떻게든 헤쳐 나가길. 사람의 있을 곳이란, 이렇게 커피 한 잔에도 있구나. 그래, 안녕 에니스, 안녕 히스 레저. 참, 노래는 <브로크백 마운틴> OST에 담긴,
He Was A Friend Of Mine」. 커피 참, 진하다.  [뷰즈 기고 원문 약간 수정]

p.s. 20일, 어제 용산 2주기. 아직 용산참사는 끝나지도, 아픔이 아물지도 않았다.
故 이상림, 양회성, 한대성, 이성수, 윤용헌 님과 당시 경찰이었던 김남훈 님,
명복을 빈다.

여전히 아픈 건, 그 '사람(들)'을 죽인 주체가, 그들이 믿고 살던 국가였다는 거다.
'사람 아닌' 김석기(당시 서울경찰청장)는 1월10일 오사카 총영사로 내정됐다.
거참, 시기도 그렇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이 국가의 정신줄은 대체. 
그러니, 한국엔 '정부'가 없다. 몰염치한 '회사'만 있고. 어메이징하다.



 

마침, 오드리 헵번과 겹치는 이유다.
그녀가 스크린의 요정,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사람'인 이유가 있다.
19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된 그녀는 1992년 9월 소말리아를 방문, 말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배우일 때보다 더 많은 정열과 생을 다하면서 구호 운동에 헌신한 그녀의 이 말은, 구호와 기부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북돋았다.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체화한 그녀였다. 스크린의 요정이자 은막의 여왕으로 받은 사랑, 어떻게 돌려줘야 하는지를 알았던 아름다운 사람.

오드리 여사는, 1993년 1월20일 세상을 떠났다.
구호활동에 매진하다 건강이 악화됐고, 직장암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들에게 들려준 유언이나 명언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실은 그녀가 좋아한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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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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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로 여겨질 수 있는 내용이 황해에 빠져 있음.)

김훈 작가였지, 아마. 세계의 기본 구조는 악과 폭력이라고. 세상의 온갖 야만성과 폭력은 사랑이나 희망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그 폭력의 근저에 ‘이권’이라는 것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이권을 향해 치닫고, 그것에 의해 조율된다. 이권 없이 세상은 옴짝달싹 않는다. ‘인맥’이라는 말속에도 그 이권의 냄새가 배여 있을 정도다.

아, 오해는 말자. ‘이권’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로, 이권의 모든 것을 말할 의도는 없다. 이권은 때론 세상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힘도 된다. 내게 가해지는 부당한 억압, 그것에 저항하는 것, 또한 거칠게 말해, 이권이다. 이권을 위해 저항하는 거다. 내가 불편하고 힘드니까. 이권을 향한 인간의 촉수는 본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은 이성이다.

물론, 스스로 노예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 그 이권은, 오로지 화폐의 규모나 집이나 자동차로 환산할 수 있는 화폐성을 뜻한다. 아마 그것을 ‘가족을 위해서’라는 말로 치장할 가능성이 꽤 클 테지만. 

 
어쨌거나, <황해>를 보고선, 하나를 더하고 싶어졌다. 이권 외에도 플러스 원.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 그것은, 치정(癡情). ‘치정극’하면, 여느 아침드라마를 떠올리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다. 그 아침의 치정극이야,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조미료에 가깝지만, <황해>의 것은 세상의 근간이자, 퍼즐을 맞추는 메인 재료다. 숨겨진 레시피라고나 할까. 어쩌면, 우리가 감추고 싶은, 세상 깊은 곳의 추잡함 혹은 더러움.

황량한 멜로드라마 


이 영화, 폭력성 혹은 잔인함으로 얘기하는 수사들, 많다. 그것도 맞다. 허나, 나는 그것보다 로맨스로 봤다. 다만 그 앞에, ‘삭막한’ 혹은 ‘쩨쩨한’을 붙여야 되겠다. 어째 하나 같이 이곳의 수컷들은 삭막하고 쩨쩨한 존재들이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을 상상하거나, 이를 추궁한다. 구질구질한 궁상남(들). 그러면서 센 척, 있는 척, 대범한 척 한다. 억지로 자신을 감춰야 한다. 돈이 많으면 뭘 하나. 늘 불안에 떨고 이권만 먼저 생각한다.
(물론, 정부와 짜고 악행을 저지르는 여자도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어둡고 잔뜩 찌푸린 채 시작하고, 시종일관 이 톤은 유지된다. 옌볜의 택시기사, 구남(하정우)의 표정부터 그렇다. 빚더미에 짓눌려 있으면서 그는 한탕을 바라며 마작놀음에 매달려 있다. 아내는 돈 번다고 한국으로 갔는데, 깜깜무소식이다. 그런 그에게, 유혹은 밤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면정학(김윤석), 면가라고 불리는 개장수가 한 놈 담그고 오면, 빚을 갚아준단다. ‘공존’은커녕 ‘생존’만 희번덕대는 공간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밀항을 하고, 주소 하나만 들고 살인대상을 향해 구남은 황해를 건넌다. 열흘의 시간. 6만 위안에 목숨을 걸고, ‘살인자’라는 죄명까지 쓰건만, 구남에게 큰 고민은 없어 보인다. 노모와 아이도 있지만, 그는 빚과 아내 없는 현실, 부정한 상상이 빚어낸 삶의 피로감을 견딜 재간이 없다.

돌고 있다는 개병(광견병)이 그에게도 스며들었던 것일까. ‘어미를 물어죽이고 나중에는 제 아가리로 물어죽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물어 죽인’, 어릴 적 기르던 개를 닮아간다. 칼에 묻힌 피를 씻어낼 도리가 없다.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 흔들리던 아마추어 범죄자도 도리가 없다. 모든 상황이 그를 낭떠러지로 몰아간다.

 
애달프게 보고픈, 바람난 것이 아닌지 불안한 아내 찾자고, 빚진 돈 갚아 집안 꾸리고자 한 가장이었을 뿐인데,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 아, 이런 몹쓸 멜로드라마를 봤나. 사랑도 야만과 폭력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 사실이구나. 아니, 사랑은 야만과 폭력 앞에 쉬이 힘을 쓰지 못하는 구나. 아...

악의 다양한 얼굴


구남이 그렇게 입체성을 띠고 있다면, 구남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장본인, 면가는 악의 전형성이다. 이권에 눈 먼 극악한 인간의 단면이랄까. 면가는 오로지 하나만 본다. 내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 차갑고 단순하다. 그것을 본능이라 말할지 몰라도, 철저하게 이성에 의한 작동이다. 이권을 취하려면, 잔머릴 굴려서 앞뒤 재야 가능하다. 동정이나 연민? 그런 건 없다. 이성으로 그것도 몰아내니까.


면가는 끝까지 밀어붙인다. 소용없으면 죽인다. 살려주는 건 하나, 돈이 될 때, 돈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구남에게도 그러하며, 또 다른 폭력과 악의 축인, 김태원(조성하) 패거리에게도 그러하다. 이권의 취득 여부가 모든 행동의 기준이다. 그는 세상의 작동 원리를 온몸으로 체화한다. 소뼈다귀를 들고 사람을 후려치는 모습. 면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순 없다. 그 모습은 또한, 소뼈다귀만 안 들었을 뿐이지, 우리 사는 세상과, 우리와 다르지 않다.


김태원도 전형적이다. 약한 자에겐 강하고, 강한 자에겐 한 없이 약한 존재. 운수회사 사장이라는 그럴 듯한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있지만, 실은 그는 양아치이자 조폭이다. 형-동생 한다는 관계의 동생을 살인청부하고, 그게 밝혀질까 관련자들을 없애자고 안달복달이다. 눈앞에서 협박하는 면가 앞에선 설설 기지만, 뒤에선 살인을 교사한다. 그에겐 물론 이권 외에도 또 다른 살인의 이유가 있다. 사랑 아닌, 소유욕. 그건, ‘내 걸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이권의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니, 양아치나 조폭에게 의리 같은 게 있다는 건 착각에 가깝다. 그들이 부르짖는 의리 같은 건,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에 한한다. 의리 없이 뒤통수친다고 욕할 것도 없다. 그게 그네들 생리다. 의리라고 쓰지만, 이권이라고 읽는. 조폭 아닌 이들이라고 사실 크게 다르진 않다. 의리는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만 지키는 것이고, 의리는 많은 경우, 이권의 소소한 작동에 의해 지켜지고 유지된다.


면가나 김태원, 세상의 기본 구조다. 쉽게 ‘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캐릭터를 구축해 놨다. 감독은,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이라는 현실의 알레고리


한국은 그런 세상을 더욱 실감나게 절감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의도였건, 그렇지 않건, <황해>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은, 황량하고 건조하다. 강남구 논현동, 부산, 울산 등 어딜가도 그렇다. 현실의 알레고리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우선, 옌볜에 있는 조선족 구남에게, 한국은 돈 벌겠다고 간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다. 아내가 일했던 식당의 주인은, 아내의 행방을 묻는 구남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여기, 진짜 부부가 있는 것 같냐며.
그리고선,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구남이 직접 발 디딘 한국은, 동족이라곤 하나, 그것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수사임을 확인할 뿐이다. ‘우리’가 아닌 ‘그들’로 치부하는, 이주노동자에게 더 없이 가혹한 곳이 한국이다. 도움을 묻는 구남에게, 식당의 이주노동자는 냉랭하다. 이주노동자끼리도 별다른 교감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계급의 가장 아래 부분에 있는 이주노동자를 등치는 한국인, 그게 다 이권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나.


영화는 또, 먹는 장면을 통해 지금-여기의 살풍경을 비춘다. 극 중에서, 구남은 허겁지겁 먹는다. 살기 위해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살인을 위해 잠복하다가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소시지를, 도망 다니다가 한 폐허가 된 식당의 냉장고를 뒤져 깍두기를 걸신들린 듯 먹는다. 여기의 많은 이들은 생존을 명목으로 그렇게 주어진 것에만 매달린다. 어떻게든 눈앞의 것을 먹고 살아남으려는 생존본능만 번뜩인다.
 

경찰은 더 없이 무력하다. 지들끼리 총을 쏘고 맞고, 떼거지로 몰려들면서도 눈앞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을 놓친다. 화면을 화려한 스펙터클로 채우는 카체이싱 장면도, 알고 보면 경찰의 아둔함 덕분이다. 경찰의 무능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으나, 우리가 아는 많은 경찰이 그렇다. 총장 나으리께서 건설현장 함바집까지 신경을 쓰시는 마당이니. 무능하거나, 부패하거나. 지팡이?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물론, <황해>는 거칠고 건너뛴다. 2시간40여분의 러닝타임도 담지 못한 건너뜀이 있다. 그럼에도 그 속엔 에너지가 있다. 잔인함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엇. 그 표면적 잔인함에 묻거나 뒤에 숨은 세상의 어떤 구조들. 끝내 다시 건너지 못한 황해의 풍경은,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세상의 머뭇거림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기야, 건넌다고 해결이 됐을까. 마지막 장면은 뭔가 아쉬움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사족 같았다.

<황해>는 현실의 잔인무도함에 비한다면, 오히려 디스카운트된 영화다. 스크린이라는 필터를 통해 순화된. 굳이 이 영화에 잔인하다는 말을 붙이고 싶지 않은 이유다. 곳곳에서
‘악의 평범함’을 목도하는 마당에 무슨. 하물며, 내 안에도 악과 폭력이 있거늘. 내 안을 먼저 들여다볼 것을, 내 안의 개병을 먼저 살필 것을 권하는 영화, <황해>다. 우리도 지금, 황해를 건너지 못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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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아리에티 - The Borr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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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의 일부를 말하기 전, 이 얘기부터 하지요.

얼마 전,
한때 야큐계를 풍미했던, 구대성(이라 쓰고, 대성불패라 읽는다!)의 은퇴 경기.


 

아, '쿠옹'도 이렇게 떠나는구나.
우리의 한 시절도 이렇게 접히는구나.
'대성불패(臺晟不敗), 안녕', 을 마음속으로 외치던 날입니다.


헌데 이날,
나를 '가장' 뭉클하게 만든 건, 한 여성팬의 피켓 문구였다지요.


"당신 때문에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아, 가슴이 찡찡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극강의 상찬이 있을까요. 흑ㅠ.ㅠ
생을 송두리째 야큐에 바친 야큐선수의 은퇴경기에 피켓문구로서 가장 좋은 예.

'모태야큐'가 아니라면, 친구의 꼬드김이 아니라면,
야큐를 보고, 야큐장을 찾게 된 어떤 계기가 있을 겁니다.

야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이가,
TV에서 야큐 경기가 펼쳐지면 '대체 뭐가 재밌다고 저런 걸 보나'싶던 이가,
어느 순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야큐에 빠지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떤 특정 선수의 활약상 때문이기도 할 것이라고요.

그 여성에겐 그 대상이 '대성불패'였던 것이죠.
그 어떤 수치나 수상 경력보다 은퇴선수의 심금을 가장 울리지 싶은 저 말.
"당신 때문에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아, 저요? 전 모태야큐, 모태노떼(자이언츠)였다지요.^^)



미안. 서론이 길었죠? ^^;

이 영화, <마루 밑 마루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The Borrowers).
보고선 쿨쩍훌쩍 했습니다.ㅠ.ㅠ 조금 있다 얘기하겠지만, 쿠옹의 은퇴에 최고의 상찬이었던 그 피켓문구가 자연스레 떠오르더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신상입니다.

메리 노튼의 소The Complete Borrowers(국내제목 :《마루 밑 바로우어즈》)가 원작이죠. 하야오 할아버지가 젊은 날 읽고, 품고 있던 아이템입니다. 40여년을 삭힌 내공, 과연 하야오 철학과 잘 맞물려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기획과 각본만 하야오 할아버지가 맡았다는데, 지브리의 최연소 감독인 서른일곱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연출은 하야오 할아버지의 자장에 있습니다. '하야오'라는 이름이 여전히 각인된 작품이라는 얘기죠. 
 


 

자, 이 초상이 바로 아리에티입니다. 보는 순간, 훅~ 갔습니다. 곧 '여신 포스'를 발산할 것 같은 요정 포스의 그녀는, 14살입니다. '아니, 14살짜리가 왜 저래?'하면서 같이 보던 친구에게 툴툴(?)거렸습니다. 성숙하다못해 섹시하다니. 요정은 저런 거야, 응?


물론, 그렇게 아리에티가 그려진 것은 다 이유가 있더군요. 씨네21의 김혜리 기자가 전한 아리에티 탄생의 비화(?). "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은 “<아리에티>를 연출하기로 결정한 다음 프로듀서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처음 받은 주문은 아리에티를 아주 관능적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며 미소짓는다. 뚜렷한 로맨스 일화가 없음에도 아리에티의 이같은 분위기는 영화에 줄곧 첫사랑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아하, 아무렴. 아리에티의 관능에 매혹되지 않는 자, 유죄!

아리에티는 10cm 작은 생명입니다. 현재 지하 700m 갱도에 갇힌 칠레의 33인 광부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지름 8.8cm의 구멍보다는 약간 큰 10cm. 그들은 크기만 다를 뿐, 사람의 형상과 똑같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면 안 되죠. 그들에게 인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위험한 존재'거든요. 종족이 멸종 위기에 처한 것도, 인간에게 존재가 '뽀록'났기 때문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일까요. 자신들의 종족에서 유일하게 남은 아리에티 가족. 걱정작렬하는 엄마, 아빠는 아리에티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인간에게 틀켜선 안 돼. 그리되면 우리 종족은 멸망이란다. 멸족 여부를 고민하는 그들의 대화를 듣자니, 나는 인간(!) 땜시 멸족(멸종)한, 혹은 멸족 위기에 처한 생명(들)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숭악함 때문에 사라져 가는 지구의 어떤 이들.

괜히 미안해집니다. 나 역시, 그런 인간의 탈을 쓰고 있잖아요. 만물의 영장'이라며 지구의 쥔장처럼 행세하는 인간은, 때때로 수시로, 기고만장에, 안하무인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가장 무섭다는 말, 이 애니에서는 실감납니다. 작은 생명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은 한 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오롯이 '공포'라지요. 아,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에겐 공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우리의 요정, 아리에티의 눈으로 인간남자(소년) '쇼우'를 처음 봤을 때의 방식부터, 시계의 초침소리는 어찌나 큰지, 공포감 작렬입니다. 문 여닫는 소리도 천둥치는 것 같고, 작은 생명들이 부엌과 방, 테이블을 오갈 때의 거리감과 모험도 장난이 아닙니다.

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죠.
익숙한 우리네 인간 세계임에도, '아, 저런 시각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다른 세계에 대한 감각을 요구합니다. 그것 참, 나쁘지 않습니다. 묘합니다. 짜잔.

그 건 역시 지브리, 곧 하야오 할아버지의 대부분 작품이 관통하는 인간에 대한 관점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어요. 인간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숭악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성찰을 은연중에 요구하기도 하는.

아마, 이 애니를 보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다보니 극중 악당 비스무리한 역할을 맡은 집사 여자를 통해서일 겁니다. 아마 가장 보통의 인간을 대변하는 존재일 그녀는, 딱히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캐릭터지만, 어느덧 감정이입이 된 아리에티 가족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탓에 그리 느껴지게 됩니다. 그녀를 통해 어떤 죄의식도 없이 다른 생명(심지어 같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아,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야~



이런 것도 있어요. 아리에티와 그 가족이 인간에게 '빌리는' 각설탕, 티슈, 빨래집게 등의 '전리품'은 우리의 일반적인 용도와 달리 활용이 돼요. 아하, 세상 모든 것의 용도가 하나로 묶인 것은 아니구나.

뭣보다, 아리에티와 그 가족의 생존방식인 '빌리기'에서 나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감탄했어요. 찌리릿. 커피 한 잔 찐~하게 마시고 싶더라고요. 애니의 원제, 원작의 제목을 잠깐 볼까요? '빌려서 생활하는(더부살이) 아리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
)', 혹은 '빌려 쓰는 사람들(The Borrowers)'.

아리에티와 가족은,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훔치'는 행위를 '빌린'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것을, 아주 조금씩 빌려 가면서 생존을 유지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인간에게 큰 손해가 닥치는 것은 아니죠. 있는 둥 없는 둥, 결과적으로 인간은 그들에게 나눠주는 형국입니다.


이런 빌리고 빌려 주는 관계에서, 인간과 자연 혹은 세계가 지닌 관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 빌려 쓰는 주제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존재인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미래로부터, 어떤 생명들로부터도. 작은 생명이 인간에게 그러하듯, 인간은 자연(지구)로부터 그러하지요. 인간 모르게 필요한 것을 빌려 가는 아리에티 가족과 자연 모르게 필요한 것을 빌려 가는 인간들.

김혜리 씨네21 기자는 또한 그것을 '이삭줍기의 도덕'이라고 말합니다.
"가진 것 없고 약한 사회 구성원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남아도는 재화를 공짜로 취해 생존을 유지하도록 용인하는 세계가 <아리에티>의 이상이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빌리는 일과 훔치는 일이 다름을 수차례 강조한다. 한데 ‘빌리기’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아리에티>는 문명의 이기가 필요없는 수렵과 채취의 야생으로 돌아간 소인 소년 스피라를 통해 쓸쓸한 대답을 제시한다." 



 

솔직히 나는 의심해요. 지금 이 시대, 더 이상 '빌리기'와 '이삭줍기'가 힘을 발할 수 있을까. 한 예를 들어볼까요? 한때 우리에게도 '대지의 여신'이 있었잖아요. 여신의 뜻을 받들고 자연의 힘을 빌어 먹을 것과 살 곳을 빌려서 살았죠. 그런데 지금 시대는 여신을 경멸하고 아예 겁탈을 했죠. '소유'라는 명목으로 빌리기가 아닌 훔쳐 버리고야 만 시대.

그리고 다르다 싶으면 무조건 박멸하고 내쫓고야 말지요. 집사 여자의 행태처럼.해충박멸 회사까지 불러들인 그녀를 보면, 기업(자본)을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이른바 '문명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집시 추방 조치를 보세요. 21세기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아닐까요. 날짜만 바뀌었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직 20세기일지도 몰라요.

많은 것이 사라졌으며 멸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소년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잔인하게 대놓고 말합니다. "너희는 곧 멸종할 거야. 그건 섭리야." 그런데, 그 말이 꼭 인류를 향해 하는 말처럼 들린 건 왜일까요. 그 말을 내뱉은 인간소년 쇼우야말로 심장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잠깐 <마루 밑 아루에티>의 결말에 도달해서,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어요, 이 애니는 인간의 위협으로부터 아리에티 가족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해피 엔딩' 구조를 취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더라고요. 이 애니는 느슨하게 뻔한 이야기 공식이 아닌 나름 반전(?)의 형태를 가지거든요.



자, 생각해 볼까요. 인간이 아닌 작은 생물의 세계를 그나마 긍정하고 함께 살기를 바랐던 쇼우. 하지만 그는 큰 수술을 앞두고 이미 생의 의욕을 잃은 조숙한 아이입니다. 아리에티 가족이 '인형의 집'을 새로 얻게 되지 않을까, 허술하게도 생각했으나 그들은 쇼우의 집을 아예 떠납니다. 더 이상 '인간에게 빌리기'를 거부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자연주의적, 생태주의적 삶을 사는 듯한 스피릿을 따라간 것을 보면 말이죠. 

인간과 공존하기보다 자신들만의 종족과 뭉쳐 살기를 선택한 아리에티 가족. 결과적으로 인간이 그들을 내쫓은 셈이죠. 그나마 공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인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멸종 운운하다가 던진 이 말. "죽는 건 너희가 아니라 나야." 어쩌면, 이는 지브리가, 혹은 하야오 할아버지가 인간을 향해, 더 이상 희망으로 포장된 감언이설에 휘둘리지 말자고 건넨 말 아닐까요. 죽는 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야. 된장, 식빵~ 




 

하지만, 절망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희망이 그렇듯.
대성불패 쿠옹을 맨 처음 꺼낸 이유도 이젠 말씀 드리죠.
아리에티 가족이 새로운 곳에서 자신들의 종족을 만나 잘 정착했는지, 쇼우가 수술을 잘 마쳤는지는 모릅니다. 이 애니는 그것까지 펼쳐 보이질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점을 아쉬워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는 이 불친절함(?)이 외려 좋았습니다.
"인간이라고 다 무서운 건 아니"라며 인간소년 쇼우를 옹호하던 아리에티의 말에서 '절망의 구'에서 탈출하려는 소수의 모습을 봤다면,

떠나는 아리에티에게 쇼우는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아리에티 고마워. 너 덕분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

 

죽기로 결심한, 죽을 것을 예감한 누군가도 아주 작은, 10cm에 불과한 생물의 존재에서 힘을 얻을 수 있구나. 8.8cm의 지름도 33인을 살게 하지 않는가. 살아가야 할 이유,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은, 당신이 잘 볼 순 없지만, 당신 옆의 하찮은 무엇일 수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속물이자 평범한 악이었던 내가 지금까지 건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건강하게 이 사회에 썩어 들어가길" 바란 그녀의 말이었듯 말이죠.

쇼우가 수술을 잘 마치고 살아있을까,를 내게 묻는다면, 음, 고개를 도리도리흔들 것 같아요. 매정하고, 냉정한 답변일지 몰라도, 난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하지만, 아리에티가 수술을 앞둔 그에게 준 '살아갈 용기' 덕분에 그저 맥없이 눈을 감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니 몰라도 좋을 것은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그 작은 존재가 준 선물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아울러 아리에티 가족은 몇 안 되는 자신의 종족들과 계속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요. 아리에티가 멸망 운운하던 쇼우에게 했던 이말처럼 말이죠.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다들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 아리에티 가족을 보면서 새삼 생각했습니다.

잘 보이진 않아도, 자그만 생물들이 지구상에는 무지하게 많고 그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구나. 잘 빌려주고 잘 빌려야겠구나. 우리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인간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무수한 점들에 의해서 꾸준히 돌아가는구나.

아, 혹시 멀쩡하게 있었는데, 없어진 게 있다면 아마 바로우어즈가 빌려간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세효~ 아, 애니를 본 뒤 후유증이라면, '내 심장의 일부, 아리에티'가 침대 밑에 혹은 의자 밑에 행여나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는 건데, 아파트는 바로우어즈가 살기엔 참 좋지 않은 환경이에요. 된장. 

* 참, 장난감에 숨을 불어넣은 픽사의 <토이스토리3>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픽사와 지브리, 미국과 일본, 더 크게는 서양과 동양의 어떤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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